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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2장 1~5 보김에서 우는 자들

LNCK 2021. 12. 30. 10:18

◈보김에서 우는 자들                  삿2:1~5                  스크랩, 출처

      

김성수 목사 설교 스크랩

 

◑본문의 배경

 

우리는 1장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가나안 거민들을 다 쫓아내지 않은 이유들을 고찰해 봄으로써

인간들의 세상 사랑이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를 공부했습니다.

 

심지어 사사기 1장 마지막에는 단 지파가 아모리 사람들에게

쫓겨서 올라가는 사건까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다 몰아내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는커녕

그 적들을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적들에게 쫓겨서 산으로 올라가는 지경까지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납니다.

그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주어 모세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자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도 투입이 된 하늘의 사자입니다.

 

출3:1~5절에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시면 그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라고도 부릅니다.

 

여호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여호와라는 말입니다.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사기 6장의 기드온의 이야기에서도 그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하지요?

분명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셨는데

기드온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여호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여호와의 사자를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의 과정 내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게 하셨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도 앞장세우실 것이라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23:20~33절을 찾아보십시오. (본문 생략)

 

그런데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가나안 거민들을 모두 쫓아낼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장 다 쫓아내지는 않으실 것이라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남겨진 가나안 사람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가나안의 신, 즉 세상 신을 섬기게 되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올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보세요. 지금 가나안 족속을 남기시는 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신과 가나안의 문명에 매력을 느낄 것을 모르셨을까요?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가나안 거민을 남겨두신 것입니까?

그리고는 그들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존재들의 이기적 악마성을 폭로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기적 악마성이 열매 맺는 이 땅의 소산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너무 칼빈주의 신학적 해석인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가나안의 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덥석 물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신, 세상의 우상을 덥석 문 삶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며 패역한 것인지를 경험하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자유를 어떻게 옭아매는 올무가 되는지를

처절하게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들의 악마성이 폭로되고, 인간들의 무력함이 폭로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이 공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에서부터 광야 교회, 가나안 정복전쟁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올바른 자기 인식과 올바른 하나님 인식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렀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자마자

가장 먼저 당도한 가나안 초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열두 돌을 쌓게 하셨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이 ‘여호와의 사자가 바로 그 길갈에서부터 왔다’는 표현하는 것일까요? 2:1

먼저 여호수아서의 길갈로 가보겠습니다.

 

▲수4:4~9,18~24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 두 사람을 불러서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 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8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 두었더라

 

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

 

18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

 

19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 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2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시켜서 길갈에 열두 돌을 쌓으라고 하신 이유가 나오지요?

뭡니까?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궤에 의해서였음을

잊지 말라는 취지에서, 요단강의 돌 열둘을 취해 요단 서편에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다 건널 때까지 제사장들이 메고 있던 언약궤가

계속해서 요단강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제사장들과 언약궤가 요단에서 올라오자 요단강물이 다시 차고 넘쳤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임을 기념하는

돌이 길갈의 열두 돌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길갈에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수5:1~12

 

수5:9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은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시기 위함이라고 하지요? 애굽의 수치란

애굽화 되어버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더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애굽의 수치를 제거하시는데 할례를 행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 이스라엘의 옛 존재 전체를 부정해버리시는 것입니다.

 

할례라는 것이 원래 인간의 생식기를 잘라버린다는 뜻이 있는 것이고,

인간의 전 존재의 부정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곧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 버린,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육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골2:11~12)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할례의 원래 의미가 뭡니까?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할례는 그러한 인간의 모든 육적 가능성을 다 소멸해 버리는 상징적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할례의 현장은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이 낱낱이 폭로되는 현장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고 공고하게 서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하필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할례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길갈의 이야기가 나오는 여호수아 5장 1절을 보시면

그때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수5: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가나안 족속들의 모든 왕이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병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러한 때에 전면전을 펼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스라엘 남자 전부에게 할례를 시켜버리신 것입니다.

당시의 할례는 전투력 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때 가나안 어떤 족속이라도 쳐들어오게 되면

이스라엘은 그 자리에서 몰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적의 땅에 들어와서는 전열을 정비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지는 못할망정

그나마 가지고 있는 전투력도 전부 제로로 만들어 버리십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전쟁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투력에 도움을 받아 전쟁을 치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그게 목적이라면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할 틈도 없이 요단을 건너는 즉시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 돌입을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사기로 볼 때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그러한 전쟁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이기던/ 지던

하나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만 잘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하여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전쟁은 나의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 말미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리고 전쟁을 치르기 바로 전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수5:12~15)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낸 후

그 다음날 가나안의 소산으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로 만나가 그쳤습니다.

 

아직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도 안됐는데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반드시 이스라엘의 것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확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정복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가나안 땅의 소산으로 만나를 대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시작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를 보고 묻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적의 편이냐?’

그랬더니 군대장관이 ‘아니다, 난 너의 편도 아니고 너의 적군의 편도 아니다.

난 하나님의 편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편을 들어서

그들이 세상을 이기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메시지로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싸움에서 이기게 하는 도우미로 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보시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그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하나님 백성의 발에서 신을 벗기러 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던 베드로를 외부에서 결박하여

그 머리에 띠를 띠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끌고 가시는 그 모습인 것입니다.

 

그게 신을 벗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힘으로만 치러지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길갈은 그런 곳입니다. 이제 곧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러야 할 이스라엘에게

이 전쟁은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 치러지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치러지는 전쟁이니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던져진 곳입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얼마 있다가 여리고 성이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치질 한 번 하지 않았고 칼 한 번 휘두른 적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냥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길갈에서의 메시지가

그대로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곧 이어 아이 성 사건이 터집니다.

 

아이 성 사건 – 중략

 

재미있는 것은 이 사사기 2장 서두가

여호수아의 그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길갈은 이스라엘이 열두 돌을 세워

하나님 전쟁의 주도권은 하나님의 언약에 있음을 보여주고,

무시무시한 정복 전쟁에 앞서 전투력 제로의 할례를 행함으로서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한 곳입니다.

 

▲그러면 보김은 어디인가? 보김은 길갈에서 20km쯤 떨어진 지역입니다.

원래 보김이라는 곳의 지명은 다른 지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통곡을 한 곳이라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 새로 지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김이라는 곳은 어디일까? 오늘 본문 5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보김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지요?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은 언약궤가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언약궤는 벧엘에 있었습니다. (삿20:26~28)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에는 오늘 본문의 보김이라는 단어를

‘울음의 장소’라고 번역을 해 놓고는

이어서 벧엘이라는 단어와 이스라엘의 집이라는 어구를 첨부해 놓았습니다.

즉 70인 역은 보김을 ‘울음의 장소 벧엘, 곧 이스라엘의 집’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이스라엘의 언약궤가 있는 성막이 있는 곳을 말하고

벧엘은 그 성막이 있었던 곳이며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보김은 벧엘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벧엘은 아이 성이 있던 곳이지요?(수8:15~17)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 아이 성 사람들이 쫓아 나왔는데,

성경은 아이와 벧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건 아이가 벧엘에 있는 성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아이 사람들과 벧엘 사람들을 구별 없이 불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보김이라는 곳은 여호수아서의 아이 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하고

그 언약의 성취를 여리고에서 직접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에 가서는 이내 자기들의 정체를 또 폭로 당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아간을 들어

인간 쪽에서의 무력함과 구원의 은혜 성을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또 다시 아이 성의 패역함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삿2:2절을 보세요.

 

(삿2: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하나님은 아이 성에서 여호와의 전쟁에서 얻어지는 모든 노획물은 전부

여호와의 창고에 들이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그 중에 조금을 개인 소유로 남겼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이지요?

 

사사기의 아이에서도 똑같은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다 진멸하라 하셨고

그들과 언약도 세워서는 안 되며, 그들의 단은 반드시 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장에서 보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문명과

그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에게 매료당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팽개쳐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이스라엘의 삶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진행되고 성취된다는 것을

열두 돌 비석으로 굳게 세우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할례언약을 행함으로 해서

인간의 힘은 하나님의 전쟁에 하나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존재하고

언약에 의해 진행되며, 언약에 의해 양육되고, 언약에 의해 완료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수시로 자신들의 눈과 귀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되고 싶은 미래를 스스로 꿈꾸었고

그러한 본인들의 욕망에 반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초개처럼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협박하십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 (삿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 말씀은 이미 민수기나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서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민33:55~56)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수23:10-13)

12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13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인 사사기 2장에서 또 반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아무리 교훈을 하고 심지어 협박을 해도

이 세상 매력에 대한 애착을 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여실히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계속해서 옆구리를 가시로 찔리고

이방인의 올무에 걸리는 역사를 살게 됩니다.

 

옆구리가 계속 가시에 찔리는데, 이방인의 올무가 계속 자신들을 옭죄어 오는데

이 세상 힘에 대한 욕망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방인의 올무에 걸려

이방인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사망에 던져지셨습니다.

바로 불가능한 우리를 위해 예수가 그렇게 옆구리의 가시에 의해

이방인의 올무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속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옆구리의 가시와 이방인의 올무가 우리를 품고 있는 예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한 유죄 선고가 무효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옆구리의 가시로 이방인의 올무로 돌아가셨던 예수가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존은 늘 하나님의 명령을 배반하고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사는

패역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시와 올무 저주를 예수님에게 이미 퍼부어 버리셨기 때문에

감히 기쁨과 소망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보김에서 울었더라! 2:4~5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그 속에 ‘가시’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민수기와 여호수아에 가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사사기에도 가시라는 단어를 끼워 넣은 것 같은데

사실은 사사기에는 가시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냥 ‘옆구리가 되리라’입니다.

 

그러면 해석이 좀 달라지지요?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옆구리가 될 것이라는 말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신부가 될 것이라는 의미의 관용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을 신부로 붙여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겠다는 말씀 같지요?

그런데 그게 벌이라면 말이 좀 달라집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성도에게는 영의 눈이 열리고 영의 귀가 열린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의 눈과 영의 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영의 눈과 귀로 이 세상을 보고 들으면 무엇이 보이고

어떤 것이 들리겠습니까?

근사한 매력으로 위장하고 있는 세상의 실체가 보이고 들리겠지요?

 

인간이 마귀의 사주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도시와 국가,

그리고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가며

하나님 이외에도 우리가 의지하고 추구해야 할 좋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고 선포하는 듯 삶을 삽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그럭저럭 이 세상도 살만한 곳이고 재미있고

가치 있는 것도 많다는 식의 세뇌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해야 하는 인간들이

이 세상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롬1:21~25) 각자 찾아보세요.

 

이게 아이 성에서의 아간의 모습이고 보김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아니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야 하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행복이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여러분, 그런 삶이 행복하세요? 힘드시지요?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 말 안 듣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행복할 줄 알고

애써 하나님의 말씀 바깥으로 나가 달려 보지만

성도의 눈과 귀는 이미 열려 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의 실체가 보이고 들립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을 여전히 입고 있는 우리 성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잘 아십니다.

그러시면 이 세상 이방인들과 우리 사이를 가시와 담으로 막으셔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와 이방인을 신부로 붙여버리시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한 멍에로 묶으시는 형국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세상과 간음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게 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벌입니다.

 

우리는 벌치적 죄책으로서의 사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사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 속에 벌치적 죄책이 아닌 책치적 죄책을 남겨 두셨는데

그것이 죄악된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성도가 경험하고 느껴야 하는 현실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러한 이기적 삶에서 오는 외로움과 고난의 극대화가 지옥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민수기 33장을 다시 한 번 볼까요?

 

(민33:55~56)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멸망 받을 이방인들에게 내릴 심판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 미리 경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요?

 

우리의 욕망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세상의 힘들에 의존하여

그것들과 간음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 것인지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징벌과 심판을 면제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몸으로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저리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이며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삿2:11~13)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어떠세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그렇게 울고불고 했던 사람들이 행동은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의 울음은 ‘난 이게 너무 좋은데 왜 자꾸 막으세요?’라는

탄식과 원망의 울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가능한 자들을 인생 속에 두시면서

이 역사 속에서 심판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인생이며 그 인생 자체가 고난입니다. 심판이니까요.

 

성도에게는 심판으로 체감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복된 고난입니다. 그 작은 심판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의 무서움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 견뎌내셔야 합니다.

 

김성수 목사 설교 스크랩, 출처 상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