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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장 1~25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LNCK 2021. 12. 13. 08:05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마1:1~25                 설교 정리

                                                                *성탄절 설교 모음 -클릭-  

어김없이 성탄절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코로나 대 유행으로 지친 온 인류에게 한 줄기 빛과 같습니다.

지치고 힘든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희망입니다.

요즘 '위드 코로나'로 간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위드 갓, 임마누엘'로 가게 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소식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탄절은 홀로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할렐루야.

 

◑임마누엘의 증거 - 정 affection 이 있습니까?

 

침몰선에서 부녀자들은 먼저 구명선에 태우고

남자들은 침몰선에 남습니다생사의 갈림길입니다.

그 때진정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구명선에서 침몰선으로 훌쩍 옮겨 탑니다.

"당신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나도 따라 가렵니다당신 없는 생은 무의미해요!"

 

부부가 같이 살지만진정 같이 살지 못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한 집에 같이 살지만 마음이 서로 나뉘어져 있고서로 정이 통하지 않고 서늘합니다.

그것은 진정 같이 사는 것이 아니고사는 재미도 느낄 수 없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죄로 십자가에서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내 십자가에 훌쩍 올라타셨습니다.

나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을 외면치 않으시고나를 위해내 대신 죽으셨습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은 몸 따로마음 따로가 아닙니다.

몸도 함께 마음도 함께 나누고서로 정과 정이 통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나도 내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주님 죽는 곳으로 훌쩍 달려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주님과 따뜻한 마음의 정을 나눕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못 본체하고고난을 회피하는 사람자기 혼자만 살겠다는 사람...

몸은 같이 살지만마음은 동떨어진 재미없는 부부 관계와 같습니다전혀 정이 없습니다.

 

affection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정이 있어야 신앙 생활에 맛이 있고멋이 있습니다.

헌금에 벌벌 떨고희생할 기회 생기면 피해서 도망 다니는 사람은,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 때 주님은 그를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 서로 마음을 주고, 나누는 따뜻한 부부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같은 이치로하나님과 같이 산다고 할 때서로 정이 오고 가는 관계를 말합니다.

따뜻한 정이 전혀 통하지 않는 관계는, 진정한 임마누엘이 아닙니다

당신은 예수님께 대한 정()이 있는가요?

 

 

◑임마누엘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성탄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첫 두 장을 할애하여 요셉과 정혼을 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예수님이

임마누엘이심을 전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God with us' 란 뜻입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처녀가 낳은 아들로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예언하셨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잉태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옛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숱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위기들은 모두 이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죄와 허물로 초래된 것이었습니다.

 

▲사도 마태가 제시한 예수님의 족보에는 4명의 이방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굉장히 특이한 기록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오게 된 이야기는 구약 성경 창세기(38장),

여호수아서(2장), 룻기, 사무엘서(삼하 11장)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두 아들을 낳았고,

살몬은 여리고의 창기 라합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룻의 남편은 일찍 죽었고, 과부가 된 룻은 보아스의 은혜를 입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을 낳은 이야기는 19금에 해당될 정도입니다.

 

어렸을 때에 어른들로부터 흔히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대체로 나쁜 의미로 쓰였습니다. 부모의 나쁜 행실을

자식도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을 판단하는 말로 쓰이곤 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예수님의 족보는 나쁜 행실을 저지른

조상들의 나쁜 피가 흐르는 족보라고 오해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런 조상들이 있는 족보가 어떻게 거룩한 그리스도의 족보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얼룩진 그들과 함께 하셨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유다가 그랬고, 다말이 그랬고, 룻이 그랬고,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죄와 허물로 얼룩진 이야기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아름다운 믿음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개인의 죄와 허물뿐만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의 죄로 인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이어진 유다 왕국은 결국 죄로 인하여 망하고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민족의 침입으로 왕국이 멸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끌려갔다면 그 민족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겠습니까?

 

민족의 대가 끊기고, 다른 민족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빌론으로 끌려간 후에도 유다 민족의 역사는 계속되었고,

70년 후에는 왕국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버리고 바빌론을 하나님처럼 섬기다가 멸망 당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포로로 끌려간 그곳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민족의 시련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정금과 같이 단련하셔서

다니엘과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 다시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의 허물과 죄악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망하되 완전히 망하지 않게 하시고, 그루터기를 남기셔서

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고, 그것이 가지가 되고 줄기로 자라 큰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1장 예수님의 족보에서 마지막 위기는, 예수님의 잉태 직후에 있었습니다.

이 위기는 사람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 방식 그 자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시되 죄는 없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야 하되,

그들의 죄성은 물려받지 않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님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유대의 결혼 풍습상 정혼하면 법적인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천사가 나타나는 그 날까지 그는 이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의 고뇌를 다 아시고 그의 꿈에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0~21

 

사도 마태는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합니다.

 

결국 요셉의 의심은 다 해결되었고,

오히려 정혼한 아내의 임신과 출산을 통하여,

'임마누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75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 일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마리아에게 잉태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적과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확실한 징표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쉬운 성경)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쉬운 성경)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모든 의심과 회의를 거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예수님으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여주신 날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을 대신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의 내주, 동행, 인도하심을 통해서

임마누엘의 은혜를 오늘날 내 것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와 함께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목적이 있을까요?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가 그것을 분명히 말씀해 줍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족보에 수록된 인물들에게서 보았듯이,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인물인 다윗도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다윗은 그 죄로 인해 점점 폭군의 모습으로 치달았을지도 모릅니다.

 

죄의 본질적인 특징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과 행동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과 행동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야 하기에 다른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고, 죽이고, 빼앗습니다.

거짓, 사기, 살인, 도둑질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자연의 힘도, 인간의 능력도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죄에서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이런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길 원치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유다에게 하신 것처럼, 다윗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의 죄와 허물을 감당하시고 인내하십니다.

 

더 나아가, 자기 백성의 죄의 책임과 형벌을 예수님께 대신 담당시키십니다.

 

죄의 책임을 묻는 대신 용서하시고,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는 대신 자신에게 돌리십니다.

 

마치 자녀가 지은 죄를 용서하고, 그 죄의 댓가를 대신 지불하는 부모처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내시는 이유는,

우리와 아버지와 자녀, 창조주와 피조물,

왕과 백성, 친구와 친구의 관계를 맺고자 하심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헛된 욕망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다가온 성탄절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다시금 확인해 줍니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이라고요!

 

◑군대 가스실 훈련장에 나타난 임마누엘

어느 책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육군 훈련소에 가면, 훈련병들이 <가스실>체험 훈련을 받습니다.
최루 가스를 터트린 가스실에서, 처음에는 방독면을 쓰고 훈련하다가,
나중에는 방독면을 벗고, 최루 가스를 직접 체험해 보는 훈련을 합니다.

어느 훈련병이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벌써 '가스 훈련실' 앞에서 앉아서 기다릴 때부터, 강박관념으로 신경이 불안정했습니다.

더욱이 먼저 체험을 마친 동료 훈련병들이
가스실 바깥에 나와서 눈물, 콧물을 쏟는 것을 쳐다보니.. 몹시 두려웠습니다.

이제 그 훈련병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스실에 들어갔는데, 그 고통이 너무나 참기 어렵고 극심해서
조교 5명이 지키고 있는 가스실에서
조교들을 모두 밀쳐내고, 자기 스스로 가스실 밖으로 뛰쳐나온 것입니다.

군대 생활을 해 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이 훈련병은, 자기에게 내려질 ‘처분’을 기다리며,
아까보다 더욱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가스실 훈련 담당 중대장이, 그에게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그 근처에 있던 모든 군인들이, ‘이제 큰 일 났다’며 지켜보고 있는데,
전혀 의외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중대장이 그 공포에 떨고 있는 훈련병 어깨에 손을 얹더니
한참 뭔가를 얘기했습니다.

놀랍게도, 중대장은, 그 낙오병을 데리고
자기도 방독면을 쓰지 않은 채, 가스실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책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중대장은.. 그 훈련병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삼았고,
그 훈련병은.. 중대장의 승리를, 자기 승리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삼으셨고,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만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