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교회 오전 예배 - 개혁하는 교회 - 이기남 목사 ( 2021.10.31 )
◈개혁하는 교회 막7:11,겔22:26, 신30:11~14
※내용이 이론적, 변증적이나 이런 내용도 필요하기에 녹취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개혁교회는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개혁한다' 라는 말을
지금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해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
그것은 재앙을 받을 일입니다.
계시록 22:18~19절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개혁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가르침 이외에, 새로운 가르침을 말한다면
그것은 헤테르독시, 이설異說이요, 이단입니다. 재앙 받을 일입니다.
모든 진리는,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것으로 여겨지죠.
그러나 그 진리는 이미 과거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은, 과거로 돌아감으로서의 새로움 입니다.
개혁은, 알려진 과거의 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명백하게 알려진 그 진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곧 옛 길입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 렘6:16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것을 들고 나와서 종교개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알려진 진리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칼빈이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가장 참된 교회!
그러나 지금은 파괴된 교회를
그 오래된 참된 교회로 되돌리려고 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진리는 이미 명백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신명기 30:11~14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다 알려진 말씀이고, 쉬운 말씀이고,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진리는 이미 과거부터 알려져서 우리의 입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에 명백히 알려진 그 진리를 지키지 않습니다.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
진리에 보태서 새로운 해석이나 가르침을 만들어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그들의 욕구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고르반' 이라는 새로운 교훈을 만들었습니다.
부모님을 섬겨야 되는데, 부모님을 섬기면 물질적 손해를 보니까
'이거 하나님 앞에 드린 거다' 하면서, 부모님을 섬기지 않았어요.
이렇게 자기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것을 다시 만들어내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원래 진리에서 더덕더덕 붙은 것들을
뜯어내는 것이 개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새로운 '고르반'이라는 새로운 교훈을 만들어내어
진리를 새로운 다른 것으로 바꿨습니다.
사람의 편리함과 쾌락을 채워주는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었습니다.
개혁이란, 인간의 즐거움과 편리를 위해서 고안된 이 새로운 교훈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르반'이라는, 그 왜곡된 진리를 지적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것을 버리고, 과거에 명백하게 알려진 진리,
그 진리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개혁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과거부터 명백하게 알려진 진리,
이미 우리가 입으로 말하고 있는 그 진리 가운데서
가장 명백한 진리가 뭡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다'
우리 기독교가, 우리 교회가 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다'
하는 진리로만 다시 돌아온다면
현재의 쓸데없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그런 모습들이
안 드러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이십니다' 이 말은 *신본주의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본주의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 1장부터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대로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온 세계가 결속해서 이 명백한 진리,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이 명백한 진리를 부정해 왔음을
교회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고, 자연도 하나님이고,
과학도 하나님 이라는 것들을 만들어내면서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새로운 가르침(인본주의)을 만들고 전파하는데에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진리는
우리 인간을 불편하게 합니다.
지금 현대 사회는
점점 우리 인간의 즐거움과 편리가.. 진리의 기준이 되고
우리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이
'선'이며 '진리'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기준, 표준으로서의
하나님과 성경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거나 아예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편리와 즐거움은
선과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진리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엄격히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우리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통제되어야 합니다. 억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세상 모든 것이
결국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개혁이란, 이런 거대한 인본주의적 흐름을
신본주의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자 그 중에 대표적 하나가 이런 겁니다.
우리는 예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설교 하나만 보더라도
그 주제와 중심과 초점이
사람, 곧 듣는 청중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편리와 기쁨을 위한, 설교요, 예배인 듯 합니다.
그래서 한참 유행했던 것이 열린예배, 열린교회,
물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어떤 접근하는 방식으로
그런 방법들을 동원했겠지만
그게 심해지면, 진리와 거꾸로 가서,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없어지고
우리 인간의 편리를 위해 진리가 바꿔졌다면.. 우리는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제가 한 때 수련회나 부흥회를 강사로 많이 인도했지 않았습니까.
저를 초청하는 쪽에서 부탁하는 거 딱 하나 있어요.
강사님이 재밌게 해 달라는 겁니다.
지금 엄격한 진리를 말해서, 인간들이 바꿔져야 되고
깨져야 되고, 무너져야 되고,
회개해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를 바꿔야 되는
그런 메세지를 전해야 되는데
설교 재밌게 해야 된다니...
이 둘을 조합하면
그런 진리의 말씀을, 재밌게 전해 달라는 것이죠...
그래서 진리를 재밌게 전하는 사람이
좋은 인기 강사가 되는 거죠... (약간 씁쓸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예배 받는 자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개혁이란, 뭘 새롭게 하는 게 아니라, 원래의 있던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열심히, 그리고 은밀하게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새로운 교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고,
우리 인간의 즐거움과 편리가 진리의 기준이 되는 것이죠. *오늘날의 실존주의 사조
우리의 감동과 재미를 주는 것이.. 진리가 됩니다. 선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것, 신본주의 같은 것,
즉 우리가 그것에 힘들게 맞추어야 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이고, 억압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쉽고 재미있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를 어렵게 하고, 우리 자신을 억제하고 만드는 것은
그게 성경이든, 하나님이든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이 이념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맞춰 줘야 됩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 이니깐요.
그래서 죄를 지어도 이건 죄가 아니에요.
무슨 장애지요. 뭐 이런 식이에요.
우리가 자신을 억제해서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것(하나님)에 맞추어야 할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은,
우리가 피조물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에게
뱀이 '네가 하나님이 될 거다' 그랬을 때
그게 얼마나 달콤한 제안입니까?
여태까지는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 하나님에게 맞춰야 되었는데
'네가 하나님이니까 이제 네 맘대로 하고
다른 게 네게 맞춰 줘야 돼!' 라고 하는 이런 제안!
얼마나 매력적이었겠나요?
▲우리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가르침이 *인본주의, 실존주의, 현세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우리에게 가장 편안하고, 가장 감미로운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준다면
그것보다 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 시대가 점점 악해진다는 것은
악이 점점 더 험악해진다, 험악한 겉모습을 갖는다.. 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악이 더 영악해지고, 영리해 질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악은, 우리를 더욱 만족시켜주는 겉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자기를 가장하고
어둠의 일꾼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그 일이
점점 우리를 매혹하는 겉모습을 가져서
우리가 거부 하기 힘들 정도의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악은, 우리더러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라고 하는
아주 굉장히 교묘한 그런 방법들로
우리에게 접근해 온다는 것이죠.
일례로, 저는 목회자 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님들을 섬겨야 되지 않습니까.
근데 '성도를 섬긴다' 라는 것이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에 올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정 '인간을 섬긴다' 라는 것은
인간을 인간의 자리에 올바로 머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너는 인간이고, 너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고
너는 너의 자리에 있어야 돼!' 라고 계속 알려 주는 것이
인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을, 예배 받는 자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존재 이유 입니다.
이런 면에서 목회자인 저도
이 부분에 있어서 개혁해야 될 부분이 있으면, 개혁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계속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데
'아 잘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해 준다면, 저는 개혁되어야 됩니다.
물론 가급적 예쁘게 지적해 주고,
'예쁘게' 바꿔 줄 수 있게 해야죠. *부드럽게
'예쁘게' 라는 말을 제가 할 수 없이 넣는 겁니다.
거칠게 얘기하면 옆의 교회로 가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의 자리에 머물도록
인간을 섬겨야 되는 거죠.
▲칼빈은 <기독교 강요> 의 앞부분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과 인간의 동등성을 결코 암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의 높으심에 관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그 안에
인간의 낮음에 관한 지식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높으심에 관한 지식을 알 때만
얼마나 우리 인간이 낮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알면 알수록
우리 인간의 죄인됨을 더 극명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진짜 알면, 절대로 사람은 교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벗'입니다. 약2:23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하다' 라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유혹했던 그 유혹 있잖아요.
'네가 하나님이 되라' 라는 이 유혹은
우리가 저항할 수없는 가장 강력한 유혹입니다.
이미 알려진 진리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한 진리는 뭐라 그랬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게 사실은 종교개혁의 전체 주제를 한 마디로 뽑으라고 하면
바로 이 문장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만
우리가 매일 숙지하고, 그렇게 확인하고 출발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만할 수도 없고, 우리 맘대로 뭔가 하려고 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서려고 하지 않겠죠.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그 가장 확실한 진리,
이미 알려진 진리 가운데 가장 확실한 이 진리를 부정하게 할 만큼
창세기 3장에서의 이 사탄의 유혹은
아주 가장 새롭고 강한 가르침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하는 아주 강력한 유혹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아담과 똑같이
'네가 하나님이 되라. 너 맘대로 해라. 너 맘대로 할 수 있어!'
라는 자리로 초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새롭고 강한 유혹입니다.
▲사보나 롤라, 이 사람을 우리는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의 순교자라고 합니다.
1452년 에서 1498년 동안 사보나 롤라는 르네상스를 거부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 했던 시대착오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메디치 패밀리가 주도하는 플로렌스의 르네상스는
결국 인간의 향락과 그 갈망과 편리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가르침일 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라'고 하는 역사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정신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의 올리라'는 이 가르침은
매 시대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제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포괄적으로 '자유주의' 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개혁교회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지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저항해 왔습니다.
거기에 저항할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여 왔습니다.
자 그런 새로운 가르침이 우리 교회 안에 들어왔고
개혁교회는 이 가르침에 대해서 저항할 것을
지금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가르침은
하나의 중심을 가진 많은 동심원 들처럼
질적인 면에서, 그리고 양적인 면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성주의적인 자유주의'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의 고양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감정주의적 자유주의'도 있습니다.
-말씀을 떠나서 따로 하는 거하고 *'이성주의적인 자유주의'
-또 말씀대로 사는 것 같은데, 아주 열정적으로 자기 감정을 고양 시키는데
그렇게 흥분하는 것들 *'감정주의적 자유주의'
자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바로 그 일,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장려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보수주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의의 보수 입니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하나님의 진리의 보수 대신에
인간의 정욕의 보수주의로 그 의미를 바꾼다면 *정치적 보수 등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그 자리에 인간을 올리는 또 하나의 자유주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자이지, 받는 자가 아닙니다.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입니다.
듣는 자로서의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말하는 자의 자리에 올리는 것은
거룩함과 속됨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주일 예배 시간에 말씀을 선포할 때,
여러분에게 본문 말씀을 읽게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을 많이 참여시켜서 다 활발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좋은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예배는,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거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듣는다'
듣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이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거는 이따가 우리가 식사하면서 교제하면서
그 때는 서로 나눠도 돼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우리는 예배자입니다.
우리는 다시 개혁의 자리로 돌아 와야 됩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듣는 자로서의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말하는 자의 자리에 올리는 것은
거룩함과 속됨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는, 그리고 문화는,
이론적, 실천적으로
또 어떤 때는 명시적으로, 또 묵시적으로
이 새로운 이념을 확장하는 일에 결속되어 왔습니다.
어마어마한 대적이 있습니다.
영의 눈을 딱 열면, TV 에서 어떤 영화 하나 나오는 것만 보더라도요.
요새 나오는 '오징어 게임, 아수라장'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영화들은 섬짓 섬짓 합니다.
그런 영화들이 우리에게 쫙 깔려지면서
'네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결정하고,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근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온 인류가 명시적으로/ 묵시적으로, 이념적으로/ 실천적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는 이 일에 결속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 라는 것은
말씀 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철저히 듣는 자로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에서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입니다.
설교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임을 가정할 때,
칼빈의 말대로, 예배의 혼입니다. 예배의 혼(생명)이 말씀입니다. 설교입니다.
따라서 설교에서 우리는 더욱 철저하게 듣는 자입니다.
들으셔야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봉독될 때에
인간은 가장 절대적으로,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듣는 자입니다.
▲현대를 <세속주의 시대> 라고 부릅니다.
세속주의란, 세상의 모든 것이 속되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거룩의 영력, 성 holy의 영역이 세상에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게 세속주의 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 속되다 라는 것은 *holy / secular
그것이 위생적이냐/ 아니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속되다' 라는 것은, 인간이 그의 의도와 편의를 위해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스러운, 거룩한 것은 *holy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거룩한 것에 맞추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즐거움과 편의를 위해서
세상 것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일, 그리고 성전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전은 신약적 개념으로 우리 육체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을 때에
모든 것을 다 성스럽게 하신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속되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아담이 임의로 먹게 했습니다.
맘대로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 자신을 위해서 다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두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지 못하게 구별했습니다.
생명나무 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것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거룩의 영역, 성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이용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처럼 손대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복제한다든지, 이런 거는 하나님의 영역인데
그거는 우리가 손대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런 영역을 둠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세계의 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런 우리는 선악과를 보면서
'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정확하게 확인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세속주의는, 현대사회가 세속주의 인데요.
세속주의는 세계의 모든 것이 인간의 의도대로 다 이용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거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세계의 주Lord 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사용하게 하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가르침과 똑같이
오늘날의 세속주의는,
인간이 모든 것을
자기 의도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속되다'고 가르침으로써,
즉 이 세상에 거룩의 영역은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인간이 바로 하나님 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일례로, 하나님께서 여자, 남자 이렇게 성별을 구분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에 거룩한 영역이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거죠.
에스겔은 성전을 갈망했으며, 성일을 갈망했습니다.
성전 이라고 불리는 명목상 성전이 아니라,
거룩하게 구별된 참된 성전을 갈망했습니다.
성일이라고 불리는 명목상의 날이 아니라
인간의 즐거움과 편리를 위해 살지 않는 참된 성일을 갈망했습니다.
(*구약적 안식일 개념은 아님, 안식의 의미와 그 참된 정신을 지키는 것임)
모든 날이 속된 날들 중에
구별된 성일을 가진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속된 성전 중에
거룩한 성전을 가진 백성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제사장들이 오히려
거룩하고 속됨을 분변치 않으며
사람으로 그것을 분별하게 가르치지 않고 있음을 탄식했습니다.
안타깝지요.
에스겔 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성일 과 성전을 가지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가르쳐야 될 제사장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거룩한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그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거룩의 영역의 봉사자인 그들이
오히려 거룩의 영역을 부정하는 세속주의자임을
에스겔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하는 이 진리는
이미 과거에 명백하게 알려진 진리입니다.
창세기 1장 에서부터 이 말씀이 증거되어 왔습니다.
이미 우리 입에서 말했던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는, 조금의 더함이나 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진리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어떤 가르침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 것을 암시하는 어떤 실천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계속해서 이 진리를 부정해 왔습니다.
다양한 빛의 모습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올리는 어둠의 가르침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론으로 실천으로
명시적으로 또 암시적으로
이 새로운 어둠의 가르침을 전파해 왔습니다.
개혁교회는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개혁교회는 이미 과거에 알려진 그 명백한 진리로 돌아가는
그 전투 중에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터툴리안, 캘빈, 칼바르트가 이 싸움을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신 이유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는 그 일에 저항해서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두기 위함이며
인간은 예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목사를 세운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실로 인간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교회의 현재와 미래가
오늘 우리들이 이미 과거에 명백히 알려진 진리,
이미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진리,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진리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일어서고/ 넘어짐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고백의 진정성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그 하나님 되심, 이미 잘 알려진 그 진리,
우리의 입으로 이미 고백했던 그 진리,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동안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것저것 더덕더덕 붙여 놓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여러 가지 것들을
오늘 하나님, 우리 교회가 뜯어내게 해 주시고
우리 자신이 뜯어 내게 하여 주셔서
다시 그 명백한 진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시고
끊임없이 개혁하는 일에 저희가 부지런히 참여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드리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