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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8장 3~25 사울이 무당에게 묻다

LNCK 2021. 12. 9. 15:40

◈사울이 무당에게 묻다            삼상28:3~25                 2021.11.21.출처

◑서론 : 영적 지도자가 부재해서 생기는 혼란들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영적 지도자가 죽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결국 다윗은, 블레셋에 아기스를 찾아가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되고 

사무엘이 죽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일어나는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서 
본문은 사울은 무당(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무엘에게 못 물으니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 스토리의 골자입니다. 
그래서 다윗, 사울 둘 다 위기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런 위기에 빠질 수 있어요.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안 가진 사람이나 
잘 믿는 사람이나/ 대충 대충 믿는 사람이나     *다윗/ 사울
우리는 동일한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영적 지도자를 놓치면 안 됩니다.

따라서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두려움에 빠지다

(그래서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까지 찾아간 것입니다)

삼상28:4~5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수넴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어요.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항상 동 - 서로 부딪혔는데     *동쪽은 이스라엘, 서쪽은 블레셋
이번에 블레셋은 특별히 북쪽으로 군대를 몰아서 
갈릴리 호수 근처까지 올라가서 수넴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도 북쪽으로 가서
수넴 근처에 있는 길보아 산에 진을 치게 됩니다. 

길보아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한 눈에 블레셋 군대가 사울의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 많은 숫자나 위세에 사울이 눌린 거예요. 
그래서 두려워졌나 봅니다.

여러분, 두려움!

이게 문제의 핵심이에요.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위기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건 아니에요. 

사울도 나름대로 전쟁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한두 번 싸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전에 몇 번 승리한 적도 있습니다. 

비록 국지전이었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은 
사울 휘하에서 블레셋을 격파했던 적이 있었죠. 

근데 성경은 왜 숫적으로 열세인 이스라엘 군대, 
무기 면에서도 지극히 열세인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이나 다른 이방을 이겼는지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삼상14: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결정 때문에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전세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무기의 우열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전쟁' 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을 때는
전쟁에서 늘 승리를 안겨주셨어요. 

그 때문에 실제로 사울은 초기에 승승장구 했습니다. 
그도 전쟁터에 가는 곳마다 몇 차례 이겼어요. 

삼상14:47~48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재위 초기에 이렇게 사울은 마치 전쟁에 능한 용사처럼 
승리의 맛을 보았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셨고,  
사울이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을 치루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사울이 왜 두려워졌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에요

뭐 언제는 수가 많았습니까? 
앞서 전쟁 때는 불과 3천 명으로 있다가 
그 중에도 다 도망가고 6백명만 남았어요.  삼상14:2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자 딱 한 명 데리고 적진으로 뛰어듭니다. 
그 6백명으로도 전쟁을 승기를 잡아서, 승리로 이끌어 가는 것을 보게 돼요. 

따라서 지금 블레셋 군대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마음이 떨리는 상태,  
이거는 지금 아주 큰 위기 중에서도 위기라는 것입니다. 

적이 강해서 위기가 아니라 
적을 대하는 사울의 마음이 지금 불안하다는 게  위기의 본질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었어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내 앞에 닥치는 위기가, 위기가 아닙니다. 
진짜 위기는,  
나에게 위기기 닥쳤을 때, 내가 그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며 
그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내가 하나님 편에 굳게 서 있는가?

그러면 어떤 위기도.. 기회로 변하고요, 

나에게 그 믿음의 꿋꿋한 자세가 흔들릴 때 
그게 진짜 큰 위기라는 거지요. 
지금 사울이 그래서 큰 위기를 맞이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두려움의 문제에 직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나온다고 할 정도로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계속적으로 말씀합니다. 

세상은 이 두려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늘 자신이 가져야 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다 높은 자리를 원합니다. 힘 있는 자리를 원해요. 
그 자리에 가야 사람들이 자기에게 굴복하거나,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힘 있게 보일 것인가?' 
이걸 늘 염두에 둡니다.

지금 사울이 두려움을 느끼고 떨리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물론 우리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시험장에만 들어가면 떨리는 사람도 있고 
첫 데이트를 해도 떨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입사시험을 봐도 그냥 면접 때 두렵고 떨리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사람마다 포비아 증세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 사울은, 여러 번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적도 알고, 자기도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고 떨리는 까닭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 편에 바로 서 있나?' 
'하나님 편을 떠났나?' 를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편에 굳게 서 있다면 
태산이 무너져도 두렵지 않아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게 그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면 더 두려워진다

삼상28:6~7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앞서 3절에서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다 쫓아내었더라' 28:3
이스라엘의 왕들은, 이 일로 
그가 의로운 왕인지/ 불의한 왕인지가 분별되는 기준이에요.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느냐?
얼마나 우상을 멀리하느냐?

얼마나 신접한 여인이나 무당이나 박수나             *무당은 여자, 박수는 남자무당
그런 영매, 초혼술사, 강신술사.. 이런 사람들은 멀리하느냐? 
이게 왕이 의로운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사울은 재위 초기에는 그 무당들을 다 쫓아내었어요. 
근데 지금은 자기가 두려움에 휩쌓이니까 어떻게 합니까?

도리어 무당을 찾고 있어요!

지금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사울에게 대답이 없습니다. 
아니, 자기가 하나님을 진작에 일찍 떠나 놓고 나서 
지금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면 어떡합니까? 

구약성경에서, 꿈이란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한 방편입니다. 
우리는 꿈을 통해서 환상을 보기도 하고 
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얻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게 사라지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꿈꾸고 싶어도 꾸지 못하는 때가 온단 말입니다. 그런 순간이 있어요. 

왜냐면 사울이 하나님과 거리가 자꾸 멀어지고, 
괜히 다윗을 추격하면서 하나님께 계속 불순종하니까

(귀신에게 사로잡히니, 귀신이 주는 것이) "극심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림으로도 대답하지 않는다' 28:6
그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제사장들을 다 죽인 사람이에요. 
그 제사장의 마을인 놉 주민들을 완전히 진멸하는 학살극을 벌인 사람입니다. 삼상22:18~19

그래놓고 이제 와서 하나님께 와서 뭘 묻겠다는 것이죠?

선지자도, 사무엘이 죽은 이후로는 
선지자 다운 선지자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지금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수 있는 선지자는 
더 이상 찾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죽었으니까요!

어떤 방법으로도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길을 
스스로 다 차단해 놓은 상태지요. 

그래서 지금 두렵고 난감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내려서는 안 될 명령,
적어도 이스라엘 왕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결정을 내립니다. 

신하들에게 신접한 여인을 찾아보라는 겁니다. 
답답한 나머지.. 자기가 다 쫓아냈던 무당을 찾아보라는 겁니다.

누구도 이런 사울의 잘못에 대해서 간언하는 자가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건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는 선지자자도 없었어요. 

여러분, 그게 비극인 것입니다. 
지도자의 가장 큰 위기나 비극은 
자기 옆에 반대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이건 안 된다'고 얘기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가 잔소리하면 행복한 줄 아십시오. 
사사건건 안 된다고 발목을 잡으면, 
훌륭한 아내라고 인정해 주십시오. 

남편에게 관심이 없으면, 이러나 저러나 누가 잔소리 하겠습니까? 
그래도 평생 잔소리 하는 사람이, 부모하고 부부 밖에 더 있습니까? 
그 말이 듣기 싫다고, 딴 데 가서 엉뚱한 짓 하면.. 바보 같은 짓이에요. 

하나님께서 직접 말을 해서 안 들으니까 
곁에다 껌딱지처럼 딱 붙여 놓고,

계속 그런 얘기를 그냥 딱따구리처럼 쏘아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잔소리를 듣다보면 머리가 아플 때가 있지만, 
여러분, 곁에서 내게 반대할 사람이 있다는 것.. 이게 중요한 거예요. 

위대한 정치인이란, 반대자를 포용할 줄 아는 사람 아닙니까? 
자기를 가장 반대한 사람을 각료로, 국방장관으로 세우는
그런 위대한 정치인들이 있잖아요. 
패거리 끼리 모이는 게 무슨 정치입니까? 그건 뭐 폭력집단이죠.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이것 만은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레20:6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여기서 접신한 자는 무당, 
박수무당은 남자 무당을 말합니다.
접신하는 사람들 중에서 여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무당에게 묻는 것을 '음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래가 불투명하고 미래가 불안해 보여도 
찾아 갈 사람이 있고/ 찾아가서 안 될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해도
찾아 갈 사람이 있고/ 찾아가서 안 될 사람이 있잖아요. 

돈도 빌릴 데가 있고, 빌려서 안 될 데가 있잖아요. 
무당은.. 한번 잘못 관계를 맺으면 못 빠져 나옵니다. 죽음의 길이에요. 
자기 목숨을 담보로 그에게 맡기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무당과 점쟁이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그게 우리의 파멸의 길, 영혼이 죽는 길,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대로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다급하고 힘들어도 
절대로 여기는 쳐다 볼 생각도 말아야 됐다는 말이에요. 

근데 온 TV에, 미디어에 
뭐 점보는 일, 운세 보는 일.. 이게 지금 가득합니다.

목사 많다고 흉보는데, 목사보다도 훨씬 무당 숫자가 많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재미로 무슨 점을 보질 않나, 
그걸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가는 거죠. 

◑무당이 음부에서 사무엘을 호출하다?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가면, 또 신기하게도 또 자기 과거를 다 알아 맞힙니다. 
이름을 알아 맞추는 점쟁이도 있고, 
호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알아 맞춥니다. 

그런 걸 한번 겪고 나면, 거기에 안 빠져들면 이상해요. 
그래서 사사건건 묻기 시작하고, 사사건건 복채 갖다주고
사사건건 거기에 매달리다가... 그냥 거기에 평생 메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 하시지 않습니다. 

근데 세상의 여러 나라마다, 정치 지도자들, 경제를 주무르는 사람이든지 
뭐 문화계 인사이든지.. 점보러 다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용한 사람 있으면 자기만 갑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끌고 다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 만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아주 그냥 코믹하게 얘기를 하는 게 있어요. 
사8: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우상)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이렇게 대답하라고 대답까지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 산 자의 일을, 죽은 자에게 묻느냐?' 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물어야지요.

나중에 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이 
거기에 멀쩡한 선지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보냈다가  *왕하1:2
자기 부하 군인들 100명 씩이나 죽게 되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누구에게 물어라고요? 
하나님께만 물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안 들리는데요?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에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읽기에 힘들다고, 신자들이 안 읽어서 그렇지 
성경을 매일 읽는 사람 치고, 답을 얻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는 혹시 답을 못 찾아도 
여러분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서 답을 얻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사야는 애굽이 멸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도 이유를 밝혀줍니다.
한 나라가 망하는 이유도, 그들이 무당에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사19:3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의 계획을 내가 깨뜨리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

이런 짓 하다가 나라가 망한다고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찾아가서는 안 될 사람한테 찾아가고, 
물어서 안 될 일을 계속 묻다가.. 
애굽 나라가 거들났다는 겁니다. 

이런 얘기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삼상28:8~9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엔돌은 수넴 옆입니다. 지금 사울의 진지와 가까운 곳입니다.
사울이 지금 엔돌에 찾아가는 이유는, 일단 가까운 곳입니다. 

그러니까 적군에게 노출되지 말아야 되니까 변장을 했고 
또 현직 왕이, 자기가 다 쫓아냈던 무당을 새삼스럽게 찾아가니
당연히 변복, 변장을 했겠지요. 

:10~13절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신접한 여인)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1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성경에서 해석상 가장 혼돈스러운 구절입니다.
굉장히 해석들이 많습니다. 

그 해석들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1) 무당이 불러올린 사무엘은 속임수!  
귀신의 속임수.. 라고 보는 큰 관점이 있습니다.    *이 설교의 관점

2)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울을 긍휼히 여기셔서 
무당을 통해서, 사무엘을 보내서, 마지막 경고를 하신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의견이 크게 두 갈래입니다.

제 (조정민 목사) 관점은 이렇습니다. 
귀신들을 경험해 보고, 또 이 땅에서 일어난 수많은 귀신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가 이번에 설교 준비를 하다가, 한 주 동안 많은 자료를 찾아 보았어요.) 

근데 귀신들은, 귀신같이 사람들의 일을 알아맞힐 뿐만 아니라 
귀신같이 죽은 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게.. 이게 장기(자기 은사)입니다. 

그래서 한번 듣고 나면, 가슴이 섬짓해서, 안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무당(귀신)은 천의 음성을 가지고 있어요. 누구든지 흉내낼 수 있어요. 

사무엘이 아니라, 무슨 모세를 흉내 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이런 일들에 아예 연루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번 그냥 어쩌다 재미로 따라 갔다가
한 번 어떻게 '알아 맞혀 봐라!' 했다가, 거기에 걸려들면 못 빠져나옵니다.

마치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나 마찬가지예요. 
그만큼 악한 영도 영적이고, 
악한 영도 영력이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혹할 만 하죠.
그래서 사실 두렵게 (경계하는) 생각을 해야 마땅 해요. 

지금 신접한 여인이 뭘 불러 올렸다 했는데, 
여러분,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사무엘이 죽어서 어디러 갔을까요?

우리는 성경 이외에 다른 데서 답을 찾으면 안 됩니다. 

눅16장과 23장에서 실마리를 조금 얻을 수 있어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어디에 갔습니까? 

눅16:22~23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둘 다 같이 죽었어요. 
한 사람은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왜냐면 눅23장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우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눅23:43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은 낙원으로 가는 겁니다.

근데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음부'는 죽은 자가 가는 곳인데, 
그래서 음부 안에도 

-고통을 겪어야 할 곳과   (부자가 간 곳)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나사로, 우편 강도가 간 곳)

이렇게 두 군데로 나눠져 있다고 보는 설이 있어요. 

음부(하데스, 스올)란 죽은 자들이 가 있는 곳인데 
그것은 (부활 때까지) 임시 거처, 정거장과 마찬가지이고

그 후에 우리가 다시 부활할 때, 몸을 입고
그 몸과 영이 결합하여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거쳐서 
천국과 지옥으로 다시 갈라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충, 성경 전체를 통해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원에 이미 들어갔다는 것은 
천국을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비록 낙원에 있지만, 천국에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해석을 하거나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가 장례를 치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지금 아직 천국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이지만 (부활 전이라서)
천국에 들어간 거나 다름 없이 여기는 거죠.

반대로, 부자는, 지금 (나사로가 물을 주러) 갈 수 없는 곳에 가 있다는 겁니다.
둘이 서로 교통과 왕래가 불가능한 곳에 가 있습니다. 

근데 이렇게 사무엘을 불러서 뭐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는 
'귀신의 장난'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는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다니까요!

히브리서 말씀대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나면 심판이 있으리로다' 히9:27
심판이란,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 그 거처가 정해지는 
마지막 결정적 사건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이 
뭐 이거 가지고 논문도 쓴 사람이 많지만
찾아봐야 별로 뚜렷한 결론이 없어요. 

저는 여러분들이 성경이 말하는 것에 그냥 안심하고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너무 깊이 들어가다 보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요.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14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여러분 천국에 가면 (두꺼운) 겉옷 같은 거 안 입습니다.   *mantle 
지금 사울이 갑자기 두려움을 갖게 된 이유는 
그가 아말렉을 칠 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이 이미 당신을 떠나셨다' 라고 그때 알려 줬어요. 

그때 사울이 사무엘을 붙잡고 같이 가자고 부탁하다가
사무엘의 겉옷이 찢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삼상15:27

어쩌면 겉옷이 찢어진 거 입고 나타나겠죠. 
어쨌든 사울은, 사무엘의 겉옷에 대한.. 어떤 각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입은 누구(유령)를, 무당이 봤다는 말을 듣고서 
사울은 '저가 사무엘이 확실하겠구나!' 이렇게 짐작해 버린 것입니다. 

지금 무당 눈에는 뭐가 보이지만, 사울의 눈에는 안 보입니다
무당이 지금 그렇게 '겉옷 입은 사람을 봤다'고만 얘기를 해 주는 거예요. 

그럼 무당의 입술에는 누가 들어 있어요? 
이미 무당의 입술은 귀신이 사용하고 있는 입술입니다. 

지금 그 유령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는데,
사무엘은 덮썩 그게 (정확히 확인도 안 해보고) 사무엘이라고 믿고
절까지 했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누구한테 절을 한 겁니까?
여러분, 사무엘은 보지도 못하고 
사무엘 행세를 하는 무당에게 절을 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한 나라의 왕이, 찾아가서 안 될 곳을 가더니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고 
듣지 않아도 될 야단을 맞고 
그리고 볼썽사나운 꼴을 겪는다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데 찾아가서 
볼썽사나운 꼴을 보지 말고, 소리도 안 듣게 되길 바랍니다. 

점치러 가면 무당이 대충 말을 놓습니다. 존댓말 쓰지 않아요. '하대'한다고 하지요.
근데 무당이나 고객이 잘 될 줄 아십니까? 무당 자식 잘 된 거 봤어요?

무당들이 맨날 그렇게 돈 긁어모으더니, 본인들은 다 사기당합니다. 
돈을 사기 당해요. (그래서 무당이 부자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사19:3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의 계획을 내가 깨뜨리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

◑무당이 과거는 혹시 맞춰도, 미래는 못 맞춘다

:15~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하는 말 (15~19절)
중에 대부분의 과거지사는 이미 알려진 일입니다. 
특별한 신통력적인 예언으로 맞춘 게 아닙니다.

귀신은 <과거>지사를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족보의 내력까지 귀신들은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용한 무당은, 집안에 누가 아무도 모르게 혼외자를 출산한 사실까지도
알아내는 무당이 있다고 합니다. 정작 그 집안 식구는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무당을 찾아가서 그 얘길 듣고 나면 
그냥 그 무당을 안 믿을 도리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절대 믿지 말아야 될 것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 라는 것입니다. 

무당 중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미래지사는 전부 추측' 이라는 것입니다.
확률은 반반이니까요. 맞거나/틀릴 확률이 반반!

'내일 저녁에 누가 죽을 거다' 이렇게 예언해 놓고도 
만약 안 죽고 살면 '그가 기도해서 죽음을 피하고 살아났다.' 그러겠죠.
그러니 예언이 틀려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자기 예언대로 된 거고요. 

저는 여러분들이 그들이 말하는 미래지사에 절대로 속지 말게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는 혹시 용한 귀신이 알 수도 있어요. 근데 그건 당신도 잘 압니다. 자기 과거니까요. 
그러나 미래는 하나님께 맡겨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맡길 때 여러분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미래가 될 것이지만 

여러분의 하나님을 떠나서 그(무당, 점쟁이)들을 의지하게 되면
여러분의 미래는 확실하게도 멸망과 파멸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수치 당함

:20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사울은 또 장기(잘하는 재주)가, 무슨 큰일 나면 금식하는 거예요. 
그전에도 금식 하다가 아들 요나단을 죽일뻔 하지 않았습니까. 
금식해서는 안 될 때 괜히 금식을 한 거예요.
(아마 20절도 사울이 금식한 모양입니다. 너무 의기소침에서 식사를 안 한 거죠)

:21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가 심히 고통 당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순종하였사오니
22 그런즉 청하건대 이제 당신도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내가 왕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하니
23 사울이 거절하여 이르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의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24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가져다가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25 사울 앞에와 그의 신하들 앞에 내놓으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여러분 이 모습을 한번 지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얼마나 그 몰골이 처량하고 한심한 몰골입니까? 

사울은 한 나라의 왕이에요. 
무당 집에 가서 밥이나 얻어먹을 처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에 가서 비굴하게 땅에 엎드려서 절할 처지가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가지 않을 곳에 가서, 겪지 않을 수모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의 뜻 안에 죽을 것이고 
살아도 하나님의 뜻 안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사는 것도 치사스럽고 
죽는 것도 부끄러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우리는 어차피 다 죽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죽음을 선택해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비참한 죽음, 수치스러운 죽음, 자식들에게 고개를 못 들게 하는 죽음 
그런 죽음을 맞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했으면 
여호와께 대한 충성, 여호와께 대한 믿음, 사랑, 소망을 
절대로 변절치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절하는 자에게는 변절하는 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리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신실하게 완주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재위 처음에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이죠.
신앙은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중요합니다. 
끝이 더 중요할 수도 있죠. 

우리는 딱 좋은 믿음의 길을 출발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중에서, 다 우리가 믿음의 마지막 경주까지 
완주 한다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의 신앙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분(하루 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오늘 하루 분의 신앙으로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안심 하지 마십시오. 누구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당했던 것처럼 
우리를 집어 삼키기 위해서,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 믿음의 경주를 이겨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