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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4장 해석

LNCK 2021. 11. 5. 15:18

 

◈이스라엘의 회복의 약속과 회복의 영광     이사야54:장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 54: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3:장을 잘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여호와의 종 메시아, 고난의 종 메시아에 관한 내용입니다. 

40~66장까지 이사야 예언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곳에서 나타난 메시아는 풍채가 수려하지도 외모가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멸시 당하고, 버림 받고, 고통과 슬픔을 겪으며, 병을 짊어지십니다.  

학대를 받고 괴롭힘을 받았지만 입을 열어 변명하지 않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십니다. 

여러분, 메시아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죽었기 때문에 이사야 54장의 회복이 예언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의 회복, 구원, 축복의 뒤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1. 회복의 약속       사54:1~10

 

회복의 메시지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수치를 벗고 회복될 것이니 환호성을 지르고 소리를 질러라, 

둘째 앞으로 나타날 수많은 축복을 준비해 장막터를 넓혀라, 

 

셋째 네 부끄러운 과거는 치유될 것이다, 

넷째 다시는 이런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고 꾸짖지도 않겠다. 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평화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0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 받은 자들이, 완전하게 회복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회복의 메시지이지만

궁극적으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완전한 회복을 누리게 될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홀로 된 여인'

놀라운 사실은 이 여인이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아내를 버리는 나쁜 남편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여인이 나쁘기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호세아서에 나오는 창녀와 같습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창녀는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고,

창녀를 버리지 못하는 남편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남편은 음란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불순종하는 부인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

바벨론 포로 시대에 그 숫자가 적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특히 이어지는 3절에서는

이방인 성도가 이들에게 포함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는 점에서, 

바야흐로 신약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에 관한 비전이 강력히 제시됩니다.

 

물론 이 사실의 성취는, 이방인의 회심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앞장에서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묘사한 저자는

그 사역이 낳을 결과의 첫 번째 것으로

믿는 자의 수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씨앗으로 해서, 늘어날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절에 “노래할지어다” 라는 말씀이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52:8~9절에서도 소리 높여 노래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노래하라는 것입니까?

복된 소식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나를 위로하여 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생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래할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를 출산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가져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비유하였습니다. :1

  

당시 사회에서 아이를 출산 못하는 여자는 수치를 당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그런 수치와 모욕을 70년 동안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노래하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로귀환/구원하여 주셨다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떤 고난에 있다 할지라도, 어떤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회복시켜 주실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하십니까? 

 

▲2절,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우리의 장막 터가 넓어지고 우리가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것은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병과 슬픔을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나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치유될 것입니다. 수치를 벗을 것입니다. 

넓혀진 장막 터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 장막 터를 넓히고 왜 말뚝을 단단히 박아야 할까요? 

좌우로 퍼져나가기 때문입니다(3절). 축복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부흥도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면 여러분은 그냥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축복을 나눠주게 될 것입니다. 

놀랍고 새로운 일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3절,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 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좌우로 퍼지며’

이것은 동서남북 그 어느 방향을 가릴 것 없이

폭발적으로 퍼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퍼지며’의 원문적 의미는 ‘터지듯 번성하며’입니다.

물론 이는 영토의 확장 혹은 단순한 인구의 폭발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수의 증가를 가리킵니다.

 

‘황폐한 성읍들’

1차적으로는 남북 왕국의 멸망 이후에

근방 민족들의 불법 이주로 훼손되었던 팔레스틴 땅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3절 끝에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회복되지 아니하면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이 짐승처럼 변해가고 있습니까?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저들에게, 반드시 영적인 회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 나의 죄를 회개할 때 영적인 치료가 임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4절,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런 외면적인 팽창, 물질적인 팽창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치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릴 적에 겪은 비참한 상처들을 모두 치유해 주십니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장차 이스라엘이 마주할 백성의 중다함과 그 영광의 찬란함은

그 수욕의 역사를 잊을 만한 정도라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입니다.

 

물론 이 구절의 완성은 주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후 이스라엘은 그 역사 속에서

몇 차례 외적의 침입 및 그로 인한 영광의 함몰을 재차 겪었기 때문입니다.

 

‘과부 때의 치욕’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른 결과, 

예컨대 이방 민족의 침탈과 유린 등을 가리킵니다. (렘3:24, 25, 31:19, 호2:2~5 참조)

 

영적으로 육적으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은, 더 강력하게,

자신의 택한 자들을 붙잡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고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약속하십니다.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내면의 회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어릴 적 상처입니다. 

성인이라 할지라도 어릴 때 받은 상처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 학교에서 받은 상처,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 등이 있습니다. 

어릴 적 상처는 현재 나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다 잊어버린 것 같은데 과거의 상처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에 꽁꽁 묶어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다 치유해 주십니다. 

여러분 안에 숨어있는 어릴 적 상처들이 다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 겪은 부끄러움이 다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과부시절의 상처입니다(6절). 비록 내가 쫓겨날 만 해서 쫓겨났지만 상처가 있습니다.

억울함과 처절함이 있습니다. 과부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받은 상처를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십니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밖으로는 팽창하며 열방으로 가고(2~3절), 안으로는 내면의 치유가 있는 것입니다(4절).
오늘 여러분 안에 외적인 팽창도 있지만 내적인 치유도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정신세계에 있는 거미줄, 어둠의 세력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다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5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이는 ... 남편이시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그처럼 크고 세심하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태는

흔히 간음으로 묘사됩니다. (대하21:11, 겔6:9, 호4:12), 

 

그래서 신약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됩니다.(요3:29, 엡5:23, 24, 계21:9).

 

성경에서 하나님을 남편이라고 칭하는 구절은 3번 나옵니다.

본문 사54:5절과, 렘3:14절과, 렘31:32절에서, “나는 너희 남편이다”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혈통적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상 모든 백성에게도, 그들을 통치하는 참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실 것을 예언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예언은 하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전파될 시대를 겨냥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3:29).

 

이 같은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메시야의 대속 사역 때문이었습니다(53장).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부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편이라고 하시면서 3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1) 남편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만 6823번 기록되고 있는데

“스스로 존재하는 자, I AM WHO I AM” 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에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시고, 시작과 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2) 그 남편은 '거룩한 자'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강한 것이 거룩함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1:16)

   

3) 그 남편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온 천지에 하나뿐인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신이십니다. 다른 신들은 모두 죽은 신들이며

어둠의 세계에서 나온 악령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외에 그 어떤 신도 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곧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자의 죄를 자손 삼 사대까지 갚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6절,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소시에 버림을 당하였지만'

소시는 시내 산 언약의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때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고 부부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므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지만,

다시 회복시켜서 회개시킨 것처럼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7절,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신약 성경에도 동일한 사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큰 긍휼’

또 다른 차원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버림받음이 ‘적은’것이라면

긍휼은 ‘큰(위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큰 ‘긍휼’의 내용은 오래 동안의 배역(背逆)을 다 품고 해결할 수 있는

위대한 메시야의 대속사역입니다.

 

▲8절,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면서도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자식을 때리고 야단치면서 기분 좋아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가슴을 찢고 울면서 때리는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고 혼내는 것에 섭섭해 하고 화를 내지만 

부모는 피눈물을 흘리는 법입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이제 영원한 사랑으로 네게 자비를 베풀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고통을 겪는 것을 못 견뎌 하십니다.
구약의 노아의 사건을 통해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넘치는 진노’

‘분노의 범람’이 그 문자적 뜻입니다. (a surge of anger,  NIV)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과 회복의 은총을 대조시키는 문맥을 중시할 때, 

이는 ‘적은 분노’(a little wrath,  KJV) 혹은

‘잠시 동안의 격노’ (overflowing wrath for a moment,  RSV)로  해석됩니다.

    

7~8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고 은혜이고 긍휼하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온 세상의 하나님이신 줄 모르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고 간음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렘3: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곧 영적 간음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부부 관계에서도 간음을 하면 이혼을 해도 된다고 까지 언급할 정도로

영적 간음이던지 육적 간음이던지 하나님은 간음에 대해 심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왜 남편이라고 표현하고 있으십니까?

부부간에 다른 것은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음만큼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다른 것은 다 용서하실 수 있는데, 우상을 섬기는 영적 간음만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하나님 자신을 남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다시 받았지만

그들이 또 다시 우상을 섬기는 영적 간음을 행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더 무섭게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9절,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본절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주신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다시는 이스라엘을 징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본절에서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징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데, 

그것은 53장에서 메시야께서 온 인류의 죄악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것이기 때문에

그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심판을 면제해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다시는” 라는 말이 9절에 3번 반복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노아의 홍수 때처럼 심판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너에게 노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이 죄악을 범해서

우상을 섬겨도 다시는 심판하지 아니하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위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남편이라고 하시면서, 3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로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거룩한 아내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다시는 너희에게 심판을 하지 아니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0절,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자’(헤세드) 

언약 용어로서 기왕에 주신 약속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

동일한 용어가 사용된 유사 구절에 근거할 때

본 언약은 다윗의 위를 이은 한 왕이 통치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관한 약속입니다. (겔37:24~26) 

 

이 나라는 혈통적 이스라엘만을 구성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들어올 이방의 택함 받은 자까지도 포함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약속으로 보아야 정확합니다.

 

이 나라의 건설은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하나님 언약의 신실성 때문에 가능합니다.

견고성, 불변성을 상징하는 산들은 혹시 움직여질 수 있어도

그 나라를 세우기로 한 하나님의 약속 계획은 결코 변경되지 않습니다.

 

10절을 보세요. 산들은 언제까지나 제 자리를 떠나지 않는 불변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산들이 떠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화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언약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했습니까?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고

잠간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지만, 또 다시 타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말라기 이후에 400년 동안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서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너희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은 똥처럼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말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가 우상을 섬기거나

우리 마음에 다른 신을 모시지 않는 한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여러분! 하나님을 절대로 떠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호흡이 끝나는 순간까지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의 손 잡고 있는 한, 절대로 예수님은 우리 손을 먼저 뿌리치지 않습니다. 

 

 

◑2. 회복의 영광      사54:11~17

 

11절부터 12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폭풍에 그렇게 고생하고도 위로조차 받지 못한 성읍아, 보라.

내가 홍옥으로 벽을 쌓고 사파이어로 주춧돌을 놓겠다.

루비로 뾰족탑을 만들고 반짝이는 석류석으로 성문을 만들고

보석으로 모든 성벽을 둘러쌓겠다.”

 

여기 나타나는 ‘폭풍에 그렇게 고생하고도 위로조차 받지 못한 성읍’(11절)은

옛날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값지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완벽하고

거룩한 새 예루살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런 일들을 보지 못했기에 인간의 언어 중 가장 좋은 것,

보석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곤고하며... 안위를 받지 못한 자’

오랫동안의 포로 생활로 광풍에 시달리는 배처럼

그 마음에 평안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저자는 미래의 안정과 영광을 약속함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11~14절)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여기 ‘화려한 채색’이란 색색의 벽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돌과 돌을 붙이는 색색의 접합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인들이 눈썹 위에 치장용으로 붙이기도 했던 이 접합체는

벽돌 사이사이에 붙여, 벽돌건물을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청옥’ 

그 단단하기에 있어서는 다이아몬드 다음이고

아름다움과 광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푸른 색, 붉은 색, 흰 색, 

자주색 등 다양한 색을 지닌, 사파이어로 알려져 있는 보석입니다.

 

우리의 남편 되신 하나님은 11절부터 다시 약속하여주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제 지켜주고 보호하여 주고

영광의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벨론 포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들이 이 말씀을 얼마나 믿었을까요?

  

여러분들 중에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한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회복시켜 주시고,

반드시 나에게서 모든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12절, 홍보석으로 네 성첩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이것은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나옵니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여기에 조금 설명해놨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과 환상과 모습들이 

기가 막히게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26절에 보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고 

히브리서 12장 22절에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첩’

성벽위의 반짝이는 성채

혹은 성(城) 본 건물에 딸린 작은 건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든 문맥은 그 기초가 든든하고 찬란한 성을 말하고 있으므로, 

보석으로 지은 번쩍이는 성 건물의 일부로 보면 적절합니다.

 

11~12절에, 3가지 보석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청옥, 홍보석, 석류석인데 보석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입으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 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며, 안위를 받지 못한 자입니다”  :11

바벨론 포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고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 자들에게

보석으로 꾸며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내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묻지 말고

“그 고난의 순간에 나는 누구를 찾고 있었고 어디에 있었는가?”

자신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순간에 나의 가까운 사람들은 다 멀리 떠났어도

나의 하나님은, 가장 나의 가까운 곳에서,

손을 내밀고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나를 고난의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로 옮겨주시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생명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시록 3:11절에는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3절,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

 

앞서 11~12절에서 새 예루살렘의 외형은 보석으로 설명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완벽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하는 것처럼 내려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의 내면적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평화와 정의입니다. 13~14절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있고 정의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압제가 없고 두려움과 공포가 없습니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이것은 미래에 하나님의 참자녀들이, 메시야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을 시사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 아래 있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이 구절과 유사하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이끌림을 받은 자만이

그에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본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 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13절은, 자녀에 대한 평강의 약속입니다. 

부모들의 관심은 오직 자녀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잘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평강이 최고의 복입니다.

  

돈 많이 벌고, 출세해도..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고,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안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교훈으로 평강이 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들이 평안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면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신6:6~9 

 

▲14절,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못할 것이라

 

‘의로 설 것이며’

메시야가 다스리는 나라의 특성 중의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시72:2, 계 19:11).

다른 세상 나라는 음모, 약탈, 정복 등으로 세워지므로 통치의 내용이 불의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는 메시야의 왕국은

편만한 공평이 통치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14~17절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고난을 당하고 나서 “하나님 왜 나를 지켜주지 아니했냐” 라고 합니다.

 

내가 학대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사람들의 입으로 조롱당하고 정죄당할 때

하나님은 무엇 하셨냐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있을 때 대부분 백성들이

“왜 우리를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죽은 신이야!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바벨론 신보다 못해!”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바벨론 포로가 되어 70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왜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우리) 안에 의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에는, 하나님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입니다.

내 안에 이 의가 없는 한, 나는 세상으로부터의

학대와 훼방과 조롱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4절에 “너는 의로 설 것이며” 시작해서

17절에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여기서부터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하신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 어떤 세력도 무릎을 끓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내 안에 예수의 십자가 의가 있을 때

14절에 나오는 학대자도 멀어질 것이고, 두려워하지도 아니할 것이며,

15절에 나를 핍박하는 세력들이 힘을 모아 나를 칠지라도 그들의 세력은 패망할 것입니다.

  

또한 16절에 나오는 장인들의 기계는 세상의 방법과 수단을 의미하고 있고,

17절에 나오는 송사하는 혀는 나를 모략하고 비방이 있을지라도

그들 세력이 오히려 정죄를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15절, 그들이 모일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하나님의 나라에는 사탄의 영향력, 공격이 모두 사라집니다. 15~17절

하나님께서 “너와 다투던 사람들은 다 무릎을 꿇을 것이고, 

너를 죽이려고 만들었던 무기는 다 무기력해질 것이고, 

너를 고소하려던 혀들은 다 패소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들이 모일지라도'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의 대적이며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의 대적입니다.

 

세상 나라 군왕들이 연합하여 메시야를 대적할 것을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아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2:1, 2)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문자적인 뜻은 ‘너에게 복종케 되리라’입니다.

이것은 메시야의 대적이 파멸케 될 것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이들이 오히려 교회의 진영으로 두손 들고 들어오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교회는 멸망할 듯 보였으나, 도리어 세상 나라가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6절,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만한 기계를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여기 언급된 기계를 만드는 자와

그 기계를 가지고 파괴를 일삼는 자는

외관상 전쟁을 일삼는 자들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다음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이들은 교회를 대적하는 존재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수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교회를 대적할 수 있을 뿐입니다.

 

▲17절,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법정의 이미지가 동원되었습니다. 교회의 대적들은 교회를 고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도리어 대적들에게 승리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근거로, 그의 택한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대적이 고소할 때 교회를 변호하고 대적을 물리치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 선지자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반대 세력들이 나타나

성전 건축을 방해하고 훼방하여 성전 건축이 16년 동안 중단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되었습니다.

  

여러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있는 한

세상 앞에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세상의 모든 세력은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내 안에 예수의 의가 어느 정도 있는 가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의로 충만하여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54장 본문 속에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씀이 5번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 끝에서 “여호와의 말이니라”

  6절 끝에서 “네 하나님 말씀이니라”

  8절 끝에서 “여호와의 말이니라”

  10절 끝에서 “여호와의 말이니라”

  17절 끝에서 “여호와의 말이니라”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살아계시고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신다면

이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약속을 하셨습니까?

  

첫째로 영적으로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먼저 내 영적 상태를 돌아보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나의 죄를 철저히 하나님께 고백하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아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이 있어야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영적 회복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둘째로 육적 회복도 약속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영과 육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분리되는 순간 죽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은 영을 지배 받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육이 영을 지배하며 살려고 할 때 그 삶은 곤고하고 피곤합니다.

성령의 다스림 속에 살면 내 육도 회복됩니다. 성령의 다스림 속에 살면

내 육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알기 때문에 내 육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영이 회복되어서 내 육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모든 예배에 몸과 마음을 다해 드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육의 회복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셋째로 의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의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이 무엇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까? 예수의 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믿는 것이 곧 말씀이고,

그 사실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내 안에 예수의 의가 없다면 우리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공의의 하나님은 도와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오직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는 귀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들의 인생 속에서 모든 삶을 책임지는

귀한 남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