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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장 12~21 신앙의 진위를 검증하라

LNCK 2021. 12. 1. 11:32

https://www.youtube.com/watch?v=DrYytIwiILs

◈신앙의 진위를 검증하라           막14:12~21             2021.11.28.출처

본문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자리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일이 하나 일어났죠.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늘 본문을 대할 때면, 12명의 제자 중에 한 명이 배신을 한다.. 
참 믿어지지 않는 얘기죠. 

이 시기는, 무교절 첫날이라고 하고,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첫날 하루, 무교절은 첫날부터 7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우리나라로 치면 광복절과 같죠.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탁에서 독특한 유월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죠. 
사실 유월절의 핵심은 어린 양입니다. 

▲오늘 사건은 식탁에서 벌어집니다. 식탁은 어떤 곳입니까? 
친밀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바로 그곳에 배신자가 앉아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죠. 

예수님은 이미 그 일을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룟 유다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 보셨을 것입니다. 
또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배신자를 
그 행위를 폭로하지 않고, 끝까지 안고 가십니다. 

여러분, 배신은 죄 중에서도 질이 아주 안 좋은 겁니다. 
왜냐면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믿었던 사람이 뒤에서 등에 칼을 꽂는 일이 배신입니다.
아주 악한 죄입니다. 
근데 사실 인간 사회에서 살다보면, 배신은 참 자주 일어납니다. 인지상정입니다.

◑가룟유다의 배신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궁금해요. 
그 배신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이렇습니다. 

요13: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여러분, 평소에 생각이 참 중요합니다. 
행동 이전에, 생각이 먼저 있었던 거예요.

생각이 없었는데, 행동 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먼저 있었던 거예요. 

아마 인류 최초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세상을 만드실 생각이 먼저 있으셨던 거예요. 
그다음에 창조 역사가 있었습니다. 

생각이 행동화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하는가? .. 가 중요하죠. 

사탄이 그냥 가룟 유다의 생각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은 것은 아니에요. 
가룟 유다의 마음 안에, 먼저 예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 있었던 거죠. 

▲로마서 8장 6절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참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놀라워요. 성경의 진단입니다. 
'육신의 행동이 사망'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가룟 유다는 육신의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죠. 
영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그 유다의 생각 안에서 둥지를 튼 것입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반대 길로 가게 한다는 거죠. 

여러분, 마귀가 어떻게 활동하는 것을 오늘 본문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귀가 뭐 바깥에서 난리를 치는 게 아니라 
뭐 마귀가 머리를 귀신처럼 풀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생각 안에서 활동합니다. 

마귀가 아무에게나 들어가 역사하는 게 아닙니다.
마귀는 자기가 좋아하는 곳이 있습니다. 

즉 사람의 더러운 생각, 악한 생각, 두려운 생각, 지속된 미움의 생각, 
용서하지 못하는 생각 .. 거기에 마귀가 침입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침입하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거죠.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나쁜 생각을 계속 하면 
마귀를 내게 초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생각 안으로 들어와, 내 생각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그러면 그냥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아닙니다. 
그냥 마귀입니다. 
손이 장갑속에 들어가서 장갑을 움직이듯, 마귀가 나를 움직이게 됩니다.

마귀가 내 안에 들어와 내 생각을 지배하면 
내가 마귀가 되는 겁니다. 
마귀 사촌이 아니고요. 그냥 마귀입니다. 

요6:7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왜 진짜 마귀죠?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그의 생각과 마귀의 생각이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같은 생각을 하고, 마귀의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마귀인 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마귀와 일심동체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스승을 팔아넘기는 일은, 정상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마귀의 일입니다. 

▲시편에도 배신자에 대한 시가 있습니다. 
시편 41:9절에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아히도벨의 얘기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유능한 사람이고, 다윗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반란에 참여합니다. 

나중에는 그가 압살롬에게, 다윗을 기습 공격 해야한다는 자신의 계략을 얘기했지만 
그것이 다 무산되자,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성경에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들이 종종 나옵니다. 
아히도벨도 가룟유다와 똑같은 배신자였습니다.

배신은 생각에서 출발해서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생각으로 출발해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주님과 내가 생각을 맞추는 작업이에요. 
주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추는 작업!

왜 우리가 늘 말씀을 묵상합니까?
주님의 뜻과 나의 뜻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맞지 않으면 
내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내가 일치를 이루어야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 약간 불편한 게 있으면 
여러분, 나를 고쳐야 됩니다. 
말씀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우리의 생각을 교정하는 시간이에요. 
생각의 차이가 나는 것을 바꿔 놓습니다. 

마귀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집어 넣었어요. 
그래서 가룟유다는 예수에게 반역하는 그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막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우회적으로 말씀하셨어죠. 
무엇을 의도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때 가룟유다가 '아~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구나' 
그러면서 회개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됐을 것입니다. 

근데 다른 제자들의 반응이 재밌어요.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다르게 표현하면 '혹시 나입니까, 예수님? 내가 배신자입니까? 나는 아니죠?'
라는 뜻이죠. 
이렇게 예수님의 이 말씀에 모두 자기를 의심했습니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가룟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이에요.

그런데 유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이 모두 마음이 찔렸던 거 같아요. 
'혹시 내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근심하며 말했습니다.

이상한 현상이에요.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거죠. 

유다같은 사람은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고,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겁니다.
유다는 '혹시 나입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자주 찔림이 있습니까?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나는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적용하는 편인가요?

만약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위험한 신호입니다. 
말씀이 전해질 때, 만약 '강한 부정'을 하면 심각해요. 

말씀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는 거죠. 
그래서 늘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룟유다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릴 때도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낭비했다고 화를 냈습니다. 
말씀을 자기 자신에 적용하지 않았어요. 

여러분, 건강한 신자의 반응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말씀을 들을지라도, 자기에게로 가져와 그 말씀을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혹시 내가 배신자는 아닌가?' 

사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 말씀했을 때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특정하지 않고 얘기 하신 것은, 의도가 있어요. 
모두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게 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든,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그 누구도 
스승을 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비판하지만, 나는 한 수 더 뜰 수 있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비슷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혹시 내가 아닌가?'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혹시 내가 배반자는 아닌가?' 
그러면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근데 '나는 절대 아니야'라며 부정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말씀이 빛이 비춰질 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죠.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미친 짓을 했구나. 내가 잠시 미쳤구나!'

그런 판단이 들면, 돌이키면 되는 거죠. 

말씀이 들려 지고 있는데, 자신을 돌아 보지 못한다면
위험한 상태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있기 때문이에요. 

가룟유다는 예수님 곁에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어요. 

잠깐만 옆으로 몸을 기울이면, 
예수님의 귀에 자신의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물리적 거리와 영적 거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룟유다와는 최측근의 거리입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둘 만의 은밀한 얘기를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관계죠. 
바로 이때죠. 회개의 기회입니다. 

회개하면 삽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했다면 가룟유다는 벌써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가룟유다가 눈이 마주쳐도 한두 번 마주쳤겠습니까? 
그러나 가룟유다는 주님의 눈길을 계속 피한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싯기실 때도
가룟유다의 발을 동일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여러분, 망하는 사람의 특징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또 놓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또 인내 하십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회개할 마음을 계속 내가 막으면, 회개할 기회가 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회개를 안 한 것입니다. 
근데 나중에는 못 하게 됩니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안 하고 있을 때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회개를 못한다는 말은 이미 상황 끝입니다.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완전히 망가진 상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일상을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실수합니다. 죄 안 짓고 살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도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회개한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지는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이전의 죄와 다릅니다. 태도가 다릅니다.
마음대로 못 짓습니다. 브레이크가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또 죄를 짓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고 아픕니다.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에 대해서 둔감해진 상태는 어때요?
그게 없어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벼랑 끝이요, 추락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세히 한번 나를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포인트에요. 
'일상에서 내게 회개가 있는가/ 없는가?' 
'내가 언제 진정한 회개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막장 막장' 하는데 
무슨 끔찍하거나 치졸한 죄를 지을 때 막장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막장은 딴 게 아니에요. 
회개 없는 삶이에요. 
죄의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룟유다를 살펴보면서 
날마다 우리가 늘 확인하는 것은 
가룟유다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스스로 팔았기 때문에 망한 게 아닙니다. 
회개가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는 조금의 차이예요. 
베드로가 결코 낫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했습니다. 

근데 가룟유다는 후회만 했습니다. 
후회와 회개는 다른 것입니다. 

자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행동을 주목 하시죠. 

막14:20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요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떡을 주시는 행위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사랑의 손길이죠. 

가룟유다에게 마지막까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냥 받아 먹고 끝납니다. 돌이키지 않습니다. 
회개 없이 떡 조각을 받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만찬에서 이 떡 조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받아 먹어라 내 몸이니라' 라는 이 말씀은, 그냥 떡 조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 주님이 주시는 그 떡 조각, 즉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을때 
그는 무심하게 받습니다. 

 

그런 가룟유다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아마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그 떡을 내미실 때, 가룟유다는 온몸이 떨렸어야죠. 
진땀이 나면서 부들부들 떨려야 돼요. 근데 그냥 받아 먹어요. 

이미 그는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영혼은 이미 죽어있었고, 마귀에게 점령을 당한 상태입니다. 
자 어떤 일이 일어나죠?

요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사탄이 언제 들어갔다는 거죠?
'떡 조각을 받은 후 곧' 입니다.

그는 회개 없이 떡을 받습니다. 상황 끝입니다. 
그동안 회개할 수 있었던 모든 기회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손길 거부한 그 순간 
그는 마귀에게로 완전히 넘어가 버립니다.
주님에게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자로 바뀝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던 일을 속히 하라!' 

마지막 기회를 그는 거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기회에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을 결코 심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셔서 우리에게 회개를, 
그 길에서 돌아서라고 기회를 주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외면하지 않는 자가 복된 줄로 믿습니다. 

자 이 가룟유다는 결국은 자기 안에 뭐가 있었습니까? 
이 배반의 과정에서 그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유다는 예수를 은 30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는 스승을 팔기 위해 흥정을 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줄곧 가룟유다를 도둑으로 규정합니다.
그의 배신의 과정에는 돈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미 도둑이에요. 그가 돈궤를 맡았다 그랬는데, 
여기서 '돈궤'란 뭘까요?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했습니다. 
먹고 자고 활동하는 가운데 돈이 들 수밖에 없죠. 경비가 들어요. 

그 경비가 어디에서 충당 되었을까요? 
당시 예수의 무리를 후원하는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여인들이 나옵니다. 

아마 가룟유다는 모든 경비를 본인이 관리를 했어요.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다룬 것입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로 돈궤를 맡은 사람은, 조직에서 신임을 받는 사람입니다. 
아무에게나 재정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재정을 맡긴다는 것은 신임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가 재정 사고입니다. 
재정은 자녀에게 맡겨도 사고가 납니다. 
믿고 맡기는 곳에서 사고가 나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벌어집니다. 

가룟유다가 왜 돈궤에 손을 넣었을까요? 
탐심 때문입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탐심이 있습니다. 

내면의 탐심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이 탐심, 탐욕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탐심은,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나고 확장하는 잡초와 같아요. 
이 탐욕이 못 하는 일이 없어요. 어느 정도일까요? 
스승도 팔아 먹습니다. 

탐욕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요? 
적당한 환경만 만나면, 불꽃이 튀는 것입니다. 
마치 불과 기름의 조합과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조심해야 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괜찮다' .. 그런 거 없습니다. 인간이 가진 탐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근처에 있으면 사고가 나게 되어 있고
고양이에게 고기를 맡기면 안 된다는 거죠. 

탐심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돈 근처에 있으면 어떻게 돼요?
사고가 나는 거죠. 

이성에 약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그런 환경에 들어가면 안 돼요. 
명예에 약한 사람은 그 명예욕을 늘 조심해야 돼요. 

처음부터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들어가다가 결국은 빠져나오지 못할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의 시작은 돈궤에 손을 넣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은 작은 돈을 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상습화 되어가는 거죠. 습관이 무서운 것입니다.
탐심과 습관이 만나는 것입니다. 

제자의 위치에서 가장 악한 죄를 짓는 단계까지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렇게 얘기하죠.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잉태하면 반드시 죄를 낳는 것입니다.
잉태하면 낳게 되어 있습니다. 잉태부터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가만히 있지 않아요. 계속 부풀어져요. 
어디까지요?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가룟유다의 배신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헌금할 때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내 재정이 모두 나의 것이다.. 이건 세속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내 재정에 일정 부분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떼어진) 몫이 있다 .. 이게 성경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것'에 내가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다고 책망했죠.
'하나님의 것'을 탐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사역을 하는 동안에 
돈을 만지는 일에 조심해야 됩니다.

돈을 만지다 보면 영혼에 때가 묻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속담에 '금을 계속 만지면 손이 더러워진다'는 말이 있죠.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죠.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합니다. 자신을 믿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환경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죠.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자신이 죄를 짓지 않도록, 투명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이 그 부분에 약하다 라고 생각이 들면 
처음부터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지요. 

여러분, 탐심이 결국 그(가룟유다)를 집어 삼켰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그 마음, 그 죄가 
결국은 스승까지 팔아넘기는 인간의 연약함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죠. 

결국 가롯유다는 열두 제자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배신자로 끝을 맺습니다. 

그는 시작과 끝이 달랐습니다. 
행1:17절에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그는 12명의 사도에 참여했습니다. 영광입니다. 
그런 예수님으로부터 직무를 받은 소명자 있어요. 
그러나 출발은 좋았지만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행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직무를 버리고..' 그 직무는 뭘까요?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직무입니다.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누가 나를 부르셨는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하늘이 부여한 직무를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는 주님이 부여하신 직무가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열심히 하는데, 자기 길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 제자들이 처음에는 다 그랬습니다. 
매사에 열심이었어요. 주님 옆에서 너무도 열심이었던 사람들인데 
알고 보니 주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것은 
그가 자기 목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일꾼은,  자기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목적을 향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본래부터 '자기의 길'을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 자신을 매 순간 진지하게 검증해 보아야 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제자, 사도'라는 존귀한 타이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신자였습니다.

여러분, 타이틀 보고 모릅니다. 교회 직분 보고 몰라요.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는다고 해도, 알 수가 없어요. 

12제자 중에 한 사람이, 배신자가 된다는 걸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나 자신을 확인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룟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어떻게 24시간 365일, 그것도 3년동안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고 있던 그 동료들도 

가룟유다가 배신자 라는 걸 몰랐어요. 

주님 외에는 아무도 몰랐어요. 
가룟유다는 철저히 속였어요. 

속임의 고수였어요.
그는 타락한 사람인데, 그 타락을 숨겼어요. 

여러분 죄가 완전히 들통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가짜일수록 포장이 더 탁월합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다가온다' 그랬습니다. 광명의 천사!
그러니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사람들의 평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진짜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는요,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가 가짜 같이 취급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진짜인가요?
나는 진짜 제자인가요?

결국 가룟유다는 끝까지 가지 못했어요.
그는 도중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 하게 되죠. 
맛디아가 가룟유다를 대신하여 제비에 뽑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까? 
내가 빠진다고 뭐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중단 되는 거는 아니에요.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전반전의 주역입니다. 
베드로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아니요 바울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지나고 그 뒤를 누가 잇습니까? 디모데가 잇습니다.
사도요한이 잇습니다. 

내가 안 해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져 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그 일에 쓰임 받는다면, 얼마나 큰 축복 이겠습니까!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영광 중에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신 게 어딥니까?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들이에요. 
우리는 실력이 없고, 우리는 감당할 수 없지만 
주님이 부르신 그 일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그 일에, 우리가 달려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뭘까요? 
자기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곁길로 빠지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막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가룟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그림자(어두운 부분)이었어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는 
빛만 있는 게 아니라, 어둠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의 배신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 할 수는 없었어요.
도리어 그의 악 마저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가룟유다는 그것으로 그의 인생을 비극적으로 끝낸 것입니다.
'인자를 파는 자는 화가 있으리로다'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막14:21

여러분, 오늘 나는 부름의 자리에 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가룟유다는 자기의 길을 걸어 갔어요. 

여러분, 우리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가요? 
아니에요. 그리스도에게 매인 자가 진정한 자유인 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고 
그리스도에 매인, 그리스도의 종들로 끝까지 완주하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 가룟유다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느낍니까? 
직접 팔아넘기는 않았지만, 다른 제자들 역시 가룟유다 못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십자가 상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 합니다.  *同苦同樂
특별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주옥같은 설교를 직접 들었습니다. 
여러분, 다양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에게 직접 '저자 직강'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예수님에게 말씀을 직접 코앞에서 들었어요. 
기적의 현장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신비로운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3년의 삶을 통해서 
그 동안에 얼마나 놀라운 경험과 역사들이 있었겠어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또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어요. 
시사하는 바가 참 커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수백~수천번 말씀을 듣고 듣는다고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다녔던 것만으로
좋은 신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햇수로는 신자임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의 사각지대'가 있어요. 
교회 봉사를 하고 있지만 은혜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상하게도 은혜를 받는 순간에, 그는 자리에 없어요. 
아니 은혜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영혼은 잠금 장치가 걸려 있습니다. 

말씀을 셀수 없이 듣고 들었는데 
하나도 말씀이 그 영혼에 파고 들거나, 스며 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가룟유다는, 예수를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니고 
그는 근본 예수를 안 믿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숱한 세월을 교회를 다녔는데, 기억에 남는 말씀이 없어요. 
그냥 무덤덤해요. 

예배 참여는 하지만,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말씀 통독을 하지만,  말씀의 깨달음은 없을 수 있어요. 

말씀을 듣는다고 다 듣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의미가 뭘까요? 

가룟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스며들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그 많은 설교, 그 많은 기적을 보고도 
그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어요. 
그는 완전한 생짜로 남아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배신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보시면,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은 제자들의 배신해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화답하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이용하고, 주님을 욕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입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셨습니다. 요15:15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주님의 사랑에 마땅한 반응을 보이며 살아왔는가요?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가룟유다를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따르는 자인가?
아니면 조직에 참여하는 그냥 멤버십인가? 

여러분,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관계성'의 차이입니다.

조직에 관계된 건가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 관계된 것입니까?

교회 라는 교회 조직에 속해 있는 것과 
그리스도께 속한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주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져 가고 있는가? 
나는 점점 더 변화되어져 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더 변질되어 가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있는가? 
세상을 닮아 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매 순간 우리 자신의 신앙을 검증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나는 예수의 제자인가, 아니면 배신자인가?' 

예수 이름을 위해 내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자인가?
아니면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인가? 
그 예수 이름에 나의 반응은 어떤 것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단순한 종교인으로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주님과 교제가 깊어지고 
그리고 내가 그 주님이 주신 직무에 최선을 다하고 

나의 직무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직무, 그 소명을 따라 살아가기로
힘쓰는 여러분들 되셔서,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설 수 있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신앙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신앙이 껍데기로만 존재하지 않게 하시고 
형식으로만 있지 않게 하시고 
종교적 활동으로 자아 만족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참 제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