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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21:1~25 자기 소견의 끝은 뼈저린 후회다

LNCK 2021. 12. 25. 17:08

https://www.youtube.com/watch?v=OUhrjwePKbU&list=PLl3giv1osErJIUN06D2lsLt8U-XB5S9SH

 

◈자기 소견의 끝은 뼈저린 후회다          삿21:1~25        2021/11/28 출처 

 

※정말 설교로 다루어지지 않는 본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성격을 말하면 성미가 좀 급한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재빠르게 서둘러 대처하는 점이 있고, 
그런 점에서 참 좋지만, 때로는 급하다 보니까, 실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성격 급한 사람들이 뭘 많이 하느냐면, 후회를 많이 합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조금 더 기도해 보고, 조금 더 기다려 볼 걸..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죠. 

급한 성격은 참 마귀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거 같아요. 
마귀는 굉장히 압박과 충동의 명수 아니겠어요? 

그래서 뭔가 빨리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조급함과 앞선 마음 때문에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오면서 이런 부분을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제 안에 올라오는 어떤 생각과 행동들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훈련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되더라고요. 

◑1. 그런 맥락에서 본문 사사기의 이스라엘 11지파가 무엇에 넘어졌느냐? 
바로 이렇게 성급하고 경솔한 결정이 화근이었다는 거죠.

조금 더 생각해보고, 조금 더 따져보고,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께 가져갔으면.. 해결받았을 것을..

자기 감정에 이끌린 대로, 기분대로, 분위기타서 일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초래되었죠? 
이스라엘의 한 지파인 베냐민지파가 그만 몰살을 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기억하셔야 됩니다. 
경솔한 결정은 후회를 불러옵니다. 

자 이제 이스라엘은 뭐라고 울고불고 하나님께 말하냐면, 3절 함께 보겠습니다. 

삿21: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자 저는 3절을 아주 읽기도 싫어요. 
아니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지금 베냐민 지파를 누가 없앤 건데요? 

자기네들이 죽여 놓고, 하나님이 시켜서 그런 것처럼 말하는 이 말버릇을 좀 보세요. 

'어찌하여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셨습니까?' 
자기네들이 이래 놓고, 하나님께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홧김에 저질러버린 경솔한 결정과 행동으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후회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본문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제 베냐민 지파 외에는 
어디론가 도망가버린 1천 명은 제외하고 
계수 할 수 있는 600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자 그런데요.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치르기 전에 
뭐라고 서원했냐면 
베냐민 지파에 대해 안 좋은 마음이 있으니까 
'우리가 너네 한테는 우리 딸들 시집 안 보내!' 이렇게 서원을 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베냐민 지파에 대가 끊기게 생겼어요. 
왜냐면 성읍 전체를 다 끝장내 (몰살해) 버렸어요. 
베냐민 여자들이 없어요. 

그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은, 지금 장가를 못 가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야 이거 어떡하지?' 
11지파가 베냐민 지파에게 자기 딸들을 주지 않기로 서원을 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요. 

자 여러분, 저는 생각해 봤어요. 
이것도 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거 어이없는 거 아니에요? 

11지파가, 자기 동족은 다 죽여 놓고 
그런 쓸데없는 서원은 잘 지키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무슨 서원이에요? 

그 지파를 다시 정말 살리려고 한다면 
'하나님 저희가 잘못된 서원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자기네들 딸이라도 얼른 줘야죠. 그렇게 다 죽여 버렸으면!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금 대책, 솔루션을 제시하는 겁니까? 
전쟁 치를 때 다른 서원을 또 했는데, 그게 기억이 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서원 이었냐면, 

이제 베냐민과 전쟁을 치를 때 
만약에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 있으면 
모조리 죽이겠다고 하는 소원을 또 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자기네들이 생각해 보니까
이 전쟁에 참전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게 어디냐면, 므낫세 지파 소속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서원한 대로 다 죽여야 되잖아요. 그죠?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다 죽였어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11지파가 1만2천명의 군인을 보내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 중에, 남자들이 참전 안 했다고.. 다 죽였어요. 

그러면 그 여자들만 남게 되죠. 
그 여자들 400명을 데리고 와서, 
그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에게 아내로 준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황당하지 않습니까. 
동족을 죽여 놓고, 지금 또 동족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겁니다. 

자 이게 뭐가 문제냐면 
자기네들이 경솔하게 했던 서원에 대해서는 조금도 피드백(되새김)이 없어요. 
서원을 했으니까, 서원 이행으로 그대로 직행해 버리고, 그래서 또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 서원을 지키자고 사람(동족)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걸까요? 
자 이런 일이 왜 벌어지냐면, 바로 사사기 전체가 말해 주고 있는 바 
'자기 소견대로 행했다'는 시대였다는 거예요. 

이만큼이나 이스라엘 중에 경건의 모양도 갖춘 사람이 없었고 
기도하는 어른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죠. 
그러니 사사시대에, 이런 코미디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자 여러분, 인간의 지혜와 해결책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나도 어리석죠. 
자기네들의 입장에서는 맞고, 이것이 옳구나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보세요.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주신 것이고, 말씀을 주시고, 기도할 수 있게 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옳은 선택을 내리게 하십니다. 
바른 인생길을 걸어가게 하신 거예요. 

요즘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자기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가치관이 형성 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기를 좀 무조건적으로 신임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경험과 행동과 방식은 그리 믿을 게 못 됩니다. 

요즘 청년들이 '한번 뭐 부딪혀 보지?' 하면서 부딪혀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부딪쳐 보려고 하는 그 상황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면 괜찮은데.. 

이게 말도 안 되는 것을 향해서, 자꾸 부딪쳐 보겠다고 
도전정신을 내보이는 친구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거는 객기입니다. 

내 판단과 생각은 틀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직면한 상황을 내가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기도하고 묻고, 
그 후에 그것을 따르는 지혜로운 청년들로 거듭나야 됩니다. 


◑2.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보여 주는 두 번째 현상은 뭐냐면 
예배를 드려도 자기 주장이 처리되지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자 여러분, 예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배는 능력입니다. 
예배가 왜 능력이에요? 간단하죠. 
하나님과 만나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우리가 능력을 얻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데도,
자기 자아가 여전히 펄펄 살아 있고 
하나님을 막 이겨먹으려고 그래요. 하나님을 무시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임재해 계실 이유가 없죠. 
그때 우리에겐 능력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잘 정의 내려야 돼요. 
하나님이 내 주인이심을 확인하고, 확정짓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를 올려드리는 것, 
그래서 예배를 잘 드리면 달라집니다. 변화 되지요. 

여러분, 이스라엘도 그렇게 베냐민 지파를 다 죽여 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삿21:4, 20:26참조.

예배 가운데,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후회에 불과했어요. 회개는 후회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예배를 드렸으면, 전인격적인 회복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보다 그게 잘 안 일어나요. 
예배가 온전히 진행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예배 후에 벌어진 행동을 보면 알아요. 
이제 그렇게 자기 멋대로 사람들을 죽였으면, 하나님께 물어야 되죠. 

그런데 11지파는 하나님께 묻지 않아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또 행동합니다. 
그래서 야베스 길르앗 남자들을 또 다 죽여버립니다. 21:5, 10~11

서원을 했더라도, 서원을 이행하기 전에 한 번 되짚어 봐야죠.
혹시 홧김에 잘못 서원한 것이면, 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죠.

그런데 자기들이 서원했다고, 21:5
그 서원을 이행한다고 해서 야베스길르앗 사람들, 
즉 베냐민 지파를 치는 전쟁에 참전 안 했던 사람들을 다 죽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각에서 보면, 얼마나 웃겨요? 
번제와 화목제 예배를 드리고, 또 울었어요. 

그리고 눈물 닦자마자 또 사람을 죽였다고요. 

여러분 이렇게 자아가 죽지 않으면 
예배를 백날 들여도 소용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자기 자아가 죽지 않으면 
얼마든지 예배 때 공상에 빠질 수 있고, 음란 할 수 있고, 
엉뚱한 생각을 붙들릴 수 있어요. 

자아가 죽지 않으면, 기도했다고 대수가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내면의 소리가 들리면, 이게 다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아요. 
자기 욕심의 소리일 수도 있인데 말입니다. 이게 문제라고요. 

예배 드리는 거, 기도하는 거, 안수받는 거, 그게 대수가 아니라 
예배와 기도를 통해 내 속사람이 바뀌어야 돼요. 

내가 거듭나야 되고, 내가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그릇이 돼야 됩니다. 
안 그러면 교회 안에서, 예배 잘 드리면서도.. 완전히 빗나갈 수 있어요. 
'자기 소견대로'를 빨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예배에 성공하는 비결이에요. 

자기소견대로를 빨리 처리한 사람들만이 
그 다음 스텝을 온전하게 밟을 수 있어요. 

이스라엘의 용사들은, 
두 번째 서원한 대로 야베스길르앗 사람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21:10~11

아까 제가 말씀 드렸지만, 이런 질문이 생겨요.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다짐하고, 서원하는 경우가 생겨요. 

그런데 서원을 했으면, 이거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해야 됩니까? 
이런 문제가 꽤 많더라고요. 

하나님께 작정해서 다짐했기 때문에, 이거를 그대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근데 그 서원이 만약에 성경적이지 않으면 어떡할 거예요? 

내 서원이, 하나님의 진노하실 만한 서원이면 어떻게 됩니까? 
서원이라고 했으니까, 소원이니까.. 무조건 이행해야 됩니까? 
아니에요. 회개하고 철회할 수 있어야 돼요. *애당초 잘못된 서원인 경우

그런데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요, 엉터리 서원은 잘도 지키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이행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차라리 해괴망측한 서원할 바에는 입을 열지 마세요.
서원 같은 건 섣불리 하는 게 아닙니다. 

전도서 5:6 '너는 혀를 잘못 놀려서 죄를 짓지 말아라. 
제사장 앞에서 내가 한 서원은, 실수했습니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왜 너는 네 말로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려 하느냐?
어찌하여 하나님이 네 손으로 이룩한 일들을 부수시게 하려고 하느냐?' 

경솔한 서원을 통해, 세워놓은 거까지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그런 틀린 말들과 서원들, 맹세들을 남발해서 
삶을 어지럽히지 말란 말이에요.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뜻이잖아요. 

우리가 너무나 속상한 것이,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하면서 
또 혹은 신앙의 이름으로 엉뚱한 데 힘을 쏟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현장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있잖아요. 
이 사람이 차라리 신앙을 안 가졌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았을 사람도 있어요. 

갑자기 신앙심을 갖게 된 후에 
그 신앙의 이름으로 엉뚱하게 분별해 가지고, 일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되게 안타까워요. 제 지인 중에도 있어요. 

제가 지인에게 늘 얘기하는 게 뭐냐면  
'그래,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믿음이 꼭 상식을 짖밟지는 않으니 
잘못 분별해서 어리석은 길로 가는 거 보다는 나으니까 

자꾸 네가 어떤 깨달음이 올때 
이게 일단 상식적인 것인지 생각 해 봐라. 
그러면 일을 크게 그르치지는 않을 거다' 라고 얘기 해요. 

그래서 계속 상식과 그런 부분들을 강조하죠. 

제가 알고 있는 지인도, 바로 이런 상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바람에 
일찍이 소천하셨어요.

제가 가장 가슴 아픈 것 중에 하나는, 누가 신앙의 힘으로 암이 나았어요. 
그럴 수 있죠. 그건 그 한 개인의 일일 수 있어요. 
근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요. '내가 그랬으니 너도 해 봐라. 
나는 믿음으로, 민간요법으로 낳왔다. 그러니 너도 병원 갈 필요 없다. 
믿음으로 고쳐라. 그리고 부수적으로 불안하면 민간요법을 한번 해 봐!' 

결국 그래서 치료받을 골든타임을 놓쳐서 암이 다 퍼져서 
돌아가신 분들이 계세요. 

제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라고요.
왜냐면, 그런 비상식 적인 암치료 법을 퍼트리고 다니는 분이
목사 사모님이라 그러더라고요.

이렇게 신앙의 이름으로, 자꾸 상식을 거스르는 행위를 해요. 
요즘은 여러분 조심하셔야 되는 게 
신앙이 점점 오염되어 갑니다. 

유튜브를 조심해야 되는 게, 한 개인의 검증되지 않은 체험 신앙이 막 돌아다녀요.
별의별 체험, 별의별 은사 경험, 잡다한 신앙관이 우리를 어지럽히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어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 가장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느냐? 
말씀의 원리를 붙드는 거고요. 
말씀의 관점으로 분별하면 되고요. 

두 번째, 상식적인 차원으로 헤아리라고 제안 드리고 싶어요. 
그 검증도 안 된 해괴망측한 신앙관 때문에
사람 잡고, 인생 꼬이고,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들 통해서 
사회에서 지탄받는 일들이 꽤 많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 팔아 가지고 
성령의 이름 빙자해서 왜 자기 소견대로 일을 하냐 말이에요. 

그래서 감리교회에서는 "4가지 신앙 지표" 제시합니다. 
그게 뭐냐면 전통 - 이성 - 성경 - 체험이에요. 

여기 중에서 '이성의 영역'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성의 영역'을 무시하면 안 돼요. 

이성을 무시하면 정말 광신과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으니까 주의해야 돼요. 

따라서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우스꽝스러운 신앙 형태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닌데, 하나님을 이상한 신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 공동체는 몰상식한 어리석은 서원을 통해서 
자기동족을 글쎄 자꾸 죽여버리고 
이스라엘 전체 전력을 깎아버리고,
이방 나라의 조롱을 받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거죠.

얼마나 이방신들을 섬기는 자들이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 우습게 알겠어요? 
'쟤네들은 지들끼리 칼로 쳐 죽여!'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지금 전쟁을 치르게 되면, 사단의 종들과, 안티크라이스트 세력들과 치러도 모자랄 판에 
교회가 교회들 끼리 칼 들고 싸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가 막힌 얘기죠. 

근데 그들은 눈이 가려지지 않습니까? 
자기 소견에 옳아버리면.. 그냥 싸워요.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자기가 맞다고 계속 싸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어디 교회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그 교회의 그 기사가 떴는데 
그 밑에 댓글을 보니까 충격적인 댓글이 있더라고요. 
'종교인이 변하면 테러범이 된다' 

이게 뭐예요?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눈이 가려워 진 겁니다. 
주의하셔야 돼요. 


◑3. 세 번째 본문의 이스라엘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뭐냐면 
죄가 또 죄를 연쇄적으로 물고 들어왔다는 거예요. 

자 기가 차지만, 이들의 해결책은 뭐였어요? 
'베냐민 지파 남자들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 

그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의 해결책이 뭐냐고요? 
자기 동족 남자들을 또 죽여서, 그 남은 여자들을 
베냐민 지파에게 데려다 주는 거예요. 황당 하지 않아요?

제가 이 본문을 설교 준비하는데 고민이 되는 거예요.
신앙인들이 정말 다 이렇게 몰상식하다고 생각할까 봐... 
말이 안 되는 얘기죠.

남은 베냐민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야베스길르앗 남자들을 다 죽여버렸어요.
그래서 구한 여자들이 400명 이었어요.

근데 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손들은 600명의 남자들이었어요.
그러니 400명은 아내를 구해줬는데, 여전히 200명의 여자가 모자라죠. 

그럼 남은 200명을 어떻게 구할까요?
이제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들의 소견에 좋은대로 또 하나의 계책을 냅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이게 좀 설교하기가 좀 힘들어요. 
이게 보쌈 작전입니다. *보쌈 : 과거에 한국에서 여자나 남자를 보자기로 덮어서 납치한 일

당시 언약궤가 실로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매년 여호와의 축제가 열려요. 
거기서 예배하며 춤추는 여자들, 그런 여자들이 있었어요. 

그때 11지파 공동체가 뭐라고 얘기하냐면 
'베냐민의 남은 200명 군사들아, 
너희가 숲에 숨었다가, 그 춤추는 여자들을 하나씩 붙잡아서
너네 땅으로 데려가서 아내를 삼아라' 

그래서 실제로 200명이 숲에 숨어 있다가 
실로에서 춤추는 여자들이 등장할 때, 
숲에서 200명의 남자들이 나와서 납치해 갔습니다. 
본문에는 '붙들었다'라고 했는데, *21:21
사실은 '납치했다'는 뜻입니다.  *히, 카타프 seize, catch

그러니 이스라엘 그 베냐민 지파가 했던 짓이 얼마나 악한지 아시겠죠?

그런데 문제는,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 입니다. 
실은 이 에브라임 지파도,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과 전쟁을 치를 때 
다같이 모여서 서원했습니다. '우리의 딸을 주지 않기로' 

그런데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자기 딸을 빼앗겨서 
그만 베냐민 지파에게 넘겨주게 된 거예요. 
에브라임 지파는 굉장히 억울한 상황이겠지요? 

게다가 졸지에 영문도 모르고 잡혀간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이었어요? 
창기입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예배에 참여했던 예배자들이었어요. 

이들을 욕보이겠다는 것은, 여러분 충격적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건을 접할 때, 신앙인으로서 너무 당황스러워요.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를 몰살한 것에 대해서 가슴 아파한 것도 잠시, 
그 '베냐민 장가보내기 프로젝트'을 수행할 때, 
실로의 여자들은 보쌈 납치로 해결했다... 

이런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지만, 교회에 예배하러 나온 여자들을
강제 납치해서 자기 고향으로 데려가 버린 겁니다.

이거는 여러분, 있을 수 없는 너무나도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베스길르앗 여인 4백명, 실로 여인 2백명, 
해서 총 6백명의 여인들은
마음에도 없는 베냐민 지파 남성들에게 끌려가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울분과 한이 맺혔을까요?

그래서 야베스길르앗 과 실로에는, 지금 한 맺힌 절규와 울부짖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는 '통곡의 책' 이라고도 합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서 압제당할 때 보김에서 울었죠. 
보김에서 울었던 것은 회개가 아니에요. 
그냥 자기 인생이 하도 딱 하고 한탄스러워서 우는 겁니다. 

처음부터 사사기는 통곡이었고 
마지막 21장까지 여인들이 웁니다. 
중간에 이방에 압제를 당할 때마다 또 울었겠지요.
이스라엘이 눈물바다로 시작해서 끝나는 게 사사기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대처를 보세요. 
실로의 여자들을 보내주고 나니까, 실로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가 찜찜했겠죠.
그때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뭐라는지 알아요?

21:22 '만일 그(빼앗긴 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제가 잠깐 설명해드리면, 만일 졸지에 납치당한 여자들의 가족들이 와서 
'왜 내 딸을 그렇게 데리고 갔느냐?'라고 항의하면, 이렇게 얘기하면 된대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너그럽게 해 주세요. 
아버지인 당신이 비록 서원을 깬 거 같지만 
내어준 것은 우리가 내어 준 거니까, 당신은 (서원을 깬) 죄는 없소!'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딸 자식 뺏긴 부모와 그 형제들이 마음이 편할까요?
아마 남은 평생을 설움과 울분가운데 살아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자기들이 일으킨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보세요. 이게 해결책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이 사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사회가 주관하고 있는 일부 모임이나 회의들은 
되게 무서운 것이 있어요. 그 몇 명이 모여서, 그들의 토의를 하는 그 책상에 
선한 것들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악한 것들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것이 악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소견대로, 욕심대로 행하여
그것을 선하고 정당한 것으로 얼마든지 둔갑시켜서 통과시켜 버린다는 겁니다.

몇몇 힘 있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명분 걸고 도장 찍고 유행시켜버리면 
간단하게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동성애 문제 아니겠어요?

그 동성애를, 인권이니, 상생이니, 차별금지 등의 선한 모토로 통과시키고
유행시켜 버리면, 그 사회에는 그게 마치 정당화된 것이고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이건 강자의 횡포가 될 수도 있어요. 

근데 본문의 이 이스라엘이, 강자의 횡포 같은 짓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자기들이 벌인 일을, 왜 남들이 뒤치닥거리를 하게 합니까?

만약 실로의 성막 앞에서 춤추는 여자들이
자기들의 딸이었으면, 그렇게 쉽게 베냐민 지파에게 내어주겠습니까?
남의 딸이니, 그렇게 쉽게 내어주는 거죠.
 
바로 이런 끔찍한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사기 21장은, 지금까지 설교자들에 의해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실을 피하고, 좌시할 수 없어요. 
왜냐면 이 사회는 사사 시대이기 때문이에요.
아니 사사시대를 넘는, 초월적인 죄에 빠져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죠. 

자신의 정욕과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권과 정절이 
희생당하고 유린되고 짓밟히는 시대인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사기에서 보여주는, 자기 소견대로의 삶이 
얼마나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얼마나 더럽히고, 망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거예요. 

게다가 하나님을 떠난, 말씀을 저버린 인생들은 어떻게 돼요? 
사람 같지도 않죠. 괴물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사사기의 이스라엘 공동체 보면서 
이 사람들 보면 어때요? 사람 같지도 않죠?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들과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요. 
이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에요. 
그 말은 곧 뭐냐?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자 우리는 지금 모를 수 있지만, 요즘 이때도 다들 쉬쉬하고 있을 뿐이지 
왜 하나님의 성전에서 말도 안 되는 그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일들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스라엘이 지나간 자리는 온통 자기 멋대로 였고 
이스라엘 사회에는 눈물자국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요, 지울 수가 없어요. 잊혀지지가 않아요, 삭제가 안 돼요. 
그게 시대의 아픔이었고, 동시에 인간들의 추잡한 영적 민낯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간의 자기 멋대로의 세월은, 이와 같이 후회 밖에 남지 않습니다. 
후회밖에! 

여러분, 우리가 이런 이스라엘의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간단하게 두 가지만 살펴보기 원하는데요, 

첫 번째는, 죄는 그 죄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는 죄를 다시 물고 오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찾아 들어오는 작은 죄를 허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 여러분 지금 이제 내전으로 인한 동족 살상과 
그 딸자식 납치사건까지 나왔는데 
사실 여기까지 가기 전에는, 어떤 미미한 개인의 종교적 타락이 있었어요. 

그걸 사사기가 보여 주는 거예요. 
미가 라고 하는 한 개인의 종교적인 타락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레위인에게도 종교적인 타락의 영향을 미치고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단 지파 전체가 우상숭배로 이어지게 하고 
그것이 결국 어디까지 퍼져 나갔어요? 
내전으로 인한 동족 살상과, 여성 납치까지 가는 거죠. 

이건 뭘 보여 주고 있어요? 
죄가 죄를 연쇄적으로 물고 들어오는 무서운 현상을 보여 주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 제가 개인적으로 항상 조심하는 것이 뭐냐면 
'그 죄의 씨앗을 조심해야 됩니다.' 

죄를 화끈하게 짓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죄의 씨앗이 심령 안에 뚝 떨어져요.

그때 얼른 그 씨앗을 싹 날려 버리고 털어버려야 되는데 
그 작업을 안 하면, 반드시 여러분의 심령에 터를 잡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버려요. 

그 씨앗은 우리 안에 또 다른 죄들, 
보다 더 큰 죄로 이어지게 합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들 있을걸요? 
내가 작은 것을 허용한 거 같은데 
어느 날 자기를 볼 때, 너무 그게 커져서 깜짝 놀라 겁니다. 

왜냐면 불과 며칠 만에, 자신이 죄 가운데 살고 있는 걸 발견하게 돼요. 
그리고 이 죄가 이미 딱 자라게 되면, 떨쳐내려고 그래도 떨쳐지지가 않아요.
꽤 고생을 하게 됩니다. 낭패를 겪고, 
그다음에 이제 힘겹게 자기 제자리로 돌아온 경험이 다 있을 거예요. 

여러분, 작은 것, 작은 죄를 허용해서 문을 열어 주면 안 돼요. 

토마스 아 켐피스가 뭐라 그랬죠? 
'죄는 초기에 대응하라. 유혹은 초기에 차단하라!' 기억하십시오!

두 번째는, 우리가 죄를 깨달았잖아요. 
그러면 회개의 철저한 과정으로 고쳐야지, 잔머리를 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보면, 제가 저를 봐도 인간의 본성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에서 살았는데 
그 아파트 단지 앞에 꽤 괜찮은 잔디밭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아파트에 있는 모든 초등학생 친구들이 다 나왔어요. 
그 잔디밭에서 축구를 했거든요.

근데 제가 공을 찼는데 그만 잘못 차서, 
공이 가정집 창문으로 향하는 거예요.
그냥 창문이 공에 맞아서 깨져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제가 아직 유리가 깨진 것도 아닌데, 
공의 방향만 보고서, 그냥 냅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숨기 위해서였죠.
제가 달려가는데, 뒤에서 쨍그랑 소리가 나더라고요.

집으로 도망가서 숨었는데, 심장이 그렇게 쿵덕쿵덕 뛰어요.
그 집 주인 아줌마가 나와 가지고 사납게 그냥 친구들을 잡는데
얘들은 그냥 제가 있는 쪽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이거 어떻게 될까? 시침이를 뚝 뗄까? 내가 했다고 말할까?'

사실 그 문제는 굉장히 간단하게 해결됐습니다. 
제가 숨어있다가 그냥 일어나 가지고 갔어요. 
'아주머니, 제가 그랬어요. 잘못했습니다' 하니까
'조심해!' 그리고 간단히 해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창문 유리값 5만원 물어드렸어요. 
동경유리점에서 와서 수리해 줬어요.

여러분 그러면 끝나는 거거든요. 무슨 말이냐? 
우리가 잘 못 했잖아요. 그럼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말하면 그걸로 끝나요. 
그런데 여기서 잔머리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이스라엘 11지파는, 그냥 하나님 앞에 '우리가 베냐민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죽일 놈입니다. 우리 딸을 베냐민에 보내겠습니다.' 결단하면 되는데 

이스라엘은 잔머리를 쓰고, 편법 쓰고, 요령 부려서 
거기서 빠져나가려 하다보니 
그게 잘 안 되니 어떻게 됩니까? 
인생이 꼬이고 복잡해져서 
하는 짓마다 계속 죄만 더 짓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회개하는 게 미련한 거 같고, 되게 돌아가는 거 같죠? 
바보 되는 거 같죠?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는 어릴 때 깨달았어요. 잘못했으면 그냥 가서 잘못 됐다고 그러면
빨리 끝나는 거예요. 회개는 우리가 회복하는데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그때부턴 하나님이 개입하지 시작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통해,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거죠. 

인간의 힘으로 잔머리 굴려 봤자, 그건 다 임시변통인 거예요. 
그냥 또 고생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또 한 면을 보게 되면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죠. 
회개하지 않고 계속 편법을 쓰고, 부산스럽게 일을 꾸몄습니다. 

사실 이게 뭘 지금 보여주고 있는 건줄 아십니까?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그래도 내게 옳은 구석이 있다는 걸 보이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집에서 잘못 했는데 자꾸 변명하고 우기는 애들에게는 
뭐 밖에 없어요? 매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계속 잘못했는데, 잘못한 것을 인정을 안 하고 우기면 
부모는 매를 대하죠. 

근데 여러분 이겁니다. 매라도 되면 다행인데, 
매를 만약에 안 대잖아요. 그럼 패륜아가 돼 버려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실수가 있고 죄를 지었을 때 
매를 딱 맞으면, 여러분 이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살았다. 난 이제 살았다.' 

근데 하나님이 매를 안 대시잖아요. 
영적 패륜아가 되고, 버림 받는 거예요. 

제가 이따금씩 보면, 한동안 교회 안 나오시다가 다시 오신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뭐 자신 만만해서, 예배 필요 없다면서 소리치고 나가신 분들이 
후일에 예배당에 다시 오잖아요. 

그러면 왜 그 분들이 오셨을까요? 대부분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쉽게 말해, 세상에 나가서 인생의 충격을 한 방 먹고 돌아온 거예요. 

내가 옳은 줄 알았는데, 내가 맞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 될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아닌 거죠. 그래서 돌아오신 거예요. 

여러분 이거예요. 매 맞고 돌아오면 너무 천만다행 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 중에는 못 돌아오는 분들도 계세요. 저는 그런 분들을 알고 있어요. 
못 돌아오는 거예요. 끝까지 그 자리에 붙어 있어요. 

저는 두려워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서둘러서 나의 경솔한 결정과 서원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며 회개했다면, 오히려 앞으로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더욱더 부강하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나라로 바꿔 주실 수 있었어요. 
하나님 회개를 가장 기뻐하시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어요. 잔머리 굴렸어요. 
이젠 가망이 없는 거예요. 후회할 짓을 계속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는데 또 무슨 생각이 드냐면 
'그래, 그 어른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었어. 
근데 문제는, 죄는 흔적을 남기거든요. 
후손들이 문제라고요. 후손들에게 반드시 악영향이 옵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왜 악영향을 미치는 줄 압니까?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어요. 
절대 앞 모습을 보는 게 아니에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 지 결정합니다. 

후손들이, 
어른들이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태도를 보이고 
그날 온 공동체가 울면서 회개 집회를 열었으면 
후손들이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어른이 되었을 때 
잘못 하게 되면, 나가서 주님 앞에,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다시 우리를 긍휼이 여겨주세요. 

내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면 나를 싸매어 주시고 
다시는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런데 이 후손들의 눈에는, 어른들의 회개를 보지 못했어요. 
돌이킴을 보지 못했어요.
이 후손들은, 어른들에 대한 선한 기억이 없었어요. 

그저 어른들은 변명하고, 잔머리 쓰고, 
자기가 지은 과오를 그저 덮으려고 하는 섬뜩한 어른들의 눈빛과 
그저 교활한 행동들만 기억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후손들도 결국 어떤 길을 걸어가요?
어른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는 거지요. 

사랑하는 우리 청년 여러분, 또 여기서 함께해 주시는 우리 성도 여러분 
시청해 주시는 인터넷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삶을 사는 것은, 책임이 따릅니다. 

오늘 나만 살다가 가는 게 아니에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나 하나만 죄짓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이 영향을 받고, 내 후손들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죄를 바톤 터치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우리의 대generation 에 
이 죄의 싹을 끊어버리고, 잘라 버리고, 말려 버려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다음 세대를 살려내야 돼요.

사사기를 이제 마치면서, 우린 이제 무엇을 깨닫죠?
결국 1~21장까지, 그 어떤 사사도,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대신 지혜롭고 선하고 구원할 만한 존재는 없었다는 결론이 나는 거예요. 

따라서 진정한 사사는, 사사기에 딱 한 명만 존재하는데 
그분은 바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진정한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에요. 
이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거밖에 없다... 이것이 사사기가 주는 주제인 것이죠. 
따라서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이제 낮추십시다. 
내 소견과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사에 주인이 되어 주시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앞서 나가 주실 수 있도록 

이제 나와 내 집이 우리 여호와만 섬기고 
여호와를 깊이 마음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거룩한 주의 청년공동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사기에서 계속 나오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가 
앞으로 우리들의 삶을 움직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예배자요, 
이 시대를 변화시킬 거룩한 사사로 일어나는 
귀한 젊은이들 되길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