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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8장 18~22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

LNCK 2021. 11. 5. 11:34

https://www.youtube.com/watch?v=gE7-Wr7gh2w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      마8:18~22      2021/08/22, 출처

▲도입
제가 요즘 성도님들의 신앙상담과 고충을 듣고 있는데 
부쩍 늘은 상담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귀신 역사나 또 신내림에 관계된 상담을 많이 받고 있어요. 

그런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님들에게 예방적인 차원에서 
제가 말씀을 좀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무당 얘기를 좀 해 보려고 그래요. 

사람들이 이런 무속, 샤머니즘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빠지는 경향이 있으신 거 같아요. 
제가 그래서 막아야 될 거 같은데요. 

예전에 이런 TV프로가 있었어요. 제작기간만 3년 걸리고 
'전국에 있는 진짜 무당을 찾아라'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작진들이 수년동안 찾아서, 
그 유명하다고 하는 용하다고 하는 이름난 무당들을 다 찾은 겁니다. 

그들의 전화번호를 다 알아낸 다음에 
여자 스테프에게 시켜서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남자의 사주를 좀 봐 달라'고 하는 
그 동일한 내용을, 전국의 유명한 무당들에게 전화로 다 부탁한 거예요. 

그런데 그 남자가 누구냐?
지금 고인이 된 애플 회사의 CEO 스티브 잡스 였어요.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 이제 만나는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사주를 보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유명하다는 무당들이 답을 내놓는데,
결론적으로 다 틀립니다. 

이렇게 유명하고 복채 듬뿍 챙기는 자들이 다 틀려요. 
그 내용을 제가 일일이 다 얘기할 순 없지만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래요. 

'아 이 사람은 사람은 좋은데, 참 사업할 사주가 아니네'
무슨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까? 애플사 CEO 라고요.

또 '이 사람은 직장 다니고 있지? 
이 사람은 직장만 다녀야지, 다른데 투자를 하면 안 돼! 사업하면 망해!' 그랬어요.

더 황당한 이야기는 뭐냐면 '건강은 좋은데 돈 복이 없어!'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이 사람은 게을러서 사업하기에는 성격이 안 맞아. 재물운이 없네. 박복해!' 

다 틀렸어요. 

이게 여러분, 전국의 소문난 무당들이 하는 점괘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데 속지마시고, 성도들이 어디서 신문 보고 연도 따져서
사주 운세 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그걸 맞추었어요. 
'너 그 사람 정말 만나는 사람이 맞아? 
내 안에 있는 신이 그래. 영혼이 멀리 있다. 
너 어디서 장난질 하고 있어? 전화 끊어!' 그랬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들은 그거 맞추고 그게 끝이에요. 
그다음에 뭘 요구하는 줄 압니까?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굿 한번 하자 그래요.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져 줄 것 같습니까? 그런 게 없다고요. 
어찌됐건 진짜 무당과 가짜 무당을 가르는 기준이 있다면 
그건 정확히 상황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도 한번 물어 보죠. 
우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진짜 제자와, 가짜 제자를 가르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내가 기도를 해봐서, 저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떤지 파악하는 은사일까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일까요?

-전도 많이 하는 것일까요? 
-병든 자 많이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일까요? 

여러분 그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기준은 아니에요. 
진짜 /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내가 예수를 따르냐는 거예요. 
예수님을 정말 따르느냐에.. 그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나눠지게 되죠. 

이것이 여러분의 심령에 꽉 박혀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예수님을 정말 따르는 거 말고, 대체물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내가 예배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 했다. 
-나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어디 가서 봉사 좀 했다. 
-내가 선교지에 꽤나 들락날락거린다.

그런 이유를 가지고, 자기를 진짜로 여기고 자화자찬하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했으면 변화되어야 돼요. 
기도 한 만큼 살아 내는 거예요. 예수님 따라 가는 거예요. 
그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 얼마나 예수님 지금 본받으려고 애쓰십니까? 

성경 좋아하시는 분들 많아요. 
성경속의 예수님을 공부한다고 뭐가 달라져요? 
예수님을 닮아 가야지요. 

제자훈련 프로그램 마쳤어요. 그래서요? 
거기서 요구하는 리포트 제출하고 숙제 냈어요. 그래서요?
여러분 그거는 과정이에요. 그다음이 중요하죠.

내 삶에서 예수님 따라 가려고 하는 치열한 삶의 노력이 있어야 
작은 예수 되는 거 아니겠어요? 

여러분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 마8:18~22절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이 두 사람 나오는데요. 

-한 서기관과
-자기 부친이 죽어서 장례를 앞둔 제자
이렇게 두 사람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1. 서기관의 조건부 반쪽짜리 헌신

먼저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서기관 입니다. 
그가 이렇게 얘기 합니다. 
'선생님이여,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따르리이다.' 마8:19

예수님이 말씀 하세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20

지금 무슨 말 하시는 걸까요? 동문서답 같습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이게 따르라는 말인가요/ 따르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근데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서기관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따른다고 했지? 
근데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 줄 너는 아니? 
너 그거 알면, 너는 나를 못 따라 올 걸!' 

'그리고 나는 머리 둘 것도 없어! 
너처럼 여유롭게 가정 생활 하고, 애들 재롱 보고 
이런저런 일들 다 좇아다니면서, 그런 거 하면서 너는 나 따라올 시간 없어' 
지금 그 얘기하시는 거예요. 

'너 진짜 알면, 나를 못 따라와!' 

여러분,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여러분, 다 알았다면 지금 남편이랑 결혼 하셨겠어요?
지금 아내랑 결혼 하셨겠어요?

다 알았으면 결혼 안 했을 거예요. 

정말 다 알았으면, 그렇게 애들 많이 낳았겠어요?
젊었을 때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쑥쑥 낳았는데 
키우다 보니까 이게 장난이 아닌 거예요. 
하나 키우는 게 그렇잖아요. 알면 못 하는 거예요.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영혼의 심장을 가지고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의 심리로 작동해서 따라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그를 거절하신 겁니다. 
왜냐? 그에게 인간적인 마음이 컸기 때문에! 

그 인간적인 충족이 되지 않으면, 욕구가 충족이 안 되면 
제자의 길에서 도중하차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를 거절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서기관을 결코 나쁘게 우리가 매도해서는 안 될 겁니다. 
왜냐면 이 서기관의 태도는 분명히 진지했어요. 

그리고 당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그 문맹률이 아주 높았던 유대사회 당시에 
서기관은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특권을 많이 누렸습니다. 
이들은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에 대해서 강론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기관은요, 그 당시에 대제사장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과 함께 
동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한마디로 끗발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서기관 쪽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적대세력 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이거는 놀라운 일이네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절하셨어요. 이유가 뭘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서기관은 절반만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에게 헌신이 있어도, 조건부 헌신이 있었던 사람이에요. 

물론 예수님을 존경하고 좋아해서 따라가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언젠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흔들릴 것을 주님이 미리 아셨다고요. 
왜? 조건부 헌신이니까요! 

▲또 많은 사람들이 서기관의 "조건부 헌신"을 어디서 찾는가 하면
그때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 라고 부릅니다. 

근데 서기관은 뭐라고 하냐면 "선생님!" 이라 그랬거든요. 

자 여기서 '선생님'은 헬라어로 디다스칼로스 인데,
이게 예수님 당시에 유대에서 통용되었던 언어는 아람어 입니다. 
아람어로 선생은 '랍비'입니다.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좋은 말씀 전해 주시는 '선생'으로 여긴 거예요. 
선생으로서의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따라 가겠다는 거죠. 

여러분,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여요. 
좋은 선생님 따라가는 거! 

근데 여러분, 예수님이 주인 되지 않으면 
언젠가 결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성도님들 중에서도 이런분들이 계세요. 
주님이 주인이 될 수가 없어요. 
단지 예수님은요, 매주 나에게 좋은 말씀을 목사님을 통해 주시는 선생님이에요. 
그래서 그런 분들은 헌신을 잘 못합니다. 

▲자 성경을 보면, 이렇게 조건부 헌신을 하면서 
예수님을 '선생'으로 불렀던 사람이
근데 제자 중에도 한 명 있었어요.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입니다. 

그거 예수님을 팔아 넘길 때 '랍비여!' 라고 불렀어요.
'랍비여, 이 쟁반에 손 넣는 사람 중에, 당신을 파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아니지요?' 그럽니다. 마26:25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이 전부가 아니었어요. 
그는 이용 가치가 있어서 예수님께 찾아왔다가, 
이제 없다고 판단이 드니까 떠나려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반쪽짜리 마음은 위험해서 
언제든 흔들리고 낙오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교의 분위기를 보면, 선생이 제자를 택하는 게 아닙니다. 
유대교는 제자가 선생을 택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근데 지금 제자가 서기관이죠. 
서기관이 지금 예수님을 선택한 거예요. 

그러면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겠어요? 
'나같이 끗발 있는 사람이 당신을 선택한 거예요. 
당신 땡 잡은 줄 알아야 돼요!' 하면서 공치사 떨 수 있는 거예요. 

따라서 서기관에 이 조건부 헌신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도 하고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나오지요.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도는 철저한 제자도입니다. 
조건부 헌신이 아니라, 무조건적 헌신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그것을 충족시키는 게 제자예요. 
사실 이게 진리입니다. 아시겠죠? 
근데 자꾸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부담스럽고 회피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교회 강단에서, 이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헌신을 설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들의 헌신이 오늘날 이렇게 약화된 겁니다. 

교회는 사람들 신경 쓰면 안 돼요. 
진리를 진리대로만 선포하면 돼요. 왠 줄 아십니까? 

어차피 말씀을 안 들을 사람은.. 안 들어요. 
들을 사람은.. 기가 막히게 들어요. 

그런데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전해 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죠? 
들을 사람도 못 듣게 되는 것이죠.

왜 교회들이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가 '회심 시리즈'를 통해 다시 한번 회개하고 나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는,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날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말씀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자꾸 저보고 메시지가 세다고 합니다.
제가 센 게 아니고, 여러분이 그동안 약한 말씀을 들어온 것입니다.

복음을 비틀었기 때문에 
이런 설교가 듣기에 생소하고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제자도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 
'야 이거 어떻게 지키냐? 나 이대로 못 살고 있는데 어떡하지?' 
이렇게 눌릴 것이 아니라 
할 말은 하고, 알 거는 제대로 알아야 된다.. 이 말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헌신은, 무조건적 헌신이었습니다. 

자 합리적이고, 계산적이고, 인간적인 헌신.. 
사람이 그런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런 헌신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근데 한 가지는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 사람은 제자는 못 됩니다. 
그런 헌신을 하십시오 그러나 제자는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확신해요. 

왜냐면 바로 옆에 다른 서기관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서기관들 들으라고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제자가 되려면, 제자들이란 이런 거야!' 
하면서 서기관들 들으라고 가르치셨어요. 

예수님은 무조건 서기관을 제자도에서 탈락시킨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너 내 말을 옆에서 잘 듣고, 너 어떻게 반응하는지 내가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서기관은 옆에서 듣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부자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갔듯이 
바로 이 서기관도 근심하며 떠났을 것입니다.

왜냐? 성경에, 예수님 말씀을 듣고서 
그 후에 서기관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기록이 없어요. 

'주님 저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조건부 헌신이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제가 무조건적으로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성경에 없어요. 

예수님은 그 한 사람에게 얘기하시고 난 후에, 
배를 타고 가셨다는 기록밖에 없어요. 

그러니 서기관의 헌신은, 조건부 헌신이 맞는 거예요. 


◑2. 부친의 장례를 앞둔 제자

마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1절에, '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제자'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에게, 아버지의 장사가 났습니다. 
여러분, 자식인데, 부모 죽어서 장례 치르는 게 나쁜 겁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마8:22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아니 율법에도 부모공경 조항이 있잖아요. 
그리고 내가 아예 예수님을 떠나가겠다는 게 아니라 
장례 치르러 갔다가 마치고 돌아오겠다'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의 장례식은 일주일 이었어요. 
그러니까 '한 주간만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하는데 
주님이 이걸 허락하시지 않아요. 

그럼 이 때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요. 
'아 그럼 우리 믿는 자들은 장례식 가면 안 되는 거냐?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면, 장례 치르면 안 되는 거냐?' 
이런 식으로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 의미가 아니라요.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가짐을 다루고 계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보다
자기에게 더 중요한 일은 없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에게 아무리 급한 일이 있고 중요해도 
바로 그때,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면 
일 처리하러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꼭 장례만 아닙니다. 결혼식 잔치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기념일일 수도 있어요.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그때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명분을 찾잖아요. 
'이때가 너무 중요하다고.. 거긴 꼭 참석해야 된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때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모임과 행사가 중요하니까, 주님 섬기는 일을 제쳐놓고 가야 돼요? 
그러면 제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주 친한 사람이 결혼을 해요. 내가 꼭 가 줘야 돼요. 
근데 같은 시간에, 주님이 시키신 일이 너무 분명하게 있어요.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거기 결혼식에 가면 안 된다고요. 
그냥 마음으로 간절히 축복기도해 주시고.. 
그 전이나 나중에 만나서 축하해 주면 돼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마음가짐이 너무 중요한데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 있어도 
주일 예배보다 중요한 게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그게 예수님의 제자들인 거예요. 

게다가 사람이 또 그래요.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죠? 
두 번 세 번 또 빠지게 돼요. 
한번 급한 일이 생겨서 주일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잖아요. 
이상해요. 그다음에 또 빠질 일이 생겨요. 

그게 사람 마음이 그렇더라고요. 

지금 상황적으로 마8:23절 보면,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사역을 떠나셔야 하는 (특수한) 상황입니다. 

근데 이 제자는 장례를 치르겠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가 제자라고 한다면, 하나님 일보다 네게 더 중요한 것은 없어. 
심지어 아버지를 장사는 일이라 할지라도, 
네 가족을 돌보는 일이라 할지라도, 네 집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지라도 
지금 내가 복음전하러 갈 때, 네가 제자라면, 너는 우선적으로 나를 따라와야 돼!' 

'그 어떤 일도, 제자에게는, 나 Jesus 의 일 보다 앞설 수 없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내면을 꿰뚫어 보셨듯이 
이 제자의 내면도 꿰뚫어 보신 거예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제자였지만, 버려야 될 게 한 가지가 있었던 사람이에요. 
'자기 일이 있으면, 주의 일을 미룰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마8:22

여기서 앞에 나오는 '죽은 자들'이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라서 나설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외에 중요한 것이 많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1. 그래서 제자도의 중요한 첫 번째 속성은.. 기억하십시오! 
<우선순위> 입니다! 

여러분 '제자'라고 하면, 우선순위 문제를 정확하게 결정하셔야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이 순종의 요구 앞에
그 어떤 것도 그 자리를 앞서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따르는 것은 성가시게 여기고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는 거예요. 

'주님, 그게 중요한 일인 거는 알겠는데, 제가 지금은 갈 수 없습니다. 
제가 다음 주에 꼭 갈게요. 
제가 이번에 같이 따라가지 못하지만, 헌금은 꼭 할게요.' 

주님은 '그런 거 필요 없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2. 바로 여기서 제자도에 중요한 두 번째 속성이 나오는데요. 
그것은 <긴급성> 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받은 우리가 바로 결단하기 원하세요. 
바로 순종하기 원하세요. 바로 따르기 원하세요. 

왜냐면 여기에는 일리가 있는데, 두 가지로 말씀드리죠. 
1) 첫 번째는 앞서 살펴본 '우선순위' 문제에 걸리는 것이고요. 
2) 두 번째는 주님을 위해 결단하는 마음을 
원수 마귀는 반드시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서두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세상 일도 미루다가 영영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물며 하나님 일은 어떻겠습니까? 이게 영적인 일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못 하는 것은, 우리 게으른 체질, 미루는 성격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마귀의 공격도 만만치 않다고요. 
어떻게 그 사람이 결단 했을 때, 바로 순종으로 가겠습니까? (어렵습니다)
따라서 당장 결단하지 않으면, 순종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특별히 새생명축제 때 보세요. 
교회에 초대하기로 다 약속해 놓은 상태 잖아요. 
몇 번을 찾아가서 확실히 확답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토요일 날에, 그 분께 갑자기 무슨 일이 집안에 생겨버려요. 
그리고 주일 당일 날 왜 아프지도 않던 몸이, 그때 아플까요? 그래서 못 와요! 

여러분 미루시는 분들 잘 기억하세요. 
그 다음 주, 그 다다음 주는 과연 여유로울까요? 
여러분에게 여유로운 날은 앞으로 영영 없을 거예요. 

여러분 안에 게으른 체질도 있겠지만, 또 사단이 가만두지 않아요. 
여러분에게, 없던 일도 또 만들어 낼 겁니다. 
그래서 결국 헌신을 못 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 당장 헌신하고, 따라야 되는지 아시겠죠? 

그래서 제자도는 
내가 마음 내킬 때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팬클럽의 지침이 아닙니다! 

무슨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의 팬은, 열심히 따르기는 하는데,
자기 마음 내킬 때만 그래요. 늘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만약 주님을 그렇게 따른다면, 그건 팬클럽이지, 
제자도는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는, 학원생이 아닙니다.
교회를 학원 다니듯이 다니려하면 안 됩니다.

학원생은요, 뻑하면 학원에 빠져 버려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가기 싫으면 얼마든지 학원에 빠질 수 있어요. 

근데 여러분, 우리가 꼭 이렇게 학원생 수준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마음 내킬 때만, 내 마음이 원할 때만 
주님을 따르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있다고요. 

그러나 제자 disciple 는 다릅니다. 
내 마음 내킬 때, 내 마음이 원할 때만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누가 보든/ 안 보든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로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제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그를 알아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자기가 말은 안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다 알아요. 
'야 저 사람은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야!'

그 얘를 말씀드릴게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여러분 여기서 사랑은 원수 사랑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 사랑은, 인간적인 마음으로 내 마음 내킬 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원수사랑.. 이거 불가능한 얘기예요. 
원수를 어떻게 사랑을 할 수가 있겠어요? 

이건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주님의 말씀이니까, 악물고 순종하는 거예요.
물론 성령님이 내 내면을 변화시켜 주셨으니까, 
그게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세상과 정반대 개념입니다. 
세상은 어떤 개념을 좋아하죠? 
미움, 시기, 질투, 폭력, 승리, 억압 ..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세상 속에서 사랑을 한다는 거는 
결국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제자들만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자성어에 '낭중지추' 라는 말이 있어요. 囊中之錐
주머니 속에 송곳이라는 거예요. 

즉 아무리 감추고 숨기려고 해도 삐져나온다는 거죠. 
예수님의 제자는 숨겨도 감춰도 티가 납니다. 세상이 그를 알아봅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면, 다니엘을 꼽고 싶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뭐 자기 자랑하고, 자기를 드러냈습니까? 
아니요. 그냥 가만히 있고, 자기 갈 길을 묵묵히 가는데 
그 영적인 기운이 너무 탁월해서, 제국이 바뀌어도, 
왕들의 눈에 띄어 가지고 뽑힌 겁니다. 

여러분, 제자는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빛은 감춰지지 않고, 반드시 어둠 속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신이 제자라는 거를 보여 주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어요. 

1) 첫 번째는, 페르시아 제국을 다스리는 총리인데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대제국의 총리라고요.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데 그 급하고 바쁜 일이 많은 데도, 예배 빠진 적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다니엘 보다 그렇게 바쁘고 할 일이 많아요? 
이게 우리 마음의 문제라고요. 마음이 없는 거예요. 

2) 두 번째는, 다니엘은 어떤 경우를 당하냐면
믿음의 심각한 도전을 받았어요. 

'30일 동안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면 
사자굴에 넣겠다'는.. 다니엘을 겨냥한 법안이 통과되어 버렸어요. 
근데 그때 다니엘이 어떡하죠> 

다니엘서 6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세상이 어떤 음모를 꾸미건, 내가 사형 당할 줄 알면서도 
그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창문을 딱 열어젖혔습니다. 사람들이 볼 테면 보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거지요.

자기는 속에서 일어나는 기도의 불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이게 제자들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아무리 은밀히 하려고 해도 
그 영적 영향력이 드러나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할 수 밖에 없어요. 

헌신을 누가 강요, 협박, 요구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알아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제자입니다.

▲어느 성도님이 교회에 가끔씩 다니십니다.
그러면 사역자들이 가서 반갑게 '성도님 오셨냐'고 맞이할 수 있어요. 
그냥 인간적인 마음으로 오랜만에 보면 반갑잖아요. 그렇지요. 

그럴 때 그 오랜만에 오신 성도님들 마음은 어떨까요? 
그냥 자기를 반겨 주니까 흡족해 한다고요. 

그런데 그때 진짜 흡족해 하면 큰일 난다고요. 
왜냐면 그냥 오랫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반겨주는 것이지,
그가 진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그를 환대해 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주님 보시기에, 그런 정도의 신앙으로는
하나님이 절대 쓰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걸 모르시는지요!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해 하실 일이 없어요. 
그런데도 교회 가면, 환영해 주고, 또 환영 받고...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가 한 편으로는 큰 착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환영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강하게 말해서, 그런 사람의 인정이 필요 없을 때도 있어요. 

우리는 주님께 인정받고, 주님이 뭐라 하시냐에 따라 
성도의 생명과 영생이 결정나는 존재 들인데 
엉뚱한데 환심을 주고, 또한 받으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거 아십니까?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사랑 설교'는 이제 인기가 없어요.
감사하게도 요즘 성도들은 위로, 사랑, 축복.. 
이제 그런 거 말고, 나도 살고 싶으니까, 나 좀 때려 주세요. 나 좀 깨트려 주세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한국교회도 소망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3. 그래서 제자도에 중요한 세 번째 속성은 <전적 포기>입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려한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
는 말씀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요?
그 제자도의 대가가 얼마인지 한 번 헤아려 보셨습니까?

물론 우리 앞서 그 대가를 지불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과 믿음의 조상들, 위인들입니다.

-저렇게 살면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고생을 할까?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될까? (아 힘들어서 나는 못 하겠다..)

그거를 따지는 분들은 '전적 포기'가 아직 안 된 사람이에요. 
정말 포기한 사람들은요, 대가도 헤아리지 않아요. 
순종만 있어요. 

그런데 다들 여기서 제동이, 브레이크가 딱 걸려서 
합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해요. 계산적으로 미뤄보니까
자꾸 머뭇거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만 말씀 드리는 게 아니에요. 
저도 그래요. 저도 사실 종으로 부름 받았을 때 
가장 갈등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어요. 

제가 어릴 적부터 듣고 배웠던 그런 그 신앙의 선배들,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목회자들은 가정생활도 없고, 자기 생활이 없는 분들이었어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가는 분들이었어요. 

제가 섬기고 있는 우리 원로목사님 박정환 목사님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이분께 무슨 가정생활 있었겠어요? 
이분께 무슨 어떤 개인생활이 있었을까요? 없으셨어요. 

하나님이 쓰시는 부흥사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깨우셨습니다. 

성도들이 재림을 너무 몰라서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가르치면서 
그 신부를 준비 시키기 위해 정말 애쓰신 분이세요. 

그렇게 집회를 다녀 오실 때면, 꼭 고아를 데리고 오신대요.
그래서 불쌍한 아이들 데려다가 
성도들이 돌볼 수 있는 가정과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또 그 때는 성도들도, 아무 군소리 없이 그 요청에 다 순종했어요.

예전에는 이렇게 목회자도, 성도도 
자기를 포기하는 거,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고 
당연한 듯이 살았습니다. 

그게 예수쟁이가 하는 당연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그 사실을 보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에 
그래서 어려서부터 신학대학 가는 것, 종으로 부름 받은 것을 제가 싫어했어요.
그래서 목사가 되는 것을, 저는 아예 생각도 안 한 것입니다.
제가 두려웠으니까요.

그 길은, 제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길은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본받기 원하고 
모델로 삼고 싶은 초대교회는..

로드니 스타크 라는 불신자 사회학자가 쓴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에 보면,
그는 초대교회를 연구했어요. 사회학적으로. 

그 책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돌보지 않고, 자기를 포기하면서 
남을 도우고, 남의 병을 고치고 돌봐 주다가 
그 병에 자기도 전염되서 죽는 게 그리스도인 들이었다...' 

그래서 로마가 기독교를 물들었다는 거지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존경하고 따랐던 초대교회 성도들 
지금도 본받기 원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모습이었어요. 

제자도를 그들은 살아내고 계셨다는 거예요. 
-우선순위 문제를 통과했어요. 
-긴급성이 문제를 통과했어요. 
-전적포기 다 하신 분들이에요. 

그리고 솔직히 우리를 보자고요. 
포기는 고사하고, 우린 너무 프리하게 살고 있잖아요.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요, 
거리에 외제차가 넘칩니다. 

물론 경제가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코로나 이전처럼 우리가 지출하고 쓸 수 없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할 것 다 하고 계시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해요. 힘들어해요.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뭘 포기했죠? 
아무 것도 없는 신자들이 많아요. 
너무 많은 걸 다 쥐고 계시잖아요. 

정말 자존심도 끝까지 챙겨서 
그렇게 교회 분란을 일으키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나는 이거 하나도 버리지 못 하지?' 
이런 문제로 고민해 보셨나요? 

이 설교를 들으면서 '뭐 골치 아프게 그런 걸 또 말해? 아이고 머리 아프다..' 
혹시 그런 분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제가 장담해요. 
'구원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제자가 못 되는 것은 당연하고요!'

▲여러분 그래서 내가 진짜 제자인지/ 가짜 제자인지 결정하는 도구가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 

그래서 누군가를 보시면, 그 사람에게 십자가를 갖다 대 보세요.
그에게서 십자가의 증거가 확실히 나타나면, 그는 제자이고, 참 성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그저 죄사함 받은 것만 뜻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희생, 헌신, 충성을 뜻하는 거지요...

그리고 자기 인격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부인의 사람입니다...

그 증거가, 나에게, 또한 그에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전에 마가의 다락방 목요철야의 무게는 굉장했습니다. 
우리 기도원의 메인 예배이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셨고, 뜨거웠던 예배입니다. 

제가 신학교 3학년 때, 4월 달에 중간고사를 바로 코앞에 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근데 제가 이제 시험 공부를 해야 되기 때문에 
박(보영) 목사님께 학교 도서관에서 밤에 연락을 드렸어요. 

'목사님, 제가 시험 준비 때문에, 이번 주 목요 철야에 못 올라갈 것 같습니다.' 
제가 그때 찬양 인도를 할 때도 아니었고, 
신학생 신분으로 왔다 갔다 그러고 있을 때였어요. 

목사님은 '어 그래? 그렇구나. 그래 알았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열심히 준비해서 중간고사 시험 치르고 
그 다음 주에 '마가의 다락방'(기도원)에 올라가서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인사를 드렸지요. 
목사님은 아무 말씀을 안 하세요. 그리고 가만히 계세요. 

그러시다가 저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난 네가 용사인 줄 알았어!' 

제 스승의 그 슬퍼 보이고, 실망 짙은 목소리를 
저는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눈빛과 그 목소리를요. 

지금도 그때가 생각이나요. 
저는 그때 그 목사님 말씀을 듣고, 제 머리에 망치를 한방 맞은 거 같았어요.

여러분 저는 그때 제 가치관이 깨졌어요. 그 한마디에! 

저는 제 성적이 중요했던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안에, 학교 성적에 대한 애착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험을 대충 보는 것이, 저에겐 용납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날,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한 마디가 제 삶을 살렸습니다. 
저를 완전히 바꿔 놨어요. 

제가 그 목사님 말씀을 듣고, 결단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제가 다락방 예배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눈물로 제가 회개하면서 돌아왔던 때가 기억이 나요. 
저는 그렇게 마음을 고치고, 기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마가의 다락방의 찬양 인도자로 세우셨어요. 
그리고 저는 늘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정말 그때 그 일 이후로, 저는, 제가 한번 배정받은 찬양인도나 설교 사역을 
미뤄 본 적이 없어요. 
몸이 아파서 죽어가도 무조건 섰습니다. 

왜요? 주님과의 그 약속 때문이에요. 

지난 10년 동안 제가 성대를 다쳐서 
더 이상 서지 못 하기 전까지 
시키신 것을 저는 미룬 적이 없었어요. 

왜냐면 저에게 그 일은,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때 그 목사님의 그 눈빛과 그 말씀을 
정말 지금도 제 마음 깊이 감사하게 생각해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을,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이 알게 하셨어요. 
그 일로 제 가치관이 깨져버리고, 
물론 지금 저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뛰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기어가는 종에 불과하지만 
저는 그냥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주님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한 가지 말씀하신다고 생각해요.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들의 행사에서 벗어나, 너는 나를 따르라! 
바로 지금! 넌 나를 따르라!' 

찬양하면서 주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결단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내가 이제 주님을 위해, 조건부 헌신이 아니라 
무조건적 헌신으로 나아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결단을 통해 
주님 오늘 이 찬양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