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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4장 1~24 반복되는 악순환, 진정한 구원자가 필요했다

LNCK 2021. 12. 31. 05:48

반복되는 악순환, 진정한 구원자가 필요했다 / 사사기 4장 - YouTube

◈반복되는 악순환, 진정한 구원자가 필요했다     삿4:1~24       여러 설교 정리

 

◑반복되는 7번의 악순환의 싸이클

 

사사기에서 보는바

사람은 <범죄→징벌→부르짖음→구원>의 악순환을 계속한다는 점입니다.

그 악순환이 사사기에 7번이 반복되는데,

어쩌면 우리 각자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더 눈여겨 볼 점은,

7번의 악순환이 반복될수록 더욱 강도가 더해진다는 점입니다.

죄악은 점점 더 악독한 결과로, 갈수록 심해진다는 점 등입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전체 주제는,

사람은 구원자가 필요하며, 왕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기 전의 인생은,

마치 사사기처럼,

<범죄→징벌→부르짖음→구원>의 악순환을 계속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나면, 진정 회개하고 회심한 성도는

<범죄→징벌→부르짖음→구원>의 악순환을 일생에 1으로 끝낼 것입니다.

 

그런데 단 1번으로 끝낸 성도도,

그 이후 또 작은 죄를 짓습니다. 범죄합니다.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사기처럼 점점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이제는 왕이신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에, 그 싸이클이 반복되더라도

점점 더 선한 모습으로, 점점 더 약하게 반복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세상 역사도 그렇고, 개인 역사도 그렇고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왕이 없는 사람의 역사는, 더욱 악하게, 더 쎈 마약을 찾듯이 반복되어

갈수록 더 지옥을 지향하고,

 

반대로 진정한 왕을 모신 사람의 역사는

불치병에서 점점 호전되는 방향으로,

<범죄→징벌→부르짖음→구원>의 싸이클(순환)을 일평생 반복하는 가운데

점점 더 천국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본문 해석 : 여자 사사 드보라, 군대장관 바락, 헤벨의 아내 야엘

본문 삿4장에 등장하는 주요 세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각 지역별로 사사기가 전개되는 것은,

사사기의 전쟁은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역사를 다 더하면 총 4백 년이라 하는데,

국지전으로 볼 때, 신학자들은 약 2백 년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이곳 저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사건인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드보라가 이스라엘 자손 만 명을 데리고 가라고 한 것은

곧 납달리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국지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하솔 왕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1절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범죄→징벌→부르짖음→구원>의 싸이클이 더 악화일로로 7번 반복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고, 세상 역사입니다.

 

▲2~3절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9백 대가 있어

2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하솔의 통치자 야빈과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이스라엘의 징계의 도구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하솔은 북부 가나안 성읍 중 하나로 납달리 지파에게 할당된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곳은 팔레스타인 북쪽에 있는 가장 전략적인 요충지로

이미 여호수아 군대에 의해 점령된 바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솔의 왕은 ‘야빈’입니다.

그런 것으로 본다면 ‘야빈’이란 말은

애굽 왕의 공식 칭호인 '바로'나, 블레셋 왕의 공식 칭호인 '아비멜렉'처럼

왕을 가리키는 공식 칭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아니라요.

 

△하솔 왕 야빈에게는 당시 최첨단무기라 할 수 있는 철병거 9백대가 있었습니다.

이 철병거 때문에 이스라엘은 20년 동안 심한 학대를 당합니다.

625전쟁 때로 치면, 북한이 앞세워 밀고 내려왔던 쏘련제 탱크에 비유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야빈의 철병거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을까요?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강한 존재, 고통은 극심했고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철병거는 2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을 억누르며 압박합니다.

철병거라는 존재가 정말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에서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무서운 존재가 호랑이로 소개되었다면,

이 시기에 이스라엘에는 철병거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 자꾸 울면 철병거가 나온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철병거는 정말 큰 문제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근데 우리 각자에게도, 이런 철병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 삶을 무겁게 하는 철병거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입니다.

안 믿는 사람, 믿어도 진정 회개치 않은 사람은, 수많은 철병거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3절에 이스라엘이 20년 동안 학대를 당했다고 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렇게 이래 저래 학대를 당하며 삽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에서!

 

혹시 ‘나에게 문제는 우리 남편이야!’

‘나에게 문제는 자식들이야!’

‘나에게 문제는 직장이야!, 나에게 문제는 저 인간이야!’

 

아닙니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나에게 문제는 나 입니다!”

진정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철병거가 사라집니다.

본문에도 결국 하나님의 도움으로 철병거를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14~15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십니다.

이스라엘을 팔아버리는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삿4:2)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그러니까 성도의 삶에 닥치는 고난의 주관자가 누구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구산 리사다임이나 에글론을 보낸 분이 누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사를 보내셔서 건져내시지요?

‘병주고 약주고’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벌이실까요?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팔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마카르’는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아버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건 우리가 구속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 판 것은 반드시 돈을 주고 사와야 합니다.

그걸 구속이라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악의 세력에게 팔아버리시는 내용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속전을 지불하시고

그 백성들을 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속(아폴뤼트로시스)은

반드시 속전을 지급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무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속전을 지불하고 죄의 노예 되었던 자들을 사 올리는

구속의 은혜를 설명하시기 위해

당신 백성들을 죄의 세력에게 잠시 팔아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자신의 모습을 ‘곤고한 몸, 사망의 몸’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팔림에 의해 죄의 노예가 되어

죄에게 극심한 학대를 당하게 됩니다.

 

그건 다름 아닌 죄에 대한 자각에 의한 성도의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는 죄에 대한 치 떨리는 울부짖음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죄를 도말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챙겨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죄의 노예로 팔려 수시로 죄에게 학대를 당하는 것은

가끔 저지르는 실수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이미 죄에서 건짐을 받아

죄와 무관한 자가 된 것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운명적이고 선언적이며 신분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죄밖에 내 놓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후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기 위해

죄에게 당신의 백성들을 학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사기 전체가 이스라엘의 죄가 계속 더해지는 모습으로 전개가 되는 것이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의 대적, 즉 죄가 이스라엘을 학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그 대적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 ‘내가 바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자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가 도출이 되는 것입니다.

 

▲4~5절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여자 사사 드보라를 소개하는 말로, 그녀의 출신배경과 활동지역,

남편의 아내, 여 선지자, 그리고 사사로 이로서 그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여성으로서 선지자를 수행한 자로는 드보라(‘꿀벌’ 이란 뜻) 외에도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왕정 시대의 훌다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지도자, 예언자적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권위가 있었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 재판을 받는 것은 그 까닭입니다.

 

또한 그가 받은 사사로서의 영적 권위는,

그가 출정을 위한 모병에서 만 명이 지원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납니다.

전쟁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드보라의 제의에

납달리 자역에서 1만 명이나 지원했으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 권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7절 (드보라의 예언) ‘내 God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야빈의 군대를 기손 강가로 유인해 오도록 명령하십니다.

승리할 수 있는 전략적 지역으로 상대를 이끌어 오는 전술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에 따라 드보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으로 있던 바락을 불러 적들을 기손 강가로

오게 하는 병법을 알려주며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줍니다.

 

▲11절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이 구절은 모세의 장인을 호밥이라고 언급하지만

성경 다른 곳에서는 모세의 장인이 르우엘(출 2:18; 민 10:29)

또는 이드로(출 3:1; 4:18; 18:1)로 언급합니다.

 

르우엘이 본명이고 이드로는 제사장이 된 후에 얻은 존칭인데

호밥은 아마 모세의 처남일 것입니다(민10:29).

히브리어에서 장인을 뜻하는 ‘호텐’은 처남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 처남 호밥의 자손 중에 겐 사람 헤벨이 있었어요.

모세의 장인은 겐족 출신인데(삿1:16),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미디안 출신으로 언급됩니다(출 2:16; 3:1; 민 10:29).

 

아마 겐족과 미디안족은 친밀한 유대 관계를 맺다가 결국 동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에 관한 얘기 도중에 갑작스럽게 겐 사람 헤벨이 언급되는 까닭은

시스라와의 전쟁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헤벨의 아내인 야엘이기 때문입니다(삿4:17-24).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자손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후

유다 지파의 경내에서 거주했습니다(삿1:16).

 

그런데 헤벨은 그곳을 떠나 납달리 지파의 경내인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으로 이주해서

이스라엘을 등지고 압제자 하솔 왕 야빈과 결탁했으리라 봅니다. (4:17)

아는 사람의 집에 찾아간 것이죠

 

그런 헤벨의 아내를 통해 시스라를 죽이시는 장면을 보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14~15절,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를 거느리고 이스라엘과 대결합니다.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다볼 산에 있었고,

시스라가 이끄는 철병거는 다볼 산 아래에 기손 강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공격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는 5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였을 것입니다.

시스라의 군대는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기손 강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비가 내려 강이 범람했고 온통 진흙탕이 되었습니다.

철병거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스라도 병거를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큰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16)

 

▲17절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시스라가 걸어서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을 찾아갔습니다.

하솔 왕 야빈과 헤벨의 집 사이에 화평이 있었기 때문이었죠(17절).

 

그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시스라를 금방 알아본 것을 볼 때

헤벨 가정은 하솔 왕 야빈뿐만 아니라 하솔의 유력한 신하들과도 알고 지냈을 것이다.

 

헤벨의 아내 야엘이 전쟁에서 패해 찾아온 시스라를 영접하며 말했습니다.

“내 주여! 들어오소서. 두려워하지 마소서.”

 

시스라가 헤벨의 장막에 들어서자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었습니다(17절).

야엘의 지극한 환대를 받고 시스라는 방심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때 시스라가 말했습니다. “내게 물을 조금 주시오. 목이 마르오.”

야엘은 우유 부대를 열어 물을 마시게 하고 그를 덮었습니다(19절).

 

시스라가 말했다.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누군가 와서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면 없다고 해주시오(20절).”

 

그 후 시스라가 피곤해서 깊이 잠들자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았습니다.

 

헤벨의 아내 야엘이 우호관계에 있던 시스라를 죽인 것은

그의 남편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인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속죄하는 의미가 내포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장막 세우는 일은 주로 여인들이 했기에

여인들은 망치로 말뚝을 박는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엘이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꿰뚫은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야엘은 시스라를 추격하는 바락에게 잠든 시스라를 넘겨줄 수도 있었지만

직접 시스라를 죽인 것은 바락의 도착 전에 시스라가 원기를 회복해 도망친 후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드보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9

 

 

◑적용

 

▲1. 역사와 개인의 일생은 싸이클을 반복합니다.

<범죄→징벌→부르짖음→구원>의 악순환을 계속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전체 주제는,

사람은 구원자가 필요하며, 왕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기 전의 인생은,

마치 사사기처럼,

<범죄→징벌→부르짖음→구원>의 악순환을 계속 반복할 것입니다.

하향적으로, 지옥을 지향하며 더 강한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나면, 진정 회개하고 회심한 성도는

<범죄→징벌→부르짖음→구원>의 악순환을 일생에 1으로 끝낼 것입니다.

 

그런데 단 1번으로 끝낸 성도도,

그 이후 또 작은 죄를 짓습니다. 범죄합니다.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사기처럼 점점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이제는 왕이신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에, 그 싸이클이 반복되더라도

점점 더 선한 모습으로, 점점 더 약하게 반복되며 천국을 지향합니다.

 

▲2.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사사기 다른 이야기와 구별되는 것은

전쟁의 주인공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협력 사역 입니다.

 

전쟁을 지시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 드보라가 있었고,

직접 전쟁터에서 군사들을 이끈 장군 바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시스라를 잡은 이방인 야엘이 있었습니다.

세 명의 주인공이 협력해서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여성들의 활약이 돋보입니다. 드보라, 야일 다 여성입니다.

 

그러면 이 전쟁에서 진짜 영웅은 누구일까요?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23)

 

전쟁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하신 것입니다.

 

드보라는 가나안과의 전쟁에 혼자 힘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스라엘의 장군 바락에게 사람을 보내서

함께 싸울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싸움이었고

하나님께서 적군을 넘겨주리라고 약속하신 전쟁이었습니다. (삿 4:6~7)

 

쉽게 말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하기만 하면

승리가 보장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동역자와 함께 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드보라의 권유를 받은 바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에 홀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보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 ”(삿 4:8)

 

드보라와 바락 …, 바락과 드보라 …

두 사람은 함께 동역하기를, 함께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

또 한 사람은 지도자를 도와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으로 …

서로의 역할을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 동역을 통해 드보라와 바락은

가나안 장군 시스라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일인불과이인지(一人不過二人智)’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는 두 사람의 지혜를 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에는

‘거미줄이 서로 뭉치면 사자를 잡을 수도 있다.’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다 협동하고 합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두께 2인치, 폭 4인치의 각목 하나가

지탱할 수 있는 최대 하중은 167kg이라고 합니다.

우리 예상대로라면 각목 두 개를 사용하면 그 두배 …

334kg을 지탱할 수 있어야 하는데

 

똑같은 각목 두 개를 접착제로 붙이거나 못을 박으면

최대 하중이 2,212kg으로 증가합니다.(한 개일 때 보다 13배 증가)

하나가 10마력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실린더 엔진도

8개를 연결하면 8 곱하기 10해서 80마력이 아니라

285마력의 힘을 생산하게 된다고 합니다.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개체가 힘을 합했을 때

둘이 지닌 힘 이상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기도도, 찬양도, 전도도 혼자서 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찬양하면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시너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3. 가문을 회복한 여인 야엘

야엘의 남편 헤벨은 모세와 연관(처남의 후손)되어 있는 자손이었음에도

그곳을 떠나 게데스에 살고 있었습니다.

학자들 중에 의견은 가나안 족속에 협조하며 살고 있었다고 봅니다.

 

도드라지는 것은

하솔왕 야빈의 장군인 시스라가 '야엘의 장막'입니다.

보통은 남성의 이름이 붙어 장막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야엘의 장막'으로

마치 야엘의 남편인 헤벨과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스라가 야엘이 살고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가문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여인이 야엘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야엘의 장막’이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17

 

말씀을 보며 어머니와 우리 가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설교자

 

우리 아버지는 건축현장에서 일하신 분으로서 거칠게 사셨습니다.

그런 집안을 하나님을 따르는 가정을 세운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할머니도, 나도, 형도 주님 앞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미비하지만 아버지도 하나님 곁으로 이끄셨습니다.

 

우리 집안은 하나님 때문에 버티고 견딘 집안이라 생각합니다.

안 그랬으면 뿔뿔이 다 흩어졌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지 않았으면 시집 살이 못 버텼다고"

 

나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우리 가정만 떠받치고 사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삼 형제 모든 가족들이, 무너지지 않게 세우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고

친척들은 모두 무너져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말입니다...

 

국가와 가정이 무너질 때

그 본질을 잡아주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둥을 세워주는 것이

여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우리 엄마,

엄마의 사랑과 헌신 속에

우리 가정은 여기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상처 가득한 가정에

몇 명의 영혼이나 구원에 이르게 하셨는지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셨는지..

 

이제 하나님은 어머니에게 영원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엄마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우리 엄마!

 

▲4. 내 삶에 하나님의 개입하심, 역사하심을 보물찾기 하듯이 찾으십시오.

우리 삶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23절의 고백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내가 민감하게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찾아야 합니다.

 

마치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는 말처럼,

곰곰이 헤아려보면, 받은 복이 정말 많은데,

민감하게 깨어있지 못하면, 하나님은 천국에서 아무 일도 안 하시고 늘 주무시는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머리카락 까지 세고 계시는데,

내가 둔감해서, 그걸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삶에서 민감하게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삿4장의 승리를 경험하게 되고,

또한 삿5장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삿5장은 드보라의 찬양입니다.

 

마치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찾으시기 바랍니다.

숨은 그림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그림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것 같지만,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손길을 매일, 매주, 매달, 매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작은 순간에도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신다고요.

주님이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허락하셨음을,

주님이 역사하셨음을 고백하며 계속해서 그 선하신 손길에 내 삶을 맡겨 드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