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가 오심으로 회복될 백성의 특징 이사야56:장 여러 설교 정리
사49~57장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회복시켜주심에 대해 기록하는데,
54~55장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면,
56장은 ‘그렇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백성 (1~8절)
▲1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본절은 언약적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언약에 근거하여 ‘구원’과 ‘의’를 베푸실 것인데,
이제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 역시 ‘정의(공평)’과 ‘의’를 지키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한편, 세례 요한도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함에 있어서
인간 편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서, 유사한 요구를 한 바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본절의 ‘정의’나 ‘의’ 혹은 세례 요한의 ‘회개’ 등은
메시야의 도래를 맞을 때 요구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자세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4:5, 6)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이것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완전하게 구원받을 것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 재림으로 인해 구원이 완성되어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말씀에 순종하며 구원과 의를 이루어가는 자들이 되라고 강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구원은 무엇을 지키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 공로로 구속함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 받은 자가, 변화 받은 자가 이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며 의를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
크게 두 가지를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1절)
정의(공평)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나의 신앙이라면
의는 내 안에서 내적으로 일어나는 신앙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평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선이라고 한다면
의는 개인의 신앙 양심에서 나오는 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가 거울을 삼아 지켜야 할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지켜야 할 관계를 말씀하고 있다면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들끼리 지켜야 할 언약의 말씀입니다.
5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라,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라,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십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것이 바로 정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또한 내 안에 의를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의를 행하며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거룩함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선을 행하며 산다 할지라도, 내 안에 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의가 즉 거룩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선을 행하고 도를 닦는다 할지라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내 안에 의를 가지고 선을 행할 때
진정한 공평과 의를 행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할 때 그 의는 나를 나타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나게 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2절,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잘 준행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본절 만의 내용을 보면, 안식일에 지켜야 할 금지 사항만 언급되고 있으나
문맥상 온전한 예배와 영적, 육체적 회복과 갱신이라고 하는, 안식일의 적극적 측면도
함께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포로기 동안 안식일 준수는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의 건실한 일원임을 알리는 결정적인 표시였습니다.
▲3절,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
여기 ‘연합한’의 히브리어 ‘라와’는, 레위 지파를 가리키는 ‘레위이’의 어근으로서,
레위지파의 성전 직무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레위 지파는 거룩한 성전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특별히 구별되었습니다.(신10:8)
그렇다면 본절은, 그 직무가 이방인에 의해서도 수행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본 구절은, 참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예배자가 될 이방인을 예언합니다.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원래 ‘고자’의 히브리어 ‘사리스’는 그 당시 궁궐에서 주요 직무를 맡고 있던
고급 관리 곧 ‘내시’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생식기능이 마비된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당시 모세 율법에 의하여, 총회의 명부에 기록되지 못했고
총회의 모임에 참석하지도 못하였습니다(신23:2).
본 구절은 이제 율법 시대가 지나감으로, 그들도 총회에 들 수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본 구절은 단지 생식 기능이 마비된 자 뿐아니라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총회의 행사, 특히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던 자들도 겨냥하고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강조점은 고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약하던
(이방인에 대한) 율법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4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절,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새롭게 등장할 메시야 왕국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복락을 누릴 자의 자격은
외형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유대인/이방인)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신실히 좇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내 집’
교회의 상징으로서의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딤전3:15).
모세 율법상으로 이방인은 성전 바깥뜰 밖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성전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도 마음껏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됨으로써
거룩한 자의 반열에 들수 있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히10:19, 20)
‘내 성 안’
고자들도 예루살렘 성 벽들 안에로 출입이 허용될 것이라는 뜻인데,
성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말은 그들도 하나님이 통치를 받게 됨을 뜻합니다.
‘기념물’
‘기념비‘(삼상15:12, 삼하18:18), 혹은 ‘장소’ 등을 뜻하는 용어로서,
여기서는 ‘장소’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KJV)
왜냐하면 본 용어와 연관성이 있는 절 말미의 ‘끊어지지’란
어떤 장소, 공동체와 연관이 있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6절,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절에 열거된 특권을 누리기 위해, 이방인들이 행해야 할 일들이 자세히 열거됩니다.
‘여호와와 연합하여 섬기며’
3절에서 이미 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연합’이란
레위 지파의 제사 직무와 연관된 용어입니다.
물론 본 구절에서 말하는 제사란, 구약 시대의 제사와는 다른 새로운 예배를 가리키며
이 새로운 예배는, 오실 메시야 예수께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요4:21~23)
‘이름을 사랑하며’
여기 ‘이름’은 인류를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와 연관성이 있는 하나님을 모르고는, 참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종이 되며’
‘종’이란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자를 뜻합니다.
먼저는 그리스도 자신이 종이 되실 것이고
계속해서 그의 교회가 종의 직무를 전수하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
구약의 한 절기에 불과한 안식일이 아닌, 메시야 도래이후
그 의미가 새롭게 재정립될 모든 종교적 규례들을 함축적으로 가리킵니다.
▲7절,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나의 성산’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영적으로는 메시야 시대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2:2, 렘3:17)
‘번제와 희생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지금 문맥은 메시야 시대에 있을 일들을 다루고 있는데
메시야가 자신의 몸을 영단번의 제사로 드림으로, 구약의 희생 제사는 폐지될 것입니다.
(히10:11, 12). 그래서 성전 제사가 없어지고, 나의 성산(신약교회)에서
그들(이방인)의 번제와 희생을 받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핵심은 이스라엘의 특권과 우월성이 사라지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번제와 희생은 이스라엘만의 특권이었고, 그들의 우월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는 ... 될 것임이라’
본절 상반절에 기록된 이방인의 특권 수혜의 근거를 적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국한 하였던 특권을
‘만민’, 곧 땅 위의 모든 백성에게로 확대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은, 온 인류를 상대로 하는 메시야의 대속 사역 때문입니다.
이방인까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해달라는 간구가
성전 봉헌 당시 솔로몬에 의해 언급된 바 있습니다(왕상8:41~43).
그러나 이를 복음의 우주적 성격과 관련지어 명확히 표현한 것은
본격적으로 이사야에 와서입니다. 주님께서도 본 구절을 인용하신 바 있습니다. (마21:13)
▲8절,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포로지로부터 모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이방인들을 많이 더 하시겠다는 이 약속은
본장 본절까지와 앞의 몇장들 내용의 결론이 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새로운 주제가 소개되므로
여기서 지금까지 다룬 몇 개의 장들을 정리 요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약의 내용은 본 구절을 통해 잘 드러나듯이
메시야 시대 때 이방 세계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특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타민족 사이에 놓여왔던 두터운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민족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놀라운 경륜 아래서 이제 모든 성도는, 한때는 낯선 자요 외국인이었으나
이제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확신 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엡 2:19).
그 기원에 있어서 온 세계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온 땅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행17:26).
◑타락한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사56:9~12
▲9절, 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들의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소집될 이방 군대를 가리키는데,
본서가 기록된 시점이, 아직 갈대아의 침입을 받기 전이므로
갈대아(바벨론) 군대로 봅니다. (렘12:7~9, 겔34:5).
바로 앞장에서 메시야 도래의 확신과, 그 택함 받은 자의 수가
이방인의 회심으로 더 늘어날 것을 말함으로써, 그 백성을 위로하였던 저자는,
돌연 그 주제를 바꾸어, 이방 군대의 침입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한 주제를 말합니다가 갑자기 상반된 주제로 바꾸는 것은
본서 저자의 기술(記述)상의 특징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갑자기 이스라엘이 멸망받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이사야서는 예언서입니다. 예언서는 삼중적 계시가 있는 말씀입니다.
1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예언하고 있고
2차적으로는 오늘날 이 시대를 예언하고 있고
3차적으로는 미래적인 일들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 예언서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멸망 받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본 단락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하고
형식과 외식으로 드리게 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의 타락은, 곧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십자가의 소리가 점점 작아져 가고 있고,
죄에 대한 설교의 소리가 작아지고 있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 소리를
듣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앞에서 공평과 의와 안식일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0절,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파수군들’
문자적인 뜻은 ‘보는 자’입니다.
본 용어는 성 위 망루에서 망을 보는 자
혹은 영적인 눈을 가지고 먼 미래를 예견하는 선지자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후자와 아울러,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을 함께 일컫는 말로 이해됩니다.
‘벙어리 개’
짖음으로써 사나운 짐승의 접근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목자의 사냥개'에서 따온 비유입니다.
‘꿈꾸는 자 ... 누운 자 ...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
세 가지 모두 유사 용어입니다.
그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꿈꾸는 자’의 그 문자적 뜻은,
‘꿈속에서 말하는 자’, ‘비전을 보는 자’ 등인데,
이것은 게을러서 비활동적인 사람뿐 아니라,
그릇된 이상, 환상을 보는 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바르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파수군으로 비유하였습니다.
파수군처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어떤 자라고 하였습니까?
첫째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영적 소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손에 있고 눈 앞에 있는데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영적 소경이기 때문에, 말씀을 보고도 그 말씀의 뜻과 깊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벙어리 개라는 것입니다.
개도 짖지 못하는 벙어리 된 개는 없을 것입니다.
“개” 라는 말이 10절 11절 두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개는 도둑이 오면 짖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의 종들이 성도들 기분 상할까봐 할 말도 못하고, 비위나 맞추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시대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오시고 계시는데도, 세상 복이나 받으라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파수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무섭게 타락되고 있고,
악한 원수 마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택한 자들을 미혹하는데도,
우리는 구원받은 자니깐 걱정 없다고 한다면, 짖지 못하는 개와 같습니다.
셋째로 파숫군의 역할을 왜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까? 10절 끝에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나니” 이것은 곧 영적 게으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거짓 종들은 말씀의 연구도,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너무 바쁜 것은 좋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만 전무하였습니다.
고소한 참기름을 먹을 수 있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깨를 달달 볶아서 틀에 넣고 누르고 또 누르고 해서 나오게 되듯이
목사는 말씀 준비에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영적 게으름은, 참된 종의 사명을 망각하게 하고
거짓된 종의 길로 가는 지름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개'라고 했겠습니까?
이 개들에 대해서 11절에서도 자세히 언급하였습니다.
▲11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이 개들은 ... 자요’
원문 직역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심 많은 개들이요’입니다.
이는 당시 지도급 인사들의 물질적인, 육적인 탐욕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겔34:2, 3, 믹3:11).
이와 같은 자들을 신약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빌3:18, 19).
‘몰지각한 목자들’
백성들의 영적 필요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10절).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에 빠져 있는 자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
특히 영적인 필요를 헤아릴 수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마다’
창19:4은 ‘무론 노소하고’,
곧 ‘나이든 사람, 어린 사람 가릴 것없이’로 번역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파멸의 이유가 밝혀졌는데, 그것은 종교지도자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도층의 성향은 곧 피지도층의 성향이 되기 쉽습니다.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진 바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조금만 더, 더, 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또한 이 개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지혜와 생각이 없이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말도 자기 입에서 나오는 데로 지껄입니다.
‘다 제 길로 돌아가며’
또한 이 개들은 자기 길로 갑니다.
거짓 종들은 자기들이 주체가 되어, 무엇을 계획하고 결정합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다스림 받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까지도, 행동까지도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종입니다. 종에게 무슨 특권이 있습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또한 이 개들 거짓 종들은 자기 이익만 챙깁니다.
앞에서 언급한 탐욕과 비슷한 말입니다.
거짓 종은 오직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사는 자입니다.
조금이라도 손해 볼 것 같으면 참여하지 않습니다.
▲12절,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 오리라’
여기 이르는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포도주를 가져 오리라’란, ‘한 잔 더 마시겠다’란 뜻도 됩니다.
결국 본 구절은 술을 서로 권하는 대로 받아 마셔
한 테이블에 앉은 자들이 포도주에 취하여 취흥을 즐기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지도자들의 육적인 상황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줍니다.
‘내일도 오늘같이’
이것은 그들의 육적인 탐닉이 일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것, 곧 삶의 주된 관심사였음을 밝혀줍니다.
또한 이 개들 거짓 종들은 세상 것에 취해 사는 자들입니다.
12절에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서 오늘도 내일도 취해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탐욕으로 취한 재물을 가지고 세상 것에 취해 사는 모습입니다.
거짓 종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짐승처럼 특히 개처럼
이 땅에서 잘 먹고 즐기고 사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말이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9절에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이스라엘이 멸망 받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바벨론의 칼날에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A.D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었을 때
당시에 제사장들이 2만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2만 명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 거짓 종들의 종말은 어떻게 된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까?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거짓 종들은 산 채로 지옥 유황 불 속에 던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은 똑바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