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84편 해석, 성전 문지기의 노래 시84:1~12 여러 설교 정리
오늘 본문의 표제어는 <고라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입니다.
고라와 고라의 반역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민16:장
민수기 26:11절에 의하면 그 때 고라의 아들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반역자 고라가 죽임을 당할 때 그의 아들들이 죽임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반역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죽임을 본 이후
고라의 아들들과 그의 자손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같으면 반역을 일으킨 가문은 멸망을 당합니다.
왕을 죽이려 하거나 왕에게 반역을 했다면 역적의 가문이라고 해서
3족이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 우리네 문화에서 생각한다면 반역의 주동자였던 고라가 죽고 난 이후
고라의 자식들도 죽임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라의 아들들을 죽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에게 이전과 똑같이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계속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왕 시대에는 다윗이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하면서
이 고라의 자손들에게 성전의 문지기 역할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역대상 26:장)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이해한다면
본문의 시를 쓴 ‘고라의 자손’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시를 썼겠는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의 온 가문이 전원 멸문지화를 당할 뻔 했던 고라의 자손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기들을 다시금 성전의 문지기로 일할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자의 복 (1~4절)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는 감탄문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인생에 감탄사가 나타납니다.
사랑의 열정이 있어야 인생에 감탄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나에게는 주님께 대한 그런 감탄이 있으면 복된 사람입니다.
다윗은 주님께 대한 그런 감탄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주1)
그는 다른 시편에서
주의 집과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시69:9).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고라자손도, 다윗도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보다 주의 집과 주의 성전을 너무너무 간절하게 사모한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1절에서 성막을 ‘주의 장막’이라고 표현했던 시인은
이제는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움이 큼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모하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창백해지다’이고,
‘쇠약하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끝나다, 멸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찬란하게 빛나는 주님의 장막에 너무 가고 싶어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죽을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육체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합니다.
‘부르짖다’의 원 의미는 ‘진동하다’입니다. 온 몸이 떨릴 정도로 탄식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성전을 너무 사모해서 몸과 영혼이 쇠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노래 속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궁정을 향하여 너무나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미물에 불과했던 참새와 제비 새끼가 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들락거리는 참새와 제비가 부러웠습니다. :3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참새와 제비에 자기를 비유한 고라 자손>
다름 아닌, 가치 없는 참새와 같고 제비와 같은,
즉 다른 표현으로 ‘벌레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당신의 집에 용납해주시고, 거기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라 자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집에
그러한 죄인들과 상처받고 버림받은 영혼들이 깃들 수 있는 처소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넘치는 성품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된 지체들이 함께 경험하는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 ‘새끼’라는 단어가 복수로 나옵니다.
자기가 낳은 ‘많은 새끼들’을 거느리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긍휼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 주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새끼들’이 내 육신의 자녀들이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양육하는 영적인 자녀들이든지,
참새와 같고, 제비와 같은 비천한 나에게
주께서 주의 전에 거처를 주시는 은혜도 감사한데,
‘내 새끼들’까지도, 주의 전에서 거처를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아마 성막에 새 집이 지어져 있었고, 거기에 새끼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갈 곳 없는 제비 새끼와 같고,
연약하고 작은 참새와 같이,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 받는 수많은 인간들,
그리고 실패하고 낙담한 죄인들이 성소에 와서
조그맣게 라도 집을 지어 살겠다고
당신께 매달리는 자세는... 참 복된 것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시84:4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자신은 주의 제단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그토록 간절하나 갈 수 없지만,
당시에 가장 흔하고 가치 없게 여겨졌던 참새나 제비는
주의 제단 근처에 집을 짓고서 마음대로 주의 장막에 머물 수 있으니,
그것이 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사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주님을 찬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라 자손이 감당했던 ‘성전의 문지기’ 일은
성전의 문 앞에서 성전으로 통하는 통로를 지키는 일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모든 바깥문들을 여닫는 일에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이나 부정한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려 하면 그들을 막아 되돌려 보내는 일과,
성전 안에서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없나 하는 것까지도 감시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문지기의 마음속에 잘못된 욕망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전에 그들의 조상인 고라가 그랬던 것처럼
‘왜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는 일만 하는 거야?
우리도 제사장들처럼 멋지고 화려한 옷을 입고 성전 안에서 섬기는 일을 하면 더 좋잖아?
우리도 같은 레위의 자손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인기 없는 일만 하라는 거야?’
이렇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고라의 자손들도 사람인데, 왜 그런 불평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시인에게는 그런 불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성전 문지기로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바로 앞인 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인은 주의 성전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문지기로, 때로는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찬양대로 일하면서, (역대하 20:19)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알았기에
힘들지만 기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 순례자의 복 (5~7절)
5~7절은 성전 순례자를 보면서 향하여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은 단숨에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긴 여정을 꾸준히 따라가야 합니다.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여행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주님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께 얻는 특별한 힘입니다. 여행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시온의 대로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과 같이 절기 때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의 장막으로 가는 길이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오늘도 예배를 올려드리기 위해서 예배의 처소로 가는 길이 있는 사람은 복 있습니다.
다른 무엇을 얻어서 복이 아니라, 그 길을 가진 것 자체가 이미 복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충전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힘에 힘을 얻고 새로운 은총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은,
시온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큰 길이 마음이 그에게 있다는 거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여 사는 삶이 쉽다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는!
대로를 가니까요!
세상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처럼 살기가 엄청 어려워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대로를 가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 사람 백성의 특징이 뭐냐면
하나님의 나라 사람으로 사는 일이 굉장히 쉽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거죠.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시온의 대로, 순례길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눈물 골짜기가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각자의 눈물 골짜기의 지점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에 눈물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청소년기에 통과합니다.
중년에 통과하는 사람도 있고 노년에 통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눈물 골짜기의 종류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일로 눈물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으로 통과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의 일로 인해서 여러 사람들로 인해서 통과합니다.
우리에게 눈물 골짜기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시온의 대로가 또렷하게 보이고,
그것이 은총과 복임을 알게 됩니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힘을 한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자꾸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걸어갈 길을 끝까지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삶을 다 마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순례길’은
우리 일평생의 신앙여정의 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눈물 골짜기가 우리를 넘어뜨리거나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그 과정을 통과할 때에, 주님께서 주신 힘으로 인해서
마침내 하나님을 우러러 뵙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순례자의 기도 (8~12절)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9절에서는 자기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은
왕을 또는 제사장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시인은 자기 시대의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주시라’고 기도했겠습니까?
어쩌면 자기 조상 고라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의 조상 고라가 성막에서 일하던 중에
당대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임당한 것을
그의 후손인 오늘 본문의 시인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자기 시대에 최고 지도자인 왕과 제사장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자리를 결코 탐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대신에 자신은 자신에게 주신 성전 문지기의 이 직분을 만족하게 여기고,
자신은 평생 그 문지기로 있는 것만으로도 복되게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0절에서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 어떤 사람도
성전 문지기인 자기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지금처럼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인은 자신들의 악한 꾀로 수많은 재물을 모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비록 많은 돈을 버는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박수쳐 주거나 인정해 주는 자리는 아닐지라도
자신은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고 노래합니다.
왜요? 11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해요 방패이시기 때문’입니다.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를 영화롭게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해’는 만물에게 빛과 열을 공급해서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어 주시고 은혜를 공급해 주셔서
이 땅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또 ‘방패’가 적의 칼과 창, 화살의 공격을 막아주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요새가 되시며 피할 바위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온전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 증거가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 본문은 시편 1편, 23편처럼 따로 설교하지 않고, 천천히 읽기만 해도
가슴 깊이 와 닿고, 저절로 머리를 끄덕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삶의 자리에 심으셨을지라도
그 자리가 낮아 보이고, 눈물 골짜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시온의 대로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10절)”
라고 말한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생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없는 복이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는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지
거기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하며 만족하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저 문지기이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면 문지기라도 좋습니다. 아니 문지기이고 싶습니다.
이런 고백과 믿음으로 살아가십시다. 다른 자리 탐내고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주신 직분과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
주1)
칼빈과 델리취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편 84편의 저자가
다윗이거나, 다윗의 정신으로 노래한 고라 자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시편 84편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귀중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2).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3).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
여기 세 가지 고백은 모두 주의 집과 주의 성전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다윗의 간절한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에 물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 안에만 계신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 속에도 계십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다윗의 소원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던 솔로몬 왕도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그때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단순히 내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열왕기상 8:27)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성전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 또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장소를 뜻하지,
꼭 건물로서의 성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