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또 우리가 맞이하는 새해 2020년 가운데 하나님의 깊은 임재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광야 같은 우리 인생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 주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시편 91편 1절에 보면 '전능자의 그늘은 은밀한 곳이다' 라고 했는데, 하지만 이 말씀에도 딜레마가 있습니다.
인생길이 아무리 광야 같을지라도 어찌 계속해서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안식처를 떠나서 다시 도전해 보고, 부딪혀 보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다가 다시 지치고 실패하면 그분의 그늘 아래로, 그 안식처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 라는 주제인데요.
출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출애굽기는 총 4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 마무리인 두 구절을, 오늘과 다음 번 설교로 나누고자 합니다.
출애굽기는 굉장히 인상적인 설명으로, 마지막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성막을 드디어 완성했는데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했다'
▲자 그러면 '구름'이 왜 나타나는 것일까요? 구름은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요?
두 가지를 보겠는데,
첫 번째로, 구름은 홍수심판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세상에는 비가 오지 않았어요.
홍수 심판이 있고 나서부터, 비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에 창들이 열리고,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처음으로 비가 내리는 사건,
그래서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홍수로, 비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전에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비는 홍수 심판이 후에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구름 가운데 놀라운 은혜의 반전이 있었죠.
창세기 9장을 보면,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하나님이 띄우셨어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름은, 심판의 결과이자, 은혜의 증표 입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상징하는 상징물로서 아주 적합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창세기에는 구름이 심판의 결과인데 출애굽기에서는, 이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시내산 금송아지 사건인 출29장 1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에 강림하시는데 빽빽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다'
또 다니엘은 환상중에
'인자같으신 이가 하늘 구름을 타시고 옛적부터 계신 이',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단7:13
그럼 왜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등장할까요? 무대에서, 드라이아이스로 연무 효과를 내서 주인공이 등장할 때, 어떤 임팩트를 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요?
왜 하나님의 구름의 임재가운데 나타나시냐면,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해서는 감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직접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어요. 그분의 거룩의 광채와 영광의 광채를 온전히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임재하시고 나타나시면서 구름을 등장시키시는 것은 만날 수 없는 대상 인데도 불구하고 만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대상이지만 너희는 추악한 죄인이요, 망가진 존재이지만 '나는 반드시 너희를 만나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거죠.
구름을 통해서!
▲그런데 오늘 본문 35절에 그 표현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출40:35절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똑같은 얘기가 34절, 35절에 두 번 반복되는 난감한 본문입니다.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굉장히 가슴이 아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성막이기 때문에, 거룩한 장막이이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맞는데 그러나 회막이 무엇입니까? '회막'이란 만남의 장막이잖아요. *tent of meeting
그런데 어떻게 만남의 장소에서,
만날 수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그 만남의 장막에, 모세가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는 거죠. 구름(여호와의 영광)이 너무 강력(빽빽)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너무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찾아갔는데 부재중인 거에요. 전화를 해도 전화도 받지 않아요.
더 이상한 것은, 여기서 '회막' 이라는 단어의 '회'자가 모에드 라는 히브리어 입니다. '모에드'는, 그냥 우연히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포인먼트, 약속된 만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모에드'는 하나님이 백성들과 '1년에 7번은 이런 날짜에 만나자' 그래서 절기를 정하셨잖아요. '모에드'는 절기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하나님과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그분을 갑자기 만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죠.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가장 마음에 불편하고,
좀 화가 나는 그런 대사가 있습니다. 뭐냐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는 만나면 안 돼!' 라는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이것은 완전히 틀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대상인데도 만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시고
구름을 통하여서 그분의 임재를 가려주시면서 우리를 만나시고 어린 양의 피로 흘리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자기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절대로 우리와의 만남은 포기하지 않으세요.
▲자 그러면 '만남의 장막인데 만날 수 없는 분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정작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나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을 만나는 것은 죄인인 우리에게는 원래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어요.
하지만 이 어포인먼트를 우리가 잡은 게 아니잖아요. 이 약속은 하나님이 잡으신 것이잖아요.
이 장막은 하나님이 만들라고 하신 것이잖아요. 그러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자께서,
이 일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죄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지만 우리더러 가까이 다가와 나를 만나라고 하시기 때문에
회막을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이 회막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가운데'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세상을 왜 창조 하셨습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조하셨죠. 그런데 그 교제의 동산은 배신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에 하나님은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 천사들로 하나님은 그 교제의 동산을 폐쇄시켜 버리셨어요.
성경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보면 하나님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우리와 만나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한다'고 이야기 하시면서도 우리와 만남의 장소를 자꾸 폐쇄 하시는 거에요. 우리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 하게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밀당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하시고는 도리어 밀쳐 내시는 거예요. 밀쳐 내시고는 또 가까이 다가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올해 2019년 양재 수요저녁예배 때 신구약 성경통독을 쭈욱 했습니다. 성경을 다시 보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로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궁극적인 기쁨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하나님의 로망이 무엇이냐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줄곧 나오는 표현이 있어요.
모세오경, 역사서, 선지서, 4복음서, 서신서, 마지막 계시록까지 반복해서 나오는 성경의 표현이 있는데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죠.
'내가 너희 가운데 장막을 펼치고, 내가 너희와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제 하나님의 로망이에요.
하나님이 왜 6일간 창조의 수고를 하셨는가요? '7일째 안식일에 우리가 서로만 바라보고 서로만 기뻐하는 행복한 시간을 갖자!'
그 날을 위한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7년간의 수고와 노동을 '수 일처럼 여겼더라' 했는데 하나님의 심정이 야곱의 심정과 똑같은 것이죠.
▲생각해 보세요. 신혼 부부가 신혼집을 새로 장만했어요. 신혼집을 왜 장만하나요? 당연히 들어가서 같이 살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에 배우자 둘 중에 하나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야 우리는 데이트만 하자, 같이 사는 건 부담스럽다.' 만약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이 결혼이 유지가 될 수 있겠냐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머물리라' 여러분 이 표어로 40일 동안, 우리가 요즘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이거 보시면서 상당히 부담스러워 하셔야 돼요. 정말 전능자의 그늘에 잠깐 가서 쉬겠습니다..가 아니잖아요.
전능자의 그늘에 1년에 한 번 이벤트로 가겠습니다..가 아니잖아요. 그냥 계속 줄곧 거기에 오래도록 머물겠다는 거잖아요.
과연 우리는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요? 그렇게 할 마음이 있는가요?
주일에만 잠깐 그분의 집에 들렀다가 일주일 내내 집(임재)에 들어오지 않고 지내지 않습니까? 바쁠 때는 한 달씩 집에 들어오지 않기도 해요.
어떤 성도는, 아버지 집에,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자주 오기는 하는데 대화도 없고, 각방 쓰고, 심지어는 더 나아가서 집에 다른 이성을 데리고 들어오는 거예요. 상상 할 수 있는 일인가요?
분명히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의 그 임재 안에 머물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들락거리기는 하는데
그 임재로 충만한 삶이 아니라 세속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꿈 꾸셨던 신혼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은 에덴동산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출애굽기를 보면 고요한 광야로 인도하셔서 시내산 앞에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십계명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셨어요.
이 장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결혼식'이었습니다. 결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누추하고 종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그들을 온전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부로 삼으시겠다고 완전히 망가진 한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을 하나님의 신부로 삼아주신 예식을 치르신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결혼식을 치렀어요. (시내산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결혼식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결혼식 기간 중에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그것은 신혼 여행 기간에 부정행위를 한 셈입니다.
신혼 첫날밤 부정 행위를 한 그들을 향하여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와 이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고 거부하셨어요.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켰죠.
▲여러분 근데 또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셨어요.
백성들 입장에서, 이 땅에 살아 가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로망이 뭔가요? 집 사서, 자기 집 짓고 거기서 영구히 사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제는 새 집(가나안)에 들어가게 됐구나. 과수원과 내 경작지(분깃, 유산)를 얻어서 이제는 편히 살 수 있겠구나!'
근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그런 생각이 아니셨어요. '야 이제 우리도 이동식 집이 아니라, 영구주택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 이게 하나님의 로망이었어요.
하지만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땅을 얻자마자 마음이 변심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가나안 땅의 우상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성경을 볼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이 도와주셨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를 하지?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면 우리가 똑같아요. 신혼집에 들어가자마자, 남편이신 하나님을 몰아내고 다른 남자(각종 우상)들을 집에 불러들였어요. 하나님의 가슴이 얼마나 무너지고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나러 오라고 회막을 지어 놓으시고 모세조차 들어올 수 없게 만드셨는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거룩에 대한 헌신이 없이는 우리가 이 거룩한 만남에 대한 헌신이 없이는 이 만남은 온전히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 만남은 오래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세상 성공의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내 자녀의 성공과, 내 사업의 성공과, 내 인생의 이 땅에서의 형통함에 사용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그 잘못된 로망,
하나님의 꿈과는 전혀 다른 그 생각, 그것으로는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분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의 얄팍한 로망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세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신실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변함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한번 우리를 사랑하시면,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묵상 할 때마다 개인의 삶도 그렇고, 성경을 볼 때도 그렇고 '하나님은 온 우주의 최고의 로맨티스트 이시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아내와 결혼한 지 22년차 되어갑니다.
아내는 하나님이 제게 결혼하라고 보내주신 사람이에요. 10대 때부터 제 기도 제목이 '하나님, 그 한 사람을 알아보게 해 주십시오' 그게 제 기도 제목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데이트도 안 했어요. 연애도 안 했어요. 그리고 드디어 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제가 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침에 '오늘 프로포즈 해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날 프로포즈했어요. 믿거나 말거나!
제가 그 후에 곧 미국 유학을 가게 되어 있었어요. 두 달 후면 미국 유학을 떠나기로 했는데 자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 때가 1996년 이었는데, '우리는 (유학 다녀 와서) 1999년 봄에 결혼한다..' 그렇게 그 당시 여자친구에게 얘기했을 뿐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녔어요. 교제한지 한달만에!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깜짝 놀랐어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느냐?' 제가 말했죠.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제 핸드폰 뒷자리 4개가 9925 입니다. 99년 2월 5일, 그날 우리가 결혼했어요. 하하하!
▲하나님의 로망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시작된 그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곳은 천국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길고 고단한 인생 여정이 끝날 때 입주하는 실버타운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요? 여러분은 천국에 대한 기대감이 있으신가요?
그러나 결코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이 짧은 순간을 살면서 하나님께 사랑의 서약을 드리고 나면
'인생'이라는 이동식 간이 신혼집을 살다가 그 나라에 들어가는 날, 영원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신혼집에 들어가서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날 드레스를 입은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떨까요? 노쇠하고 병들고 지친 모습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천사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그런 존귀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결혼식을 치르게 되고 그 사랑의 노래를 영원토록 부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2절과 3절 말씀이 그것을 알려 주고 있는 곳이에요. 계21:2~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게 하나님의 로망입니다.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출40:35절의 말씀처럼 거룩한 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람이 감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죠.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조차도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어요. 그때 흠이 발견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곳.
영광으로 충만한 그분과 세속으로 충만한 우리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것이죠.
그러나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부도덕한 수가성 여인을 만나 주셨잖아요.
군대 귀신 들린, 그냥 귀신이 한 두 개 들린 것도 아니고 군대 귀신이 들린 광인을 만나주시고, 치료해 주셨어요.
그리고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를 만나주신 주님이십니다. 들로 산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다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초대해 주셨는데 우리를 '하객'으로 초대하신 게 아니라, '신부'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주인공으로 초대를 받은 것이죠. 자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근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어요. 오늘 말씀 가운데 끊임없이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 '영광' 이라는 단어는 '카보드'인데, 무겁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영광이 무거운가요?
모든 존재는 나름의 무게를 갖고 있죠.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어린아이 하나가 풍선을 들고 뛰어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분위기가 가벼워지고 밝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임재하시거나 국가원수가 여기에 갑자기 나타난다거나 그러면
장내가 무거워지는 거죠. 진중해 지는 거죠.
각 존재는 존재의 무게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존재가 여기에 임하실 때 그 분이 갖고 계시는 그 분 만에 영광의 빛이 드러나는데 바로 그것이 그분의 존재의 무게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 해야 되는가요? 토미 테니가 쓴 <다윗의 장막>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문, visitation 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거주, habitation 을 원하신다'
잠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영속적으로 거주하며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 여기 임하여 주십시오. 우리 예배 가운데 오십시오. 제가 기도할 때 임재하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초대는 잘 합니다.
근데 그 분의 영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리를, 내가 준비하고 있냐고요?
그분의 영광의 임재를 감당할만한 나의 깨어진 영혼, 진실한 영혼을 내어드리는가요? 나의 갈급한 심정을 그분 앞에 내어 드리는가요?
만약 그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임하면
내가 초토화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청년 사울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분의 무거운 임재를 초대하기 위해서 청년 사울처럼 눈이 멀게 될지라도 (다메섹에서) 제사장 사가랴처럼 말문이 막히게 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