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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9장 해석

LNCK 2021. 11. 11. 18:12

 

◈하나님, 이사야, 백성들의 삼자 대면        이사야59장        여러 설교 정리

 

삼자대면입니다.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 이스라엘 백성들,

이렇게 삼자가 마주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극화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의 배경 : 이스라엘 백성들이 씩씩댑니다. 뭔가 속이 뒤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오늘 우리의 곤고함과 삶의 힘겨움을 알기는 합니까?

그런데 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솔직하게 말해볼게요. 하나님이 좀 의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면, 어떻게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고

우리가 포로로 잡혀갔단 말입니까?"

 

1) 이사야 (1~8절,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는 설교)

바로 이때 예언자 이사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신랄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잘 못 없음, 하나도 없음. 모두 너희 잘 못임!

다 너희 죄악이 문제이다! 그 입 다물라." 입니다. 매몰찬 일갈입니다.

 

2) 백성 (9~15a절, 죄를 고백)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꼬리를 내립니다. 바로 무릎을 꿇고 자복합니다.

 

3) 하나님 (15b~21절, 구원의 선포)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이들을 구원할 사람이 없음을 보십니다. 중재자도 없고,

스스로 구원할 능력도 없고, 저들 안에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자비의 음성으로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마!"(16)

"나는 너희의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이다!"

 

 

◑1. 이사야,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다          사59:1~8

 

이스라엘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은

57장 58장에서 계속해서 언급하였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상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에도

마음에 찔림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악한 죄악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그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시고 계십니다.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본장은 자신들의 오랜 포로 생활 가운데 겪는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듯

하나님께 논쟁하고 따지는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변론을  전제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58:3 참조) 

 

여러분! 열심히 부르짖는다고 응답받는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가로 막힌 죄악의 담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맨 처음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죄악의 담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소수만이 죄악의 담을 허물었고

     대다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2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라가 없는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는 비참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7가지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죄악 속에서 나의 죄는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죄악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는 커튼이나 벽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위 본문에는 '사이'라고 나와있는데, 벽이나 커튼을 뜻합니다.

그 같은 상태에서는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3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1) 첫째로 그들의 손이 피와 죄악으로 더러워졌습니다.  :3

 

57장에서도 보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여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또한 우상 앞에 나아가 제물을 드렸고, 기도를 하였고,

자신들의 자녀까지 이방신 몰렉에게 바치는 악한 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악한 자들이 손을 들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그 손을 붙잡아 주시겠습니까?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손이 피와 죄악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은 곧 행위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비록 우상 앞에 제사 드리지 않고

주의 종들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성도들의 행위가 온전치 못하다면

그들의 손은 피와 죄악으로 더럽혀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8장 3절에서 우리의 기도는 향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하였는데

    기도의 향이 더럽고 악한 향으로 드려진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기도를 열납 하시겠습니까?

 

    무조건 부르짖는다고 기도가 응답되는 것 아닙니다.

    진실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2) 둘째로 입술은 거짓을 혀는 악독을 말했습니다. :3

 

하나님께 기도하는 입이, 거짓을 말하고 사람들에게 악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58장에서도 보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금식을 하면서도 싸웠고,

안식일날도 거짓을 행하며 형식과 외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약3: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그런 입으로는 아무리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 해도

    하나님이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에 재갈을 물리라고 하였습니다. 할 말 다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원통하고 분한 일이 있을지라도 참고 인내하는 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셋째로 불의와 타협하고 허망한 것을 의지하였습니다.(4절)

 

▲4절,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공의가 땅에 떨어졌던 사회상을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이니다."(합1:4)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왜곡되고 불합리한 사회 풍조 때문에,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는 일이 되지 않고

그래서 온갖 부정한 수단에 의지하게 됨을 나타냅니다.

 

‘잔해(殘害)를 잉태하여’

문자적인 뜻은 ‘불행을 잉태하여’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불이익, 상처를 낳는 악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공정해야 할 법정에서 조차 공의와 진리가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쳤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타락된 것은, 세상의 허망한 것들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은 세상의 허망한 것을 쫓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허망 속에는 반드시 불의가 있고 탐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불의와 불법을 좇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기도 응답을 해주실 수 있단 말입니까?

 

4) 넷째로 독사의 알을 품고 거미줄을 짰습니다. (5절)

 

▲5절,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독사의 알을 품으며’

이 같은 뱀은, 알 속에 있을 때 밟아 죽여야 옳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도리어 그 동물을 보호하고 키우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그들이 악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거미줄을 짜나니’

여기 ‘거미줄’은 다른 곤충을 잡기 위해 치는 함정, 

곧 남을 해치기 위해 놓는 덫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곧 망가져 버릴 정도로 얇은 조직으로 된

거미줄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6절에서 이 거미줄은 단단하고 치밀한 조직으로 짠

‘옷’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해치고 망치려는 계획과 행위는

헛되며 일순간적인 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8:14, 잠11:18)

 

이웃을 해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도모하는 것이

독사가 알을 품는 것과 거미가 거미줄을 짜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독사의 알에서는 사람을 헤치는 독사가 나오고,

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은 벌레를 유인하여 잡아먹기 위한 것이듯,

악인들의 생각과 계획은 사람을 헤치고 죽이기 위한 것이며,

거기에 걸려드는 자들은 치명적인 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독사의 알과 거미의 거미줄 같은

죄악의 행위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가 상달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은 없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마음 속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바로 독사의 알을 품고 있는 자이고 거미줄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더럽고 악하고 추한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을 받았다면

내 마음 속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 같은 것들을 모두 버려야만 합니다.

 

5) 다섯째로 그들의 행위는 무익할 것입니다. (6절)

 

▲6절,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거미줄은 옷감 재료로 부적합하다는 것이 문자적인 뜻인데, 

여기서는 그와 유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나아가 구원을 보장할 수도 없다는 의미를 암시합니다.

 

거미줄을 짓는 것과 같은 행위에는 기만적인 궤변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 지혜, 경건, 미덕 그리고, 그에 따른 구원을 이루지 못하며

허공을 치는 사색에 그치고 맙니다.

 

또 다른 예로는 악한 자의 술수, 헛된 형식주의, 거짓된 여론, 간교한 사색, 

그리고 생명 없는 전승 등이 있겠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이루어가는 것 같지만

그들의 계획으로는 의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우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모래 위에 세운 바벨탑 같은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마7:26-27)

 

6) 여섯째로 그들의 발은 행악을 행하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할 것입니다. (7절)

 

▲7절,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악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3절에서 죄를 짓는 신체 부위로서 손, 손가락, 입술, 혀를 언급했던 저자는

여기서 발을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악이 전인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1:5, 6)

 

‘사상은 죄악의 사상’

죄행의 뿌리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행동에 있어서만 악했던 것이 아니라

그 의도, 생각에 있어서도 역시 악했는데

사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요소입니다.

 

발도 손과 같이 행위를 의미합니다.

손이 어떤 일을 행한다면 발은 그 일을 신속하게 행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악한 일을 열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의미입니다.

 

57장에서도 보았지만 이스라엘은 몰렉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방 나라까지 갔는데, 가는 길이 멀다고 피곤하지 아니하고 열성을 보였습니다.

 

오늘날도 이 시대 다른 일은 더디 해도 죄를 짓는 악한 일을 하는 데는

미루지 않고 열성적으로, 피곤한 줄로 모르고 죄악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신속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 일곱째로 그들의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었습니다. (7절)

 

▲7절b,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8절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 속에는 온통 죄악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계획이 모두가 다 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노아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입니다.

이런 죄악의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황폐와 파멸”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첫째 사람들이 마음이 황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사막처럼 마음을 그 무엇으로 채워도

갈급하고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의 끝은 파멸입니다. 이 파멸은 죽어서도 받지만

반드시 이 땅에서도 그 댓가를 치르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삯이 있는데 그것은 곧 사망입니다. 이 사망은 영적 사망뿐만 아니라

육적인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8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죄악의 길에는 평강도 공의도 없습니다.

평강은 오직 진리와 의로움이 실현되는 곳에만 있습니다.

평강은 진리와 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32:17)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여러분! 하나님과 가로 막혀 있는 죄악의 담은 없는지 살펴보시고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여 죄악의 담을 무너뜨리고 기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는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거룩한 입으로 간구하는 기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백성들의 회개         사59:9~14

  

▲9절,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에게서’ 

8절과 그 앞 몇 구절들에서 3인칭(그들)이었던 호칭이 1인칭으로 바뀌었습니다.

저자는 이같이 인칭을 바꿈으로써

이제 이사야 자신까지를 포함하는 이스라엘 민족전체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당할 재앙을 바라보면서 그 죄악을 회개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의’

문맥상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회가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공평과 의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 할지라도 죄악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자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 시대 어둠의 악한 영들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죄악을 멀리하고 아니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겠지만 전혀 죄에 대해 아파하지도 않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이 시대는 어두운 세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절,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시내 광야에서 모세가 예언한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그때 모세는 만일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준행치 않으면

소경이 더듬는 것같이 더듬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 28:29).

 

소경처럼 담을 더듬는다는 것은, 갑작스런 환난을 당하여 황망해 하는 것, 

스스로 참 진리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

혹은 스스로는 구원의 길에 들수 없는 상태에 처한 것을 가리킵니다.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임한 재앙이 그치지 않음을 뜻합니다.

안식의 낮을 잠시 기대하여 보지만 여전히 재앙의 밤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장한 자 ... 같은지라’

‘강장한 자’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이를 ‘어둠’(Jerome,  Luther), ‘무덤’(탈굼역), 

‘황량한 장소’ 등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맥상 이 말이 ‘죽은 자’와 반어적 관계에 있는 듯하고, 

그 어원으로 추측되는 ‘솨멘’이 ‘풍부한’, ‘살진’, ‘무성한’ 등의 뜻임을 미루어 볼 때,

이는 ‘비옥한 밭’ 혹은 ‘살지고 강건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번영과 낙을 누릴 때,

죽은 자처럼 번영도 없이 기쁨을 모르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불신자의 모습입니다. (26:10, 눅15:17)

 

여기서 불신자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있는 불신자입니다.

 

영적 무지한 이스라엘은 소경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낮에도 갈 길을 몰라 넘어지고, 강한 자 같지만 죽은 자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은 소경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사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1절,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아무리 타락한 시대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예언서에서 나오는 “남은 자” 의 신앙인들입니다.

 

(사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그루터기를 남겨놓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이러한 그루터기 같은 자들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나라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자(본문에 곰, 비둘기)들이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12절,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

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원문 직역은 ‘우리의 죄가 우리를 향해 대답하오니’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과거 죄악들이 너무 현저해서

그들이 죄인임을 명백히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12절에서만 “우리” 라는 말이 7번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수많은 허물을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허물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자신들의 허물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왔다면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13절,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데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하니

 

바로 앞절에서 구체적인 내용의 진술 없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죄인임을 인정했다면, 

본절에서는 죄의 구체적인 내용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죄행도,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배신의 행동, 말

그리고 생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4절,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평’(미쉬파트)이란 재판정의 생명이라 볼 수 있는 ‘공정성’을 뜻합니다.

재판은 바로 이 ‘공정성’에 의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는 어떤 권력의 배경이나 뇌물 등을 가진 자에게 유리하도록

재판이 진행되곤 하였음을 시사합니다.

 

‘거리에 엎드러지고’

공정성에 의해 진행되는 재판은, 거리가 아닌 성문 따위와 같은

사람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곳에서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의 생명인 ‘공정성’. ‘성실’(에메트)이 거리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공정성이 재판정을 떠났음을 뜻합니다.

 

‘정의’의 상징인 재판정이 정의롭지 못하면

그 나라 전체는 도덕적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많이 본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도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 살아계심을

똑똑히 보았고, 그 넓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광경도 똑똑히 보았습니다.

 

또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여 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신 것 다 체험하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인정하지 아니했다” 는 것은 살아계신 신으로 인정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롬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좇는데서 돌이켰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좇는 대신 무엇을 좇았습니까? “포학과 패역, 거짓”을 마음에 잉태하였고

공평과 의와 성실과 정직은 그들의 삶과 멀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회개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한 모습을 가지고 지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나라 민족에게도 이러한 죄악들이 세상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욜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이제라도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회개 기도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더라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 선포          사59:15~21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말씀처럼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에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기도도 바로 응답이 없다 할지라도, 진실로 의로운 기도였다면

언제인가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1) 첫 번째로 그동안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15절,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은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문자적인 뜻은 ‘악으로부터 떠난 자가 먹이가 되다’입니다.

범람하고 있는 악의 세태에 물들지 않은 정직하고 경건한 자가, 

먹이를 노리는 야수와 같은 악인의 공격 표적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원문 직역은 ‘하나님 눈앞에 악이 있었다. 그것은 그분을 고통스럽게 하였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악성은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는 그의 품성을 따라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만 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속성을 예시하는 역할을 위해 선택된

모범적 국가로서의 자태를 만방에 드러내어야 했습니다.

 

무엇을 감찰하셨습니까? 이스라엘에게 공평이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공의를 중재할 사람이 없는 것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자기 팔로 자신의 의로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땅을 감찰하시고 자신의 택한 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감찰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6절,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이스라엘이 징벌을 받는 이유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징벌이 멈추려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한 존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본 구절의 뜻하는 바입니다.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원문 직역은 ‘어찌할 바 몰라하셨다‘인데,

이것은 중재자,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없음을

크게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2) 둘째로 무장하시고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7-18절)

 

▲17절,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고

보수로 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이스라엘의 부패상이 너무 심각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마치 무장한 전사처럼 하시고서 직접 개입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묘사한 성도의 전신갑주를 연상시킵니다. (엡6:13)

 

에베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여호와의 각종 무장 장비들은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의 다양한 표현들이며, 

이들은 당신의 진노와 사랑을 아울러 나타내는 것입니다.

 

▲18절,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본절에서 강조되는 말은 ‘행위’입니다.

이 말이 세 차례나 사용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강조점은 명백합니다.

‘보응’과 ‘보복’의 히브리어도 바로 같은 단어 ‘행위’(게물)임.

 

이제 말씀으로 경고하는 때는 지나갔고 심판의 행동이 개시됩니다.

 

한편,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 열방들에 대해 내려지는 것으로 묘사되어서

마치 패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숨겨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아마 기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까지 세상 만국에 대한 심판 속에 포함시켜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워주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먼 훗날에 다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약 100년 후에 이루어지는데

강력한 바벨론 세력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멸망시키십니다.

 

그 날에 하나님은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고, (호심경은 가슴을 보호하는 흉패)

구원의 투구를 쓰시고, 보수(보복)로 옷을 입으시고,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분노하시고, 보호하시고, 보복하신다” 는 삼중의 표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도 하나님은 예수와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이 땅의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사탄을 무저갱 속에 가두게 될 것입니다.

 

3) 셋째로 온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19절)

 

▲19절,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돋는 편에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본절에 대한 번역은, 역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가 대적들을 완전히 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분노 앞에 두려워하지 아니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해 돋는 편은 동방을 가리키는 말로 서방과 함께 언급된 것은

남방과 북방이 포함되는 의미로, 온 땅의 모든 열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강력한 바벨론 세력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온 세상이 두려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의 종말 때에 더욱 두려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넷째로 하나님이 구속자로 임하시겠다는 것입니다.(20절)

 

▲20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이 말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하늘로부터 오는 구속자는

배타적으로 유대인에게만, 유대인을 위해서만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구속주가 이스라엘 중에서 탄생하시게 된다는 의미에서

우선적 배려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롬1:16 참조).

 

이 약속은 먼 훗날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오실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도 죄악을 떠나는 자에게 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죄를 회개한 자에게 예수의 구속하심이 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이 어떻게 임하였습니까?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

으로 하나님의 구속하심이 인류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구속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매달리면서 온 몸의 물과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속의 비밀을 깨달은 자는, 자신의 죄를 예수의 보혈로 사함

받을 수 있다는 비밀까지 깨닫기 때문에 회개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다섯째로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21절)

 

▲21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절은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20절)를 포함한

구속함 받은 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먼저는, 성령을 그들에게 계속 임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성령은 계시의 근원이자(욜2:28), 권능과 은사의 원동력입니다(믹3:8).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계속 머물러 있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말씀은 계시의 결정체요, 신령한 은혜의 방편이요, 

성도의 행할 바를 일러주는 삶의 지침서이기도 합니다.

 

이 두 약속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신구약 66권의 완성을 통해

1차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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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아르헨티나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합니다> 라는

긴 제목을 가진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오르띠즈 목사님은

우리의 기도의 90% 이상이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성을 가진 대화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무너진 것은

57장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58장에서는 형식과 외식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59장 본문에서는, 그들의 죄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혀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통이 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응답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만 되어서 돌아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이전에

    나의 죄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 기도하였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아무리 천번 만번 기도한다고 해도 응답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죄악의 담이 무너지지 않는 한, 나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가 될 것이고

    잡동사니 취급을 당하는 기도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이 시간 우리 모두 나의 죄악의 담을 허무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