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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원하느냐 요1:35~42 2020.01.26.출처
◑도입
오늘 나누고 싶은 말씀은 제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면서
참 좋아하는 말씀인데요. 제목은 "무엇을 원하느냐?" 입니다.
요1:35~36절 '또 이튿날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본문이 '다음 날(이튿 날)'로 시작하는 것은
그 전날에도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동일한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단 두번의 고백이었지만, 두 제자(안드레와 요한)의 인생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선지자가 말라기죠.
근데 그 말라기 이후에, 예언도, 묵시도 사라져 버린 영적 암흑기 4백년기의
침묵 시대를 깨고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 시대를 영적으로 각성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광야로 나오게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런 영적 거목이었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사랑과 존경의 눈빛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날에도, 요1:29~34절에 보면
총 6절에 걸쳐서, 상당히 길게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했어요.
근데 오늘 둘째 날은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두 제자의 인생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했다는 것이죠.
◑여기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싸인(뜻)을 어떻게 구별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싸인은, 고속도로에 있는 이정표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정말 중요한 인생의 목적지를 갈수록
이정표는 반복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두 번 메시아에 대해 증거)
예전에 어떤 여집사님이, 남편이 지방에서 파견 근무 중인데
남편이 지방으로 내려오라고 종용을 한다는 겁니다.
'제가 서울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내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여집사님이 저한테 갑자기 찾아오셔서 질문하셨습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근데 남편분이 지방에 가신지 얼마나 됐습니까?'
거의 10년 가까이 됐대요.
'그러면 그 동안 이 주제를 가지고 기도하신 적이 있었나요?'
있었답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질문했을 때,
그 동안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그랬더니 이 분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지방으로) 내려가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제가 그 분께 말씀드렸어요.
'다시 하나님의 뜻을 질문하실 상황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이미 주신 뜻을 받아들여야 되는 상황입니다.'
근데 여집사님은 그걸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자녀들의 교육 문제도 있고,
또 남편이 신앙생활을 굉장히 강하게 반대하는 분이라서...
지방에 가면, 신앙의 자유를 이제는 다 내려놔야 될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반복해서 말씀하셨다면
기존의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되는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하셔야 됩니다.'
라고 제가 권면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에 저와 여러분이 익숙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듣는 경우가 너무나 많고
또 그 말씀이 들려도, 내가 안 들으려고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겁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목적지일수록, 중요한 결정 일수록 반복해서 말씀하세요.
그런데 요한의 두 제자는, 두 번째로 (스승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자마자 결단을 했죠.
이건 대단한 믿음입니다.
명절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찾아 갈 때도
목적지 이정표가 한 번만 나오지 않아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신호를 놓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신호를 지나쳐서, 가던 길을 한 참을 되돌아 와야되는
그런 인생의 실수를 하지 않게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택하십시오!
요1:37 '그 말을 듣고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때가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1:39참조.
한낮의 작렬하던 태양빛이 이제 좀 수그러들 즈음이었죠.
두 제자가 평생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던 세례요한, 기존의 스승을 등지고
새로운 스승을 따라 나섰어요.
세례요한이 그 시대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제자는 완전히 새로운 스승을 따라나서는 모험을 한 것입니다.
인생과 신앙에서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가요?
어떤 조직이나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있는가요?
내가 이 길을 평생 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신호가 명확하다면, 새로운 길목에 들어서야 될 때가 있는 거예요.
그 때는 주저하지 말고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 외에는, 인생의 그 어떤 것도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최종 목적지는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 인생의 소중한 그 무엇도
예수님 외에는 가교 (이어주는 다리) 일뿐이지
목적지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내려놓는(포기)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싸인이 왔을 때 주저하지 마셔야 돼요.
그냥 예수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즉 나를 따르는 목적이 무엇이냐?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1:38
저는 이 본문 전체를 참 좋아하지만
특별히 38절 말씀이 영화적 상상력이 좀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주1)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세례요한의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에게 친절하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이냐면, '무엇을 원하느냐?'
예수님은 그들 안에, 어떤 갈망이 있는 것을 아셨어요.
이제 그 갈망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뭐라고 반문을 했냐면
'랍이여,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정말 탁월한 질문에, 탁월한 반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랍비와 제자들, 유대인들의 대화 방식이
질문에, 또 다른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을 해서 계속 대화를 예리하게 만들거든요.
예수님도 그들의 갈망을 보셨고,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러나 주님,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원합니다.'
'어디에 계시나이까?'란 뜻은 '당신을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두 제자는
'세례요한이 이 시대의 해답이라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그분을 따라다녔는데
그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당신이 해답'이라고 지목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당신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우리들을 당신의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요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정처없이, 정해진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셨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집 주소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을 사부,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자기 의향을 나타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이라고 질문하셨는데
제자들은 '당신을' 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면약간 이 구도를 놓고 봤을 때
'무엇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당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진정 예수님을 순수하게 구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구한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 질문을 참 좋아합니다. 주2)
자,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그럼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는가요?
◑와서 보라!
요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오후 4시 경)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와서 보라' Come and see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라는 소개조차 하지 않으시고
그냥 '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진정 알려면,
정말 그들이 눈이 열려서 메시아를 보려면
주님께 와야 하기 때문이었어요.
주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체험이 일어나야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귀로 들어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만약에 세례요한의 제자로만 있고
'아~ 저 분이 진짜 구원의 해답이시구나!'
이렇게 멀리서만 바라보기만 했다면
지식적인, 또는 이론적인 신앙으로 머물렀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그 자리를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점차 인격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내가 급할 때만, 주님께 반짝 기도하고 응답을 받는 신앙에
머무를 것인가?
그러면 내가 주님을 체험했어도, 지식적이고 의식적인,
인식적인 신앙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과 24시간 동행하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모태신앙이 다른 말로 '못 해 신앙' 이잖아요.
요즘은 '가나안 성도' 라는 말도 쓰지요.
가나안 성도란, 하나님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대해서도 기대감이 없고, 예배나 교회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너무나 많이 비슷해 줬어요.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받은 그런 은혜를 누리고도
하나님과 멀어지고, 예배와 멀어지고,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요?
그것은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
마치 하나님은 천국에서 '그래 너 돈이 필요하니? 내가 송금해 줄게'
그런 부모님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담임목사님께서 아주 일찍부터 자취생활을 하셨다는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초대하신다.. 라고 얘기 하실 때
이런 일화를 소개하셨어요.
자기 아버님이, 한 달이나 두 달 치 생활비를 보내 주시면 참 좋겠는데
꼭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와야 그제야 생활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만 아들 얼굴 한번 보니까!
그래야만 자식이 부모에게 얼굴 한번 보여 주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어떤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요?
내가 필요할 때만 반짝 주님 앞에 나아갔다가..
용돈이나 생활비가 필요할 때만, 그때만 아버지께 친절한 척 했다가
그리고 멀어지는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요?
이제는 여러분, 주님과 함께 식사하고
주님과 함께 새벽을 열고
주님과 함께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 시간을 보내고
저녁 시간을 보내는 성도..
살림을 할 때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
사람들을 만날 때도 주님과 함께 하는,
그리고 기도할 때도 주님과 함께 하는...
이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이게 와서 보는 신앙입니다. 동행, 동거하는 신앙!
기도할 때도 24시간 주님과 대화로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꿈나라에 갈 때도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신앙생활을
2020년에 시작하시면 좋겠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물론 저도 모태신앙 이어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지만
제가 중 3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뜨겁게 만났어요.
그러고 나서 정말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하게 됐어요.
길을 갈 때도 주님과 함께 대화하고
미술관에 갈 때도 (전에는 혼자 다녔는데) 주님과 함께 가고
영화관도 주님과 함께 가고..
공부할 때도 주님과 대화하면서 공부하고
모든 일에 24시간 주님과 대화하면서 함께 가니까
주님과 너무 빨리 친해지더라고요.
정말 좋은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라고요.
기도할 때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더라고요.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먼발치에서 신앙 생활이 10년, 20년, 30년 평생
그 기간이 얼마나 길고 짧은지의 문제가 아니라
계속해서 세례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그와 함께 머무는 사람들도
어마어마한 영적인 삶을 살았다고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삶이 시작되지 않으면,
24시간 주님과 함께 머무는 신앙생활이 시작되지 않으면..
딱 거기까지에요. 신앙이 성숙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새로운 결단을 하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놀랍게도 어떤 기적 행함이나, 나의 헌신이나, 사역이 아니에요.
그것보다 먼저, 우선적인 것은
그냥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에요.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이 가장 갈망 하시는 것,
'하나님의 로망'이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내 백성이 되는 것'
이게 하나님이 꿈꾸시는 거예요.
'나의 장막을 너희 가운데 펼치고, 우리가 함께 거하는 것' 요1: 14
하나님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노래하시는(원하시는) 내용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고, 고민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인데
24시간 천국을 체험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천국은, 화려해서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고난이 없기 때문에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에요.
여러분의 삶에 24시간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여러분, 이 땅에서 천국을 체험할 줄로 믿습니다.
▲명절이 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자녀는 부모님을 한번 찾아가서 뵙는 게
대단히 큰 효도를 하는 것 같잖아요?
하지만 부모님은, 하루하루 늘 자녀 생각을 하는 것이죠.
최근에 어떤 성도님이, 동창들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굉장히 공감했다는..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아들이 이제 좀 나이가 들면, 부모님하고 사진도 같이 안 찍으려고 하잖아요.
근데 어느 날 아들이, 엄마하고 함께 사진을 찍어 준 거에요.
그것도 굉장히 밝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 준 거에요.
드문 일이지요.
청소년 아들은 이렇게 엄마와 사진 한 번 같이 찍어준 것만 가지고도
자기가 큰 시혜를 베푼 것처럼 여깁니다.
근데 그 사진속에서 엄마는, 아들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마치 연인처럼!
아들은 엄마에게 한번 웃어 주며 사진 같이 찍어준 게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만
평생 그 부모는, 자식 바라기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성도의 관계 비유임)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거에요.
▲자 39절에 보면, 오후 네시 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오후 4시는요. 이스라엘 땅에, 당시에 전기가 없던 시절이잖아요.
주님은, 해가 지기까지 불과 2~3시간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나누셨겠죠.
좀 더 길게 대화를 하셨다면,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면서 대화를 하셨겠죠.
그런데 그렇게 한 밤을 지내고 나서, 이 두 제자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1:40~41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안드레 입니다.
근데 다른 한 사람은 왜 소개를 안했을까요.
요한복음에서 좀 약간 불편하거나 애매하게 자기 소개를 안 하는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 바로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이죠.
그래서 세례요한의 바로 곁에 있었던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서
대뜸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를 찾아냈다고..'
요한과 안드레는 예수님을 하루저녁 만나고 나서
그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여러분, 하루저녁을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분이 머무시는 곳에서, 주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대화한 결과
주님을 놀랍게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리스도인 것을!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과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자, 안드레는 막 흥분이 됐어요.
그래서 자기 형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게 42절 말씀입니다.
'(안드레가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아마 시몬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거예요.
시몬의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야고보와 요한은 부모가 등장을 하죠. (세베대, 나중에 엄마가 청탁)
근데 시몬은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돌아가신 거 같고
장모만 모시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봐서
장인도 일찍 돌아가신 거 같아요.
장모님을 모시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되는 생계형 가장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호숫가를 떠나기 어려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책임에서 자유로웠던 안드레는
일찍부터 종교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거에요.
시몬 안에도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있었죠.
영적인 삶을 살고 싶은 갈망이 있었지만
그런 길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현실의 상황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걸어오는 시몬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이제 너는 게바 라고 불릴것이다.'
이 짧은 한 문장 가운데 예수님은
시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 거예요.
'요한의 아들' 이라는 그의 과거를 알아 보셨고
'어부 시몬'이라는 그의 현재를 알아 보셨고
너는 게바, 즉 반석과 같은 믿음의 인물이 될 것이라는
그의 미래를 알아 보신 거예요.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시는 분입니다.
나의 과거가 어떠하든, 현재가 어떠하든,
나의 미래를 보실 수 있는 분은 주님 한 분이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영혼에 거울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앞에 서야만,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임재 앞에 서야만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드러나고 해석되게 됩니다.
내 인생의 과거가 아무리 상처가 많을지라도
그분 앞에 서면 치유될 줄로 믿습니다.
내 인생의 현재가 아무리 불안해도, 그분 앞에 서면
그분의 평강이 임하실 줄로 믿습니다.
내 인생의 미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암울할지라도
그 분 앞에 서는 순간, 그분의 약속의 말씀, 거룩한 비전이
우리 가운데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것이 놀라운 축복인 것이죠.
◑조금 부족해도, 따라가다 보면.. 온전해 집니다!
다시 본문의 앞으로 돌아가서
38절에, 두제자가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께 처음 나왔을 떄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는냐?' 이렇게 질문 하셨어요.
영어로 seek 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질문을 하셨을까요?
무엇이 아니라 '주님을 구합니다' 라고 제자들이 정답을 바르게 대답했잖아요.
정말 그들은, 정답을 대답한 것처럼,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는 건 맞았어요.
근데 문제는 그들이 갈망했던 메시아는,
정치적인 해방의 지도자였습니다.
자신들의 영혼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 주실 분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어요.
주님을 통해 그들이 원했던 것은
정치적인 해방자,
즉 전혀 다른 이상과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죠.
근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3년을 제자 생활을 했잖아요.
그리고 나서는 전혀 엉뚱한 다른 야망이 생기게 됐어요.
'주님이 왕이 되시면, 우리도 높은 자리를 한 자리씩 차지하겠다...'
고상한 비전은 사라져버리고
개인적인, 일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지위와 명예를 향한 갈망이 커진 거예요.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시작했던 거 같은데
어느새 양 손으로 하나가득 세속적인 것만 갈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주님을 뒤따라가는데
주님이 나를 뒤돌아 보시면서
'넌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시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요?
두 제자처럼 정답으로
'주님 저는 다른 걸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물질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만을 원합니다!'
이렇게 놀라운 명답을 하실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우리들 자신 대부분은
성공을 원합니다. 자녀의 성공을 원합니다.
물질을 원합니다. 지위를 원합니다. 건강을 원합니다.
여러 가지를 요청하겠죠.
여러분, 구하셔도 돼요. 주님이 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다만 문제는, 이 제자들이 놀라운 정답을 이야기 했지만
그게 사실 미숙한 시작에 불과했다는 거예요.
우리도 안드레와 요한처럼
'주님, 다른 거 필요 없습니다. 주님만 원합니다.' 고백할 때도 있죠.
그러나 그 고백이 너무나 일회적이고 일시적일 때가 많다는 게 문제예요.
그들의 갈망이나 대답이 상당히 순수해 보였지만
사실 영적인 기도 같아도,
그들은 세상적인, 인간적인 것을 구하는 마음이 강했어요. (세상적 메시아 구함)
그러면 예수님께서
'야 너희들 그렇게 대답하지만, 사실 너희들의 본심이 그게 아니거든?'
이렇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근데 그렇게 얘기 안 하셨어요.
그냥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와 보라!'
▲그러면 도대체 그들의 대답이 불완전 함에도 불구하고
'와서 보라, 컴앤씨' 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는, 예수님 당신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컴앤씨 Come and see!
'네가 오기만 하면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네가 나를 따라 오기만 하면, 네가 눈을 떠서 진짜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라는 말씀이에요.
오늘 현재적인 순종과 결단을 우리가 내어 드리면
미래적인 결과와 열매는 주님이 주시겠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주님이 책임지신다는 거예요.
▲비슷한 예를 말씀드리면,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영어 공부를 정말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열심히 하잖아요.
그러면 영어에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세계도
내가 하나님의 세계에, 이제 입문이고 비록 시작일지라도
여러분이 계속 말씀을 파도가 계속 치듯이
말씀을 계속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계속 하나님 임재의 자리인 기도로 엎드리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의 영적인 세계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근데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 세계가 열리기 직전까지 가다가 그만 멈춰요.
그 앞에서 멈춰요.
제가 영문학 전공해서 대학에서 2년 공부하다가
카투사에 들어갔거든요. 근데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생활에 영어가 익숙해지고, 영어가 익숙해지면
영어로 꿈을 꾸게 될 거라고요.
카투사에서 복무한 지,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진짜 영어로 꿈을 꾸더라고요.
자나 깨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 할까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에) 출석도장 찍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신앙 생활을 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새벽을 깨우는 것부터
아침 시간에, 사람들을 만날 때, 일할 때에도
늘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해 보세요.
어느 날부터 성경을 펼쳐서 읽으면
이것이 글자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으로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응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사람과 대화 하면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거예요. 할렐루야!
저는 여러분이 그런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한 가지 '와보라!'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의 갈망에 대한 예수님의 용납하심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여전히 미숙했고,
자기가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구하고 있었어요.
'어~ 내가 멋진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너의 생각은 틀렸고, 너의 방향은 잘못했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따라와라!'
'야 너 그거는 아니지!' 이렇게 얘기 안 하시고
'그냥 따라와라!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굉장히 중요한 두 단어가 있는데
'무엇을 구하느냐?'에서 구한다 라는 단어와
그리고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라는 단어입니다.
근데 '메시아를 만났다'가 원래 원어적으로는 '찾아냈다'입니다.
그런데 구하는 자가 찾게 된다 라는 표현이
성경에 그대로 나오는 구절이 있어요.
마태복음 7장 7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Seek and you will find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우리말로는 두 단어가 똑같은 단어로 번역을 했지만
사실은 다른 헬라어 단어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게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come and see, seek and find
'네가 오기만 하면, 내가 너에게 보여 주겠다.
네가 나에게 구하기만 하면, 내가 너에게 찾게 해 주겠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주님께 찾고, 구하고, 따라 오기만 하면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나를 찾아내고,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전 인생과, 전 신앙의 과정 가운데
나의 눈을 열어서 본질이 무엇인지를 경험 시켜주겠다...
그건 주님이 책임진다는 거예요.
다만 따라 오겠다고 했다가 중간에 멈추지 말라는 거에요.
이제 조금 믿음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멈추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길을 찾아갑니다!'
왜 제가 갑자기 사랑 얘기를 꺼내는 걸까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결혼에 대한 걱정들이 많아요.
뭐 결혼해서 자녀키우는 이게 만만치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생활비도 걱정이고, 자녀 양육도 걱정이고, 교육비도 걱정이고
뭐 재정에 대한 걱정, 다 걱정거리인 거죠.
그래서 결혼을 아예 엄두도 못 내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자 그러면 과거에 어른들은 다 알아서 결혼했을까요?
결혼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를 다 알아서 결혼을 했을까요?
그런데 참 용감하게 결혼을 해서
열심히 일하고 자녀들을 다 키워내신 거죠.
이번에 목회사관학교가 예전에는 40일새벽기도회와 떨어져 있었는데
40일 끝나자마자 목회사관학교 4일 동안
이번에는 4일 동안 정말 쉬는 프로그램 하나도 없이, 액티비티도 없이
4일 동안 계속 앉아서 강의만 들었거든요.
너무 강행군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관 딱 끝나고 나서는 다 서울로 돌아가셨는데
저는 거기 남아서 3일 동안 가족여행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다들 저를 보시고는 '어휴, 좋으시겠네요' 이게 아니고
'대단하십니다!' 그러더라고요.
두 가지 의미이에요.
한 가지는, 그렇게 강행군을 했는데 또 무슨 무리를 하려고 그러냐?
또 한 가지는 사춘기 아들들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거든요.
애들이 어렸을 때는 제 몸이 힘들었지만
애들이 이제 사춘기가 되니까,
그분(자녀)들 오늘 분위기가 어떠신지 눈치를 제가 보느라고..
자녀들 입장에서는 부모가 가자는 대로 따라 가 주는 것을
굉장한 혜택과 은혜를 베푼 걸로 생각을 하는데...
제가 아들들의 특성을 아니까
별로 아빠와 대화는 원치 않고
액티비티와 맛있는 거만 원하니까
계속 (아이들을) 잘 챙겨 드렸어요.
그러다가 이제 저녁에 한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를 하자 그러니까
'아빠가 너무 대화를 자주 하자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딸들은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 한다는데
아들들은 왜 얘기를 안 하냐?
여기 여행 왔으니까 좀 한번 너희들 얘기를 들어보자!' 그랬더니
'아빠, 우리는 딸이 아니니까, 딸이 하는 것을 원하지 마세요.
그래도 우리집처럼 아들들이 아빠랑 친한 집은 없다는 걸 아셔야 돼요!'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뭐 부모가 여행가자고 해서, 따라 오는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죠.
어느새 저와 두 아들, 세 남자가 키가 똑같아 졌어요.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랑 하나로 헌신했는데,
계속되는 인생의 길을.. 계속해서 그 사랑이 찾아가는 거에요.
그 앞 길이 어떻게 될 줄 알아서, 인생의 로드맵 전체가 보여서
결론은 이렇게 될 거라는 보장이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사랑으로 헌신하면
그 다음, 그 다음 한 걸음, 한 걸음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길을 가는 거예요.
하물며 인간도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정말 우리를 위해서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 인생을 왜 책임지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사랑도 모험이고, 헌신도 모험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헌신하는 이 모험은
주님이 반드시 책임지실 줄로 믿습니다.
2020년 새해에, 신앙의 새로운 차원의 결단을 하시면 좋겠어요.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주1)
영화적 상상력으로 본다면, 첫 번째 샷은 롱샷 입니다.
세례요한 옆에 두 제자가 있고,
저 멀리 예수님을, 멀리서 원거리에서 바라보는 샷입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이 가까이 다가가서 예수님이 뒷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죠.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뒤돌아서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얼굴 모습을
클로즈업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기겠죠.
어떤 모습이셨을까요?
한 낮의 강한 햇빛 때문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지 않았을까요?
늦은 오후에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서, 머릿결이 살짝 날리지 않았을까요?
온화하면서도 담담하신 예수님의 표정이.. 여러분 상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주2)
저는 성경을 읽을 때, 질문을 참 좋아합니다.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입니다.
모든 질문이 왜 좋은 질문이냐면
모든 질문에는 이미 답이 내포되어 있거나, 힌트가 주어져 있어요.
모든 질문에는 질문자의 삶과 내면세계가 투영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질문이라는 작은 파편을 통해서
그 사람의 영혼이 보이고,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이거든요.
누구에게 질문하느냐가 참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듣겠지만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듣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참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을 더 궁금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하십시오.
우리는 주님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고전13장 표현에 의하면, 천국 가는 그날까지
우리는 청동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주님을 알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기도가운데 나의 인생, 나의 신앙의 길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거예요.
주님께 질문하는 사람이, 주님의 대답을 듣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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