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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67편 해석,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67:1~7 여러 설교 정리
본 시편은 누가 기록하였는지,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기록되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6절에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의 표현이 있어서,
추수 이후의 절기인 ‘장막절’에 낭송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추수의 기쁨이나 추수를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은총이
온 세상으로 확대되기를 소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야가 ‘세계적’입니다. '선교적 비전'을 담고 있는 시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신약의 성도들 이전에
이런 동일한 호칭이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출 19 :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사장은 본질적으로 제사 의식을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다리 bridge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였다는 것은
그들이 나라로서, 하나님과 다른 나라 혹은 민족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 이미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창12: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통로였던 것입니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이방 나라들에게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면서
그 궁극적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왕상 8:60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주변의 나라들이 볼 수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이스라엘을 찾아왔습니다. (왕상 4:34).
그 중 스바의 여왕은 직접 그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왔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왕상10 :9
이것이 사실 구약 시대의 선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다른 나라가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67편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기록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시편 67편을 ‘선교적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67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우리”라고 표현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도인데,
그 목적은 그것을 통해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복을 구하는 것과 그 목적이
열방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1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이 말씀은 민수기 6 :24~26절에 나오는 제사장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손을 들어서 축복한 내용을 가져온 것으로 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4~26
백성들은 특별히 추수의 때에, 제사장의 민수기의 위 축복을 들었을 것이고,
그 기억으로, 그와 유사하게 본문 1절에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이 장막절에 낭독되어 ‘추수감사 찬송’으로 불렸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중동에서 농사의 신, 수확의 신은 바알과 아스다롯 부부 신이었습니다.
시인은 은혜와 복의 출발은 그 우상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힘주어 말하며,
하나님에 대해 감사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2절,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구원이 온 세계에 퍼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즉 구약시대에 선교의 사명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 시편이 기록될 때는 신약시대가 아니고, 구약시대 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원 받은 백성이요, 선민이라 생각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음은, 성령의 감동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도’와 ‘구원’은 매우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로서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뜻을 가지시고 행하시는 모든 일들로 광범위하게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분명한 일들로 인해
모든 나라가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마치 애굽에 내린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으로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넌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애굽과 주변국들에게 알려졌던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알리소서'의 ‘알다’는 정보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는 않습니다.
뒤에서도 강조되는 것처럼 이것은 좀 더 관계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하죠.
하나님의 능력은 여리고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지만,
그 중 정말 하나님을 관계적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던 사람은 라합이었어요.
나오미에게 일어났던 일들로 인해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정말 하나님을 알고 떠나지 않은 사람은 룻이었습니다.
이 시편의 기도는 그렇게 모든 나라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로 바꾼다면
모든 나라가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 받기를 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절,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인은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과 내 가족, 내 주변의 몇 몇 사람만 포함되어 있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복을 주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절에서는 "땅 위에", 더 나가서 "모든 나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3a절에서는 "민족들"이라고 했는데
3b절에서는 "모든 민족들"로 확대됩니다.
7a절에서는 "우리"가
7b절에서는 "땅의 모든 끝"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같이 우리의 기도도,
그 범위와 영역이, 기도하는 중에 더욱 더 확대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분이 정신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원장이 앞장서서 안내를 합니다.
어느 병동에 가니까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 중증 정신병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비하는 사람은 하나 뿐입니다. 방문자는 원장에게 물었습니다.
"원장님, 경비원이 하나뿐인데 위험하지 않습니까?
만일 이 환자들이 힘을 합해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장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위험하지 않습니다.
정신병 환자들은 힘을 합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만 생각합니다"
오늘 내가, 만약 나 자신만 생각한다면.. 점점 정신병이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과거에 샤머니즘의 나라입니다.
샤머니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굿을 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샤머니즘에는 “나”만 있지, "우리"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심성 깊은 곳에 있는 샤머니즘의 뿌리를 뽑고
"나"가 아닌 "우리"가 최소단위가 되고
그 우리가 땅의 모든 끝까지 확대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4절,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4절이, 본 시편의 주제입니다. 왜냐면 '동심원 구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1)
여기서 심판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고,
다스림은 인도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공평히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라마다 왕들이 있고 그 왕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아들 혹은 신 자체로 추앙을 받았지만,
사실 모든 민족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하의 역사를 보면 이것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엘리사는 아람 왕 벤하닷이 죽게될 것과 그의 신복인 하사엘이 아람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을 예언했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왕들은 일어섰다 사라지고 나라들도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예언대로 됩니다.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확인하며, 인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듯이,
우리도 우리의 얼굴을 하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라는 말이 나와요.
얼굴빛을 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의 도를 땅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2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3
온 백성은 기뻐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4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자마자, 그 얼굴에서 나오는 하늘기운의 광채가
내 마음을 감싸고,
그것이 내 생활로 번져나가더니
그게 온 땅, 온 만백성에게까지
내가 본 하나님의 얼굴 빛이 비춰 나가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얼굴빛을 쐬는 사람들마다
기쁨의 찬송과 감사의 찬송을 드리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67편은 <선교의 노래>라는 별명이 붙은 시편입니다. 왜요?
땅 끝까지 얼굴빛을 봤을 때 느껴지는 평안과 구원이
전 세계로 번져나가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미 구약시대 때.
하나님은, 내 미래를 안 보여주시지만,
대신에 평안한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상한 포커페이스를 갖고 있어요.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이 내 삶을 위해서 쥐고 있는 내일의 패(예정, 작정)를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내일 일에 대해서는 보려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그냥 만족하는데, 오늘 어떡하며 만족하며 살아가느냐?
내 얼굴을 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데 하나님은 패는 감추고 계시면서
얼굴에는 전혀 감추지를 못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서 29:장 같은 경우에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잖아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1
무슨 얘기입니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너희 미래에 대한 평강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찾으라. 너희의 미래를 확인하려하고
너희의 미래가 어떤 일로 전개될 것인가를 궁금해 하지 말고 나를 찾으라.
너희 미래를 찾지 말고, 나를 찾으라!'
하나님은 '너희가 내 얼굴을 봐 봐.
너희들을 위해서 갖고 있는 내 손에 쥐고 있는 패가 어떤 것인지
내 얼굴을 보면 다 보여. 그러니까 내 얼굴만 보면 돼.
너희 미래를 보려고 하지 말고, 내 얼굴을 바라봐라'
하나님의 얼굴을 딱 보니까, 평강과 사랑과 기쁨의 빛이 쫙 비치는 거예요.
전혀 감추지를 못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평강의 빛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온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선교적 차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돼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지 않아요.
전부 내 미래를 내 스스로 정탐하려고 합니다. 내 미래를.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하지 않고.
그러면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평강이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고..
내 미래를 내가 염려하고, 내가 걱정하고, 내가 구상하고,
내가 계획하며, 내가 소원하며, 끌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비결은
내가 살고 이웃이 사는 비결, 내가 살고 가족이 사는 비결은
내 미래를 보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겁니다.
어차피 내 인생의 패는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 거지,
내가 쥘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얼굴을 보면 미래에 대한 걱정이 싹 사라져요.
미래에 대한 걱정이 싹 사라져버려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딱 사라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얼굴로 향하게 하신 사건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사건이에요.
그래서 그럴 거예요. 옆에 사람들이.
‘야, 너는 도대체 뭐하고 사냐? 내가 지금 너의 지금의 처지를 볼 때
너는 먹고 살 길도 없고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왜 맨 날 히죽거리고 웃고 다니냐?’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다 알아요.
내 미래의 패를 어떻게 쥐고 계신지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분명히 평강의 패요, 행복의 패요, 최선의 패라는 걸!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그냥 마음으로 느껴버릴 수가 있습니다.
내일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내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를 향해 비춰지는 사랑의 빛과
은총과 자비의 빛을 보니.. 걱정 하나도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5절,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온 백성이 마음을 다해서, 큰 소리로 노래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인함입니다.
그리고 ‘다스리다’의 의미는 ‘인도하다’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에서
‘인도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이 뚜렷하게 다가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6절,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한 해 마지막에 있던 추수를 기념하는 것이 이 시편의 배경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시각은 이스라엘의 추수보다 더 넓습니다.
시인은 온 세상의 추수와 영혼구원을 소망하며 바라봅니다.
............
주1)
오늘 본문은 모두 7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절을 중심으로,
1~2절과 6~7절이 4절을 밖에서 감싸고,
3절과 5절이 안에서 4절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심과
하나님의 구원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기원하고,
6~7절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과 온 세상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절과 5절은 내용이 동일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핵심은 4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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