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순간순간 내리는 결정이, 하나임의 뜻인가/ 나의 뜻인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과연 어느 길이 하나님의 길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선택인지 분별하여 깨닫는 지혜를 허락해주시고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일생 동안 우리가 누구와 벗하고 짝하면서 살아야 하며 누구와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개요 세상에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나의 적이고, 누가 나의 친구인지를 혼동하는 거죠.
적인지, 아군인지를 제대로 분별 못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삶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사울을 보면, 친구로 삼아야 할 다윗을 적으로 삼아서 국력을 소진하고,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대적처럼 구는 사울을 자기 친구로 여기고, 자기 가족처럼 여겨서 그를 끝내 품음으로써, 화합을 가져오고 결국은 나라를 얻게 되고, 나라를 융성케 하는 그런 인물로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얼마나 다른, 상반된 길입니까?
우리가 이런 결정, '저 사람이 과연 나의 적인가, 나의 친구인가? 적군인가, 아군인가?' 이거 잘 판단하면서 살지 않으면 다윗과 사울처럼 이렇게 인생의 길이 정반대로 극명하게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1. 십 사람들의 배신과 밀고
삼상26:1~3a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십 사람들이 또 밀고를 합니다. 두 번째 밀고입니다. 여기는 유다 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지파를 대변하고 있는 다윗 편이어야 하는데
십사람들은 웬 일인지 기브아까지 가서 사울 왕에게 '다윗이 여기 숨어 있습니다' 하고 또 밀고를 하는 거예요.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인데, 이렇게 또 배신을 하는 것이죠. 하기야 가까이 있기 때문에 배신 하는 겁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배신하고 싶어도 배신할 일이 없죠. 늘 곁에 있는 사람,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배신하게 마련이고 그 배신한 결과를, 시간이 지나서 살펴보면 그 배신자의 판단이 옳지 않았다는 것이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절대 투서를 안 보거나,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이래야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투서(또는 비합법적으로 수집한 정보)에 의존해서 꼭 살아갑니다.
무슨 투서만 받으면 부들부들 떨어요. 그런 사람한테 얼마나 이상한 투서가 많이 올라 가겠습니까?
오늘 이 다윗이, 광야 하길라 산에 숨어있다 하는 정보를 듣자마자 사울은 또 이제 십 광야로 달려가요. 삼천명 특공대를 편성해서 득달 같이 달려갑니다.
아니 지난 번 (엔게디에서) 에 헤어질 때 어떻게 헤어졌는가요? 그냥 헤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앞에서, 자기가 다시는 다윗을 좇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그렇게 헤어졌던 다윗을 또 잡으러 온 거예요.
삼상24:19~20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사울이 이렇게 자기 입으로 말했어요.
그러면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될 것이고 다윗에 의해서 나라가 다시 굳건하게 세워질 것이고
그리고 본인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다윗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공언했단 말이에요.
그때도 삼천명 데리고 갔으니까, 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3천명) 앞에서 마치 자기 다음 후계자를 선포하듯이 '내 다음 왕은 다윗이 왕이 될거야!' 이런 얘기를 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삼상24장
그래놓고 또 잡으러 왔단 말이에요. *본문 삼상26장 사람이 자기 말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리고 투서의 힘도 놀랍다는 거죠.
근데 사람의 말은, 믿으면 큰일 납니다... 사람의 말은, 자기가 지킬래야 지킬 능력이 없고 자기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또 못 지킨다고 그렇게 또 분을 내고 비난할 일도 아니에요.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킬 상황이 더러 생기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덧입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약속 하나 지킬 수 없는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그분의 능력으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성화, sanctification' 라고 말합니다. 성화, 즉 거룩하게 된다는 말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 말하고 행동하고 달리 살던 사람이, 이제는 말하는 대로 살게 되고 약속하나 제대로 지킬 수 없던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 말을 잘 지키고 사느냐'가 참 신앙의 증표이지,
뭐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헌금을 많이 했다.. 그게 경건의 표지가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은,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에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지/ 내가 만든 우상(으로서의 하나님)을 믿는 건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생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의 말씀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이란, 그 말씀을 붙들고 사는 거예요. 내 소원을 매일 아뢰는 게 아니고요.
다윗은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사울을 옷자락만 베고 살려 보냈던 장소는, 엔게디 광야의 동굴 속이었는데, *삼상24장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는 행동을 달리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울이 십 땅으로 내려가서 진을 치고서 지휘부가 회의를 했겠죠. '어떻게 다윗을 체포할 것인가?'
◑2. 많은 자원이 오히려 불리할 때도 있습니다
삼상26:3b~5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이제 다윗이 그전보다도 점점 더 강성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제는 정탐꾼을 보낼 정도로 여유가 생겼어요.
그리고는 사울이 진을 친 곳에 가서 직접 살펴볼 정도로 다윗이 지금 대담해진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삼천명을 데리고 와서 지금 다윗을 잡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사울은 다윗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다윗은 정확히 사울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는 형국입니다.
누가 더 위험합니까? 사실 사울이 더 위험한 지경에 빠진 거예요.
사람들은 그래서 군사를 많이 동원하면, 사람 숫자가 많고, 뭐 돈이 많고, 힘이 많으면 자기가 안전하다고 생각을 해요.
여러분, 3천명이 함께 움직여 보세요. 동선이 금방 파악됩니다. 상대방에게 쉽게 노출됩니다.
많은 인적/물적 자원에는, 장점만 있는 게 아니고, 약점도 있는 거예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점만 있지 않고, 장점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다고 안전하지 않아요. 권력이 있다고 더 안전한 게 아닙니다.
근데 이 사울은 3천명이나 데리고 왔으니까 그 한 4백명~6백명의 오합지졸과 같은 다윗의 군사가 뭐가 두렵겠어요? 그냥 뭐 사냥하듯이 온 건데..
◑3. 인정 받은 용사 아비새
삼상26:6~7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다윗은 누가 나와 함께, 적진 한 가운데로 사울한테 직접 내려가겠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아비새가 자원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고서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입니다) '아비새가 다윗의 친인척이라서 자원했나?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거지..' 잠시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아비새 라는 사람을 보면 이스라엘을 세우는 건국의 주역이 되는 용사 중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해요. 대단한 사람이죠. 그러니 평소에 공을 많이 세운 사람입니다.
적극적으로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적극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직장이나 어디서나 보면, 일을 시켜보면 확연히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일이 올까봐 벌벌 떨어요.
그래서 '이 일을 내가 하면 왜 안 되는지..'를 미리 생각하기 시작해요. 아직 사장이 그 일을 맡기지도 않았는데 지레 걱정하고, 지레 거부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아비새처럼, 매사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어요. 아비새는 나중에 적진을 뚫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떠 오는 용맹한 일을 또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나라의 최고의 용사로, 인정을 받게 되는 거죠. 대상11:20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이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냐/ 아니냐? 하나님께 꼭 필요한 일이냐/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께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이 서면, 아비새처럼 용맹하게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이스라엘의 '용사 중의 용사'로 인정을 받게 되는 거죠.
여러분, 요즘 사람들의 판단 기준이 뭡니까? '그 일이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 그것이 기준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소위 말하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해야 되는 거에요. 내 프레임을 바꿔야 합니다.
'그 일이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기준으로 살아가다가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물론이요, 일반 직장에서도, 그런 사람은 인정 받기 어려워요!
'나한테 돈이 생기나, 나한테 득이 되나?' 늘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비새 같은 인정 받는 용사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돈이 없어도 시작할 수 있고, 사람이 없어도 시작할 수 있고 내가 두렵다고 피할 일이 아니라 '이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다' 이 믿음이 있으면 그냥 전진해 가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소극적인 삶이 아니란 말이에요. 신앙자체는 소극적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믿음이니까요.
그러나 일단 그 믿음이 내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굉장히 적극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비겁해지지 않습니다. 꽁무니를 빼지 않는단 말이에요. '이 일이 나한테 떨어질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아비새는 지금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 기꺼이 죽을 각오로 가는 거예요.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여기 교회 오는데 용감하게 교회에 온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나아가려면, 용감하게 나가야 할 때가 있단 말이에요.
비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누구나 뭐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어려움 가운데로 직접 뛰어드는 건 대단한 결정이고, 대단한 믿음이란 말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면
'여기가 하나님이 내가 있기 원하시는 곳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 이게 영광이 되는 일인가?' 이런 확신이 되면 뛰어들어보면 된다는 말이에요. 너무 계산하지 말고..
물론 실패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비록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그건 값진 실패가 될 것입니다.
요즘처럼 코로나 시국에는, 실업수당이나 타서 어디 좋은데 가서 쉬고 그렇게 다들 살고 싶어하겠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계산을 하겠죠. '어떻게 하면 일은 덜하고, 더 많이 놀 것인가?'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 지금 온 세상의 기준이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신앙을 가졌다면,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런 안일한 태도는 온당치 않다는 거죠.
생기는 게 없어도, 손해가 될지라도.. 그런 일에 뛰어드는 거죠. 그래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못하는 일에 뛰어들어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일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도우실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자기 수준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가지고는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날 일이 없습니다.
내 능력밖의 일에 도전하고, '저 사람이 저 일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이냐?' 그런 일이 있을 때, 한번 뛰어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주시나/ 안 도와주시나?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지극히 합리적인 시대를 살아 가지만 신앙은 비합리적인 삶이 아니라, 초합리적입니다. *초월
신앙은 비성적인 삶이 아니에요. 이성을 뛰어넘는(초월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비성적이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무식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말이에요.
우리는, 자기 자신의 역량을 뛰어 넘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의 삶을 택한 거란 말이죠.
육의 사람이야 항상 자기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겠죠. 그러나 영의 사람은,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육의 사람으로 살기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4. 대적을 하나님 손에 맡기는 법을 터득한 다윗
삼상26:8~10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그래서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밤에 적진으로 가만히 들어온 것입니다. 보니까 사울과 모든 군대가 다 자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이렇게 자기 본분(군인으로 깨어 있는 것)도 잘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비새가 사울을 창으로 찔러 죽이려 하고, 다윗이 만류합니다. 아비새가 한 성질 하는 사람인데, 다윗의 만류를 받고 속상했겠죠.
지금 적진로 들어왔으니까 아비새는 귀엣 말로 '오늘 사울을 죽일 기회를 주신 것은, 천우신조입니다. 이거는 그냥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 내가 창으로 단 한번에 찔러 죽이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근데 다윗은 '죽이지 말라.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그는 앞서도 엔게디 동굴에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삼상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지금 똑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단 말이에요. 참 이게 다윗의 변함없는 일관성입니다. 신앙이 주는 신실함입니다.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고 여기서 이렇게 행동하고, 저기서 저렇게 또 다른 행동을 하고.. 이게 아니라
어디서든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과 기준이라면 그것을 붙들고 내가 죽을망정, 그 원칙을 붙들고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아니 자기를 죽이려고 수년을 늘 추격하는 사람이 지금 자기 앞에서 널부러져 자고 있는데 그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동일한 사건을 보고도 보는 관점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믿고, 아비새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두 신앙인이, 사울이라는 똑같은 사람을 앞에 놓고 죽여야 된다 / 죽이면 안 된다 이런 상반된 관점을 지금 피력하고 있어요.
누가 옳습니까, 누가 더 믿음이 좋은 겁니까?
우리는 정답을 알아요.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이 손을 대실 터이니 우리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때 사울을 만약 죽였다면 두 사람이 살아서 빠져나가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소동에 3천명이 다 잠을 깨서 일어나면, 어떻게 두 사람이 빠져나옵니까?
그러니 사실 다윗이 정말 여러 가지로 판단이 종합적인 사람입니다.
어쨌든 다윗이 이런 결정을 한 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란 말이에요.
그 믿음이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내 목숨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이다. -내 대적의 목숨, 또는 나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처리하실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믿어져야 내릴 수 있는 결정을 다윗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놀라운 예언적 선포를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더라도, 하라님께서 그를 직접 치시거나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실제로 사울은 전장에서 죽습니다)
어떻게 이런 예언적 선포가 가능했을까요? 쫓기는 건 자기인데 말이죠.
▲이것이 앞장 25장에서 나발 사건이 기록된 이유입니다.
24장과 26장은 거의 동일한, 반복되는 사건입니다. 그 가운데 25장 나발 사건을 성경에 집어넣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나발은 다윗이 거의 죽일 뻔 했어요.
사실 사울은 (죽이기에)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만만하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홧김에 한번 모든 화를 그 나발한테 쏟아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명분도 있어요.
그냥 그 일가를 몰살하려고 득달같이 그냥 바람을 일으키면서 달려갔는데 하나님이 아비가일을 보내서 다윗을 막지 않으셨다면 나발 집안은 그날 다 죽었을 거예요.
그러나 아비가일이 그 학살을 막았어요.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막으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는 것도 깨달았단 말이에요. 그러나 더 놀라운 걸 경험해요.
아니 갑자기 그 다음날, 뭐 나발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열흘동안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열흘 뒤에 죽어버렸단 말이에요.
다윗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 내가 손대지 않아도, 하나님이 손을 대시는구나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구나!'
'내가 문제 해결을 하고자 하는 방식과 내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시점이 옳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점이 옳은 것이구나!' 이걸 화들짝 놀라며 깨달은 것입니다.
그게 25장(나발 사건)이 24장과 26장 사이에 들어간 이유입니다.
어쨌건 나발 사건은, 다윗에게 엄청난 충격적 사건이에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다윗의 신앙이 한 단계 점핑하듯이 업그레이드 되는 사건이란 말이에요.
과거에는 막연하게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손 안 대야지' 하고 알고 있었다면, 나발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는,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0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인생의 어떤 문제든 내가 해결하겠다고 나서서 설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게 훨씬 유익하고, 훨씬 안전하고 훨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다 맡기고 내버려두면 된다'
여러분들이 이걸 읽고, 머리 속에 지식으로 남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삶에 반드시 실제적으로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내게 불의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왜 내가 손 좀 봐주고 싶은 사람이 없겠어요?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다윗이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가 지은 시편을 보면 그런 경험과 체험이 녹아 있어요.
시58:7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물살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법이 없습니다. 금방 물은 흘러서 지나가죠. (대적은) 그렇게 사라진단 말이에요.
나발이 갑자기 훅하고 사라져버렸어요. 열흘만에 사라져버렸어요. 그걸 자기 눈으로 확인한 거에요.
내가 안 죽였는데, 하나님이 직접 치셔서 열흘 만에 해결되었어요.
들의 풀처럼 시들어 버리는게 인생이고 사람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버리는 거구나.. 하나님이 마음 먹으시면, 인생은 그렇게 없어지는 구나.. 그걸 체험한 거죠.
시112:10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저도 젊어서는 이를 좀 갈았지만, 요즘은 이를 안 갑니다. 악인은 이를 갈다가, 저절로, 스스로 소멸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두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