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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8장 해석

LNCK 2021. 11. 10. 19:01

 

◈금식과 안식일에 관한 책망과 권고     이사야58:장          여러설교정리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인 40~66장은 또 3등분하여

40~48장, 49~57장, 58~66장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사58~66장은 이사야의 마지막 부분으로

신앙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복된 미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사58~59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식적인 신앙과 불의함에 대한 책망,

그리고 그들이 행한 불의함이 그들에게 미친 참담한 결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 1~9a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한 형식적인 신앙,

특히 금식에 대해서 책망하며, 그 삶을 돌이킬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문 사58장은 금식과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형식이 필요합니다.

 

밥이나 우유가 그릇과 용기에 담겼을 때,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깨끗한 밥이나 우유가, 자기 용기에 담기지 못하고

화장실 바닥에 놓여져/부어져 있다면,

아무도 그것을 주워 먹을 사람은 없고, 오히려 불결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생활도 아무리 내적으로 깨끗하고 신실하다 하더라도

그게 적당한 외적 형식을 갖추어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인데,

이렇게 신앙생활에는 형식이 필요하지만, 형식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특별히 '금식과 안식일'에 대해서, 형식적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신앙 자세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1. 형식적인 신앙생활, 특히 금식에 대한 책망           사58:1~5

 

▲1절,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1절에 명령어가 3개나 나옵니다.

-‘크게 외치라’,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트럼펫) 소리와 같이 소리를 질러라’입니다.

 

즉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질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소리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흘려듣지 말고, 심각하게, 반드시 들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대상이 ‘내 백성’, ‘야곱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허물과 죄를 고발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허물’이 작은 잘못이고, ‘죄’는 큰 잘못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지만 실제는 그 반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허물’은 굉장히 강한 개념입니다.

‘반역’, ‘변절’, ‘영역침범’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래는 신하가 임금을 몰아내기 위해서 역모를 일으킬 때에 사용했던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허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가장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허물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배경은 바벨론 포로 이전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로 (일차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7장에서도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죄악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죄악을 회개하는 자에게만 함께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회개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더욱 악한 짓을 범하였는데

그러한 죄를 이사야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죄악이었습니까?

 

▲2절,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1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 허물과 죄를 알렸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즐거워하고, 올바른 길을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바른 삶을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2절은 반어법입니다.

 

하나님은 2절에서 조롱적인 뜻이 담긴 역설적인 표현으로

세 가지의 죄악을 지적하였습니다.

 

1) 첫째는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와 그 길 알기를 즐거워했다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즐거워했다 는 것입니다.

 

“마치 의를 행하며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마치” 라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두가 다 형식과 외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도 그들의 형식과 외식을 지적한 바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1~13)

 

여러분! 하나님께 나오는 것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귀함과 소중함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정성이 없다면,

그것은 형식과 외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귀신을 섬기는 무당이나 점쟁이들도

얼마나 자기가 섬기는 귀신을 정성스럽게 섬기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수가 모였더라도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면

그곳이 곧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까?

진실로 이 땅에 교회들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둘째는 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역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 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하루에 세 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고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기도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는 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고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알리고 응답해달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사1:15-18)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57장에서도 회개에 대해 강조하였지만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는 회개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구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기도는 형식과 외식적인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하나님께 나와서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나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59: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한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런 기도는 아무리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응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부르짖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 까지 기다리며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셋째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반어법)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 의식과 행위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드린 의식과 행위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

“똥” 같은 의식을 멈추라고 하였습니다. 말2:3

 

(말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육적인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귀신들도 영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무당들이나 점쟁이들이

육적인 제사를 드리는 줄 아십니까? 그들은 귀신들과 접신하기 위해서

몸이 상하도록 시간을 드리고 몸부림칩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몸부림치지 아니해도 나의 죄를 고백하고,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면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 행위에 너무 치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의식들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만날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려면”

먼저 나의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우리 옆에 가까이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57장에서도 보았지만 회개할 때 우리 마음에 영을 소성케 해주고

평강을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절,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습니다.

즉 자신들은 금식을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가진 것을 신뢰하는 삶을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금식’을 하여,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외식적인 금식은 그들의 오래된 고질병과도 같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지, 700년이 지난 후에도 마6장에도 보면

유대인들이 외식하며 슬픈 기색을 띄고, 얼굴을 흉하게 하여서

금식하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었습니다.

 

또한 눅18장에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들려주셨는데,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2번씩 금식을 한다고 하나님께 자랑을 합니다.

 

금식은 신앙을 드러내는 아주 강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만큼 외식하기도 싶고,

거래의 조건으로 변질되기도 쉽습니다.

 

본절은 이스라엘이 금식의 본래적 목적과 의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현실상의 축복을 비는 수단으로, 

단지 종교적 자랑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사실을, 계속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본래 금식은 회개와 성결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 (느9:1, 2, 시69:10),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뜻과 정욕을 억누르고

자기를 부인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금식에 대한 언급은 이른 시기부터 보여집니다. (삼상31:13, 삼하12:11~23, 대하20:3).

그러나 개인 금식이 경건의 표현으로서 대중화되고

정기적으로 공동 금식이 준행된 것은, 포로기 이후의 일입니다.

 

슥8:19에는 정기 금식의 네 시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중 4월 9일의 금식은 예루살렘 함락을(왕하 25:3~21), 

5월 10일의 금식은 성전 파괴를(렘52:12, 13), 

7월 2일의 금식은 그달리야 살해를(왕하 25:23~25)

그리고 10월 10일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처음 공략된 것을 각각 기억하는 데

애초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였는데 왜 알아주지 아니하느냐”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금식하고 기도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고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옳은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락을 구하다’는 것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즐거움을 채웠다는 것입니다.

 

금식하면서 성경을 한 장도 읽지 않고, 드라마를 보는 일에 빠져 있고,

자기 취미생활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온갖 일을 시켰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노역을 시키거나,

빌려준 돈이나 이자를 독촉해서 받아 내는 것, 권세를 이용하여 재물을 착취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주먹질하며 싸우고, 누구의 목소리가 큰지 경쟁하듯이 다투었습니다.

 

그런 모습보고, 기가 차신 하나님께는 “그럴 거면 금식은 왜 하니?

그런 금식을 내가 받을 수 있을 것 같니?”라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속죄일 기간 동안에는 모든 이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종들에게 온갖 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금식을 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온갖 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식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을 해주시겠습니까?

  

▲4절,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금식하는 것은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하면서 서로 치고 받고 주먹을 사용하며 싸웠다는 것은

소극적인 다툼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악의적인 싸움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에 기본적인 의미도 목적도 모르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어떻게 금식하는 자들이 온갖 악한 일을 다하고, 세상일을 다 하면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재를 뒤집어 쓰는 행위적인 금식을 한다고

“어찌 금식이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금식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상관없는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5절,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 재를 펴는 것’

이는 극도의 겸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형식적 모양만 갖춘다고 하여 다된 걸로 생각하는 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본절의 요지는 금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금식의 정신이 결여되었다는 것입니다.

 

금식의 참정신이 6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바, 

그것은 결국 경건의 모양 과 능력을 동시에 갖추는 것입니다. (마6:16~18)

 

하나님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금식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행위가 아닙니다.

 

금식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내 인생의 주어를 ‘나’로 삼았던 것에서,

내 인생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그 전에는 세상과 놀았다면, 금식은 하나님과 놀 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와 놀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수용하고, 순종하며,

그 하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사58:6~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금식을 지적하면서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는 금식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외적인 의식이 아니라

금식의 정신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금식의 내용 안에는 두 가지 면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6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흉악의 결박’은 주인이나 권세자가

종이나 백성에게 부당하게 채운 족쇄나 결박을 의미합니다.

 

‘멍에의 줄’은 소나 나귀를 제어하기 위한 장치나 코뚜레인데,

그와 같은 것을 사람에게 채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압제당하는 자’는 부당한 이유로 인생이 산산조각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자유하게 해 주는 것이 금식이라고 합니다.

 

▲7절,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은 굶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기간에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금식은 개인적 삶에서 의를 행하는 것인데

4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2)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라고 하였습니다.

3) 벗은 자를 보면 입혀 주라고 하였습니다.

4) 친척이나 형제가 어려워 어떤 도움을 청할 때 숨지 말고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두 가지의 금식의 정신을 모르고

그냥 밥을 안 먹는 금식의 의식만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금식은 어떻습니까?

 

나라와 민족과 이웃을 위하는 금식을 하고 있습니까?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금식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금식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금식도 필요하지만 먼저 이러한 금식의 정신을 가지고 금식을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먼저 금식을 할 때 자신의 죄를 먼저 회개한 후에

나라와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이웃의 죄까지도 회개한 후에 금식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8절,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면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에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어

결국 행복, 번영, 평화의 길로 이끄는

선봉장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이것은 이스라엘과 그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섰었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연상케 합니다. (출14:19, 20)

 

▲9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8~9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을 드릴 때

하나님의 약속이 4가지로 주어집니다.

 

1)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충만은 기도를 많이만 한다고 해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것입니다.

 

2) 네 치료가 급속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금식은

영과 육이 치료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4) 하나님이 만나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약속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4가지 약속을 10~12절에서 다시 재강조하여 주십니다.

왜 재강조하여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키면 복이지만 지키지 아니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축복을 재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지금까지 불투명하고 암담했던 삶의 여정이

분명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재앙들 그리고 시련들의 과정이 끝나고

풍성한 번영의 과정이 이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10절에서 더 이상 절망과 실패의 어두움 속에서 헤매지 않고

소망찬 삶을 살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참된 금식이나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11절,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또 그와 같은 사람은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을 만족하게 하고,

‘뼈’를 견고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황무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꽃을 피우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뼈가 없거나 부러지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며,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언제나 견고합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견고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물 댄 동산’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은 곧 ‘생명’입니다. 물이 귀한 중동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사는 사람은 갈함도 없고, 생명의 역사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인한, 그 택한 백성의 구원을 암시할 때,

‘마른 땅’의 이미지를 자주 등장시킨 바 있습니다(41:17 등).

 

‘물 댄 동산’

이는 근동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나타내려 할 때 흔히 사용된 표현입니다.

시리아 역은 본 구절을 ‘천국’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천국을 이뤄본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표현을 종말론적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의 택함받은 자들은

완성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여기 ‘끊어지지’로 번역된 ‘예카제부’는 그 문자적인 뜻이 ‘속이다’, ‘거짓말하다’입니다.

이것은 샘의 근원이 말라 있을 경우,

물을 얻기 위해 그곳을 찾은 대상들, 

혹은 짐승들의 허탕을 치게 되는 사실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실 샘은, 결코 마르지 않고 항상 풍성한 샘입니다.

이 샘은 바로 반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 사역 때문에

그분을 찾는 모든 사람은, 항상 영생의 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요4:13, 14, 고전10:4)

 

11절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영혼과 육이 보호를 받으며 강건하여

우리의 인생이 물댄 동산 같겠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한다면

반대로 우리는 곤비하고 갈급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2절,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운다’는 것과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는다’는 것은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재건할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 인생이 황폐화 된 것 같아도, 또 아무리 무너진 것 같아도,

그 인생은 다시 세워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의 수축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더 나아가서는 이방의 회심이라는 축복을 암시합니다. (암9:11, 12, 행15:16, 17)

 

12절의 말씀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믿음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껏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살았다면

이제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라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제껏 잘못된 금식을 하고 잘못된 기도를 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바른 신앙으로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다시 회복시켜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다시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다시 새롭게 일어서지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7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회복시켜 주었지만,

다시 또 그들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3. 바른 안식일의 신앙을 가져라.        사58:13~14

 

안식일에 대해서는 56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안식일은 주일로 바꾸어졌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8)

초대 교회는 그러한 안식일의 주인 되신 정신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고

기독교 역사적 문헌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20:7)(고전16:2)

 

안식일은 즉 주일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선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할지라도 주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믿음이 있는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곱 째 날 즉 주일에 대한 복을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신앙은 나의 신앙의 생명선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날이고 나를 거룩하게 하여 주시는 날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2천 년 교회 역사를 돌아볼 대 주일 신앙을 지키는 나라와 민족은 부강하였고

주일 신앙이 무너질 때 어떤 나라든지 쇠퇴하고 무너졌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3절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나오고 금식을 하면서도

그들은 오락을 즐기며 하나님께 나와 예배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3-14에서 하나님은 거룩한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3가지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3절,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본절의 시점은 포로 귀환 이후의 시대입니다.

바로 이 시대에도 안식일 준수는 중요한 의무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느13:15~22)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주일)은 ‘내 성일, 거룩한 날’이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주일)을 안식일답게 지키는 출발과 마침은

그 날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인 것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주일)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날을 자신을 위한 쾌락의 날로 삼지 않고,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 인생이 승화됩니다.

 

‘네 발을 금하여 ...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발’은 동작을 일으키는 수단입니다. (잠4:27)

안식일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따라서 안식일에 회당이나 성전에 가는 일 외에

다른 일에 그 발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행1:12 참조).

 

‘성일’ (聖日)

‘나의 거룩한 날‘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날을 나의 날이라 부르십니다.

따라서 그날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 그분은 소유를 도둑질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 즐거움이 육적인 것이냐, 아니면 영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만일 육적인 즐거움을 취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안식일 규례를 범한 것이 됩니다.

 

1) 주일 날 발을 금하여 오락을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발을 금한다는 것은 6일 동안 세상을 향해 살던 발걸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6일이 주어진 것은

7일 째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주어진 6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호흡이 있고 건강이 있다는 것은 그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으라고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고전10:31)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주일 날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6일 동안 오락을 즐겼다 할지라도 7일째 되는 주일 날은

모든 세상적인 오락들은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에

모든 시간을 바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를 복되게 하고, 가정을 복되게 하고, 자녀를 복되게 하고

나라와 민족을 복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2) 거룩하고 존귀한 주일 날은 자신의 길로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 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장사를 한다든지 사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주일 날은 나만 쉬는 것이 아니라 내 사업에 종사하는 모든 자들도 쉬게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 거룩하고 존귀한 주일 날은 말도 조심히 해야 합니다.

 

주일 날에는 발만 금할 뿐 아니라 입도 조심히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말”은 쓸데없는 말이나 악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일 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까지도 거룩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절,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쉽지 않은 구절로서 해석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이 살던 팔레스틴 땅은 고지대인데

바로 그 고지대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 

곧 포로 귀환의 약속으로 보는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높은 지대가 상징하는 번영, 안정에 대한 약속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두 견해를 연속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즉, 포로로부터 귀환시킨 후, 번영과 안정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야곱에게 약속된 땅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포로 후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땅을 소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강조할 때, 흔히 이 표현이 사용됩니다.

 

14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주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은 3가지로 약속하고 계십니다.

 

1) 거룩한 주일을 잘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일 날 세상적인 육적인 즐거움을 포기한 자에게

하나님은 영적인 즐거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즐거움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마약같은 잠간이지만

하나님이 주는 즐거움은 기쁨의 원천이 되고

내 영혼과 육이 소생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주신 이 평안 가지고 싶으십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거룩한 주일을 지키면 나를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가 어디입니까?

명예 권세가 있는 자리입니까? 그런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영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에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세상의 빛이 되라” 고 하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예수의 빛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자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거룩한 주일을 지킬 때

내가 세상 속에 우뚝 서서 그러한 영광을 나타내며 살게 될 것입니다.

 

3) 주일을 지키는 자에게 약속된 땅이 보장됩니다.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는 말씀은

이스라엘 조상 야곱에게 약속된 기업의 땅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곧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된 천국이 보장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일 날 어떤 약속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이 선약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구랑 약속을 했을 때

선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약을 취소하고 약속을 지키십니까?

 

여러분이 누구랑 선약을 했는데 상대방에게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뜨린다면

여러분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거룩한 주일의 약속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미 일주일 전에 아니 몇 년 전부터

선약이 되어 있는데, 그 선약을 내가 일방적으로 깨뜨린다면

하나님이 기분 좋으시겠습니까?

  

거룩한 주일의 개념이 무너져 가고 있는 이 시대에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어떤 누구와 약속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먼저 선약을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약속을 깨뜨리는 결단력 있는 믿음을 보이시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