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삿3장 1~11 문제를 남겨두시다

LNCK 2021. 12. 29. 22:02

◈문제를 남겨두시다           삿3:1~11                 2021.08.07. 출처
                                                    *사사기 설교 모음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를 받아오곤 합니다. 
그 숙제를 하고 있는 아이 뒤에 가서,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가 이렇게 보면 
부모의 눈에는 답이 1초만에 보이는 문제들을 가지고 
정말 오랫동안 끙끙대며 씨름하고 있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답이 뻔한데 그냥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애를 써서 답을 씁니다. 그런데 그 답도 틀리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그 틀린 답을 쓰는 아이를 보고 
바로 옆에서 간섭하고, 답을 바로 적어주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조금 고통스럽고 고생스럽겠지만 
자기가 스스로 그 답을 알아갈 때까지 
옆에서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그런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인 것이죠. 

그렇지 못하고 사사건건 개입해서 아이의 문제를 부모가 다 해결해주면 
그 아이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들어가 보니 
그 땅이 텅 비어있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다 완성해 가지고 
텅 빈 땅에 그냥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그런 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거예요. 
   
문제를 다 해결하신 채로 주시지 않고 
문제를 남겨두신 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허락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삿3:1~4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남겨두신 문제의 답을 다는 일이었습니다.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전쟁 같은.. 아니 전쟁이었습니다. 
치열하게, 그 문제에 답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 상황을 
그들 스스로가 헤쳐나가고 풀어나가야 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해서 
문제의 해결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정말 '옆구리에 가시'같은 그런 민족들을    2:3  
그 땅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가 생선을 달라고 할 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사기를 읽어보면 
사사기가 그리고 여호수아서가 우리들에게 말씀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저 고상하고 우아하게, 교양있게 
그런 것들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매일의 그런 치열함을 우리가 견디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전쟁같은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생활에 중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이죠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전쟁을 치르고 계십니까? 
아마 각자가 모양은 다르지만 
치열한 전쟁 중에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줄로 압니다. 

가정의 문제든, 전혀 양육의 문제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든, 
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 

어떻게 해결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끙끙대는 그 많은 요소들.. 
우리는 이 많은 전쟁들을 치르고 있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는 거예요. 
그 문제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셨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우리 안에 이미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사기 1장에 보면,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좀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그 땅에 있는 민족들을 쫓아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게 됐어요. 

그러나 그렇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땅에 있는 가나안 7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습니다. 

못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못했지만, 나중에는 안 하게 된 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바로 '의지의 문제'였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수많은 어려움들, 문제들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면하게 해 주셨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에게 그 능력이 있나/ 없나 
그것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그 나의 태도를 결정하고 
하나님 나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셨다면 
한번 하나님의 손을 잡고, 믿고, 제가 이 문제에 속으로 뛰어들어 보겠습니다!'
하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의지와 결단이 없었다는 것을 
사사기를 통해서, 본 서의 독자인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삿3:5~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이 전쟁이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해야 하는 전쟁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단순히 영토 확장의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넓은, 조금 더 큰 영역을 내가 획득하기 위해서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 대부분의 왕들은 
땅따먹기의 귀재들이었습니다. 

조금 더 넓은 영토를 확장하는 왕들을 
우리는 위대한 왕, 역사적인 왕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 당시 고대 근동의 여느 다른 나라들의 전쟁의 목적도 동일했습니다. 
조금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는 그것이 전쟁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참 그 비좁은, 좁디 좁은 가나안 땅을 선택해서 
그 땅을 점령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탈출해 나왔던 애굽당이 훨씬 더 컸습니다. 
조금 의구심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 출애굽기 기록들을 볼 때 
애굽에서 빼낼 것이 아니라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 전역이 그 정도로 초토화가 됐으면 

거기에 조금만 더 보태서, 한 15가지 정도 재앙을 내리셨으면 
아마 애굽이 다 무너지지 않았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요셉같은 지도자 두 세명만 세우면 
아마 애굽과 같은 큰 영토하나 삼키고 차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스케일에 또 걸맞고요.

하나님과 같이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하신 분에게 
그 정도 쯤의 일은 
큰 능력 이나 어마어마한 계획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넓고 비옥한 땅에서부터 빼내와서 
40년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셔서 

어떻게 보면 그 주변 열강들보다 훨씬 작은 땅인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광야가 아니라, 애굽에서 40년 동안 군사훈련 해가지고 
조금 더 확장하는 차원에서 가나안 땅도 점령하고 
그 주변에 있는 열강들을 다 점령해가지고 
어마어마한 영토 위에 하나님 나라를 딱 세우셨으면 

누가 봐도 하나님은 대단하신 분이다... 
이렇게 인정할 수 있었을 텐데요. 

하나님께서는 그 좁디좁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의 관심은 결코 영토의 크고/ 작음의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읽어보면 
마치 영토 전쟁을 하는 것처럼 우리 눈에는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야를 조금 넓게 보면 
결코 하나님의 관심이 
그 땅 몇 평, 땅 얼마만의 넓이를 차지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전쟁은 영토가 아니라, 영적 전쟁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영토에 있지 않다는 것을 
물질적 크기의 있지 않다는 것을 
이때부터 끊임없이 구약시대부터 말씀하고 계셨다.. 라는 거예요. 

이들의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인 전쟁이었습니다. 

본문 6절에도 보면, 그들이 무너졌던 것은, 
그들이 차지했던, 그 제비 뽑아 가졌던 그 땅을 빼앗겨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생활 방식속에 깊숙이 침투해 온 
어떤 다른 가치관들 때문에 
그들이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가면 이렇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엡6:12절을, 구약의 사사기 버전으로 번역하면 아마 이럴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 우리의 전쟁은 
영토와 자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차지해야 할 영토가 
다른 영역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토, 조금 더 본질적인 영토에 
눈뜨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그 전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터가 어디인가요? 
바로 우리 안, 우리 마음이라는 거죠. 

여기서 죄의 법과 생명의 법이 서로 싸운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전쟁에서 우리가 날마다 승리하고 있는가? 
이것을 매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삿3:6절에 보니까 
결국 이 전투에서 진 것입니다. 

마음이 빼앗겨서.. 다 빼앗긴 것이죠. 
마음이 빼앗기면.. 다 빼앗기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래서 잠4: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내가 내 마음을 지켜야 되겠다!' 라고 결단하면 지켜집니까? 

삼일 정도는 지켜집니다. 작심삼일 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내 마음을 지켜보려고, 나 스스로가 애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우리가 예배자리를 지키면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우리 삶을 지킨다.. 라는 사실입니다.  

삿3:7~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 사실 수많은 이방 신들이 있었는데 
왜 하필 바알과 아세라 신일까요? 

그들 눈에는 더 많은 신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민족들이 섬겼던 다양한 신들이 그 땅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유독 자주 등장하는 
그리고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우상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 또한 아스다롯 이었던 거죠. 
단골로 등장하는 우상입니다. 
이 당시에 가장 인기가 좋았던 우상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쾌락(다산)의 신이었습니다. 
즉 풍요로움과 쾌락을 보장해주는 신이 
가장 인기가 최고였다 라는 사실이에요.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 신의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우리가 바알, 아세라 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다른 이름의 신들, 
우리에게 풍요를 보장해줄 것 같은 그런 신들을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빠져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래 오냐, 너희가 그렇게 풍요의 신을 섬길 것 같으면 
한번 가서 실컷 섬겨봐라!' 이런 마음으로 
메소보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겨 주십니다. 

1) 구산 리사다임 이라는 이름은
'리사'라는 뜻이 죄입니다. 
'리사다임'하면 죄들, 죄악들.. 이렇게 죄가 많은 복수형 입니다. 
즉 '죄악이 많은, 구산'이라는 이름이죠. 
이름만 봐도 아주 악질인 것 같지 않습니까? 

2) 메소보다미아(메소포타미아)는    *고대 헬라어

히브리어 원문에는  '아람 나하라임'으로 나오는데

'두 개의 강 사이에 있는 아람(나라)'라는 뜻이고,

두 개의 강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주1)

 

그러니 메소보다미아의 아람은,  강을 두 개씩이나 끼고 있었으니까

그 당시 얼마나 그 땅이 비옥했고, 얼마나 풍요로웠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바알(풍요의 신)을 추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당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웠던 땅에 그냥 넘겨버리신 것이죠.

 

'그럼 한번 풍요의 신을 너희 마음껏 섬겨봐라!'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의 신을 섬기다가

풍요의 신에 먹히게 된 것입니다.

 

이 메소포타미아 또는 다른 이방 나라가 풍요로움을 유지하는 방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로 전쟁과 침략을 통한 약탈과 노예로 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나안으로 침략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물질과 생명을 사로잡아 가서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게

그들의 풍요로움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럴 수 있죠)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3:8

여기서 '팔다'는, 돈을 받고 팔다, 팔아서 넘기다.. 라는 뜻인데,         *마카르

요셉이 팔릴 때도 똑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래서 8절에 하나님이 그들을 파셨다는 뜻은

요셉처럼, '팔려서 노예로 잡혀갔다'는 뜻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단어가 출21:7에는 '자기 딸을 종으로 파는' 경우에 쓰였고,

사사기에서는 2:14(넘기다), 4:2(팔다), 4:9(팔다), 10:7(팔다)등에 나옵니다.

혹시 팔려서 노예로 잡혀가지 않더라도, 가나안에서 노예나 종으로 혹사당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메소포타미아, 아람)에 가서 자신들의 인생이 도구화되고

수단화 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8년 동안 풍요의 노예가 되어서 산 겁니다. 3:8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사는 시대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그렇게 돈이 좋으면, 한번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돈의 노예로 한번 살아봐라'

 

어떤 그런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을

우리에게 따금한 처벌로써 주시는 것은 아닌가요?

이 말씀에 비추어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렇게 돈의 노예가 돼서 풍요의 노예가 돼서 살던 이스라엘이

'이건 도저히 아니다'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세우십니다.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세요.

 

3: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그런데 10절에 보니까, 옷니엘은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한 사람' 이라고 표현했어요.

이 표현은 구약에서 메시아를 수식 하는데 반복적으로 이렇게 표현됩니다.

 

이사야서 61:1절에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렇게 메시아를 예언하는 대목에, 이 표현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는 그 시점에 마치 사명선언문을 읽으시듯이

사61장 말씀을 펼쳐놓고 이렇게 공생애를 열어 가시는 것이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눅4:18

즉 당신이 구원자 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가 구원자입니까. 누가 메시아닙니까, 어디 가야 구원이 있습니까?

구산 리사다임보다 더 큰 능력이 있어야 구원자입니까,

그보다 더 큰 부와 재물과 영토를 확보하고 있어야 구원자입니까?

아니면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두 강을 끼고 있는 풍요로운 곳에 가야 구원을 경험할 수 있나요?

 

성경을 보니까 거기에 가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옷니엘 이라는 사람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능력 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오직 그 구원이 하나님 손에 있다 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오늘 이 성경을 읽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와 재물과 힘과 권력이, 거기에 가면 내가 조금 더 자유하고,

내가 조금 더 많은 소유를 갖고 있으면, 좀 더 많이 자유해질 줄 알았던

그렇게 착각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것은 신기루일 뿐이다. 무엇이 실상인가?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이렇게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고백하며 이 하루를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눈에 마치 능력인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세상에 것들이

오늘 하루에도 많이 펼쳐지겠지만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나를 자유케 하는 능력, 나에게 구원을 베푸신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라고 이 아침에 그렇게 고백하며 기도하며 마음을 결단하고

이 하루를 시작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1) 메소포타미아는 고대헬라어로서

메소, 중간에

포타, 강 

미아, 도시 .. 그래서 '두 강 사이에 도시'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의 성경 각주를 보시면, '아람 나하라임' 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는 메소포타미아 대신에 '아람 나하라임'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히브리어로 '나하르' 라는 말은 강이라는 뜻입니다.

'라하라임' 이렇게 되면 '두 개의 강' 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그러니 아람 나하라임은 '두 강 사이의 아람(나라이름)'이란 뜻이 돼죠.

 

그러니 '메소포타미아' '아람 나하라임'을 의역해서 붙인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강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입니다.

 

석문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