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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냐 사62:11~63:6 <이사야서> 설교모음 출처
사63:1절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는 유명한 질문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 후손들의 나라이고, 보스라는 에돔의 수도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는 친척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스라엘의 원수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에돔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원수를 예표하는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1절 말씀에서는 '에돔의 수도 보스라에서 오는 분이 홍의(紅衣)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2절은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가 생산되면 큰 틀에 포도를 집어넣고 맨발로 밟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지는 포도즙을 가죽부대에 넣고 발효시켜 포도주를 만듭니다.
그런데 포도를 밟는 사람은 아무리 조심해도 포도가 튀겨서
옷이 붉은 색으로 물들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돔에서 나오는 이 분은 영적인 원수인 에돔의 보스라를 포도 밟듯이
밟아 그들의 선혈이 옷에 튀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에돔을 포도 밟듯이 싹 밟아 심판하여 옷에 피를 묻히고
승리하여 돌아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계시록 14:장과 19:장에서
재림주와 심판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계19 :13~14절에는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세마포를 입고, 예수님은 피 뿌린 옷을 입고 앞장서서 가시는 모습입니다.
계19:장 15~16절에는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원수들을 포도주 틀을 밟듯이 밟아 선혈을 튀겨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3:장 1~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최후의 심판 때에
완전히 실현되는 심판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구원의 때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기회도 안 주시고 심판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본문 62:장 11~12절에는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이 말씀은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다가오고 있는 구원을 자기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보라”고 하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시냐?”
“이 놀라운 심판을 행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시냐?”고 질문합니다.
◑1. 구원의 선포
본문 62장 11절로 12절 말씀을 통해 구원에 관한 5가지 분명한 명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 중반에는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수양을 많이 해도 결코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수양을 많이 하나 안하나,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부에는 구원받을 능력도, 공로도, 이유도 없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전혀 무력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의 제1명제는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of human being)’입니다.
즉,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타락한 인간내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외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둘째, 구원은 ‘한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 후반에는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네 구원(your salvation)'은 추상 명사 같은데,
이것이 곧바로 의인화되어 인칭대명사 ‘그(He)’라고 칭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사람을 통하여 온다고 하는 명제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지옥, 멸망, 저주, 마귀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거나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행함
또는 어떤 물건, 돈, 인간의 노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계신 '한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분을 가리켜 ‘네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눅2 :28~32절에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경건한 한 유대인인 시므온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 시므온에게
“너는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가 아기 예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눅2:28~32
여기서 말하는 주의 구원이 바로 한 사람, 아기 예수 즉,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외부의 한 사람으로부터 오며 성경은 구원을 주시는 그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명백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셋째, 구원은 ‘거룩함’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는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함은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도덕적으로 착하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구별되었다,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구별해서 분리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holiness)은 구별됨(separation)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에 갈 죄인들과 구별된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죄를 짓긴 지어도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존재로부터
우리를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별된 존재,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나서 점차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구원은 성화라고 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성화는 구원의 핵심이요
성화가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야고보서에서도 참된 구원은 반드시 성화라고 하는
급진적인 변화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넷째, 구원은 ‘구속(Redemption)’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중반에는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구원’ 과 ‘구속’은 비슷한 말입니다.
구원을 하되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속전, 즉 값을 치르고 구원한다고 해서
구원의 구(救)자와 속전의 속(贖)자를 한 글자씩 따서 구속(救贖)이라고 말합니다.
노예를 노예시장에서 구원하고 해방시키려면 반드시 속전, 즉 값을 치러야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반드시 죄 값을 치르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에게서 태어났고 인간이 되어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죄 값을 치르셨으므로
우리가 지옥과 영원형벌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빚쟁이가 남의 빚을 갚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이 남의 죄 값을 갚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 맹자는 모두 훌륭한 인간이지만
남의 죄 값을 갚아 줄 존재는 못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우리나 다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값 즉, 속전을 치루고 갚을 수 있는 자격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다섯째, 구원은 ‘안전하고(safe) 영원하며(eternal) 완전(perfect)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Once saved always saved)'입니다.
본문 12절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찾은바 된 자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거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으신 것입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0~11
길 잃은 양이 목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길 잃은 양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날 찾으셨다는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먼저 우리를 찾아 놓으시고
나중에 우리가 죄를 짓고 잘못한 게 있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는 ‘버리지 아니한 성읍(city of not forsaken)이라 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우리를 영원토록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안전하고 영원하며 완전한 것입니다.
◑2. 선지자의 질문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놀라운 구원이 외부에 있는 한 인간,
구속하는 한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고
"이 분이 누구시냐(Who is this)?"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여부에 따라서 사람은 구원받을 수도 있고
심판받는 존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분이 누구시냐?”고 물은 분위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무지에서 나오는(out of ignorance) 질문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사야 선지자가 이 분이 누구신지 정말 몰라서 한 질문일 수 있어요.
둘째, 놀람에서 나오는(out of wonder) 질문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사야 선지자가 이처럼 위대한 구원을 주시고
또한 심판을 하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신지 깜짝 놀랄 정도로 놀라워하며 한 질문일 수 있죠.
셋째, 근심에서 나오는(out of anxiety) 질문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사도바울처럼 의롭게 살기를 원하나
의롭게 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낼 그 분이 누구실까?”하고 근심해서 한 질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질문에 대한 대답
본문 63:장 1절에서 그분이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그런데 '그는 내니(It is I)'라는 대답은, 사40:장 이후에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41:장 4절에는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기록되었고,
이사야 43:장 10절에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그니라” 즉, “나니라”고 대답하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다.
피조물은 누가 “당신은 누구시냐?”고 물어볼 때
서로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나니라”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대표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위이면서도 한 분 이십니다(Three Persons One Substance).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내니라’고 할 때 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어느 분이시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약성경이 주고 있습니다.
요13:장 19절에는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내가 그인줄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8:24절에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는 내니라’고 한 이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I am)’가
중요한 신학적 주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론은 요한복음의 ‘에고 에이미’는 이사야서가 말하는
‘그는 내니라’고 한 ‘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주시는 한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요 원수를 심판하여 포도 밟듯이
밟아 버리시는 분도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명백한 것입니다.
본문 63:장 1절 후반에는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It is I, speaking in righteousness, mighty to save)’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의(義)’입니다.
우리 신앙의 제1 원리는 예수님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예수님 생각이 다를때 예수님 생각을 따라야 됩니다.
반면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와 같은 사람의 말은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구원에 관한 그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의를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구원하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마치는 말
예수님은 의를 말씀하시는 분(speaker)이시고 구원하기에 능하신 구주(Savior)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포도 밟듯이 진노하여
밟아버리시는 심판주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을 심판주로 만나 포도 밟히듯이 밟혀 선혈을 튀기는 존재가 되지 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을 심판주로 만나지 마시고 구원주로 만나십시오.
구원은 어떤 사상을 받아드리거나 어떤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위해 속전을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구주로 모시고
인격적인 관계(relationship)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하기에 능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일을 미루지 마시고 지금 결단하시여
예수님을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내 능력, 인격, 사상, 도덕, 의를 보면 참으로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자기를 보지 마시고 예수님을 보십시오. 세마포 옷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피 뿌린 옷을 입고 앞장서서 가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라가는 삶을 사십시오.
그래서 지옥, 죄, 원수, 마귀, 영원한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받고
나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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