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신'이라는 이 단어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먼저 내려야 합니다. '다른 신'은 무엇입니까?
이슬람 교의 알라가 '다른 신'입니까? No! 힌두교에서 말하는 수많은 신들이 '다른 신'입니까? No!
성경이 문제시 하고 있는 '다른 신'은, 우리 마음과 연관 되어서 정의됩니다.
우리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백을 가지고 있는 공간입니다. 즉 내 영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내 영이 하나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근데 그 하나 되는 장소가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내 영이다.. 라고 봐도 말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항상 뭘로 채워져 있어야 됩니다. 이게 채워지지 않으면
목마름이, 갈증, 공복감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 마음을 뭔가 채우기 위하여 매일 수고하며 노력하며 사는 게 인생이에요.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설계하시기를,
내 빈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데.. 타락한 인간은 자꾸 다른 대상으로 채우려 하고, 그래서 그걸 추구하면 그게 바로 '우상'이요, '다른 신'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돈은 그 자체로는 신이 아닙니다. *가치 중립입니다. 근데 내 마음(또는 영)에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내가 하나님 말고, 거기에 돈을 세워 놓으면 돈이 내게 신격화 되면서 '다른 신'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서 이제 내 허전한 빈 마음을, 자녀가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 하면서 그 자녀의 성공으로 내 빈 마음을 채우려 한다면,
그러면 자녀를 신격화 함으로써, 내게 '다른 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업이나 직장 등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죠.
그러므로 내가 소원하는 것을 보면.. 나의 '다른 신'이 파악됩니다. 결국 내 모든 소원은, 내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목마름이거든요. 내 목마름을 보면 '아 내가 지금 어떤 신을 섬기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 목마름의 대상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모두가 다 내게 '다른 신'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다른 신과 겸해서 섬기는' 기술이 있다는 거예요. 두 신을 동시에 섬기는 기술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 하셨어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런데 내게 재물에 대한 목마름이 매일 있다면.. 재물이 내게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독특하고 아주 창의적인 기술을 계발해낸 것입니다.
그 기술이 뭐예요? 그게 바로 '형식적 예배'라는 거예요. '다른 신'(우상)과 참 신(하나님)을 동시에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기술 -그것이 바로 '형식적 예배'라는 겁니다. (아래 설명 나옴)
모든 예배가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만약에 신자가 자기 우상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주일날 교회가서 예배에 빠짐 없이 참석하는 것으로, 자기 신앙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을 보유한 신자입니다.
오늘도 주일을 맞이해서 많은 지구 상의 기독교인들, 천주교인들이 성당이나 예배당을 찾아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근데 이 성당이나 예배당에 들어가서 드리는 형식적, 의식적 예배가 바로 '다른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수 있는 기술이라는 거예요.
왜냐면, 자기가 진짜 섬기는 세상 신이 있습니다. 성공, 물질, 자녀, 쾌락 등이 있지요.
주중에는 그런 것을 자기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그 마음 그대로 유지한 채 주일에는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두 신을 동시에 섬기고 있다'는 자각이 없고,
하나님 한 분만 섬기고 있는 줄 압니다.
왜냐면 주일날에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요즘 말하듯이, '주일 예배가 면죄부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일 예배만 형식적으로 참석하면 '면죄부를 받았다,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면죄부를 받아서 그런지.. 자기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 속에서 갑자기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불거져 나옵니다. 이거 묘합니다.
그 전까지는 계속 '목마름'이 주제였습니다. 이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온 이 수가 성 여인의 내적인 목마름을 예수님이 보시고 '네가 나한테 구해야 되겠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물을 주었을 것이다'
이 대화속에서 '목마름'이 주제였습니다.
그러다가 여인이, 자기가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편과 산다는 것을
예수님이 다 알고 계시는 것을 보고서,
'아, 이 분이 선지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의 남편의 이력을 이렇게 다 꿰고 계실까?' 해서 예수님은 선지자 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확신하고 나서, 곧바로 여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이 보통 때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관심, 첫 번째 우선적인 관심이 바로 '예배' 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선지자 임을 알고, 선지자를 지금 마주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 만남이 끝나기 전에 자기가 알고 싶은 가장 궁극적인 관심과 의문점을 서둘러 예수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근데 그게 '예배'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믿음(영적인 갈증, 목마름)이 있었던 여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에 별 관심 없거든요...
▲참 신기하지요. 도대체 이 여인이 이렇게 '예배'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왜 여인이 '예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2천년 전 중동 땅에서, 한 여자의 모든 것은 남편에게 달려 있었어요. 남편을 잘 만나느냐/못 만나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히, 자기 속에서 발생하는 마음 속의 궁극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남편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요즘 말로 남편에 올인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6명이나 되는 남편의 홍수 속에서 정작 이 여자는 진짜 자기 마음 속의 갈증,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은, 잘못된 남편을 만난 게 아니라, 무능한 남편을 만난 게 아니라 남편이라는 존재가 자기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을 할 수 있다.. 라는 통념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가져 봤는데.. 거기에 해갈은, 기대했던 만족감은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내가 남편을 잘 못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는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의 궁극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라는 걸 깨달은 비로소 것입니다.
근데 2천년 전에, 남편이 유일한 목마름의 해결해 길이었던 여인이 남편을 제껴놓는다면, 이제 내면적 그 목마름, 갈증, 허전함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자기 평소에 관심이었던 '예배'를,
예수님께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평소에 그리심 산에 가서 늘 예배하던 여인이요,
하나님께 예배에 관심이 많았던 여인이었지요.
예수님께 대뜸 '예배'에 관해 질문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이런 '수준 높은 질문' 못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는 이 고백은, 무슨 얘기냐?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남편을 데려오라 하시니, 제가 말씀을 드리자면 나에게는 내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는 상태입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게 '남편이 없나이다' 라는 말 속에 담긴 속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옳다고 여기고 좋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상태가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을 아시고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을 제쳐 놓으시고 사마리아 땅에서 정상적인 보통 사마리아 사람들을 다 제쳐 놓으시고 예수님이 특별히 이 이 여인에게 자기 찾아오신 이유는,
이 여인은, '이 세상에서는, 이제 나에게 마음에서 발생하는 궁극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특별히 심방을 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이렇게 이 여자에게 중대한 우선적인 관심사였어요. 삶이 미쳐버리겠거든요. 이 마음속의 목마름, 타는 갈증 .. 그러니 사는 게 사는 거 같지가 않은 거예요.
그 어떤 남자도 자기 삶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타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가지면... -뭐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은 배우자를 만나면,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면,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하게 되면, -자녀가 합격하면, 자식이 승진하면.. 등등의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희망을 먹고 마시면서!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이 여인은 자기 목마름의 해결의 열쇠로써 남편이 끝나버렸다면 (즉 남편은 여섯이나 바꿔봤지만, 목마름이 해결 안 되더라..를 깨달았다면)
▲그러니까 이렇게 철저하게 막힌 상태에서 드디어 여인의 목마름이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예배'라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뭐냐?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이니까 당시 사마리아 인들이 예배드리는 장소는 그리심 산이었어요. (이는 과거 1천년 전 여로보암 때부터 내려오던 전통이었다고 그래요)
근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사마리아의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도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리심 산에 올라가서, 거기 있는 제단에 가서 예배를 드려 봐도 그 하나님은 내게 찾아 오시지 않고, 만나지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라고 확인된 예수님에게 물어보는 거지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된다고 말하고,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도 제사를 드려야 된다고 하는데
내가 그리심 산에서 예배(제사)를 드려 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니 이게 도대체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되는 겁니까?' 라고 물었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해도, 거기서 하나님을 못 만나! 그건 그리심 산에서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과 똑같아!
그리심 산의 제단이든,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든 성전 제단에 가서 드리는 그런 형식의 틀이 갖춰져 있는 의식적 예배를 통해서는
네가 그렇게 목말라서 갈망하고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네 목마름이 해결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 질 줄 아느냐?
예배라는 건 맞아! 그런데 그 예배는 그리심산 해서 네가 이제까지 드려왔던 그런 예배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전 번역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영과 진리 spirit and truth 로' (예배하라) 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어려운 말입니다.
과거 개역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라고 번역했는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라는 뜻이지요.
일단 이렇게 졍의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굳이 설명을 시도하자면,
영은, 마음입니다. 자기 온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여기서는 주관적 진리입니다. 즉 내 마음에 옳게 보이는 길.. 입니다.
'영과 진리'라는 것은
내 마음을 다 해서, 내가 보이에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인데
'신령과 진정으로' .. 이런 뜻이라고 봅니다.
일단 이렇게 정의하고 넘어갑니다. (이게 본 설교의 주 논지는 아니므로)
▲모든 사람은 이미 자기 삶에서 재물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가족의 형통이라든지 뭐 승진이라든지, 명예나 권력 등등 '다른 신'을 섬기며 예배하는 중에
삶의 현장에서 나름 영과 진리로, 즉 신령과 진정으로 다른 신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거예요. 나름 영과 진리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그런 상태에서 예루살렘 성전이든지, 그리심 산에서든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겁니까?
삶의 현장에서는 영과 진리로, 즉 신령과 진정으로 자기 마음에 목마름과, 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에게
삶의 현장에서 다른 신을 섬기고 살고 있는 중에 신자들에겐,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 더 보태집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을 섬기며 살던 삶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생각 하는 방법과 기술이 성전을 짓고 그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정한 장소, 정한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물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며 예배하는 형식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걸 '종교'라고 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현장>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다른 신을 섬기고
<성전>에서는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볼게요.
로미오가 줄리엣과 사귀었어요. 줄리엣과 사귀다 보니까 좀 싫증이 나고 권태기에 접어듭니다. 근데 줄리엣을 딱 잘라서 팽개 치지 못하겠으니까 자기 동네에 있는 스텔라를 몰래 만납니다.
소위 젊은이들이 말하면 '양다리 걸치기' 를 합니다. 양다리 걸치기 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양다리가 가능하려면, 줄리엣을 만날 때와 스텔라를 만날 때 장소가 달라야 됩니다.
만남의 장소가 끝까지 다르게 유지되면 줄리엣을 만나고 스텔라를 만나는 양다리 걸치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됩니다. 둘을 겸하여 애인으로 사귀는 거죠.
애인을 둘로 가질 수 있는 기술은 만나는 장소를 따로 만들어 버리고 유지해 나가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과 성전, 이렇게 장소를 따로 만들어 놓고, 세상에서는 '다른 신'을 성전에서는 '하나님'을.. 이렇게 따로 만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마음에 목마름을 위하여 돈을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하고, 형통을 좋아하면서 금융자산이 늘어나는 걸 좋아하고, 이런 것들을 다 좋아하고 목말라하면서 어떻게 또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까? 기가 막힌 거지요.
그런데 예배당을 만들고 성당을 만들고 성전을 만들어 놓고 그리고 이곳에 와서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라고 말해 버립니다.
하나님 예배는 예배당 안에서, 성당 안에서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는 영과 진리로 다른 신을 또 열심히 섬깁니다.
참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기술을 발견해낸 것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전과 예배당과 성당에 가두어 둡니다.
그러면 절대로 하나님과 재물을 한 장소에서 섬기지 않으면 얼마든지 겸하여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합니까? 줄레엣이, 로미오를 가만 두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자를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삶의 현장에서는 재물을 섬기고,
이제 양다리를 걸쳐야 되니까
장소를 바꾸어서
예배당에서는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게 장소가 달라야 가능하지요. 그러니까 예배당을 만들고, 성전을 만들고, 성당을 만든 겁니다.
예배당 안에서 딱 가둬놓고, 그곳에서 내가 하나님 면회하듯이
한 번 만나고 세상으로 나가서는
진짜 자기 애인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탁월한 기술이에요. 놀라운 기술이고요. 그리고 이 기술을 바탕으로 세상 종교는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그렇게 삶의 현장과 구분된 장소를 만들어 놓고 봉사, 충성, 헌신, 헌금 등등을 하게 하고, 종교가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그럼 이 여인이 드디어 하나님을 목말라 하기 시작하는데 그동안 자기가 배운 바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 종교가 만들어낸 계명과 율법을 따라서 그리심 산 제단에 가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거기거 하나님이 만나집니까? 안 만나지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예배에 대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제단에 가서 형식에 매여 있는 의식적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다. 너희가 이제까지 그렇게 예배를 드렸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가 왔다...'
마치 돈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돈으로 만족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전 제단에 가서 드리는 의식적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못 만난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성전에서 드려지는 의식적 예배를 버려라. 의식과 절차로서의 예배를 버려라...
그리고 신령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해라!
그런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이제껏 신령과 진정으로 다른 신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니까요!
어제 그 목마름에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라는 겁니다.
이제까지는 목마름의 대상을, 이 여인은 남편에게 두었으나 이제는 그 목마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신령과 진정으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겁니다. 그 전에 남편을 예배했듯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하라는 겁니다.
남편 말고도, 돈, 사업, 자동차, 건강, 자녀 등이 있겠지요.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중에 단지 하나님만 예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일날 가서 예배하기는 했는데, 형식적 의식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내가 예배했다'고 만족해 버리는 겁니다. 그건 여인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한 것과 마찬가지였죠.
그건 사실은 예배가 아니었지요. 내가 온갖 세상 다른 신들을 목말라하면서, 평소 삶에서 그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중에
그런 다른 신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 목마름을 그대로 다 가지면서 (양다리 걸치면서) 주일 날이 되니까, 예배당에 들어가서 오히려 자기가 바라고 목말라하는 그 다른 신들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를 기도하며, 하나님을 불렀고, 하나님을 찾으며 의식적 예배에 그야말로 참석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당만 밟고 돌아간 것이죠.
자기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대상은, 사실상 '다른 신'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만큼.. 그렇게 큰 매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예배당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별로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들의 진짜 예배는,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다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을 목말라 하며 예배하고 살고, 남편을 목말라 하며 예배하고 살고, 그 대상들을 신령과 진정으로 ('영과 진리로'의 과거 번역이 더 좋네요) 간절히 예배하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바꾸라는 겁니다. 너희가 이제까지 신령과 진정으로 제단에 가서 형식적 예배를 드렸다면, 이제는 예루살렘도 아니요, 그리심 산도 아니요, 너희 삶에 현장에서, 신령과 진정으로(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남편을 사모하던 그런 신령과 진정으로, 이제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대상을 바꾸고, 다시 회복하라는 것이죠.
(그 다음에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라는 겁니다)
그게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네 삶에 참된 만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 (돈, 자녀, 성공)을 예배해서는, 다섯을 바꾸고, 열 번을 바꾸어도 그 갈증을 해갈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오히려 공복, 갈증이 더 증폭될 뿐입니다.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 위는 더 커져서 더 큰 공복감을 느끼고, 명품 가방이나 신발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중에는 수 백~수천 개를 가지게 되고, 자동차를 2~3 대를 가져도 만족이 없어서, 여러 대를 가지고 골라서 타고, 남편/아내를 아무리 더해서 가져도... 공복감과 허전함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오직 그런 세상 신, 다른 신을 섬기는 신령과 진정과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만 사람은 참 만족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을 이제 너희 삶에서 퇴치하라는 겁니다.
더 이상 이런 악랄한 악행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는 그 갈증과 목마름은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참 신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가지고 싶어 하는데, 지금 돈이 없어요. 돈만이 자기 마음에 채움과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때 수중에 돈이 없으면 답답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극복 합니까?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 날이 올 거야' 하는 마음의 소망을 품으면 그 희망으로, 현실의 답답함을 극복하고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마찬가지인 거예요. 이걸 하나님께 적용해 보세요. 내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완벽한 연합을 못 이루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소망 하잖아요. 하나님을 열망하고 목말라 하잖아요.
그래서 비록 지금은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못 이루어도 그 날을 소망하며, 그 희망으로 오늘의 답답함을 극복하며 사는 거예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갈증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리고 약간의 연합에서 오는 만족도 있잖아요. 하나님을 목말라 하기만해도 세상을 목말라하던 중에 답답해하던 모든 막힘과 장애와 방해가 뚫리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 그래요? '회개하여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다!' 행3:19
당장에 하나님과 예수님처럼 완벽한 하나가 되지 않더라도 하늘을 향하여 호흡하는 일이 시작되게 되고, 생명수를 적어나마 마시기 시작하게 되고, 그래서 유쾌한 날이 이르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예배당이, 그 본래의 목적을 변질해서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기술이 발휘되는 그런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인이 남편을 목말라했듯이 그런 신령과 진정으로, 즉 마음과 몸을 다해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부터 간절히 예배할 때 인생의 갈증과 목마름이 해갈되고 하나님으로 인해 유쾌쾌 되는 날이 이를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세상 것을 아무리 채워도 결코 만족을 모르는 밑빠진 독이요, 터진 웅덩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