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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20장 36~48 말씀을 저버린 인생들의 최후

LNCK 2021. 12. 18. 19:48

https://www.youtube.com/watch?v=mK24niu1S8s

◈말씀을 저버린 인생들의 최후    삿20:36~48     2021/11/21 출처

※본문 삿20장은 해석이 쉽지 않은데, 아래 설교는 해석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 라는 곳에, 한 레위인이 여행 중에 밤에 머물 곳을 찾다가  
아무도 그 레위인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을 때에 
자기 고향 에브라임 사람인 한 노인이,

그 레위인 일행(레위인, 첩, 종)을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해 주죠. 

그리고 나서 이제 좀 쉬고 있을 찰라에 
그 마을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찾아와서 문을 거세게 두들기며 
그 레위인과 동성연애를 요구했어요.  삿19:22

이럴 때 그 레위인이 자기 첩을 대신 내어주죠. 
그래서 그 첩은 밤새도록 그 동네 불량배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에 
거의 주검이 되어서 새벽에 그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곧 죽어버립니다.

이때 레위인은 보복의 일환으로, 자기 첩의 시신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 후에

12조각으로 쪼개서 한 조각씩 각 지파에게 보내게 되고 

 

온 이스라엘 12지파는 분노하여, 선동당해서 
이스라엘 총회가 열리고, 
최종적으로 (베냐민을 제외한) 11지파가 미스바에 집결하는데.. 그 수가 무려 40만명입니다. 

이 40만명 군인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뭐냐면 
가나안 정복전쟁 초기에 이스라엘이 연합했던 숫자라는 것이죠.

그때 40만이 모였다가, 이제 40만이 다시 모인 것입니다.  삿20:1


◑이 사건 앞에서, 저는 두 가지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어요. 

▲첫 번째 질문은, 지금 온 이스라엘은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많은 숫자가 모였냐는 거예요. 

그건 바로 자기 동족인 베냐민 지파를 치기 위해 모였다는 거예요. 
여러분 조금도 그들은, 이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정도 (40만 군대) 규모를 모이려면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모여야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가나안 원주민들을 칠 때 
이 정도 대규모로 모이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동족을 죽이겠다고 이 정도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정도 큰 규모로 연합한 것은 
사사기 3장 이후부터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모였다는 것에 대해, 저는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추방하라고 하신 가나안 민족들을 다 추방시켜서 이렇게 모였을까요?
아니요. 아직 추방을 다 시키지 못했고,

가나안 땅 여기 저기에 가나안 민족이 흩어져 살고 있었어요.

이스라엘이 차지해야 될 땅을 다 차지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베냐민 지파를 치려고 모인 걸까요?

아니요. 아직도 차지해야 될 땅이 남아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해야 할 본분은 망각한체 
동족을 죽이기 위해 모였다는 거예요

▲두 번째 질문은, 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나가지고 
이렇게까지 40만이나 거대하게 모인 것입니까?
뭐가 도대체 그렇게 화가 났길래 대규모로 모인 것입니까?

지리적으로 며칠 걸어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미스바로 다 모였거든요.
뭐 대단한 일이 도대체 있기에.. 이렇게 운집한 것입니까?

레위인의 한 첩이 집단 강간 당한 사건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까?

그건 물론 베냐민 지파, 기브아 불량배들이 잘못한 일이죠.

그런데 사실 여러분 뭐부터 화가가 나야 되냐면 
레위인이 첩을 둔 사실에 대해서 먼저 화가 나야 돼요. 
그리고 어떻게 첩의 시신을 열두 토막을 내요? 

요즘 뉴스에 가끔 나오는 토막살인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죠. 
종교 지도자가 시신을 12 토막을 내가지고 
이스라엘의 12지파로 하나씩 보냈습니다.

레위인이, 이 첩을 사람으로 여기기나 한 겁니까?
우리는 여기서 먼저 화가 나야 해요. 베냐민을 죽이기에 앞서!

집단 성폭행한 베냐민 지파에 대해서 자꾸 화를 내는데.. 
아니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갖은 못된 짓을 한 
가나안 원주민에 대해서 먼저 화가 나서,

그들에 대한 전쟁을 먼저 치러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도 없어요. 

베냐민 지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집단 성폭행한 일은 백번 잘못한 일이지만 
이게 베냐면 지파 전체가 한 겁니까? 아니죠. 
기브아 마을의 불량배들이 몇 명이 한 거잖아요. 

그런데 왜 베냐민 지파를 다 죽이려고 모였죠? (나중에 실제로 다 죽여버렸어요)
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총회가 열려야 되죠?

자 제가 계속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크게 총회까지 대규모로 모일만한 일이 아닌데도, 
다 모였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여러분 하나님을 너무 오래 떠나있고, 말씀을 잊어버리잖아요. 
그러면 분별할 능력을 상실하는 거예요. 

자기들이 지금 똑똑한 것 같고, 옳은 것 같고, 의로운 일로 모인 것 같지만

지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눈을 상실했어요. 

자 그러다 보니까, 사람의 모진 본성만 튀어나온 거예요. 
자 보세요, 사람이 얼마나 악한 본성을 가졌는지요. 

남 죽이는 일에는 이렇게 잘도 모여요. 

사실 남이 아닙니다. 베냐민은 같은 편입니다. 

 

근데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죄악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열심히 싸워야 할 대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입니다. 
한솥밥 먹고 있는 아군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가만 보면, 교회가 교회를 죽이고 
목사가 목사를 죽이고, 교인이 교인을 서로 죽이고 있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바쁘다고 하면서, 별로 그다지 서로 교제도 없다가 
경쟁상대를 죽이려고 하는 일에는 
그렇게 구미가 당기고, 하나 둘씩 쉽게 모여들어서 
입을 맞추고, 장단을 맞춰요. 

우리가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참 그렇게 용서를 잘 해줘요. 
그런데 내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이, 작은 거 하나 잘못하면 
용서를 못 해줘요. 죽이기 위해 한 곳에 모여들어요. 
그런 남을 죽이는 일에는 연합이 너무 잘 된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40만이나 모이는) 이 정도 연합이 되려면 
적대 세력 가나안 족속과 전쟁하기 위해서 모여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악한 영들의 궤계를 막기 위해 
아니면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교회를 살리기 위해 
이 정도 모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일로 모였어요?
동족 죽이는 일에 모였어요.

여러분, 우리 안에도, 죽여야 될 가나안 족속은 내버려두고 
베냐민을 죽이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또한 사람들은 이렇습니다. 
선하고 영적인 일에는 잘 안 모이다가,
쓸데없는 일에 너무 잘 보여요. 

신기한게 뭐냐면, 목회하다 보면 
철야예배, 새벽예배 모입시다, 각종 기도회 모입시다, 노숙인들 섬깁시다..

그러면 잘 안 모여요.

그러다가 언제 오는지 아세요?
어디 경치 좋은 곳에 수련회 간다 그러면, 그때는 기가 막히게
가방 하나씩 싸들고 하나 둘씩 나타나요.

강원도 평창에 아주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우리가 한번 콘도 빌려가지고 수련회 합시다.. 이러면 잘 모입니다. 
평소에 잘 안 나타나던 사람들도 그 때는 잘 나옵니다. 신기해요.

영적이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에는 모이지도 않지만 
나에게 재미를 주고, 유익이 될 것 같은 데는.. 잘 모입니다. 

 

그게 에브라임 지파가 하던 짓이에요. 
다른 지파가 모여서 고생하며 전쟁 치를 때는 나타나지도 않다가,
기드온이 승리 다 하고 나니까, 에브라임 지파가
다 차려진 밥상에 자기 숱가락 하나 더 얹으려고 뒤늦게 나타났서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전쟁에 나갔다'고 성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삿8:1

자 여러분, 우리 모임의 성격은 어떻죠? 우리가 지금 왜 모였어요?
여기 주일 예배에 모인 건 너무 바람직해요. 

그런데 우리의 모임을 살펴보세요. 
나는 왜 모여야 되는지,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 

이스라엘 11지파는 이렇게 황당하게 모이고 
황당하게 분을 내고, 이렇게 자기 동족 베냐민 지파를 죽이려고 했다는 거예요. 

온 이스라엘이 자기 지파를 죽일려고 왔으니 
베냐민 지파도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날 만 합니다..


◑혈연과 지연이 말씀보다 앞서는 사회

 

그런데 베냐민 지파도 잘 한 게 아니에요. 왜냐?
이스라엘 11지파가 총 집결했지만 
처음부터 전면전을 펼치려고 한 게 아니라 
그 기브아의 불량배들만 내어달라는 거예요. 
그 못된 짓 한 그놈들만 내어주면, 우리가 여기서 끝내겠다는 거예요. 

근데 베냐민 지파가, 그 요청을 단칼에 거절해 버리고 
전쟁 준비에 돌입합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유명한 학연, 지연, 혈연 때문이에요. 
여러분, 베냐민 지파도 문제인 게 
자기네 지파 사람들이 잘못 했으면
자기 지파 사람이라도 내 줘야지요. 

내 줘서 사회악을 근절시키고 
베냐민 지파도 이번 기회에 영적으로 재정비를 해야 되잖아요. 
갱신하면 되잖아요. 

근데 베냐민 지파는, 자존심의 문제로 걸고 들어갔다고요. 
그래서 이 전쟁이 치러지게 되는 겁니다. 

베냐민 지파도, 하나님을 떠난지 너무 오래 되어서 분별력을 상실했어요. 

여러분 사사시대 때나, 지금 이 시대나 
사회에서 없어져야 될 병폐는, 바로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인맥을 앞세워서 
공익이나 도덕을 거스르고 해치는 일이 요즘 비일비재 해요. 

아무리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내 지파, 내 가족, 내 고향, 내 학교, 내 나라가 최고가 되어버리잖아요. 

그러면 분별력을 잃어요. 객관성을 잃어버린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사회생활할 때 보세요. 
실력보다, 고향이 어디냐? 어느 학교 나왔냐? 하는 그런 인맥!
이게 채용되는데, 실력이나 자질보다 더 유리하게 작용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면 그로 인해서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지 아십니까? 
사회의 분열이 끊이지 않는 거예요. 
이놈의 지역, 파벌, 인맥이 없어져야 분열이 끊어지는데... 

그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자기 편을 무조건 옹호하게 돼요. 
그로 인해서 범죄를 양산하게 된다는 거죠. 

따라서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객관성이 있어야 돼요. 
실력대로, 사실대로 평가할 수 있는, 그 기준이 있어야 돼요. 

가족들끼리도 마찬가지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당이 있어요. 그게 '혈육당, 가족당'입니다.

내 자식, 내 아내, 내 가족을 건드리잖아요?
무조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돌격합니다. 전쟁이 선포됩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어머니가 어느 집사님에게 뭔가 어려운 일을 당했다.. 
뭐 인사를 안 받고 좀 싸늘하더라.. 이런 얘기를 만약에 엄마가 집에 와서 하면, 

그러면 그때부터 그 집사님은, 우리 온 가족의 원수가 돼요. 
그냥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죠. 속으로 '네가 우리 엄마를 무시했다며?'
전후 사정을 따져보지도 않고 일단 그렇게 대우해 버려요. 

여러분, 일반 성도뿐만 아니에요. 교회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만약에 목사님이 청년이나 집사 누구를 불러서 훈계했는데, 

자기 자식을 좀 기분 나쁘게 해서 상처를 줬다고 해서 
그때부터 난리가 나는 거예요. 
전화통이 불이 나는 거예요. '목사님이 우리 아들을 훈계했다면서요?'

목사고 전도사고 아무 상관 없어요. 
막 우리 애를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고..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막 쏟아 붓는 거죠.

 

내 가족 (자녀, 부모) 건드린 게, 내 자존심을 건드린 것으로 간주해서
그때는 자기 눈 앞에 물불이 가려지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을 보면, 신앙 위에, 뭐가 있는가 하면, 
자존심이 있더라고요. 

자존심 상하게 하면, 그때부터 전면전이 시작돼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신앙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자존심 타령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신앙이 아예 처음부터 들어간 적이 없는 거예요. 

자 이렇게 학연, 지연, 혈연, 인맥을 둘러싼 집단이기주의, 가족이기주의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이 사회와, 가정과, 교회를 좀 먹어 들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신앙적 차원은 고사하고, 상식적 차원부터 회복해야 돼요. 
객관성을 갖춰야 돼요. 

학연, 지연, 혈연, 인맥이 아니라 객관성! 

자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복음을 아는 게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알면 알수록, 밝히 살아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어느 부분이냐면 '의의 영역'이에요.

복음에는 사랑과 의가 있죠. 
근데 복음에 깊이 들어가 보면, 
내가 '의의 영역'을 꽤 많이 잃었다는 것을 알게 돼요

무슨 말이냐, 복음을 알게 되면, 십자가라고 하는 관문을 통과하게 돼요. 

그러면서 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살아납니다. 

무슨 말이냐면,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분별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 안에 십자가가 회복 되면 
내 고향사람이니, 나와 가까운 사람이니, 내 가족이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이게 안 보이고, 그러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죄가 엄격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또 내가 나를 지독하게 사랑했을지라도,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나를 감추지 않고, 내 죄를 드러내고 
내 죄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앞에서는 
학연, 지연, 혈연, 인맥 따위가 역사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가 교회 안에 살아있으면 
죄가 죄로 보여지고 
의가 의로 보여지는 객관성을 회복하게 되는 거죠. 

따라서 여러분, 교회가 다른 것 붙들 필요 없이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가까이할수록 
교회는 자존심의 문제나, 이런 집단 이기주의 문제에 얽히지 않고 
해방되어서 교회가 정화될 수 있고요. 

이 교회가 십자가를 붙들면 
이런 집단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회를 살릴 수 있게 돼요. 

이와 같이 객관성을 잃고, 분별하지 못해서 
모여든 이스라엘 11지파들은 결국 사고를 칩니다. 엄청난 대형 사고를 칩니다. 
동족을 얼마나 많이 죽이는지.. 그냥 내전이 일어난 거죠.


◑말씀대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대로 결정해 버렸다 

자 그런 의미에서 두번째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의 문제점은 뭐냐? (첫번째는 인맥의 문제였고)
말씀대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대로 결정해 버렸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에게 언제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역을, 사람이 침범할 때부터 발생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에요.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인데, 사람이 심판을 결정하고 시작을 해버렸어요. 

지금 이스라엘 11지파를 보면, 기도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
내 주장을 자꾸 어필하는 게 기도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11지파는, 지금 전쟁을 치르기 전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이 전쟁을 치를까요/ 말까요?'를 물은 적이 없어요. 

지금 이미 전쟁을 확정지은 상태에서, 사소한 거 하나 기도로 질문합니다. 
'누가 먼저 올라가서 전쟁을 치러야 합니까?' 

여러분 이게 기도입니까? 기도 아닙니다.
자기가 다 결정해 놓고 통보하듯이 하는 기도.. 이건 기도가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질문에 답을 하십니다. 
답을 안 하셔도 되는데, 답을 하셨어요.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라!'   삿20:18

여러분 이때 우리 혹시 생각나는거 있습니까? 
사사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과 전쟁할 때,
'누가 먼저 그 땅에 올라가야 되겠습니까?' 물었을 때 
하나님은 '유다 지파'라고 하셨습니다.  삿1:2

그때 하나님이 '유다 지파가 올라가라'라고 하셨던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지금 본문의 이 전쟁은, 사람이 시작한 사람의 전쟁입니다. 
  
▲이 대목을 읽는 우리 성경 독자들은 무슨 생각이 지금 딱 드냐면 
'어 지금 이 전쟁은 치르면 안 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우리는 깨달았는데, 정작 사사기 1장부터 전쟁을 치렀던 이스라엘이 
지금 본문 삿20장에서,

이 전쟁은 치러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분별력을 잃었어요. 

그래서 이번 전쟁에, 하나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이스라엘이 승리할지/ 말지 언급을 전혀 안 하십니다. 
그냥 '유다가 먼저 가라'만을 언급하셨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때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유다가 먼저 가라고 말씀을 하셨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전쟁을 허락하시는 건가?' 
여러분 그렇게 오해해선 안 돼요. 

하나님이 '유다가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과적으로 유다, 네가 먼저 올라가서 박살이 나라는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 유다 지파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우리가 삼손 다룰 때 말씀드렸죠?

유다 지파가 어떤 잘못을 했어요?
삼손이 힘겹게 홀로 블레셋과 싸우고 있을 때 
유다 지파는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겨 줍니다. 삿15:13

유다 지파는 강력하고, 수가 많은 지파입니다. 
그러면 블레셋과 싸워야죠. 
그런데 자기들이 삼손을 넘겨 줘버리잖아요. 

이런 유다 지파는 당연히 매를 맞아야 되겠죠. 
적과 싸울 때는 나서지도 않다가 
아군(베냐민) 죽이려고 할 때는 선뜻 나서서 
일번 타자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매를 맞아야죠. 

결국 베냐민 지파와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11지파가 2만2천 명이 전사합니다. 
자 이것은 왜 이렇게 돼었지요?

말씀의 원리(이웃 사랑)을 배제하고, 자기 감정대로 진행한 결과에요. 

자 11지파가 40만명 모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2만 6천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러면 게임이 안 되는 전쟁입니다.

11지파가 보면, 베냐민 지파가 가소롭겠죠.
자기들이 무조건 이겼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인생이 이렇습니다. 
내 생각대로, 예상대로 되지 알아요. 

▲여러분 저도, 20대의 꽃 다운 나이 때가 있었다니까요. 
저는 이렇게 설교준비 힘들게 하면서 
성도들이 듣는지/ 안 듣는건지도 모르면서 힘겹게 설교사역을 하고 있지만
저도 여러분 20대 때는 꿈이 있었어요. 

'내가 앞으로 28세가 되면, 개인사업장을 가질거야. 
낮에는 그 일하고 밤에는 라이브 카페에 가수가 돼서 노래하고.. 
그렇게 인생을 즐기고, 결혼은 30세에 할거야. 
내가 원하는 여자는 이런 이상형이야.. 

그래서 딱 이렇게 결혼을 하고 
편하게 사는 삶...' 을 꿈꾸었습니다.

저는 굉장히 구체적인 사람이에요. 
계획을 잡아도 너무 구체적으로 잡아서 
계획 잡다가 실행을 못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계획을 아주 철저하게 세웁니다. 

제가 그런데 28세에 '마가의 다락방'(기도원)에 와서
눈물 쫙쫙 흘리면서 고생하고 훈련 받으면서  
방금 지금도 그때 고생하던 생각이 났어요. 

'야 인생 내맘대로 되지 않더만..' 
내 예상대로 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박살 났습니다. 완전히! 

제 나이 35세에 결혼했고요, 
애는 셋 낳는 게 목표였는데,
지금 겨우 하나 낳아서 그것도 가까스로 키우고 있습니다.

하여간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에요.
아 지금 되게 후회가 돼요. 
'결혼은 무조건 일찍 해야 되는구나!'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요. 결혼을 늦게 하면 출산이 쉽지 않습니다.

인생은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러면 뭘 알아야 되냐? 

우리에게 힘이 있다고 해도, 그게 힘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또 (사람이나 자원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있는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내 삶을 칼과 창에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며 가야 돼요. 

 

▲그리고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업' 이라는 것들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돼요. 

이스라엘 11지파가 사회악을 근절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총 집결을 했어요. 

이게 하나님 이름을 걸고 나간 전쟁이라 이 말입니다. 

근데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말씀의 원리가 아닌, 인간적 감정대로 이끌린 내전에 불과했다는 거죠.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비슷한 전쟁이 있었죠. 
바로 십자군 전쟁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또 성지인 팔레스틴 땅을
이슬람 교도들로부터 탈환하겠다는 명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쟁을 시작했는데 
그 전쟁 참가자들을 보면, 영주나 하급기사, 상민이나 농민이나 
전부 투구나 방패나 옷에 십자가 표시하고 나갔어요. 

근데 사실 이게 단순히 이슬람 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종교전쟁이 아니었잖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전쟁에 참가했던 그 참가자들이 
각자 마음에 야망과 욕구와 욕망이 있었던 거예요. 

   *약탈로 인한 부의 획득이, 고대로부터 당시에 이르는 전쟁의 목적이었죠

사람들을 때려 죽이면서도, 이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너무 많은 살육을 벌였다니까요. 그래서 아랍 인들은 
아직까지 역사적으로 아픈 상처가 남아 있잖아요.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에 대한..

크리스천들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일을 진행한다고 해서.. 매번 때마다 다 의로운 것은 아니에요.
의롭지 않을 때도 있어요.

자기들 눈에는 의롭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그게 죄악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붙들고 의를 추구하는 거예요.

때로는 말씀이 따분하고, 귀찮고, 고리타분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말씀이 우리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바르게 인도하는 등대라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눈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말씀의 원리 대로 의를 추구하는 거지 
내가 내 생각대로 나아가는 게, 그게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청년들도
내 계획에,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동의를 얻어내려고 해요. 
그거 안 돼요. 

여러분 생각으로 다 확정 지어놓고 하나님께 통보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물어야죠. 그게 기도이지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게 기도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기도죠. 

▲사람은 꼭 매를 맞고 바닥을 쳐야 정신을 차리는지 
한번 패배했더니 이스라엘 11지파가 마음이 사뭇 낮아졌습니다. 
그때부터 기도 내용이 바뀌어요. 

전쟁을 다 결정해 놓고 '누가 올라갑니까?' 이러다가 
'하나님,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워야 합니까?' 
비교적 정상적인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또 울었어요.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3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올라가서 쳐라' 
그래서 이번에는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근데 두번째 전투도 실패하고 말았어요. 
11지파 군인 1만8천명이 전사했어요.
그러면 1차, 2차 전쟁 합해서 4만명이 전사했어요.

여러분 이들은 왜 또 실패했을까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회개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회개가 아닌 개인 감정이 있었던 거예요. 약오르죠. 눈물이 나죠. 

자기 형제들을 잃었으니까 슬프죠. 

 

그러니까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하나님을 붙들죠.
그런 식으로 회개한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올라가 봤자 또 패배했던 거예요. 

자 이제 우리에게 적용해볼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주일에 예배를 드렸어요. 기도도 했습니다.
근데 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아니 내가 나름대로 신앙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근데 왜 내가 하는 일이 번번히 막힐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마음을 원하세요. 
내가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지 아셔야 돼요.

그러니까 진실한 마음이 결여된 예배나 기도나 신앙생활은 
하나님 보시기에 쑈입니다. 종교적 쑈!

또 자기가 꾸며내는 연출된 쑈에 불가합니다. 

'어휴, 나는 왜 기도하는 데도 일이 자꾸 막힐까?
나는 신앙적인 노력을 하는데도, 일이 안 되는 걸까?' 
이때 조바심내고 원망하지 마시고요. 
여러분의 내면을 꼼꼼히 살펴보세요. 

내 마음이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준비되었는지 
그 내면을 살펴보시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자 이스라엘 11지파는 두 차례 전투에서 실패한 후에 
비로소 자기들은 죄가 보였어요. 

그러니까 내 죄는 모르고, 남의 죄만 지적질하고 죽이려고 했던 
그 자만함을, 이스라엘 11지파가 비로소 보게 되었던 것이죠. 

그때 자기 죄를 진짜 깨달으니까 이 사람의 태도가 바뀌어요. 
울고 끝나는게 아니고요. 벧엘로 올라가서 번제를 드려요.

화목제를 드리고  속죄 제사를 올립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6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막 따지듯이 기도하는게 아니라 
대제사장을 통해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변화의 모습을 보여줘요. 

그 기도가 뭐예요? 
'하나님, 저희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워야 됩니까/ 말해야 됩니까?' 
이 기도를 비로소 올려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28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확실이

하나님 뜻에 대한 분명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40만명이 모였다가 2만 6천명한테 패했으니, 얼마나 수모를 겪은 겁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내가 치욕을 겪는다 할지라도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 하는 의지가 이 기도에 담겨있었던 거예요. 

그때 주님이 보시기에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뭘 하시죠? 
'올라가라. 내일은 너희 손에 베냐민을 붙이겠다' 하셨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주력부대와 매복부대를 
작전을 짜서 전개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베냐민 자손 2만5천 명을 죽였어요.  :46

▲그런데 여기서 또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 전쟁을 동의하시고 시킨 것이냐?' 
아니에요. 

하나님은 누구를 지금 벌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죄악을 방관하고, 기브아 불량배들을 옹호했던 베냐민 지파에 대해
하나님은 나름대로 심판을 하신 거예요. 

자 이제 보니까 하나님는 자기 백성들을 깨닫게 하고 계세요. 
11지파도 혼나고, 베냐민도 혼나고 있어요.
이제 서로 각자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뭐냐? 
11지파가, 베냐민 지파의 군인들을 죽이고 승리한후에 
거기서 끝냈어야 돼요. 

아 그런데 11지파가, 베냐민 지파 사람 전체를 살육했어요.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만 죽이면 되었을 것을, 
베냐민 성읍으로 들어가서 베냐민 여자들을 다 죽였어요. 

그래서 베냐민 남자는 더 이상 장가를 갈 수 없게 해 버렸습니다. 
(보복공격이었을 거예요)
가축과 어린아이까지 살육하고, 학살을 해버렸어요.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48


이게 큰 화근이에요. 이로 인해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한 지파가 사라지게 돼버렸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이거를 아셔야 돼요. 
말씀이 아니라, 원한에 붙들린 거예요

여러분, 처음에는 말씀으로 시작했지만 
중간에 감정이 들어가는 걸 조심하셔야 돼요. 

이 감정이 이렇게 위험하다니까요. 

여러분 특히 보복이라는 것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될 거 같지만.. 그게 안 돼요. 

원한이 깊어지면, 보복이 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몇 배를 더 갚아주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원한에 찬 사람들이 복수할 때 
자기를 해코지 한 그 사람만 딱 제거합니까? 

그 마음의 분노가 그렇게 두지를 않아요. 
여러분, 드라마나 영화를 보세요. 

영화에 보면, 전직 특수부대인데, 은퇴한 군인인데 
이 할아버지의 손녀 딸을 건드린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이 할아버지가, 혼자서 그 마피아 조직원을 하나씩 다 죽여요.

근데 그런 장면들을 보잖아요. 
아니 한 놈만 죽여야지, 어휴 너무 많이 죽이는 것 같아요.

왜냐면 지금 그가 죽이고 있는 그 사람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남편이에요. 가족이에요. 아들이에요.

그런데 다 죽여버려요. 제가 그때 보면서 알았어요. 
사람의 보복이, 이에는 이..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니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예 '이에는 이, 눈에는 눈'도 하지 말라는 거죠.

이렇게 복수는 위험한 거예요.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옛날에 그런 영화제목이 있었는데, 복수가 정당화 될까봐 심히 우려됩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말씀의 원리를 붙들지 않으면 
이 온갖 마음에서 올라오는... 
뭐 내 상처, 쓴 뿌리, 억한 감정이 우리를 사로 잡습니다. 

여러분, 말씀에 귀기울여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시면 안 되고 
늘 순종하려고 애쓰셔야 합니다.

매사에 내가 말씀에 순종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으면, 
그러면 그 순간 나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생이에요. 그래서 결국에는 베냐민을 죽이는 거잖아요. 

여러분,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을 말살하기 전에, 기도했다니까요. 
11지파가 기도를 안 한 게 아니에요. 응답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응답과 승리에 도취되어서, 너무 선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근데 기도 응답받은 게 대수가 아니라고요. (말씀의 원리를 붙들어야 대수입니다)  
우리 청년들, 기도하다가 응답받는 게 대수가 아닙니다. 

마음속에 부정적인 쓴뿌리를 먼저 제거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11지파가 기도해서 응답은 받았지만 
마음 속 원한이 제거가 안 됐어요. 

그 결과, 참혹한 학살의 피바람이 불지 않습니까? 
저들의 전쟁의 시작은 정의구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포장지에 불과했어요. 
결국 내용은 뭐예요? 보복이었잖아요. 학살이었어요. 

여러분 이스라엘 11지파가 도대체 통곡과 금식을 왜 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여자들까지 모두 학살 하려고 했던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끝까지 말씀을 사랑하고 붙들지 않으면 
우리는 감정의 종노릇 할 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이스라엘의 내전을 지켜보면서 뭘 깨닫느냐? 
말씀을, 그 말씀의 기준과 원리를 버린 자들이, 어디까지 탈락할 수 있고, 
어디까지 밑바닥 치고, 어디까지 사회를 혼란시킬 수 있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결코 외부 침입을 통해 
나라와 사회가 혼란에 빠진 게 아닙니다. 

사사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자기들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나라와 사회를 부패하고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왜 이렇게 됐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선지자도 없었고, 
또한 자기들도 그 말씀의 원리를, 원칙을 자기 마음에 두기를 거부한 거예요. 
그럼 무엇을 붙잡았느냐? 
그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그 결과,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그 대가인, 쓴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따라서 여러분, 말씀의 원리가 빠진 곳에는
내 생각이 지배하게 되고
그런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에서, 여러분은 얼른 빠져나오셔야 합니다.

그런 11지파 가운데 멍청하게 끼어있으면 안 됩니다. 자기도 같이 위험에 빠집니다.
그러한 선택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막장으로 몰고 가지 마세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가? 
나는 그 모임에 왜 모이려고 하는가? 
나는 어디에 시간을 쓰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있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스스로 물어보세요. 

중략

저는 요즘 시대의 청년들이 왜 그렇게 불쌍하고 안타까운지요.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생, 정말 불안한 거예요.

뭘 그렇게 혼자 울분이 많고, 화가 나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지,
집을 뛰쳐나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 원하고...

제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역자로서
오늘 이 시대의 청년들을 보면, 늘 마음이 아픕니다.

주일날 교회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것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고, 답답해 보이고
친구들 한테 '너 교회 갔다 왔지?' 라는 말 들으면
간혹 창피할 때도 있어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말씀 듣는게 답답해 보일지라도
이게 우리 생각을 따라 사는 삶보다, 훨씬 현명한 길이에요. 아멘!

제발 좀 자존심 좀 버리세요.
자존심 세워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내가 이 예배당에서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내 죄가 다 드러난다 할지라도
여러분, 그 자존심만 버리면, 그 자존심이란 꽃이 땅에 떨어지면
그날부터 거기서 생명의 싹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존심의 꽃이 땅에 다 떨어지기 원합니다.
그게 아름다운 것 같죠?
아뇨. 그건 여러분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존심의 꽃이 바닥에 떨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싹 트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적어도 인생이 비참하게 되지는 않아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들이, 우리 교회가, 
무엇을 힘써야 할까요? 자기 정화에 힘써야 하는데, 

우리가 자기 정화를 잘 하는 방법은 뭐냐면
자꾸 내 삶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안 듣든지 
계속 듣게 하는 거예요. 
계속 성경을 보든지, 설교를 듣든지 하는 겁니다. 계속 애쓰는 겁니다.

이 삶을 멈추지만 않으면, 내 안에 새로운 두번째 본성이 생깁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말씀을 사랑하는 본성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말씀을 싫어하는 본성과 싸워 승리하게 돼요. 
계속 듣는 거예요. 계속 듣는 거예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거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거예요. 

뭘 듣습니까? 여러분이 듣는 거에 따라서 믿음이 형성될 거예요. 
세상의 잡다한 철학을 들으면, 세상 철학에 대한 믿음이 형성될 거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에 말씀에 대한 믿음이 형성될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게 하십시오. 그게 내가 살길이에요. 

그렇게 되면, 내가 무엇에 근거해서 행동하는지 잘 알아야 돼요. 

바라기는 내 생각하는 대로 사는게 편해보여도 
내 생각하는 대로 살다가, 그 끝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빨리 깨달으시고

오늘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 배웠잖아요.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는 거예요. 롬8:13

최근에 여러분, 저도 목회자이지만 고민이 있어요. 
이 고민이 세상 일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일인데도, 고민이 있어요. 

이 때 제가 계속 하는 작업이 뭐냐면 
주님 손에 자꾸 맡겨드리는 거예요. 내 뜻이 아니라요.

저도 사람이라서 계산이 돼요. 
주의 일이라도, 사람이라서 계산이 되고, 내 생각이 들어가거든요. 

근데 이 일에 자꾸 '나'라는게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이상하게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목사도 어쩔 수 없더라고요. 
내 생각이 들어가면 감사가 없고, 실수만 생기게 돼요.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을 다스리면서 
계속 하는 작업이 뭐냐면 
하나님이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리대로 내 삶을 그렇게 주님께 드리는 거예요. 
제가 이 일련의 과정을 지금 겪고 있거든요. 
(여러분께 구체적으로 그 일을 밝히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더라고요. 

나만 죽고, 나만 없어지면.. 하나님이 마음껏 일하실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죠? 
나는 내가 더 잘 되기 위해서, 늘 생각을 하는 거잖아요. 사실 그렇죠. 

여러분이 계획을 세울 때, 실패하려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 없잖아요. 
내가 더 잘 되기 위해서 계획하고, 내가 더 나아지기 위해서 계산하고, 헤아리고 있잖아요. 

근데 이것만 (내 자아, 내 성공만) 없어지면 일이 더 잘 풀려지더라구요. 
여러분의 삶에 주인이, 여러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돼요. 

여러분의 생각이 결정하지 않도록 막으세요. 
하나님께 더 물으세요. 하나님께 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 의지하세요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 
온 군대가 연합하여 원주민들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동족인 베냐민 지파를 진멸해 버렸어요. 

저는 이 사건 앞에서, 아직도 성경을 사랑하고 있는 한 독자로서 
어떻게 이스라엘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저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두려운 것은 뭐냐? 
나도 이꼴 날 수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매사에 말씀의 원리를 던져버리면 안돼요. 
말씀을 던져버리면, 나는 분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내 감정대로 살아가는 젊은이가 되는 거죠. 
그러면 결국 베냐민을 죽여요. 
나를 돕는 손길(동족)을, 그만 거절하고 마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우리의 삶에 말씀을, 
우리 마음과 인생 중심에 모셔드립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행합시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일하기 시작하실 거고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손끝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실패를 우리 가슴에 새겨서 
말씀에 있어서,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씀대로 걸어가는 귀한 청년공동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