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함께 나누게 될 시99편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입니다. 모세의 기도일 뿐만 아니라, 모세가 그의 인생의 노년에 이르러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요, 또 우리에게 남겨진 시입니다.
시90 편에 나타난 단어의 무게, 90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의미를 우리가 묵상할 때는 인생을 짧게 살은 청년 때에 고백할 수 없는 그러한 고백입니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이죠. 어릴 때는 '이렇게 시간이 중요하구나' 그렇게 깨닫는 그런 애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해 두 해 지나가면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나이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거부합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 중에는 앤티에이징, 그렇게 나이를 들어감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그런 단어가 붙여져 있는 상품은 아주 히트상품이 되는 거죠.
안티에이징, 이것은 사실 거만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말이죠. 나이듦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거기에 우리 모두가 다 속고, 또 스스로를 속이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이 점점 나를 피하는 것 같고 또 사회에도 모든 것을 성취중심, 또 생산성중심, 또 존재보다는 소유중심.. 이런 사고방식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점점 나이 들고 기력이 쇠하는 그런 노년에 때에 있는 분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키고 또 인정하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어느 사회든지 다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노년의 때를 한탄하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이마다 나를 피하여 갑니다. 내가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 시31:11~12
얼마나 깊은 소외감과, 또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를 피하여 간다는 거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가는 것,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소외되고 결국은 이런 소외감속에서 노년에 맞이하는 이 시편 31편의 기자는 자기 자신 까지도 소외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년에 이르러서 점점 밝은 빛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그러한 안타까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이럴까요?
과거만을 되돌아봤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세월만을 되돌아 봤을 때, 과거 만을 되돌아 봤을 때 사람은 허무를 느끼게되고, '내가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가?' 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90편에는, 나이듦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안티 에이징이 아니라 나이듦을 사랑하고, 나이듦을 기뻐하고 또 나이가 더 들수록 만족하고 또 나이가 더 들수록 밝은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사랑하며, 기뻐하며,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그 이유와 그 원리가 우리에게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 과 인간의 짧은 삶
그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90:1~2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렇게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를 시작합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영원하심,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태초부터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태초에' 라는 말은, 하나님께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은 시작이 없으신 분입니다.
태초 그 이전에 태초가 또 있었는가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시작'이라는 단어조차 해당되지 않는 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시간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죠.
시간을 창조하셨지만, 시간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이라는 단어 개념을 생각할 때 영원을 긴 시간, 끝이 없이 이어지는 시간이라고 정의하면 안 되는 거죠.
endless time 이 영원이 아닙니다. 그건 영원을, 시간 속에 가지고 들어온 개념인 겁니다. 진짜 '영원'이란, 시간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 라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 속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뛰어넘으시는 분, 시작과 끝이 없으신 분! 이란 뜻이죠.
▲그래서 C S 루이스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런 설명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 이라는 게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원성을 설명할 때 우리가 이런 상상을 해보면,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흰 종이 위에, 여러분이 2센티미터의 선을 한번 긋는다고 생각해 보시라.
그 선을 긋기 시작한 시점부터 끝나는 시점이 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일생의 시간이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그 백지는 하나님의 영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에서 보면, 한 점에 불과한 것이죠.
영원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시간, 하나님은 그 시간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3차원의 시간 속에서만 주어지는 거죠.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 보며, 또한 미래를 내다보며, 3차원의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자체가 아예 적용되지 않습니다. 중세 신학자 보헤티우스 라는 분이 또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살아가는 것은 등반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산 정상에서 우리가 등반해 오르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신다.
우리의 과거를 보고 계시고, 현재를 보고 계시고, 미래를 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지 않고 '영원한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멈춰져 있는 시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치 시간 속에 살아갈 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시간 속에 파묻혀서 열심히 일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현재로 계시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시고 움직이시고 활동하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그 영원하신 하나님을 다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우리 이해를 초월하는 거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모세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비교합니다. 그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영원한 현재 로만 존재하시는 하나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비교할 때
3절에서, 우리 인생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우리 인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티끌로 돌아가는 인생!'
그 영원부터 영혼까지 계시는 그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생각할 때 '흙(티끌)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 티끌로 돌아가는, 즉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묵상하게 되는 거죠.
그 대조를 통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들은 어떤 고백입니까? 너무나 엄청난 고백입니다.
4~6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영원하신 하나님과 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비교할 때'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4~6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천년이라는 이 장구한 역사, 여러분 천년 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한반도에 천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까? 수많은 왕조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 태어났다가 죽고, 또 태어났다가 죽고..
백 년이라는 시간도 긴 데 이 천 년이라는 장구한 역사가 어떻게 된다고요? '지나간 어제 같으며, 또한 밤에 한순간 같을 뿐이니이다'
천년이라는 이 장구한 역사가 밤에 한 순간, 지나간 어제 같이 느껴지는 거죠.
그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티끌로 돌아가는 우리 인생을 생각할 때 비교가 되지 않는 거죠.
성경 곳곳에 하나님께서 이 '천년'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습니다.
벧후3:8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우리의 '천 년'이라는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마치 '하루' 처럼 지나가버릴 수 있다는 거죠.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왜 이렇게 더디냐 라는 그런 사람들의 질문 앞에 성경은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하나님의 인내의 길이를 설명하는 거예요. 천 년의 역사를, 하나님은, 밤에 한 순간처럼 참아내신다는 거죠. '하나님의 영원하심'입니다.
이런 등식으로 우리 역사를 대입하면, 올해가 2015년이죠. 그럼 올해는 하나님께는 '이틀 조금 지난' 거예요. 이틀 예수님 승천하신지 이틀 조금 지났습니다.
우리들은 재림이 있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안 오느냐? 그러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하루만 더 참자' 그러시면 천년이 또 흐르겠죠.
우리는 천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그렇게 하면서 '내가 살아 있을 동안 아무 일도 없는 거 보니까 성경은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원과 우리의 시간대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긴 시간이다.. 이렇게 여겨지죠.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 너머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낌과 그 시간에 상관없는 '영원한 현재' 에 계시는 거예요.
▲또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천 년의 역사가 홍수처럼 쓸어가시는 것 같은, 그런 모습!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에 시들어버리는 하루살이 풀과 같다..' :5
이 고백은 지나친 표현입니까? 아니죠. 사실 이 고백보다 더 수많은 고백들이 그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티끌로 돌아가는 우리 인생의 연약함과 그 작음을 우리는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5절까지 읽고 끝난다면, 이것은 '우리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 것이구나, 헛된 것이구나! 참으로 의미가 없구나!' 본문이 그렇게 끝날 위험성이 있어요.
그래서 시편을 읽을 때는 언제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시편을 묵상할 때는 일부분한 구절만 끄집어서 읽거나 묵상하게되면 대단히 위험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죠.
길더라도, 그 전체의 흐름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전체로 이해해야 돼요.
여기까지만 고백하고 끝나면 '참 인생은 허무하구나, 헛되구나, 의미 없구나!' 그렇게 염세주의적인 철학으로 끝나버리는 거죠.
그렇게 인생을 비관하거나, 또 다른 잘못된 길은 이렇게 홍수처럼 쓸어가 버려지는 인생, 그냥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자! 그렇게 쾌락주의로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의 진노아래 소멸되어지는 세상 역사와 내 인생
모세는 이러한 소멸, 이러한 헛된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그 인생과 역사를 생각하면서, 그 원인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있다. 이것은 원래 모습이 아니다.
7~11절은 이렇게 천년의 역사가 밤에 한 순간처럼 지나가버리는 원인을 고백합니다.
7~11절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여기서 구절구절마다 반복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주의 진노, 주의 분노입니다.
천년이라는 역사가 밤에 한 순간처럼, 홍수처럼 쓸어가 버려지는 이유, 그렇게 신속하게 소멸되어 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이 세상 역사가 주의 진노아래 있다'는 거예요. 주의 진노아래 소멸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은밀한 죄가 주의 진노를 일으켰고 그래서 이 역사는, 주의 진노하심가운데 그렇게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중에 지나가고' 평생이 순식간에 다 지나가버리는 것 같아요.
우리의 인생이 70, 그리고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지나온 80년의 세월을 되돌아볼 때 수고와 슬픔뿐이라... 굉장히 비관적이죠. :10
왜냐면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인생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기에 우리가 그렇게 급히 소멸되는 것이라는 거죠.
여기까지 11절까지의 고백으로만 끝나도 사실 우리의 믿음의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원인을 아는 것, 거기까지 알았다 그럴지라도 진정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거기서 그치면 안 되죠.
▲이 시편을 기록한 모세는, 단지 원인을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진리인 것은 우리에게 답을 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단지 원인을 분석하는 것에 그친다면, 성경은 진리가 아니죠. 그 원인을 치료하고, 해결하고, 넘어설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에, 성경은 진리인 것입니다.
자 이렇게 주님의 진노가운데 속히 지나가는.. 마치 꽃이 시들어버리는 것 같고, 그리고 날아가는 것 같고
10절에 보면, '우리가 신속히 가니, 날아가는 것 같은 인생' 그래서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빨리 진행한다고 하죠.
미국에서는 이십대는 20마일, 삼십대는 30 마일,
오십 대는 50마일의 속도로 달려간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 정말 인생은 점점 신속히 지나가는 것 같아요.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볼 때 풀이 잠깐 피었다가 시들어버리는 것 같은 그런 인생,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죄가운데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3:11
하나님의 진노, 그것은 원래 태초에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허무감과 아쉬움과 허망함을 느끼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우리 모두에게 영혼을 허락하셨어요. 우리에게는 영원을 허락받은 존재였어요.
원래 이렇게 신속히 시들어버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순식간에 소멸되어 버리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인생도 또한 영원부터 영혼까지의 인생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속히 소멸되는 것은 올바른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상태가 아니라는 거죠.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이 역사 가운데,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기에 우리가 이렇게 속히 소멸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볼 때 아쉽고 허무하고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 안에 영원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다는 거죠.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인간으로 창조를 받았지만
천년이라는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홍수처럼 쓸어버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예요. '원래 이거가 아닌데,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지?'
인생이 신속히 날아가는 것을 느끼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인생이 너무나 빨리 가는구나! 그래서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고 그리고 시간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원에 대한 갈망이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거죠. 그것은 원래 우리가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 세상에 빨리 지나가는 인생 신속히 지나가는 인생에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존재로 지은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가 그런 유명한 말을 했죠. "이 세상에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갈망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세상을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 인생 속에 많은 갈등과 문제가 일어납니까?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이에요.
자꾸 이 세상 속에 비현실적인 기대로 우리는 살아가죠. 영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는 다 '영원 망각증'에 걸려 있는 인생이에요. 영원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어떠한 존재로 지음 받았는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도 역시 인생과 역사를 탐구했죠. 그는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성취도 이뤄봤습니다. 자연 만물도 연구했습니다.
그 모든 그런 경험을 통해서, 그는 전3장에 이르러 이런 고백을 하죠. 전도서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이 말씀 전에 전도서 3:1~10절에서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다스리시는데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시간과 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를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게 하시려고..
죽을 때가 가까우면 우리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고, 지난 우리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하게 되고.. 왜 그러냐는 거죠?
하나님이 그때를 정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거잖아요.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우리를 다스리시되 시종을 측량할 수 없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하게 하시려는 거죠.
◑이제 12절이하에서 모세는 해결책으로 나갑니다.
천년이라는 과거의 역사를 홍수처럼 쓸어버려지는 것 같은 그러한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아쉬워하며, 안타까워하며 그리고 허무함을 느끼며, 소외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죄가 일으킨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사라져 버리고 소멸되어 가던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을 12절이하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2
이것이 첫번째 탈출구입니다. 우리 날을 계수(셈)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올해는 내가 몇 살이지? 그렇게 지나온 살아온 날을 카운트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나이가 언제인지를 계속 계산하며 산다는 게 아닙니다. 시계만 쳐다보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매일 매일을, 우리 생애 인생의 마지막 날일지라도 우리에게 영원을 약속하신,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이 어느 때를 나의 마지막 때라고 정할지라도 우리는 그 영원에 접붙인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후회없이 그 영원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는 거예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
여러분 지혜란 무엇입니까? 지나온 세월에 집착하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허무감을 느끼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언젠가 벗어날 때가 올 거에요.
우리는 지금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때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를 건져서, 영원으로 들어갈 때가 올 거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미래도 필요 없는 거예요. 그냥 영원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셔서 죽음을 통해 영원으로 우리를 부르실 그때
우리가 영원을 믿는다면 지나온 세월에 대한 후회는 불필요하다는 거에요.
여러분 영원으로 들어가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준비가 돼어 있다면, 지금 영원을 살고있는 거예요.
여러분 '천국이 우리 가운데 왔다'라는 말씀은은 죽은 이후에 천국이 그때부터 시작된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지금 현재 천국과 영생을 산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시간이 계속 이어진다고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간이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천국이 별로 그립지 않은 거죠.
천국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것에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천국이 내게 소망이 되지 않아요.
심지어는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러면 천국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싹 사라져죠.
주일마다 그렇게 예배가 지겨운데 이렇게 졸립고 지겨운 예배를 영원히 계속한다는 말인가? 벌써 이 (3차원의) '시간' 속에 잘못 사로잡힌 거예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3차원의 시간 속에 경험하는 그런 경험과 전혀 차원이 다른 (4차원, 5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죠.
우리가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 언제이든지 간에 그때부터 영원을 살기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 영원을 믿는다면, 매일매일을 우리는 '영원'을 살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자 지혜를 얻게 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삶이라는 것이죠.
영생을 맛보며 날마다 살아가는 겁니다. 이 3차원의 시간 속에 살지만,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에 속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제 표현력이 너무나 짧아서, 이걸 어떻게 설명할 다 할수 있을까요?
매일매일 이 세상, 이 시간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한 집착, 후회, 두려움을 버리고 오늘이 마지막 시간이지만, 두렵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매일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인 줄 알고 사는 인생, 오늘 하루 매일 매일을, 영원에 접속해서 영원을 사는 인생!' 이것이 참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수천 년을 살아도 만약 우리 인생이 천년, 2천년을 사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되돌아보면 '밤에 한 순간 같고, 홍수처럼 쓸어버려지는 것 같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져버리는 풀과 같이' 허무함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은 인생을 살아도 매일매일 우리는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살고 영원에 잇대어 사는, 영원에 속한 삶을 살면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영생의 기쁨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두번째 해결책은 뭡니까?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매일 하루의 아침을, 매일매일이 마지막인 줄 알고 사는 아침! 그 아침에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 언약적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구합니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만족합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볼 때, 그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이 과거를 돌아보면 너무 허무하고 쓸데없는 것 같고, 그리고 '헛되다. 헛되다'고 고백했던 전도자의 고백밖에 나오지 않아요.
그러나 매일매일이 이 세상의 마지막으로 여기고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사는 인생으로 언제든지 시간을 벗어나 영원에 접속된 인생으로 그런 영원의 삶을 사는 인생임을 믿을 때는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임하므로 만족이 있는 겁니다. 일생동안 즐겁고 기쁜 겁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슬픔과 후회와 탄식과 그런 한숨만 쉬는 인생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며 두렵고 불안과 염려속에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이 영원한 현재이신 것 처럼 우리가 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영원한 현재를 누리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처럼) '현재' 만 있을 뿐이다. 오늘 하루 내 인생이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진탕 놀고 죽자' 그게 아니라 영원에 속한 하나님과 접붙여져 있는 인생을 살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오늘 하루도 매일매일 그렇게 아침이 만족스러운 인생으로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 시간 속에 우리를 거두어가셔도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인생이 되는 거죠.
예레미야애가에서 예레미야는 이런 고백을 했죠. 예루살렘의 멸망의 한복판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 컨텍스트(정황)가 중요한 거에요.
그렇지 않고 이 구절만 딱 떼서 보면 이거는 그냥 편안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서 '하나님 잘 자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 같죠?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처참한 멸망의 한복판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3:22~23
어떠한 멸망이 있더라도, 어떠한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마다 새로울 수 있다며 아침마다 주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은 매일매일 즐겁고 기쁠 수 있다는 거죠.
이 말씀으로 만들어진 찬양이 있죠.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그 인자와 자비가)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have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New every morning Great is Thy faithfulness, O Lord Great is Thy faithfulness
우리 매일 매일의 아침이 주님의 임재하심으로 만족하는 하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늘 새로운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일지라도 아침에 나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기뻐합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그 영원이 속한 인생을 사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3. 그래서 그는 마지막 17 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이 고백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우리의 손으로 행한 모든 것이 우리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에 속한 것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 남을 수 있는 일이 되게 하소서.
이 땅에 나의 이름을 어떻게 새겨놓고 나의 이름을 남기는 그런 일이 아니라 영원에 속한 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영원에 속해야만 견고한 것입니다.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하는 일이, 영원 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흔들리지 않아야 그게 견고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영원'에 갖다대면 다 없어져버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견고한 것이 아니죠.
이 땅에서 가지는 소유, 이 땅에서 가지는 지식 우리가 가진 그 무슨 성취라 할지라도 영원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 영원한 생명에 속한 것, 그것으로 날마다 우리의 인생이 견고해지는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