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수18장 1~4 믿음은 멈추어 서지 않는다

LNCK 2021. 12. 15. 11:33

https://www.youtube.com/watch?v=kWN9dRMM1S8 



◈믿음은 멈추어 서지 않는다          수18:1~4                2021.12.03.출처, 정리

성경에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출애굽기는 구원의 스토리,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여호수아서는 구원 그 이후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홍해를 건넌 것과, 요단강을 건넌 것은 달라요
홍해를 건넌 것은 구원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고요,  (출애굽기)
구원을 받고 난후 끝난 게 아닙니다, 노예에서 풀려난 게 전부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서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신약적으로 자기 죄성의 정복, 자기 일곱 귀신의 정복을 뜻합니다.
                                                                 

◑1. 자기 죄성을 이기는 정복전쟁  (성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단순히 애굽에서 출애굽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가 여호수아서를 통해 완성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펴보려고 하면
여호수아서를 봐야 됩니다

여호수아서가 오늘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많은 메시지를 주는 그런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홍해에서 구원 받은 그 이후를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즉 가나안 7족속의 정복을 통해서, 자기 죄성을 정복해 나가고

영적으로 성숙되어지는 신약 복음의 크리스천의 모습을,

구약 여호수아서에서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1)

여러분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보면, 목표점이 없어져버려요.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없어져요. 

'내가 왜 신앙생활 하는 거지?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하셨지? 
왜 내가 은혜를 받아야 되지? 
은혜를 받는데, 왜 더 성숙한 제자로 훈련을 받아야 되는거지?'

자, 도달해야 할 신앙 성숙(성장, 온전)의 목표가 없어져버린 것이죠.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히5:14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8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1:28  *헬라어로 다 같은 말, 텔레이오스 



◑2. 마귀의 영토를 빼앗아 오는 정복전쟁 (영적 전쟁)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여호수아서는 정복 스토리입니다. 

어떻게 정복하죠? 싸우는 겁니다. 전쟁을 통해서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전쟁 이야기 입니다.

신자는 전쟁을 치러야 됩니다. 
약속의 땅이지만, 그냥 주어지지 않고 전쟁을 해야 됩니다. 
싸워야 됩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사 warrior 가 되어야만 합니다. 
신약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전사적이어야 됩니다.

왜냐면 이미 마귀가 지배하고 정복하고 있는 땅을, 
싸워서 마귀를 쫓아내고, 물리치고 차지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즉 영적 전쟁, 거룩한 전쟁 holy war을 우리가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이란 개념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네가 발로 밟는 땅을 내가 주겠다.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겠다'  수1:3, 5
수1장에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다 전쟁적인, 전쟁의 용어입니다. 

'물러서지 마라, 앞으로 가라,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Go! 앞으로 전진해 가라, 정복하라! 
이렇게 여호수아서는 정복하는 거예요. 

뒤로 물러가면 안돼요. 멈춰 서 있어도 안 되는 거죠. 

▲주저한 7지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갔어요. 
수18장은 유다 지파와 요셉지파가, 가나안의 남쪽과 북쪽의 지역에 이제 정착합니다. 
먼저 땅 분배를 받고 정착을 했어요. 

그런데 나머지 7지파가 유다와 요셉지파 사이의 땅을 배분받는데, 
문제는 이 7지파가         *2지파 반은 요단 동쪽 땅을 이미 분배 받음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수18:2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

왜요? 그들이 매우 소극적으로 나온 거예요. 

정복은 공격적이어야 되는데 
그처럼 동경하고 꿈꾸던 가나안 땅에 진입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정복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미적거리고 있는 거죠. 

이미 다 들어왔어요. 거의 다 들어왔는데
그러나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일부의 땅이

가나안 땅 여기저기에 마치 잔당 partisan 처럼 남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당장 뛰어들어가서 정복해야 되는데 
마치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이렇게 소극적으로 있는 것이죠. 

가야할 길이 남아 있는데, 멈춰 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여호수아가 책망을 하는 거예요. 
수18: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뭡니까? 
지체했다는 거죠. 

점령하러 가야 되는데.. 약속의 땅이 바로 눈 앞에 있어요. 
완전 정복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가면 돼요. 그런데 지체하고 있었다는 거죠.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이미 하나님이 주신 땅 이에요. 
꿈에도 그리던 이 새로운 땅이 눈 앞에 있는데 
왜 머물러 있느냐는 거죠. 

▲이들 7지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그들이 머뭇거리고 있었던 이유는 
성급한 만족때문이에요. 너무 쉽게 만족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고, 광야를 벗어난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홍해와 요단강을 건넜던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요. 
가나안 땅을 밟았다는 자체만 해도 만족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여기에서 그들은 현실안주의 유혹을 받고 있는 거죠.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유혹앞에 굉장히 약해요. 
항상 찾아오는 유혹입니다. 쉽게 믿음 생활 하고싶은 마음! 

'이 정도면 됐잖아, 이 정도도 충분해!' 
너무 성급한 만족을 하는 거죠. 

더 나아가면, 그들에게 약속하신 그 분배된 땅이 있는데 
거기까지 안 가는 거예요.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자기들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만으로 만족합니까? 
신앙의 여정에서도, 너무 이런 만족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신앙의 목표가 너무 낮아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생각합니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울 때는 긴장했습니다. 
근데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그들은 목표를 잃어버렸어요. 

아직도 남아 있는데..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만 해도 그들은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정작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머뭇거리고 있는 거예요. 
더 이상 싸우고 싶어하지 않게 된 거에요.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말았습니다. 

항상 우리에게도 이게 찾아와요. 
이런 성급한 만족,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해버리는... 

그러나 정복하기 위해 싸워야 할 땅이 남아 있어요. 
여러분, 성급한 만족의 위험은 무엇입니까? 
목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목표했던 게 무엇인지를 까먹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한때는 누구나 치열하게 싸워요.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도달하고 나면, 영적인 나태함이 찾아와요. 
정신적 회의가 찾아와요. 

여러분 아이 성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여리고에서 싸울 때는 굉장히 치열하게 싸웠어요. 
그런데 아이 성에서는, 그들은 느슨해졌죠. 

나태함이 왔습니다. 작전도 짜지 않고 대충 싸우려고 했습니다. 
실패가 찾아왔어요. 큰 승리 이후에 자기들의 마음을 놓았던 거죠.

결국 목표를 잃으면 갈 곳을 놓쳐버립니다. 
우리 신앙 여정에 일평생 걸쳐 달려가야 할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함, 성숙함입니다. 마5:48,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입니다. 고전11:1)

구원(중생)을 받았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구원 그 이후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다는 거죠.

바울은 그 목표를 이렇게 표현해요.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계속 진행형이었습니다. 

부르심의 상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갔습니다.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 그랬어요. 

여러분, 12절과 14절에 두 번이나 '달려간다'는 표현을 쓰는 거예요. 
'내가 그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느라

'하나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느라'  

여러분, 바울은 멈춰 서 있지 않았어요. 
그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ing 형이었어요.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의 삶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는 계속 달음질 한다는 표현을 써요. 

마치 전선에서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
목표를 향하여 멈추지 않고 계속 Go 하는 모습, 

그런 경주자였고, 그는 군사였습니다. 
달려가야 할 목표지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거죠. 

여러분 목표를 잃어버리면 안 돼요.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 goal 이 분명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목표를 잃어버리면 
노력은 몇 배를 하지만, 수고 이후의 그 결과는 초라해져요. 
목표가 중요해요. 

바울은 영적 도약을 위한 목표가 결코 얄팍하지 않았습니다. 
성숙을 향한 목표도 대단히 높았어요. 

그래서 그는 쉽게 주저앉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세월이 흐를수록, 신앙의 영역이 넓혀져 가야되요. 
크고 깊어져가야 돼요. 

믿음의 세계를 너무 좁게 보면 안돼요. 
그저 교회 다니고, 뭐 직분 받고 
그저 교회에 출석도장 찍는 정도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성수 주일하는 정도가 목표가 되면 안 된다는 거죠. 

자칫하면 우리는,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옛날의 추억에 젖어 세월을 보내요.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매여 있으면 안 돼요. 
과거의 성취가 아무리 대단해도 
과거는 떠나보내고, 우리의 미래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자꾸 과거에만 매어있는 걸 원해요. 
그리고 치열하게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 태클을 거는 거죠. 

그래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나태에 빠져요. 영적 게으름에 빠져버립니다. 

7지파처럼 영적으로 나태해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코로나19 속에서도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영적인 나태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타협을 하는 거예요.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유혹, 
코로나니까 교회에 나오는 횟수도 줄어들고, 활동도 줄어들고 
헌신도 줄어들고, 열심히 하려고 했던 그 의욕도 줄어들고... 

코로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 정도 하면 충분하지... 라고 여깁니다.
이런 영적인 게으름과 무관심이 우리 안에 밀고들어오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 늘 경계해야 할 것은 이 "영적인 나태"입니다. 
이 나태는 뭘까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거예요. 더 나아가야 하는데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더 풍성한 길이 있는데.. 멈춰 있는 거예요. 
그 현재의 그냥 적당한 상태에서 만족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에 대한, 어떤 기대감이나 갈망이 없는거에요. 
갈망이 없어요. 
영적인 목표가 없으니까, 갈망이 없어요. 
그냥 현실에 안주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기도제목을 들어봐도 뭐 특별한 게 없어요.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별일 없이 잘 지내는 거예요. 가족들 다 건강하고 어쩌고 저쩌고..' 

'인생이 별건가? 하루 세끼 잘 먹고 살면 되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성도로서의 목표를 잃어버린 거예요.
 
현실에 안주해 버릴 때 찾아오는 증상이 뭡니까?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영적인 기대감이나 사모함이 없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축복들에 대한 갈망이 없어져 버려요. 
그러니 기도도 늘 맴도는 거에요. 
거기서 거기입니다. 

목표를 놓쳐버리면, 스스로 세운 기준에 만족하고 살게 되는 겁니다. 
그게 일종의 도피입니다. 
성도가 분명히 나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거죠.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변화산 위에 계속 있으면 안 되거든요. 
우리는 아무 곳에나 자리를 펴고 '여기가 좋사오니..' 합니다.

더 깊은 은혜의 세계가 있는데 
적당한 곳에서 자리를 깔고,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연말이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한 해 동안 내가 할 만큼 했어!'하며 몸도 마음도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묘하게 파고 드는 안일함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길에는 휴일이 없어요. 
영적 전쟁은 휴전이 없어요. 종전도 없어요. 

우리가 치러야 할 싸움이 계속 있는 거죠. 
그 싸움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계속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우리의 목표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빌2:12절에서 이렇게 얘기하죠.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가라'는 거예요. 
'이루어가야 할 구원이 있다'는 겁니다.

이거를 "그리스도인의 성화"라고 얘기하죠. 

우리는 구원을 얻었지만 여전히 모순투성이요, 연약함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 죄성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갑니다. 

전인적으로 자라가야 할 영역들이 아직 남아있는 거예요. 
노예에서 풀려난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거죠. 

 

◑3.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신 약속은 넓고 풍성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처럼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지 (성장하지) 못하는 연약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품도, 그리스도를 닮기 까지 계속 자라가는 겁니다. 

옛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살면 어떻게 하겠어요?
나도 피곤하고, 주변의 사람들도 피곤하게 살아가야 되는... 
그 성질이.. 변해야 하는 거잖아요. 

갈수록 속이 넓어져야죠. 
점점 더 이전보다 더 넓은 용량, 
세상을 마치 다 품어낼 듯한 그런 용량으로 자라가야 된단 말이죠. 
그리스도의 성품까지 자라가야 하는 겁니다. 

바울의 기도를 보십시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에게 소원(구원의 완성, 성화, 성숙)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리'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불어 넣어 주세요.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으면, 우리에게 새로운 소원이 생깁니다. 

이전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런 갈망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나는 이전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는 변화되고 싶다는 거죠.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는 거죠. 
기도가 깊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가 깊어지는거에요. 

'하나님, 내 삶이 제자리 걸음을 걷고 싶지 않아요. 멈춰 있고 싶지 않아요. 
이전과 흡사한 삶으로 반복되고 싶지는 않아요. 
나아지길 원해요. 더 깊은, 더 풍성한 성도의 삶을 살기 원해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불어 넣어 주시는 소원은 
우리가 욕망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가요? 
봐야될 것을 보지 못하니까, 
눈이 어두워져 있으니까, 
영적으로 감각이 어두워져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할까요? 
비전이란,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걸 보는 거예요.

바울의 가지기 원했던 비전은 이런 것이었어요.

엡1:18~19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기도인거죠. 눈이 밝아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우리에게 베푸실 지극히 크심의 어떠함을 알게 되면 
가슴이 막 뛰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역은 너무도 풍성하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게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기도제목 중에 기도가 그거예요.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들을, 그 약속들을 보게 하옵소서'    시119:18참조

결코 지금 나의 이 상태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 이 정도 수준으로 끝나는 게,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돼요.
  
더 깊은 곳으로, 더 풍성한 것으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무엇이며' 
이게 뭔지를 아는 게 눈이 열려야 돼요. 마음의 눈을 밝혀주십시오! 

오늘 밤에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십시오.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엡1:18~19
그래서 비전이 보여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 
우리가 달려가야 할 것,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이 무엇인지... 

여러분, 눈이 열리면 멈춰 있을 수가 없어요. 
눈이 열리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보았으니까! 

▲눈에 보여야, 소망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책망을 하고 난 다음에, 백성들에게 임무를 하나 부여하죠. 

수18:4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매 지파에 세 사람씩을 뽑아, 차지할 기업의 땅들을 돌아보고 오도록 명령을 한 거예요. 
남은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지도를 그려오게 한 거예요. 

여호수아의 의도는 뭘까요? 
그 직접 가서 보고, 두루 다니며 지도를 그리는 가운데 
그들의 무덤덤했던 가슴에 불을 지르려고 합니다. 

현장을 보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발로 밟는 땅을 주겠다'고 하셨던 그 땅을, 직접 밟아보게 한 거예요. 
매 지파에 세 사람씩 대표로 가서, 먼저 그 땅을 보고 오게 한 것이죠. 

땅을 밟고서 이곳저곳으로 보고다니는 동안에 
가슴 속에 기대와 열망이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배를 만드려면 바다를 보여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배를 만들게 하면, 배를 만들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렇지만 바다를 보여주면, 배를 만드는 것입니다.
좁은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욕구가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이전에는 좋지 않았던 욕구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죄를 통한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구, 
그러나 은혜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욕구가 일어나요. 
새로운 desire가 일어나요. 거룩한 욕구, 거룩한 굶주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주시고 싶어 하셔도, 받을 백성의 마음이 중요해요. 
직접 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도 40년 전 정탐꾼 시절에 
가나안 땅을 보고 난 이후에 비전이 생긴 겁니다. 
뚜렷한 거죠. 본 거예요. 

미리 보는 것이 비전이고 환상이에요. 
믿음이란 뭘까요? 보는 거잖아요. 

히11장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증거니' 
믿음을 가지니까,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는 거예요. 
남들은 못 보는데, 자기 눈에는 보이는 거예요. 그것이 믿음이 하는 일이에요. 

오늘날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해요.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은 앞을 봐요. 비전이 열려요. 멈춰 서 있을 수가 없어요. 

믿음의 사람은 미적거리지 않습니다. 치고 나가는 거에요. 
수세에 몰리지 않는다는 거에요. 
공격적이에요. 여러분 타인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요. 

안 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늘 미루다가 결국 내몰리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옛날 이야기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늘 새로운 소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하나의 일이 끝나면,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 거죠. 

갈렙은 85세인데, 난공불락의 산지를 내게 달라고 그러잖아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왜 그런 선포를 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믿음은 새로운 목표가 생기게 한다는 거죠. 

우리 사랑방 목자하시는 분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있어요.
분가를 계속 시키는 거예요. 

분가하는 건 쉽지 않잖아요. 
전도해서 성도만들고 그래서 많아지면 분가시키고.. 

이 정도면 됐는데, 또 분가를 하고, 또 분가를 하고.. 
몇 번째를 분가하는 분들을 봤어요. 
새로운 목표, 새로운 소원이 생기는 거죠. 안주하지 않는 거예요. 
계속 하는 거예요. 움직이는 거예요. 앞으로 가는 거예요. 정복해 나가는 거예요. 
'이 정도면 됐다'고 하는 현실 안주형이 아니죠. 

여러분 여호수아가 답답해 한 것은 무엇입니까? 
축복의 땅을 목전에 두고, 그냥 뭉개고 있는 거예요. 

가나안을 목표로 지금 요단강을 건너왔는데 
목표가 바로 코 앞에 있는데 뭉개고 있는 거예요.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3
아마 여호수아가 한참 오랫동안 보고 보다가 
답답해서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을 거예요. 

왜, 왜 뭉개고 있느냐? 
본 게 없으니까 주저 앉아 있는 거에요.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니까, 근시안이니까
그저 그 앞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좀 더 가면 그들에게 약속한 땅이 예비되어 있는데 
발로 밟기만 하면 되는데 

지금 있는 그 땅에 그냥 안주하는 거예요. 
근시안들이에요.

신자는 근시안을 고쳐야 합니다. 
멀리 보는 눈을 가져야 돼요. 

멀리 보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어요. 
오늘 여러분들의 눈이 열려서, 
뭐 지금 당장에 있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아무것도 없어 보여도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코 앞만 보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에요.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 마디의 설명보다,

매 지파에 3명씩 뽑아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직접 보게 했습니다. 
자신들이 취할 땅을 다녀보고, 지도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4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지도로 그리게 한 것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보고 오는 게 아니에요. 구체적으로 그려오게 한 거죠. 

본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요.. 
본 게 있으면, 쉽게 안주할 수가 없어요. 
못 봤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여호수아는 단순히 그냥 땅을 돌아보게 하지 않았어요.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어요.
그 모든 지형도를 그려오라, 즉 자세하게 살피라는 거예요. 

대충 보면 그릴 수 없어요. 
수없이 다녀봐야 그림으로 그릴 수가 있는 거잖아요.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꼼꼼하게 챙겨 보도록 했어요. 

여러분 여호수아가 그 땅을 그려오라고 하면서, 의도한 것이 뭘까요?

1) 첫째로는 구체적인 비전이 생기도록! 
비전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요. 

안 본 사람에게는 비전이 생길 리가 없어요.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같이.. 
그때 비전이 생기게 되고, 

그 비전은 열정을 일으키게 되고, 
나태하지 않고, 주저앉지 있지 않고, 쉽게 만족하지 않고 
위험할지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용기가 생기는 이유는 
보았기 때문에!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두루 다니면서' 목표가 분명해진 겁니다. 

하나님이 주실 축복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 맵을 그려오게 한 것은 
사명과 연결되는 거예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점검하라는 거죠. 

가나안 정복은, 그 땅에 그냥 잘 살라고 주신 땅이 아니에요. 
새로운 미션! 가슴 뛰게 하는 새로운 미션을 그 땅에 주신 거예요. 


◑적용

 

여러분 코로나19로 인해 문제들이 많아졌습니다. 
난공불락과도 같은 문제들이 우리 앞에 버티고 있습니다. 

이 코로나19가 한 2년 동안 지금도 끝이 나지 않고 
새로운 변종이 생기면서, 끊임없이 돌파감염이 일어나면서 우리를 몰아가고 있잖아요. 

모든 게 멈춰 서 버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리고 이런 코로나19로 인해서 어마어마한 문화의 대변혁,

사람들의 심리적 변화, 삶의 양태 등 모든 게 다 바뀌고 있어요. 
수십 ~ 수백 년 동안 바꿀 수 없었던 것 까지도 
그냥 급변하게 만들고 있어요. 

우리를 어디론가로 몰아가는.. 
적응하지도 않은 상태속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로 인해 시작된 New normal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일상)이

계속 Abnormal (더 새로운 게 또 나오니까, 뉴노멀이 또 비정상) 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난제들이 우리 앞에 버티고 있을 때,

우리는 혹시라도 '이 정도면 선방한 것 아닌가?'하고 만족하고 끝나버릴 수 있어요.

아니에요. 새로운 지도를 그려야 돼요.

 

믿음의 사람들은, 어려움이 올 때 더 힘이 나요.

왜냐하면 우리 만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가나안 정복의 핵심은 하나님이 치르시는 전쟁이기 때문이에요.

백성들은 믿음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나아가기만 하면

길은 하나님이 여신다는 거죠.

 

여러분 계속해서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이 사명입니다.

두루 다니며 우리가 할 일이 보이는 거에요.

다니다 보면 할 일이 보여요.

 

내가 정복해야 될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거죠.

우리는 이 땅에서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돼요.

 

▲직장을 다닐 때도 '영적인 도해 spiritual mapping' 를 해야 돼요.  *영적 지도 작성 및 분석
출근을 할 때, 첫 출근을 하고 다니면서

 

사단의 진영들이 어디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지

내가 싸워야 할 전쟁이 어떤 것인지... (도해를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3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여러분 어마어마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되는 거에요.

 

무신론적이며,  하나님을 그저 거부하는.. 저항하는 이 문화의 한 가운데

굉장히 세속적이며.. 그 세속화가 심각하게 이루어져 있는 그 캠퍼스 안에서

영적 도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나를 여기에 보내셨는지

-왜 나에게 이것을 보게 하셨는지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전쟁을 치르잖아요.

감사하게도 우리 중고등부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기도회를 만들고

막 투쟁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 초등학교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서 기도회를 열고

교장 선생님을 위해서 모여서 막 기도 하고..

교장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지 모르겠습니다.

 

아~ 멋있는 거예요, 여러분!

꼬마들인데 막 교장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학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거에요.

교장 선생님도 못하는 일을 하는 거에요.

 

그냥 수세에 몰려 끌려다니면 정복 당합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정복해야 될 영역들이 있어요.

 

지형과 동향을 살펴봐야 돼요.

내가 살고 있는 곳에, 교회가 몇 개이고, 학교가 몇 개,

병원이 몇 개, 모텔이 몇 개, 술집이 몇 개인지 (이렇게 파악하는 것이 영적 도해 spiritual mapping)

파악하고, 그 분위기가 세속적에서 영적으로 기울어지도록 기도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면 강력한 역사들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최근에 해운대 바닷가를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트렌스젠더 바가 보이더라고요. 새로 생겼나봐요.

 

간판을 일층에 크게 붙여놨어요. 그런데 그 옆에 도로에는

우리 교회에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더라고요.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돼요.

 

여러분, 어디 (우리 교회가 버티고 있는) 해운대에 트랜스젠더 바가 들어와요?

기도하셔야 돼요. 영적 공격이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청소년들, 노숙자들, 저소득층, 깨어진 가정들

그냥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데요.

돌아다니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왜 그 땅을 돌아다니며 보는 일을 할까요?

그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있는, 그 땅에 가나안의 족속들, 우상들, 산당들

하나님을 거부하는 반문화적인 그 많은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그 땅을

정복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어야 돼요.

악한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사단의 진영을 점점 우리가 정복해 갈 때,

사단의 진영이 입지가 좁아져 가고

나중에는 결국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통해 그 땅의 우상을 몰아내고

악한 자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문화들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땅이 되기를 원하셔서

당신이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그냥 잘 먹고 잘 살라고,

단순히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을 위해서

그 백성을 이끌어 내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만을 섬기는 땅으로 바꿔 놓는 그날까지

우리 직장과 학교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이유가 있는 거죠.

 

최근에는 '쇼 미 더 마니' 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아넌딜라이트 Anandelight (한국 개신교인 래퍼)

라는 청년이 아주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랩 가사에는 예수님 얘기로 가득 차 있어요.

앞에 심사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요.

'당신이 그런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인 얘기를 계속 노래로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막 이렇게 저렇게 디스하고, 공격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예수 믿는 얘기를 자꾸 하고, 기독교적인 얘기를 많이 하니까

막 사람들이 디스할 때 '너는 어떻게 할 거냐?'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끌어안을 거에요. 그리고 축복해 주겠다는 거죠.'

자기를 욕하는 사람들을!

 

그 래퍼의 세계가 그렇잖아요.

막 욕을 하고, 노래 가사가 그런 거잖아요. 굉장히 욕을하고, 공격적인 그런 가사죠.

그곳에 예수님의 복음을 랩을 통하여 증거하겠다고 정면승부를 건 거에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을 높이고

성경의 얘기를 랩으로 노래하고, 성경의 가사들이 막 노래로 나오고...

 

그 어두운 문화 안에서 예수의 그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아넌딜라이트의 삶이, 세상에 큰 빛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이 열려 질 때,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눈이 열려질 때, 그게 나를 사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에 관한 것들이

열려질 뿐만 아니라  엡1:18

우리에게 주신 사명,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그 일에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이 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잘못하면 교회 놀이로 전락해요. 교회 놀이!

그냥 우리끼리 모여서 띵까 띵까 하며 노는 거죠.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축복을 놓쳐버렸기 때문이에요.

 

신앙생활은 현상유지가 아닙니다. 현상유지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돼요.

신자로서 어느 지점에 딱 멈춰있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서 딱 멈춰있어요.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안 나가요!

 

변화도 일어나지도 않고, 어떤 사명을 위해서도 달려가지도 않고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거죠.

 

그냥 나중에 나는 천국 갈 거고, 이제 하나님이 나를 천국에 받아줄 거고 *이것도 considerable

그러니 적당한 수준에서 신앙생활 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정복해야 될 영역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어요.

우리가 할 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 있어요.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안 죽어요.

코로나19로 안 죽을 거예요. 사명이 끝나기 때문에 죽는 거죠.

 

하나님은 오늘도 앞을 향해 발을 내딛는 사람을 찾고 계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전투력을 가진 사람을 부르시고 계세요.

가던 길에서 멈춰서, 두 손을 다 놓고 있는 사람을 사용하실 수가 없어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노예기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예기질이 있었던 것처럼요.

 

죄에 끌려다니던 사람들, 수동적으로 살던 게으른 사람들,

적당하게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던 사람들...

그들은 끊임없이 그 예전의 노예적 삶을 그리워하잖아요.

 

여러분 비전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가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니에요. 신자 모두가 비저너리 Visionary 가 되어야 돼요.  *비전을 가진 사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은혜를 받으면 여러분, 희한한 일이 일어나요. 뭔가 그림이 그려져요.

자꾸 멈춰있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상상력이 복원되고요. 새로운 것을 보게 해요.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적당히 살고 싶지가 않아요.

그저 미적거리면서 그냥 예수 믿는 것, 교회 다니는 정도로 끝내고 싶지가 않다는 거예요.

 

꿈이 생기고 가슴이 뛴단 말이죠.

'이대로 살면 안 되지.. 이대로 살면 안 되지..' 라는 마음이 계속 들고

내 기도가 깊어져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게 꿈을 꾸게 하시고, 잠을 설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불면증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하죠.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꿈때문에 잠을 설치는 일이 있어야죠.

내가 기도할 때 가슴이 뛰어야 되잖아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맛보았습니까? 여러분,

신앙의 세계는 들어가면 갈수록 더 신비롭고 경이롭고 끝도 없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몇 년 해 오셨습니까?

30, 40, 50년 그 연조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영적 세계에 대한 벅찬 기대감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요...

 

여러분, 은혜도 얼마나 놀라운지.. 어메이징 그레이스 라고 그랬어요.

그 끝없는 은혜와 축복의 강수안에 푹 잠겨서 헤엄을 치는 경험을 해야 되죠.

얕은 곳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거대한 심해로 나가야 해요.

거대한 심해로 들어가서, 평생 주님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하며 더 깊이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바울이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세상의 모든 게 다 배설물 같이 여겨지는 거에요.

 

그 보잘 것 없는 것에 내가 눈독을 들이고, 평생 매달리고 살았던 것에 대해서

너무도 안타까운 생각을 합니다.

'내가 저거 붙들고 이제껏 살았나?' 자신이 스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달음이 온 거잖아요. 왜요? 진짜를 발견한 거니까!

 

실체를 발견하니까 그림자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가짜를 붙들고 몸부림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경험하게 될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금 있는 곳을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지금 내가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신앙이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그저 그냥 평행선을 달리면서, 그냥 계속 한 곳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 지체하기만 하고, 나아가지 않고, 우물쭈물하고 있지는 않는지?

조그마한 어떤 목표를 완성했다고 거기에 자족해 버리고,

성급한 만족을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아직도 땀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이 있다는 거죠.

믿음으로 발로 밟고 나아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발로 밟는 땅을 다 네게 주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여러분 '오징어게임' 하지 마시고 정복게임을 하셔야 돼요.

 

정복시리즈 일탄, 이탄, 삼탄을 여러분의 삶속에서 만들어 가셔야 돼요.

'아직도 여전히 나는 그 승리에 배가 고프다'고 고백하는 성도...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승리를 맛보도록 하나님 우리와 함께 싸워주십니다.  

 

여러분 벌써 정복했어야 할 영역을 미루다가

오히려 점령을 당한 영역은 없습니까?

 

벌써 정녕 점령을 했었어야 되는데, 벌써 끝장냈어야 되는데

세월을 보내면서.. 오히려 내가 점령을 당해 버립니다.

 

더 깊은 은혜와 축복을 갈망하는 이 갈망이

여러분들의 평생에 식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분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이라는 말이죠.

 

교회에 다니고, 직분 받고, 그저 몇 가지 봉사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훨씬 더 큰 거예요. 여러분!

 

내 삶에 찾아오신 그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기업의 풍성함을 매일 매일 맛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그리고 영적 전쟁의 선봉에 서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선봉에 세우셨습니다.

가는 데 앞장 서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소극적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이런 소극적인 모습은

마치 다된 밥을, 제 발로 차고 있는 것 같아요.

다 되어 있는 밥인데, 근데 제 발로 차버리는 거예요.

 

한 발자국만 더 나가보라는 거예요.

두려워 하지 말라! 영적 나태를 극복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코로나19 때문에.. 라면서, 끊임없이 내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주저앉아 잊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코로나19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실 일을, 반드시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코로나19에도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기를 기회로 얼마든지 바꿔놓으십니다.

 

여러분 성경의 스토리를 보세요. 어디든지  그냥 역전이잖아요.

성경을 어디든지 보세요.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다 되는 역사가 일어나잖아요. 여러분!

 

이번에 연말연시에 특새를 제가 에스더서 전체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데, 에스더서가 뭐에요?

 

죽을 듯, 안될 듯, 실패할 듯, 늘 위기가 있고 아슬아슬하지만,

우리는 에스더서를 보면서 느긋하잖아요.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것을 다 알기 때문인 거죠. 역전케 하시잖아요. 여러분!

성경에 그 어디든 여러분 늘 역전이에요. 승리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것이고

믿음의 선진들은 이미 경험했던 거에요.

 

그런데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더 크고 놀라워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밟고 나가시길 바랍니다.

멈춰있지 마시길 바랍니다. 멈춰있지 마세요.

'너희가 그 땅을 취하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수18:3

 

벌써 끝냈어야 되는데..

하나님 새로운 길을 열어놓고 준비하고 계세요.

우리에게 줄 것을 딱 기다리고 계세요. 믿음으로 나가셔야 돼요.

 

오늘도 기도로 먼저 그 포문을 여셔야 합니다.

이미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어둠의 영역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여 쫓아내시길 바랍니다.

 

그 전쟁이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서부터 이미 시작이 되고 있는 거예요.

내 마음 안에, 이미 영적인 나태와 그리고 소극적인 태도와 부정적인 마음과

믿음 없음과 적당하게 살고 싶어하는 이 유혹이

교묘하게 내 마음 안에서 나를 계속 주저앉게 만들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여러분은 덫에 걸리지 마시고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코로나19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앞서서 행하시고 승리하시는, 대장되시는 그 부대의 일원으로서

이제 약속된 땅을 그냥 밟고 나아가서 정복하는 하나님의 군대의 스토리를 이어가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쓰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가나안 7족속 몰아내기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가나안 땅에는 이미 토착 일곱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지만

이미 다른 이방인에 의해서 점령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일곱 부족은 상징적으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일곱 귀신, 일곱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정복되기 전에

이미 악한 영들, 악한 죄들이 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모든 이방인의 족속을 멸하고 그 약속의 땅을 차지했듯이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오직 주님이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이 알려지고 사용되어 왔던 ‘박군의 마음’이라는 전도지가 있습니다.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안에 그 일곱 가지의 영들, 죄들이 있는데

그것을 짐승으로 표현하여 보여줍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에,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써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말이 많은 영’입니다. 이것은 개구리의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 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2. ‘교만의 영’입니다. 전도지의 그림에는 공작새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3. ‘간교한 영’입니다. 그림은 의 형상으로 그려집니다.

말씀에도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3:1)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간교합니다.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은, ‘간교한 영’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합니다.

 

▲4. 네 번째의 영은 ‘음란한 영’입니다. 그림에서는 염소의 모습입니다.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5. ‘혈기의 영’입니다. 화를 잘 내는 영입니다.

그림은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속에서 수시로 폭발적인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 입니다.

 

▲6. ‘탐욕의 영’입니다. 전도지 그림에서는 돼지의 형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합니다.

 

이들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7. 일곱 번째는 ‘게으른 영’입니다. 그림에서는 느림보 거북이가 보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아니하므로

언젠가는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25:26)하는 책망을 듣습니다.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청년 시절에 서해안에 있는 아주 작은 섬에 여러 번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의 용사인 할머니 전도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정말 기도의 용사였습니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았고

주님과 깊은 교제의 기도 속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아주 영안이 밝아서 사람의 속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할머니를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신지 오래 되었지만

나는 섬에서 그 할머니와 대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이 전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전도지 <박군의 마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다 맞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사람의 마음을 보면

실제로 이 일곱 가지 동물의 형상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커다란 호랑이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돼지가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뱀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뱀들이 우글거리는 사람들도 있고

큰 뱀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아주 작은 새끼 뱀이 있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다 사람의 안에서 살고 있는 귀신의 영이며

주님이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그 동물들이 다 나가서 깨끗한 마음이 되고

예수님이 중심에 빛처럼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전도지에 있는 내용과 같은 말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할머니 전도사님의 말씀은, 그 전도지의 내용을 재확인해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있는 일곱부족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의 세력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이방족속은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영적으로 타락하고 돌아서게 되면

그들은 바로 반격을 개시하여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악한 영들의 거점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아직 그러한 요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거점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에게 속한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공격하고 쫓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족속을 진멸하는 것입니다.

 

부디 당신 스스로, 당신 안에 있는 악의 거점들을 공격하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무너뜨리십시오.

 

당신 안의 악한 영들을 소멸하십시오.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영만이 당신을 지배하시도록 하십시오.

 

그 영들의 진이 무너지고 소멸될수록

당신은 악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며

진정한 하늘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