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물건을 주고 받고 하죠. 또 빼앗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고 돌려주기도 하고, 돌려 받기도 하지요. 근데 돌려 줄 때도 이유가 있고, 돌려 받는 데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 언약궤, 법궤'는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 상징물인데, 본문은, 홉니와 비느하스 때 빼앗겼던 이 법궤가
어떻게 해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는지에 관한 내용이죠.
◑1. 블레셋 사람이 법궤를 대하는 태도
먼저 삼상6:1~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블레셋에 빼앗긴지 7달 동안은, 여호와의 궤(하나님의 임재)가 과연 어떤 것인지 블레셋 사람들에게 드러난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한 숫자 예요. 7달 동안 하나님은 블레셋을 온전히 심판하셨다는 뜻이에요.
처음에 그들 블레셋 인들은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법궤를 빼앗았을 때 블레셋 온 백성들이 흥분했겠죠.
그러나 흥분도 잠시고, 그 다음 날부터 더 큰 뉴스가 터지는 거죠. 다곤 신전의 신상이 앞으로 엎드러지질 않나, 또 세워 놨더니 신상의 목과 손이 부러졌습니다.
이어서 사람들에게 종기 (tumor, 악성 종양) 가 나는 재앙이 덮치더니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겨도, 옮겨 가는 곳마다 더 큰 재앙이 일어남으로써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흉흉해진 거죠.
그래서 이제 블레셋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더 이상 이 법궤를 이 땅에 둘 수는 없다. 어떻게 이 법궤를 돌려보낼 것인가?' 그것을 묻기 위해서 이제 자기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소집한 거죠.
지금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데는 다 의견이 일치가 된 거예요. 아니 법궤가 얼마나 큰 전리품 인데... 그 당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해서 이토록 큰 전리품을 얻은 적이 과거에 없었는데...
그 전리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데 그걸 자발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까닭이 뭘까요?
불과 7 달 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위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드러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블레셋 땅에서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내신 것이죠.
하나님의 임재를 블레셋 땅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블레셋 인들이 그 7달 동안 깨달은 게 뭘까요?
사실 둘 다 오해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법궤를 오해했고 (법궤만 메고 나가면 이긴다) -또 블레셋 사람들도 이 법궤를 오해했어요. (전리품으로 가져와도 문제 없다)
블레셋은 법궤를 전리품 쯤으로 여기고 빼앗고 보니까 본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존재)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성도, 교회에
불신자들이 함부로 난입하거나 속박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불신자들 가운데 나타나면.. 큰 재앙이 닥치게 되는 것입니다.
법궤(여호와)는, 자기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신도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자기들이 달랠 수 있는 신도 아닌 것 같고..
'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감당키 어려운 분이다. 따라서 우리가 법궤와 함께 지낼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자신해서 법궤를 이스라엘에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론낸 것입니다.
▲사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법궤에 비유 이렇게 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대로 오해하고, *당시 법궤를 전쟁터에 메고 나갔던 사람들에 비유 -어쩌면 불신자들은 불신자들 대로, 성경을 오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1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자신만을 위한 말씀으로 자꾸 받아들이고자 하고 (법궤를 자기 사익을 좇는데 사용했던 이스라엘에 비유)
-그들은 오늘날, 이 성경을 어쩌면 우리에게 되돌려 주고자 하는지도 몰라요.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이 성경을 (블레셋에 빼앗기듯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 불신자들이 자진해서 나서는 것입니다. (법궤를 돌여준 사건에 비유)
'정말 너희들이 성경을 가지고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않겠니?' '너희들이 이 성경을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이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지 않겠니?' 이렇게 불신자들이, 성경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일도 간혹 생기고 있습니다.
일례로,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교회되라'는 구호나 뉴스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날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오히려 더 성경적인 비판을 해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들이 그렇게 정말 돌이키지 않는다면 내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더니
-오늘날 어쩌면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본질을 오해하거나 떠나버렸고 -비기독교인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질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길로 올바로 돌이키라고 권고하는 것을 보는 것이죠.
본 회퍼의 말씀대로 어쩌면 우리는 '타자를 위한 존재여야 할 교회가 그들 자신만을 위한 교회처럼 비쳐졌기 때문에' 특별히 이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교회라는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타자를 위한 존재로 존립해야 마땅한데, 어떻게 자기들만의 교회가 되고 말았느냐는 것이죠.
따라서 여전히 이 세상은 '교회야말로 어쩌면 하나님의 무덤이 된 게 아닌가?'
예수님의 표현대로 '회칠한 무덤으로 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되는 상황이라는 말이죠.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우리는 자꾸 성경을 재단하고, 내가 자꾸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성경을 적용하려다가 결국은 멀리 다른 길로 접어드는 것 아니겠어요?
히브리서 기자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히4:12 우리는 이런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나요?
그들에게는 법궤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온전히 그 가치대로 경험되지 않으면
어쩌면 말씀을 그저 자신의 유익을 얻는 도구 쯤으로 대하고 그러면서 어느 날 그 말씀이, 마치 길거리에 버려진 듯, 잃어버린 듯 그렇게 취급받게 마련입니다. 법궤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죠.
-오히려 우리는 그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지만 -흘려 들었던 사람들이, 그 말씀에 오히려 감동하는 일도 생기는 그런 세상이 되고마는 것이죠.
▲오늘 이 법궤를 돌려주겠다고 하는 블레셋 방백들의 이 결정, 물론 자기들은 기대했던 유익이 하나도 없었죠. 재앙만 닥치는 이것(법궤)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그러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건 사실이죠. 다곤 신상에 목이 떨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그들 자신의 간이 떨어지듯, 그렇게 혼비백산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계속된 재앙을 통해서 분명 어떤 메시지를 그들은 계속해서 받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왜 우리에게 이런 재앙을 계속해서 보내고 계신가? 왜 법궤가 옮겨가는 도시마다 이런 재앙이 반복되는가?' 그게 기적이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내신 메시지였습니다.
법궤로 인해서 그들은 기적을 계속해서 본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걸 (귀찮으니) 보내 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란 그런 정도의.. 그런 가치의 존재였다는 얘기죠.
성가시고, 귀찮고, 재앙을 가져다 주고, 오히려 힘들게 하는.. 이런 신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냐? 그런 얘기였죠.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지만, 기적의 의미를 전혀 모른 채 그들은 드디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을 했어요.
▲:3~4절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 guilt offering 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Five gold tumors and five gold rats
여기 보니까 금독종, 금쥐를 만듦으로서 독종의 재앙, 종기의 재앙은 쥐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됩니다. 흑사병과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지금 그걸 막으려면 속건제guilt offering 를 드려야한다..
속건제는 이스라엘 제사법이에요. 죄를 속함 받기 위해 제물을 드리는 제사인데 그걸 드려야 되는 것은 알았어요.
이스라엘 신을 이스라엘 방식대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제사법은 정확히 모르죠.
그래서 그들은 금쥐, 금독종 으로 속건제 제물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효험이 있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지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규정한 대로 율례와 규례대로 하나님을 대접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그냥 관과하지 않으시지만 (그래서 삼상 6:19에 벧세메스 사람 70명이 죽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상하게 대하는 그건 훨씬 관용적 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독종, 금쥐 이런 걸 지금 만들어서 이제 속건제로 이스라엘 신을 달래야 된다는 것이죠.
▲:5~6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블레셋의 제사장과 점쟁이들이 깜짝 놀랄 얘기를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백성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왕 바로에 맞서서, 바로가 그들을 애굽에서 내보낸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가 그들을 내 보낸 것처럼 그렇게 내보내려고 하느냐? 그렇게 하지 말고, 그 제사를 드려서 그 신을 달래서 내 보내라!' 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5~6
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백성이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을 잊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블레셋 사람들이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요, 출애굽한 백성이요, 홍해를 건넌 백성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백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얼마나 정확한 지적입니까! 그러니 '블레셋이 애굽처럼 (이 법궤를) 내보내서는 안 된다.' 이게 지금 블레셋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참 재밌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말하는 것 가운데서 '속건제를 드림으로써 이스라엘 신에게 영광을 돌리라' :4~5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하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려라'라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블레셋에 오셔서, 체면을 구기신 겁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이 이방 땅에 와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역 신이 아니시다. 이스라엘의 민족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백성의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 땅의 온 백성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알건/ 모르건 수용하든/ 거부하든 그분은 온 열방 가운데서 예배를 받으셔야 할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신에게 왜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이가봇, 영광이 떠났다'고 탄식하고 있는데
이방 민족들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제사해야 한다고 말하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곳에서 저곳에서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나, 저 민족에게나 하나님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불교도나 이슬람교도나 그들에게도 하나님되심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 가운데서 선교사가 단 한 사람을 전도하지 못해도 그 땅에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걸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고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이시고 온 백성, 온 민족, 온 국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까닭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택하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인식했다고 해서, 그렇다고 믿음이 생긴 건 아니에요. 여러분, 믿음은 인식(깨닫는다고)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기적을 본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적이 지금 블레셋에서 7달 동안 계속 되었습니까.
그러나 이들이, '이 신은 우리 신과 다르다.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라고 말했다고 해서, 이 법궤를 돌려보내야 되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이 생긴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 계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못 믿겠다.. 하나님은 필요 없다.. 라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돌려보내야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이죠.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사람들이 '아 이분이 우리 신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참 신이구나!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거구나!' 라고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진정한 회심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현상적인 기적만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 무슨 기적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가 응답되면.. 내 믿음이 좋아질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걸, 못을 빼고 거기서 내려 오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복음이 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가시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말씀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음으로써, 생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기적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인식을 가져다 줄 뿐이죠. 진정한 참 믿음은, 인식의 차원에서 자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깝게도 우리는 계속해서 증거를 요구하고 그 증거를 통해서 믿음을 갖고자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이상 성경 말씀을 들어라는 거예요. 주1)
▲7~9절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블레셋인들이 머리가 좋아요. 법궤를 순순히 보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게 '하나님께서 정말 재앙을 일으킨 것이냐,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거냐? 마지막으로 한번 시험해 보자'
그래서 젖 나는 (갓 출산한) 암소 두 마리를 수레에 메어 보내자는 거예요. 젖 나는 소란, 갓 새끼 송아지를 출산한 소입니다. 그러니까 어미 소는 송아지를 절대 안 떨어집니다.
그리고 젖 나는 소는, 한 번도 새 수레를 매어 본 적이 없어요. 7절에 '새 수레'라고 했어요. 수레를 처음 메는 소는, 수레를 제대로 끌지 못 해요. 또한 벳세메스가 어딘지, 소가 어떻게 알아서 찾아가겠습니까?
소는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습성이 있지요.
그래서 이런 어려운 조건들을 만들어 놓고 '한번 보자, 어찌 되나 보자'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가/ 아닌가 한번 보자' 그런 실험을 한 거죠.
그래서 10~12절에 테스트를 해요.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삼상6:10~12
(에글론에서) 벳세메스까지 약 14킬로 되는 길인데, 블레셋 방백들이 따라간 것입니다. 지금 송아지는 집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미 소가 울면서도, 뒤돌아서거나 안 가겠다고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벳세메스로 향해서 곧장 나아가는 거예요.
법궤와 속건제 제물들을 실은 수레를 그냥 묵묵히 끌로 간 것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마지막까지 놀란 거죠. 있을수 없는 일이거든요.
우리는 이 상황을 좀 잘 모르니까 그냥 무심하게 읽고 있지만 어미 소의 습성을 좀 아는 사람이거나, 소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수레를 만들어서, 이렇게 법궤를 옮겨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법궤를 들여다 본 연고로, 벳세메스 인들이 70명 죽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19
법궤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고,
수레에 싣고 옮기는 것도 안 되지만 이건 레위인이 어깨로 매고 옮겨야 되지만 그런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봐주신다는 거죠.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여러 가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일곱 달 동안 법궤로 인해서 다곤 신상의 참화, 사람들에게 독종이 생기는 기적
-암소가 벳세메스를 향하여 곧장 나아가는 기적 등을 보면서도
그들은 신기하게만 여겼지, 참 하나님께 회심하거나 믿음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은
'내가 하나님의 역사를 반드시 내 눈으로 봐야 믿겠다'가 아니라 '말씀을 들어서' 잘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평소에 말씀을 많이 듣고 있으면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도 알게 되거니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쉽게 식별되는 것이죠.
마치 우리가 무슨 교신 할 때, 무슨 난수표, 암호 이런 것들에 대한 사진 지식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 듣지만, 그 암호를 이미 암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시그널이 오더라도 해석이 되어서, 그 메시지가 전달 되듯이
우리도 이 성경을 계속해서 읽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가 점점 더 뚜렷하고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보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말씀을 소리내서 읽으십시오. 성경 말씀을 더 소리 내서 읽고, 사복음서를 더 소리 내서 읽으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들의 질문과 기도에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셨죠. 렘33:3
그러나 그때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말씀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이루리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죠?
신약에는 말씀을 통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요15:7
◑법궤를 대하는 이스라엘의 태도
삼상6:13~15절을 읽겠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삼상6:13~15
그런데 이스라엘도, 실망스럽게
법궤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블레셋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경외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문제는 뭡니까? '벧세메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이에요. *'태양의 집'이란 뜻
여기는 원래 레위인들이 할당받은 성읍입니다.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성읍입니다. :15
레위인들은 누구보다도 법궤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고 법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근데 그들이 지금 법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지금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들은 우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드립니다. 암소는 번제물의 자격이 안 돼요.
레1:3절에 보면, 번제물은 소의 수컷으로 드려야 돼요.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송아지와 어미를 떼어놓기 위해서 일부러 젖 나는 소를 수레에 메게 했는데,
벳세메스 사람들은, 그 수레와 암소 둘을 접수 받아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제물로 드려서는 안 되는 암소를, 번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벳세메스의 레위인들은 어쨌든 알아야죠. 레위인 이니까요. :15 하나님을 모르는 블레셋인들은 몰라서 임의로 행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레위인들은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고 어떤 것이 제물이 되고, 제물이 되지 않는지는..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냥 임의로 암소로 번제를 드려 버립니다. 그리고 또 법궤 속에 뭐가 들었냐 궁금해서
들여다 보고 말았습니다.
좌우지간 나중에 이 일 때문에 벳세메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나요?
70명입니다. :19
그래서 참 안타깝게도 제사의식을 다 잃어버린 거예요. 레위인들이. 사시시대를 지나면서, 사무엘이 곧 등장하겠지만
지난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레위인들이 제사법이라든지, 하나님의 규례라든지 법궤를 어떻게 다루는 거라든지.. 이런 걸 다 잃어버린 것이죠.
법궤는 가려서 옮겼어요. 민4:5~6절에 법궤를 어떻게 옮기는지 나와 있습니다. 주2)
거기 보면, 법궤를 옮길 때는, 세 겹으로 장막이나 천으로 덮어서 옮겼어요. 그리고 고핫 자손만 법궤를 메게 되어 있어요. 근데 이런 규례들도 다 없어진 거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구약시대 때 이런 게 뭐가 중요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거나 또 갈등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이런 쓸모없는 것들을 이렇게 많이 기록해 놨냐?' 이런 거는 구약 시대 때, 구약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입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이 정하신 훈련방식 입니다.
여러분들이 입대하면 내가 훈련 받고 싶은 방식대로 훈련 받지 않습니다. 군대가 정한 방식대로 훈련을 받게 됩니다. 왜냐면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이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시는 겁니다.
'왜 이렇게 훈련을 시킵니까?' 라고 물을 자격이 우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훈련 시키기로 결정하셨어요.
어떻게 법궤를 옮기는지 규정 하시고 규정대로 옮기도록 하시면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하나에서 열까지 일일이 자세하게 지시하고 명령하신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따라야죠.
그 규례대로 행해야죠.
그러나 벳세메스의 레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법궤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블레셋 인들과 별반 다른 게 없었던 거죠.
이 법궤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얼마나 죽었습니까? 삼상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5만7십명이 죽은 것은 오기라고 봅니다. 그냥 70명이 죽은 걸로 하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죽은 거죠.
근데 법궤 안에 뭐가 들었어요? 주3)
▲그리고 법궤는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집니다.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원래 법궤는 블레셋에 가기 전에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실로로 도로 돌려보내지 않고, 기럇여아림으로 보냈을까요?
기럇여아림은 예루살렘에서 약 22Km 떨어진 곳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곳이죠.
그 이유는, 신학자들 주장에 의하면, 1)실로는 예루살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방어에 취약했고, 당시에 또한 실로가 블레셋과 전쟁으로 훼손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2) 기럇여아림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혹시 블레셋 같은 적군이 침입하면, 예루살렘에서 속히 군대를 보내서 법궤를 방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정합니다.
▲이 얘기를 정리하면서 우리가 살펴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법궤를 오해한 나머지 빼앗겼고
-뺏어 온 블레셋 사람들은 이 법궤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이 바뀐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가 누군가는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자기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법궤가 되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궤를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벳세메스 사람들이 70명 죽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만 두려워하고, 사람이 죽은 것을 슬퍼 했을 뿐 그 법궤를 제대로 모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럇여아림으로 보내 버렸고, 정성으로 관리하지 않습니다.
법궤는 거기서 거의 20년간 방치해 두는 수준으로 보관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법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게 되죠. 그 와중에 오벧에돔의 집에 또 석달을 머무르죠.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대로 법궤가 애물단지가 된 것입니다. 그냥 두렵기만 하고, 성가시기만 한 거예요.
그래서 이걸 가치 있게 모시겠다는 생각도 갖지 않고 그냥 숲이 우거지고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높은 산속 기럇여아림에 방치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법궤가 말씀의 상징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성경(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법궤에 대비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나 말씀을 무겁게 대하겠습니까? 아니요.
지금 그들은 오늘날 교회가 자기 집 곁에 있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들이에요.
어쩌면 그들은 블레셋이나 이스라엘이 치워버리고 싶은 법궤처럼 교회나 성경책(말씀)을 어디 멀리 보내고 싶은 그런 마음들일 거예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우리들 자체마저도 교회나 성경을 이렇게 점점 내게서 멀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말씀이 부담스럽다. 성경 말씀을 가까이 대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멀리 눈에 안 띄는 곳으로 보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 신자가운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이렇게 블레셋, 유다 어느 쪽으로도 주목받지 못하는 법궤 신세처럼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또한 성경책(말씀)이 그렇게 천대받는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나 성경(말씀)을 그렇게 천대하고 무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나 신자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를, 성경(말씀)을 기럇여아림 같은 저 외단 숲속에 갖다 놓고, 관심을 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법궤를 귀히 여기고 가까이 했듯이 늘 말씀과 교회를 무겁게 여기고, 말씀과 교회를 귀하게 여기고,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성경(말씀)을 구겨서 어디 먼 곳에 치워 버리고 살아가는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려면,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가까이 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주님께서 그 말씀이 기억나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 주신 까닭에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면 말씀으로 장막을 피신 예수님과 함께 내가 동행할 것이고,
그 때 우리는 다시 신앙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고 날마다 그 신앙안에서 하나님과 임재를 경험할 것이고
적어도 우리가 기럇여아림 같은 곳에 말씀을 쳐박아 던져두고 날마다 살아가는 그런 위선적인 신앙인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이 기럇여아림 같은 곳에 법궤를 던져 둔 분이 있다면 그 법궤를 다시 우리의 중심 가운데로 모셔와서 날마다 그 말씀을 기준으로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나는 말씀의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증거를 구하거나 기적을 구하기 앞서서 말씀을 구하는 사람, 말씀에 붙들린 사람,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가는..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같이 기도하십시다. 이 교회가 이 시대에 불신자들로부터 버림받고 신자들로부터도 외면 받는 교회가 아니라 늘 주님과 함께하는 담대한 믿음의 교회가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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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사기 때, 기드온에게는 안 그러시더니.. 그렇죠. 하나님은 아직도 수준에 맞게 응답하십니다.
사사기에 보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기드온이 양털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습니까?
삿6:37~40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부어 주시고자 할 때 믿음의 길로 부른 사람에게는 이런 증거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새신자를 우대하시는 거 아십니까? 하나님은 새신자의 기도를 즉각 들어주십니다. 초신자의 질문에 잘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적어도 신앙생활을 몇 년 오랫동안 해오셨으면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주님을 대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체질에 맞게 응답하십니다. 우리 수준에 맞게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수준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우리 수준에 맞게 이렇게 성장시켜 나가기위해서 그렇게 응답해 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내 경험, 내 기도응답방식이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 한 때의 경험이요. 사람이 그때그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한 가지 방법이지만 보편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기준은, 늘 말씀, 성경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더 큰 기적을 구하려 하지 마시고 더 많이 복음을 읽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기울여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면, 거기서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으십시오.
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기리라고 기대하지 말고 기도가 응답 되면 내 믿음이 더 커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시고 저와 여러분들은 말씀 가운데서 주의 뜻을 분별함으로 믿음이 더 자라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탈북자들이 정말 기막힌 간증들을 듣습니다. 무슬림 권의 기막힌 간증들을 듣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기적들의 간증을 듣습니다.
왜 그 땅에서는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는데 왜 여기서는 안 일어나는 것일까요? (말씀을 믿는 성숙한 신앙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주2) 민4:5~6, 법궤를 옮길 때 덮는 3가지 물건 '진영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칸 막는 휘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주3)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 금송아지 만들어서 우상숭배 하다가, 첫번째 돌판으로 그걸 깨뜨렸죠. 그래서 '돌판'은 넣어 보관한 것은,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것은 고라자손들이 반역을 일으켰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그 지팡이는 '반역의 증거물' 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기억하라고 법궤 속에 지팡이를 보관한 것이죠.
-그리고 만나를 넣은 항아리, 만나는 먹고 불평했던 음식이에요. 그걸 기억하라고 법궤 속에 만나를 보관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