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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42장 1~6 고난 속에 만난 하나님

LNCK 2021. 11. 30. 12:30

◈고난 속에 만난 하나님              욥2:3, 38:1~4           2015.05.31.출처

*출처 동영상 6분2초부터 녹취                       *◑5 가 하이트라이!

◑1.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고, 사탄에게 없다!

그가 이 고난 가운데 얻은 유일한 유익이 있다면 
고난 속에서만 만나는 하나님과의 만남,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했다는 것이죠. 

자 그러면 도대체 이 엄청난 일이, 욥의 인생에 왜 일어났는가요? 
욥1:8~9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사탄의 충동질에 하나님께서 말려드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고난이 시작되게 된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 때문입니다. 

욥기 1장에 나타난바, 천상의 회의에서
하나님이 보좌에 좌정하시고, 그 좌우에는 천사들이 시립해 있고, 사탄이 입장하고, 

그 천상의 회의 장면을 보면 
사탄이 자기 맘대로 거기서 난동을 부린다거나, 대화를 주도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질문 하시니까
사탄이 대답하는 형식입니다. 
철저히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탄의 유혹에 속거나,
사탄의 공격에 밀리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면 
그건 인류에게는 엄청난 재앙이 되겠죠.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인생에 어떠한 고난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안에서 일어나거나 
하나님의 섭리적 허용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면 우리 인생에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이해하기 어려운.. 
'어떻게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나?' 
그런 고난을 당할 때도, 그 고난도 하나님의 때로는 적극적인, 
때로는 소극적인 허용 안에서 일어난다.. 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에 들지요. 
그러나 정반대로 보면, 이거 매우 감사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놓치셔서 
사탄의 공격으로, 사탄의 유혹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라면 
사탄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탄의 손아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 인생에 아무리 어려운 일들, 사건들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2. 이유 없는 고난

이유 없는 고난이 있는가요? 
사람들은 인과응보 사상을 갖고 있지만, 이유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섭리가 없는 고난은 없어요. 

욥기 전체에서 나오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 있는데 
'이유 없이(까닭없이)' 라는 표현이 몇 번 나옵니다. 

▲1 첫 번째 사탄은 '이유 없이' 욥을 고발 했어요. 
1:9절에 '욥이 아무런 이유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2:3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하나님이 욥을 복주시니까,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죠. 
그 복을 거두어가시면, 당장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복을 거두어 가실 때 
여러분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잖아요?

그러면 사탄에게 좋은 일만 하는 거예요. 
'거 봐라 내가 얘기한 대로 아니냐?'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복을 거두어 가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 사탄을 책망하시는 것이죠. 

그 말씀이 2: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까닭없이, 즉 이유없이 
욥의 인생을 공격했고, 비난했고, 망하게 했다는 것이죠.

▲2 두 번째,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유 없이> 고난을 주신다고 원망했어요.

9: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이유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사실 욥이 구체적인 어떤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 없는 고난'이라는 이 표현은 맞는 말이에요. 
그러나 섭리가 없는 고난은 아닌 거죠. 

사탄은 욥을 이유없이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선한 그분의 섭리로 욥의 인생을 이끌어 가신 것이죠.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요? 
그것이 오늘 설교의 전체 내용입니다. 


◑3. 하나님이 욥을 신뢰하셔서, 시험을 당하게 섭리하셨습니다

욥기 1장과 2장을 볼 때 
이 고난이 시작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냐면

놀랍게도 하나님이 욥을 자랑스러워 하시고, 신뢰하셨기 때문이에요. 
고난의 시작은 하나님의 자랑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사탄이 천상의 회의 가운데 들어오니까 
'네가 어디를 다녀왔느냐?' 
'땅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왔습니다'

그때 사탄이 욥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한 게 없어요.
트집을 잡은 것도 없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먼저, 
마치 자랑스러운 자식을 너무나 자랑하고 싶어서 가만히 계실 수 없는 것처럼 
'너는 내 종 욥을 주의해 보았느냐?' 그러면서 욥 자랑을 시작하십니다.

'세상에 그렇게 악을 떠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은 없다.' 

사탄은 속이 꼬여 있는 존재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그 말대로 인제 한번 시험해 봅시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그리고는 욥에게 시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니 천상의 회의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밀실에 들어가서 
무슨 모종의 딜을 한 게 아니냐? 
어떻게 사람에게 이러한 해를 끼칠 수 있느냐?' 
이런 원망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내용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성경에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탄만 대화를 한 게 아니에요. 
천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그 앞에 있는 가운데서 대화를 하셨어요. (밀실 회의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욥에게 너무나 억울한 것이고 손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에게는 엄청난 손해가 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데미지가 될 수 있는 시도였습니다.

왜냐면, 욥이 사탄의 시험에 지게 된다면 
누구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이런 시도를 하실 이유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욥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걸고, 사단의 시험을 보게 된 것이죠. 

그리고 어떤 문제가 출제될지, 욥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두 번'의 엄청난 시험을 당했던 것이죠. 
-사업이 망하고, 열 자녀가 죽는 시험
-자기 몸에 욕창이 나서 건강을 잃는 시험

저는 욥기 1장, 2장을 보면서 
여러분, 국가대표를 뽑을 때 아무나 뽑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이 어떤 종목의 경기이든, 분야이든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를 뽑을 때는 
가장 실력있는 사람을 뽑는 거죠. 

그런데 그 국가대표가,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축구 경기에 관심이 많은데 
영광스러운 자리인가요, 아니면 고난의 자리인가요? 영욕이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한 게임 이기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한 게임 지면 어떻게 되나요? 엄청난 비난을 사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나는 항상 영광만 얻고 싶기 때문에, 국가대표 하지 않겠다' 
선수들이 그런가요? 

현역으로 있는 선수들은, 모두가 국가대표(국대)를 한 번은 해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영예로운 자리로 생각하는 것이죠. 

물론 여러분 가운데 '아~ 나는 국대 하지 않겠다' 
이런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욥의 고난, 환영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놀라운 것은 
욥이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패가 되는 거잖아요. 

욥이 패배하면, 하나님의 패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시도를 하실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도를 하셨다는 것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욥을 믿으셨다는 거예요.

'어떤 어려움이 와도, 어떤 인생의 환란이 와도, 
내 아들 욥은 나를 배신 하지 않을 거다..' 
그 믿음이 하나님은 있으셨습니다.

제가 욥기 1~2장을 묵상하면서
성경 어디에도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야기하지 
하나님이 사람을 믿어주시는 이런 놀라운 본문은 없어 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어떤 환란과 고난 가운데서도 몸부림치며 사는
욥과 같은 인생들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고, 믿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감사한 거예요. 

▲성경에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 생활이라고, 우리는 많이 오해하고 있어요.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더 많이 믿을까요?
아니면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인생이 여전히 실수와 실패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를 믿어주는 부모의 믿음이 더 클까요? 부모의 믿음이 더 큽니다. 

'넌 잘할 수 있다', '너는 반드시 훌륭한 인생이 될 거야'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 주는 그 믿음으로 
불완전한 우리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죠. 


◑4. 받은 고난의 은혜를 나눌 때, 더 큰 은혜가 넘칩니다.

욥이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믿음의 고백을 드리는 장면이 
욥기 1장 21절에 나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사람은 맨몸으로 왔기 때문에 맨몸으로 갑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뭘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이 가져가시겠다고 하는데 
내가 뭘 원망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욥의 고백입니다.

'생명도 하나님께 받았고, 사망도 하나님께 받는 것이고 
복도 하나님께 받았고, 화도 하나님께 받는 것이니 
나는 겸허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어떻게 자녀를 잃은 아버지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요? 
그런데 그는, 인생과 신앙의 본질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장례식을 많이 치르잖아요. 

때로는 너무 아쉽게 일찍 떠나고 
때로는 장수해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백 년이라는 시간을, 어떤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다 할지라도 
그가 평생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다가 간다면, 

땅의 관점에서는 그의 장수가 축복일지 모르지만, 
그는 영원한 불행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단 10년을 이 땅에서 살았을지라도
가족들과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이 땅을 떠난다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불행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영원한 천국의 행복의 가운데로 들어가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세상적 관점이 강하다는 거예요. 

조금 살다 떠나면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오래 살고,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화려했으면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1838년 뉴욕에 호레이쇼 스패포드 (Horatio Spafford, 1828-1888) 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사업도 잘 했고 
도 훌륭한 가장이었고, 또 훌륭한 신앙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D. L. 무디가 전 세계에서 전 세계에서 부흥 사역을 주도했는데 
그 무디의 친한 친구이자 동역자 였죠. 

그런데 그의 인생에 1870년부터 고난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4살 된,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레이쇼 라는 아들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급기야 그 이듬해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자기 집과 거의 모든 소유를 잃게 됩니다. 
아내는 그 충격으로 인해서 건강이 악화되지요. 

2년 뒤인 1873년에, 스패포드는, 유럽에서 있었던 무디의 집회를 돕고자 
그리고 아픈 아내와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 유럽행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인의 사업에서 돌봐야 될 일이 생겨서 
아내와 네 딸을 먼저 배에 태워 유럽으로 보내죠.

그런데 9일 뒤에 비보가 날아왔어요. 
그것은 유럽으로 가던 여객선이, 영국의 철갑선과 충돌해서
단 12분만에 배가 침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살 애니, 9살 메기, 7살 뱃지, 2살 테니타 까지 
사랑하는 네 딸을 그 사고로 다 잃게 됩니다. 
그리고 간신히 자기 아내 애나만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죠.

스패포드는 급히 배를 타고 대서양 사고 지점으로 찾아갑니다. 
그 사고지점을 지나는 가운데, 그 바다를 쳐다보니까 너무나 고요한 것입니다.

아내 애나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우리 예쁜 네 딸이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잠깐 헤어질 뿐이고,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제가 아들을 잃었을 때도 
하나님이 시카고 대화재로 내가 모든 소유를 잃었을 때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왜 내게, 왜 나의 자녀들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는 객실로 내려가서 밤새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평강이 그의 심령 가운데 임하게 돼죠.

그리고는 그가 일필휘지로 시를 한 편 쓰게 됩니다. 
그 시에 곡조를 붙인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에 평안을 안겨준 "내 평생에 가는 길이" 라는 시입니다. 

그 객실에서 그가 눈물로 써내려갔던 찬양시 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다섯 자녀를 잃은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가요? 
2절에 보면,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지만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3절에는, 아무 감사와 찬양의 제목이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주홍 빛같이 붉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그 찬양을 해요. 

4절에는 '주님 다시 구름 타고 오시는 그날 
내가 영원한 하나님의 평강가운데 들어갈 것이다' 라고 노래합니다. 

오늘은 설교 중간에 같이 한번 찬양을 했으면 좋겠어요. (찬양부르는 시간 가짐)

다섯 자녀를 잃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평강을 노래했던 스패포드! 

▲그런데 그 이후에 스패포드의 삶이 또 있습니다. 
19세기의 욥이라고 불렸던 그의 삶의 그 부분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세 자녀를 다시 주셨어요. 
두 딸과 한 아들을 새로 주셨습니다. 마치 욥처럼요.

그들 부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두 살 때, 형과 똑같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1881년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빈민구제를 하며 
평생을 선교단체를 세워서 사역을 합니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자녀들을 잃고 나서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진 거 같아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남은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던 것이죠.

1888년 스패포드 자신도 60세에 말라리아로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에, 그의 아내와 큰 딸과 사위가 
그가 하던 사역을 이어가게 되죠. 

그리고 오늘 날 그 사역은 <스테포드 어린이센터>가 되어서

  *Spafford Children Center https://spaffordcenter.org/
전 세계의 가난과 굶주림과 어려운 가운데 고통 받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매년 3만명씩 살려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했던 그가, 남긴 이 찬양과 사역이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하늘의 평강을 경험케 했고 

그리고 정말 그가 잃어버린 6자녀를 생각하면 
너무나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고백하며, 그 은혜를 나누고자 했을 때 
지금도 매년 3만명씩 아이들을 살려내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된 줄로 믿습니다. 


◑5.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나와 동행해 주시고, 임재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욥기42:5~6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42:5~6

욥은 깊은 고난 속에서, '내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되는 그런 은혜가 있었죠. 

그러나 그가 고난을 당할 때 상황을 보면 
하나님이 철저히 침묵하셨어요.

1장과 2장의 두 번의 시련을 당하고 
3~37장까지, 욥기를 읽을 때 가장 힘든 부분이에요. 
끝까지 읽기가 너무나 버거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3명의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와서는 
인과응보 사상으로 '네가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벌하시는 거지. 빨리 회개해라.' 
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라고 말했어요.

음식점에 많이 걸려 있잖아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네가 죄를 지어서 지금 미약하지만 
회개하면 창대케 해 주실 것이다'는 얘기입니다. 벽에 걸어 놓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대표적인 잘못된 인용의 예시입니다. 
물론 그러나 좋은 말씀이에요. 

그래서 욥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어요. 
위로 하겠다고 찾아온 친구들이 그를 더 힘들게 했기 때문이죠. 

▲사람이 고난가운데 있을 때, 그 고난을 힘들게 만드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고난의 이유가 해석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는 거예요. 

2) 주변 사람들이, 나를 가장 위로해 주고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오해 한다는 거예요.
'저 집은 부부관계에 어려운 거 보니까, 분명히 저 사람이 잘못 한 게 있을 거야' 

'지금 저 인생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데 
저 자녀가 저렇게 된 건 분명히 부모가 뭔가를 잘못했을 거야!' 

그리고 사람들이 어림짐작으로 판단하고 
뒤에서 수근거리고 이야기하는 게, 고난 당하는 당사자에게는 너무 힘든 거예요. 

 

3) 그 고난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사실 고난은, 고난 그 자체보다, 해석이 안될 때 매우 답답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는, 해석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지나가셔야 돼요. 
고난의 터널은, 그 속에 앉아서 '왜 이렇게 어둡지?' 그거 분석하며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묵상하면 안 되고, 그냥 지나가셔야 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서 사람들의 말에도 너무 귀 기울이지 마세요. 
그냥 흘려 버리세요. 
하나님만 바라보고 가시길 바랍니다. 

문제는 내가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내게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위로를 안 주세요.
하나님 뭐라고 답변을 안 주세요. 
그럼 얼마나 내 영혼이 서러운지 몰라요.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몰라요. 

▲그럼 도대체 하나님은 그 침묵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인가요?
제가 욥기를 묵상하다가.. 
저는 욥기에 대해 중학생 때부터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제도 욥기 전체를 다 다시 한번 훑어봤는데 
그러는 가운데 십 여년 전에, 수능일이었어요.
입시생들이 수능을 본 날 저녁에 뉴스에 이런 내용이 나왔어요.

입시장으로 사용하는 한 고등학교에
아침 입실 시간이 끝나서 철문이 쿵 하고 닫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근데 저 멀리서 오토바이 뒤에, 어떤 엄마와 입시생 아들이 
늦게 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늦었는데, 막 두드리니까 철문을 열어주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우리나라가 좋다. 미국 같으면 열어주지 않을 텐데..'
남학생은 허겁지겁 고사장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카메라는 그 어머니에게 돌려졌어요. 
어머니는 안타깝게 아들을 바라보는 거죠.

기자가 그 어머니께 마이크를 들이대며 물었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근데 그때 그 어머니가 했던 말을 저는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저 아들 대신 시험을 봐 줄수만 있다면...'

이런 뜻입니다. 
'내가 저 아들 대신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대신 당해 줄 수만 있다면..' 
저는 그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더라고요.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하늘 아버지는 그런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고사장의 철문 밖에서, 시험이 마치기를 기다리는 학부모들처럼
하늘의 아버지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험을 치르는 동안
같은 초조한 심정으로, 이 시험을 잘 마치기를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욥이 시험 받을 때도, 
하나님은 마치 시험장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처럼, 
초조하게 욥이 승리하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 어머니가 시험장에 같이 들어가 줄 수 없잖아요. 
딱 교문밖 거기까지 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날 포기하셨나보다, 하나님이 나를 거절하시나 보다'
여러분 아닙니다. 

고난의 한가운데 경험하는 그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눈물이고, 하나님의 기다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같이 시험장에 들어가서 
같이 문제를 풀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실지라도
우리 인생의 고난을 하나님이 대신 해결해 주지 않으세요. 
시험을 대신 봐 주지 않으세요.

물론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위로와 능력과 힘과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내가 통과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무리 당신을 사랑해도, 
시험은 내가 통과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침묵의 시간 동안, 하나님을 안타깝게 눈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지, 이유를 분명히 아셨지만
그러나 그 분의 영혼, 그 분의 마음은 힘드셨어요.
그 고통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가장 큰 것이었어요.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나를 버리려고 하십니까?' 가 아니라 
'이미 나를 버리셨군요!' 완료형으로 되어 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3년의 공생애 사역 동안, 그렇게 다 응답하시고 역사하시고 
죽은자도 살려 주셨던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는 침묵하셨어요.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책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외치는데,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얼굴을 돌려 외면하셨다' ..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까요?
친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아들이 울부짖고 있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그냥 천상의 라운지에서 편히 쉬고 계시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고 계셨나요?
만약에 그 순간에 아들을 붙잡아주면, 아들을 거기서 건져주면
우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위로해 줄 수 없었고, 그 아들 건져 주실 수 없었어요. 

어떤 이유로 그 십자가를 지는지, 예수님은 아셨지만 
그 고난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도 아셨지만, 
그 아들을 향해서 침묵하실 수밖에 없었어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 
마지막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하시며 운명하시고 고개를 떨구십니다.

그때 카메라 앵글이 갑자기 하늘에서 십자가 위로 내려다보면서,
하늘에서 큰  눈물 방울 하나가 떨어지죠

하나님의 침묵은, 당신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당신을 거절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눈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안타까우시고, 그 아들을 내어 주시고 
슬프셨기 때문에, 정오에, 한 낮에
온 하늘이 캄캄해져서 오후 세시 까지 이어지고 
지축이 흔들리고, 그 하나님의 아픔이, 
그 아들을 내어 주신 그 십자가 사건에 드러났던 것이죠. 

▲제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4년 사역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저는 사역에 바쁘고, 아내도 나름 적응하느라 바쁘고
제 큰 아들이 그렇게 힘든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는지 저는 잘 몰랐었어요.
 
캐나다에서는 학교 가는 게 너무나 행복했거든요.
방학 때도 학교 가는 것을 원할 정도였어요.

학교에 가면 너무 즐겁고, 아이들도 얼마나 착했는지요.
아이들끼리 서로가 신체접촉을 하거나 싸우지 않도록 
1미터 떨어져 있도록 규정이 있었어요. '1미터 룰!'

한국 애들은 딱 반에 들어갔더니 
초등학교 3학년 애들이 뭐 남녀 가릴 것 없이 막 욕하고 때리고 
선생님이 자 들고 돌아다니면서 말 안 듣는 애들 등을 때리고 

우리 애가 거의 패닉 상태가 된 거예요.
'어 여기는 거의 지옥이구나' 

처음 경험하는 한국의 학교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2학기에 복학했기 때문에, 이미 학급 아이들은 서로 다 친해진 상태였고
그래서 외톨이가 되고, 따돌림을 당하고 

그러다가 나쁜 친구를 사귀고.. 나쁜 짓을 하고.. 
초등학교 3학년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하겠느냐 싶겠지만..
아버지인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엄마에게 나중에 결국 얘기를 했고 
'아빠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제가 아들한테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제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운데,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비록 3학년이지만, 자기가 인생을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개입을 하겠어요? 

그리고 나서 제가 깨닫게 된 거는 
어렸을 때, 아기가 갓 태어났을 때부터 유치원생 때까지 
그냥 24시간 좇아다니며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게 힘든 건 줄 알았는데 
그게 힘든 게 아니더라고요. 그때는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 힘든 게 없었습니다.

내 아들이 저렇게 힘든데,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것,
그게 정말 고통스러운 거더라고요. 

우리가 인생의 고난의 시간을 지나갈 때 
하나님이 시험을 대신 봐 주실 수 없으므로
내가 그 시험을 치러야 되고, 

 

내가 그 캄캄한 터널을 지나가야 되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고, 
그런 나를 쳐다보시며,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그냥 곁에 있어 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욥기 38장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침묵을 깨뜨리고 말씀하십니다. 

38: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저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래도 위로 한마디 해 주실줄 알았어요.
아니면 그 욥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서 좀 답변을 해 주시든지... 

그런데 욥을 혼을 내십니다. 41장까지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도 좀 이상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계속 꾸중 하시는데 

욥은 또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그냥 '제가 회개하나이다' 하고 순응합니다.
하나님께 반박하거나, 대들지 않습니다.

여기서 느끼는 게 뭐냐면, 
우리 인생의 욥이 던지는 그 수많은 질문들, 
'도대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며 욥이 경험한 그 깊은 고난과 고통에 대한 해답은 
논리적이거나 교리적인 어떤 문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해답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혼내면서 나타나셔도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게 아니구나!
그때 몰려오는 영혼의 평강은 뭐 이루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아무리 힘든 시간을 지나 갈지라도 
'하나님이 여기 나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만 있으면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몰라요. 
미래를 너무 알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러나 우리가 미래로 가보지 않아도 
현재 시점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을 포기하지 아니 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을 홀로 두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 한 가지만 믿으면 
어떤 시험이 닥쳐와도 여러분은 능히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가운데 기도할 기운이 없고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깨어짐이 너무나 오래 되어서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암투병으로 병상에 지쳐 쓰러져
허공을 바라보며 '하나님 왜 입니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며 
병실에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가족을 먼저 떠나 보내고,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우울증과, 자폐증과, 불안증과, 심한 아토피로, 조울증으로, 
게임 중독으로.. 방 안에 갇혀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고쳐 주옵소서.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냥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안타까워 하시고, 하나님은 눈물로 
우리가 이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을, 우리 자녀를,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손길로, 그 임재로 우리를 붙잡아 주옵소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