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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6장에서 기드온에게 나타난 3가지 사건 삿6:1~40 여러 설교 정리
사사기 6장에, 기드온에게 나타난 주요한 사건은 3가지입니다.
-기드온이 천사를 만나고, 번제단을 쌓은 사건
-기드온이 자기 집 우상의 제단을 훼파한 사건
-기드온이 기도하면서 양털을 통해 표적을 요구한 것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 기드온이 천사를 만나고, 번제단을 쌓다 '여호와 샬롬' (삿6:1~24)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7
당시에 성경도 없었고, 당시 기드온이 매일 하나님을 대면해서 만났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기드온은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자기가 만난 천사의 영적인 정체성을 물은 것이죠.
출3장을 보면, '당신이 나를 보내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대체 너를 보낸 그가 누구냐? 그러면
제가 하나님을 누구라고 소개를 해야 되겠습니까?' 같은 질문이 되겠습니다.
모세가 만난 분의 영적인 정체성을 물은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대사, 대리인의 자격을 가진 천사)는, 정체성을 이런 식으로 대답하십니다.
제단을 쌓게 하고는, 제단에 불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0
엘리야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의 제물을 소멸하기 전에, 먼저 제단에 물을 부었습니다.
본문에 기드온은 국을 붓습니다. 국을 부은 일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입니다.
이것은, 제단에 불로 응답된 일은, 순전한 하나님의 기적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처럼, 오늘날의 내가, 또한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명 공동체인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답은, 제단에 불이 임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개인/공동체적 예배에, 성령의 불이 임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신 것이며,
또한 기드온처럼, 하나님은 그런 개인 /공동체를 들어서, 시대적 사명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샬롬을 체험한 기드온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삿6:22~24
때때로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까이로 나아가게 되거나,
주님의 강권적인 찾아오심이 임하면,
우리는 기드온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삿6:22,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사6:5
또 얍복강에서 야곱을 찾아왔을 때, 야곱은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환도뼈 부러지는 것으로 끝났지만요.
모세가 애굽으로 떠날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이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출4:24~25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잘못 만나면.. 까딱하다가 죽습니다. 물론 진짜 죽지는 않습니다.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너 자신을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보여주십니다.
그때 사람은 스스로 깨닫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내가 까불다가 죽겠구나!
바로 이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여호와 샬롬’을 알려주십니다. 삿6:24
요지는, 우리가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체험할 때는,
그 전에 먼저 ‘죽는 듯한’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아직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서워서 죽는 경험’이 아직 없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는,
거룩하고/무섭고/죽일 듯이(진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존재 자체가 무서움)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에게 ‘여호와 샬롬’이 되어주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드온이, 단 3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메뚜기 떼와 같이 수많은 미디안 군대 앞으로 싸우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샬롬은 무슨 의미입니까?
히브리어 샬롬은 “온전함, 건강,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주어지는 은총들입니다.
이것은 초조하지 않고 내부적, 외부적으로 모두 평화로우며,
영적으로 또한 감정적으로 안식하고 있는 편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단,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 임재 때문에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런 무서운 것, 무서운 분.. 내가 안 받고 말겠다고요?
그걸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결정합니다.
주님이 갑자기 질병으로, 사고로, 망함으로.. 또 다른 모습으로, 갑자기 나를 찾아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꼭 죽을 것 같지만, 당황하지 마시고,
결국은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중간에 죽는 경험-회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겉은 마치 ‘슈렉’처럼 무서울 수 있지만,
결국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분은, ‘평화, 샬롬’으로 나타내십니다.
◑2. 기드온이 자기 집 우상의 제단을 훼파하다 (삿6:25~32)
이렇게 시대적 사명을 받게 된 기드온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수신 제가'였습니다.
자기 집의 우상부터 척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25~27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실 때, 첫번째로 요구하시는 것이 영적 분리입니다.
영적 정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꼭 집을 떠나라는 게 아니라, 구별되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의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것이죠.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너의 아버지의 우상숭배의 그 자리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익숙하고 내가 의지하던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다 차단하고일어서라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부터 내 복만 바라고 살아라,
네 부모로부터 어떤 세상적 복이나 유산 상속을 바라지 말라'는 뜻도 되겠습니다.
부모와 연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어떤 정신적 얽매임과 의지함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존경은 계속 해야죠.
모세를 왕궁해서 부르지 아니하시고, 그가 광야에 있을 때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 애굽과 결별하라는 것이죠.
애굽과 연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간혹 젊은 사역자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모든 자기 육신적 필요를 부모로부터 의존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왔으므로
제대로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부모로서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종으로 '출가'하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선배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목회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헌신할 때는 배수의 진을 쳐야된다!'
무슨 뭐 전쟁의 개념이 아니라,
물질이 풍성한 가운데 사역자가 된 사람은,
사역을 하다가 여차하면 다시 돌아갈 사업이 있고... 그러면 사역이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돌아갈 데가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안 되면 죽습니다!' .. 이런 배수의 진을 친 사람이
결국 사역을 일으키더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는 사람들은, 사역을 하면서 물질을 자꾸 소진하다가 그걸 다 쓰게 되면
결국 큰 어려움을 겪거나, 그만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물질에서 떠나지 못한 것이지요. 물질도 마치 본토친척아비 집과 같은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 그 한 가지만을 붙잡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도, 자기 집에서 '분탕질'을 치고 나왔으니.. 그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의지하고 바라볼 분은, 이제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기드온에게 천사가 찾아와서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이렇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을 오픈해 보니까, 영적 상태가 엉망이었던 거죠.
그 성(동네) 안에서, 가장 우상숭배가 활발했던 그런 아비 집이었습니다.
우상숭배의 선봉에 서 있는 집안이었던 것이었어요.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 자기 몸을 먼저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고,
그 후에 나라를 통치하고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자기집, 자기 방도 청소가 안 돼 있는 사람이, 무슨 세상을 청소하겠느냐 하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도, 그게 안 되어서 지도자의 자리까지 애써 올라갔다가
물러나는 그런 사회 지도자들이 있는데, 하물며 영적 지도자일까요!
그러니 하나님은 제단에 불로 응답하신 후에, '수신 제가'부터 명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딤후3:5
▲29절에 성읍 사람들(일가친족, 씨족공동체)이 서로 말하면서 '누가 이 일을 저질렀느냐?'
그랬더니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 일을 저질렀다.]
30절에 '그러면 기드온을 끌어내라, 우리가 죽이겠다'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참고로, 바알의 와이프는 아스다롯입니다.
바알의 어머니가 아세라 입니다.
아세라의 남편은 '엘'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오늘도 사람들이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식 잘 낳아서 잘 키우고, 농사(사업) 잘 돼서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이것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로 섬기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바알 숭배자들입니다.
현대인들도 똑같은 거에요. 자식 잘 되고 사업잘 되고 돈 많이 벌고
이 두 가지에 온 세상이 미쳐있잖아요. *풍요와 다산(쾌락)
명목상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잖아요. 내 자식이 잘되고, 그리고 돈 많이 벌고
그것이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신앙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잖아요.
사실은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도 현대판 바알과 아세라 를 섬기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죠.
31절 '요아스(기드온의 아버지)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요아스는 우상지기 이었기 때문에
아들 기드온의 편에 서주지 않고 그를 비난하고 책망할 수도 있는데
어째서인지 아들 기드온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보면, 삿17장에서 미가가 자기 집에 우상단지를 세워놓고
그리고 가정 제사장까지 세워놓고 집안에서 우상을 섬기잖아요.
그런데 그 앞에 스토리가 어떻게 되냐면, 미가의 어머니의 은 1천1백 세겔을 아들 미가가 훔쳤어요.
그러면 나쁜 자식이잖아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막 자기 돈을 훔친 자를 저주하니까, 미가가 이게 너무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훔쳤다고 실토를 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뭐라 그래요? '우리 아들 복 받아라!' 이렇게 태도가 돌변됩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거죠.
본문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태도를 :31절,
-성령충만해서 예언한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미가의 어머니와 같은 태도로 볼 것인가?
해석의 관점은 다를 수 있지만 저는 후자를 택하고 싶어요.
32절,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그래서 기드온이 여룹바알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바알이 스스로를 변호하게 하라' 는 뜻이에요.
바알이 만약 진짜 신이라면, 자기 제단이 공격을 받아 허물어졌는데
바알 스스로 그 원수를 징계하는 그 정도의 능력은 발휘해야 신이 아니겠느냐? 라는 거에요.
이와 관련해서 이런 얘기가 있지요. 인도의 한 집안에서 큰 우상단지와 작은 우상단지를 두고
아버지가 아침마다 치성을 드리는 거예요. 음식도 놓고 절도 하고
'우리 가정에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아버지가 출근을 하는 거죠.
근데 어린 아들이 그걸 보면서 '참 희한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 아버지가 치성을 드리고 출근한 후에
아들이 몽둥이로 큰 우상단지를 박살을 내 버립니다.
그리고 남은 작은 우상단지 옆에다가 그 몽둥이를 기대어 세워놨어요.
아버지가 퇴근하고 와서 대노하면서 아들에게
'너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는 신을!' 그랬더니
아들은 '왜 그러십니까,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작은 우상단지가 몽둥이를 휘둘러서 친 겁니다.'
아버지는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움직이지 못하는 이 우상단지가 어떻게 치냐?'
아들은 '그럼 아버지는 아무런 힘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런 우상단지를
왜 매일 아침 그렇게 섬기십니까?' 했다는 얘기가 있죠.
▲여러분 우리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살잖아요.
사람이 물질을 지키는 것이지, 물질이 사람을 지켜줄까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모두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물질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고 있죠.
물질이 여러분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시는 거예요.
또는 쾌락주의에 빠져서
마치 쾌락이 내 인생을 충만하게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쾌락은 인생을 어느 정도 즐겁게 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런 중립적 개념을 떠나서
너무 과도한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면, 그것이 도리어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이지
인간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드온처럼, 오늘날의 우상인
과도한 물질 사랑, 과도한 자녀 올인, 과도한 쾌락 추구의 우상단지들을
다 척결하고, 깨뜨려 버려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내가) 지켜주는 것은 신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가 물질과 권력과 쾌락을 신처럼 섬기고,
그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워놓는 것..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이전에, 내 안에 있는 우상부터 깨트려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때 미디안의 13만5천 대군도, 물리칠 것입니다!
◑3. 기드온이 기도하면서 양털을 통해 표적을 요구하다 (삿6:33~40)
이 부분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기드온의 양털뭉치 기도”입니다.
▲이런 표적을 구하는 식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된다.
이렇게 기도의 한 방법론으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고,
-반대로, 이거는 미숙한 믿음의 기도다.
다급한 상황에서 한 것이지만, 기도는 항상 이런 방식을 따를 수는 없다.
이런 두 가지의 상반된 해석 관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기도에 대한 해석은, 이 기도를 어떤 상황에서 했는가를 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주1) 미디안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개국 대규모 연합군이 모두 함께 모여서 벌써 요단강(국경)을 건너고 이스르엘 평원에 진을 쳤습니다.
자 벌써 미디안 사람들에게 칠년을 약탈을 당해왔는데 *6:1
미디안 사람들이, 아말렉과 동방(아마 아라비아) 사람들까지 끌어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13만 5천의 대군을 형성한 것입니다. 8:10
이스르엘 평원은, 이스라엘 중북부에 있는 가장 넓은 평원이죠.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난다는 므깃도 산도, 바로 이스르엘 평원에 있죠.
자 그리고 나서 이 '양털뭉치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배경상황을 좀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드온이 대군을 앞에 두고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서 집결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하나님 앞에서 작은 양털 뭉치를 갖고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대장 역할을 하려면 뭘 해야 되느냐면
무슨 장수들을 모아놓고 전략회의를 해야 되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자기 무장을 점검하고, 전투 준비해야 되지 않겠는가요?
그런데 그가 '양털 뭉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앉아서 간구하고 있었어요.
두 번째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지만
여호와의 성령이 기드온에게 임한 상태였다 라는 겁니다.
34절에, 여호와의 성령이 기드온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도 이렇게 믿음과 확신이 부족할 수 있겠구나..'
그러니까 기드온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팔을 불고, 3만2천명이 모였습니다. 7:3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아놨는데 그 다음에 지도자가 확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장면을 보면, 때로 믿음의 부족함을 경험하는 우리들에게는 위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콜링과도 유사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기 전에
그가 확신이 없어 하니까
계속 말로 설명하시다가 나중에 뭘 보여주셨나요?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는 작은 기적이죠.
그리고 손을 품에 넣었을 때 문둥병이 나병이 생기는 그런 작은 기적입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내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이런 어마어마한 그런 기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기적, 그 작은 기적을 통해서, 모세에게 확신을 주셨어요.
작은 양털 뭉치에 비가 젖게도 했다가, 마르게도 했다가... 작은 기적이에요.
그런데 엘리아가 갈멜산 위에서 삼 년 만에 하나님 앞에 비구름을 구했을 때
작은 조각구름을 보여주셨던거죠.
이 작은 싸인 하나가, 믿음의 전조현상인 거죠.
마치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에, 해변의 작은 동물들과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잖아요.
전조현상이라고 하죠. 믿음의 전조현상!
하나님께서 의심하는 기드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분명히 얘기해주지 않았느냐? 분명히 보여주지 않았느냐?
너도 믿음으로 결단하고 일어나야지, 뭘 또 나에게 확인을 하려고 하느냐?'
이렇게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셨다는 건.. 할렐루야! 감사한 거죠.
사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의 작은 기적들이 일상에 늘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학생이 어떤 수학 문제가 안 풀려서 끙끙대는데,
'왜 이런 문제도 못 푸냐?' 이렇게 타박하면 굉장히 슬프잖아요.
그거를 끝까지 끝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고, 기다려주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금 하나님이 기드온을, 그렇게 인내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일교차가 커서, 아침에 이슬이 잘 맺힙니다.
-그 타작마당에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맺히게 해주십시오, 땅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해주셨어요.
-그런데 두 번째 기도는, '부디 한번만 더 양털로 시험하게 해주십시오.
이제는 반대로 양털만 말라 있게 하시고, 땅바닥에는 모두 이슬이 있게 해주십시오' :39
이것을 두고서, 어린아이 장난 같은 기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 두 가지 기도를 했고,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아무런 다른 코멘트 없이 그대로 해주셨다는 거죠.
안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긍정적인 부분들이 많이 있는 기도 입니다.
군대가 지금 모여있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는 건,
그것도 이슬현상이 나타나려면 일단 하루밤을 지나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적어도 이틀 밤을, 그냥 적군과 대치한 상태에서
기도만 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어쩌면 목숨을 건 기도라고 할 수도 있지요.
남북전쟁이 치열할 때 전세가 밀리고 있어도, 링컨은 기도시간을 미루지 않았다고 해요.
기도하는 자기 텐트에 들어가서, 누가 보고를 하든 말든
그냥 그는 기도의 자리에서 성급하게 나오지 않고, 기도를 다 마치고 나왔다는 거죠.
그리고 자기 텐트 앞에 수건을 걸어 놓아서, 자기 기도를 방해받지 않았다고 하죠.
그런 측면에서 놓고 보면, 기드온이 이 치열한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매달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모습을 기쁘게 보시지 않았겠는가요?
그리고 이 기도를 보면,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그 기도를 하고 나서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잖아요. *하나님을 이겼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자가 도대체 세상에 누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져 주신 거죠.
하나님이 왜 야곱에게 져 주셨을까요?
근데 이제 창세기 문맥을 두루 읽어보면,
이 얍복강의 야곱의 기도 역시, 기드온의 양털 기도과 비슷하게
미숙한 기도, 유치한 기도였어요.
왜냐면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건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무런 사인을 안 주셨는가? 아니에요. 미리 답을 다 주셨어요.
기드온처럼, 이미 사인을 주신 거예요.
하란 땅에 있을 때,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어요.
자기 두 아내를 자기가 목축을 하던 빈 들로 불러내서 거기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인을 받고,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난 거예요.
돌아가라는 사인을 받고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라반이 뒤쫓아 오잖아요.
라반이 뒤쫓아오는 걸,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야곱을 건드리지 마라'
그래서 분명하게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형 에서가 사백인을 이끌고 온다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벌벌 떠는 거예요.
바로 전에 하나님의 기적과 도우심을 체험했는데도
명확하게 하나님의 콜링을 받아서 가는데도... 그래도 현실은 두려운 거예요.
참 인생이 연약한 것이죠!
그러니까 기드온도, 하나님이 제단에 불로써 응답해 주셨죠. 국물을 뿌렸는데도 불이 붙었어요.
또 자기 집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쓰러뜨렸는데, 그는 보호를 받았어요.
하나님이 건져주신 거잖아요. 그런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기 마음 가운데 다급하고 불안하니까
이런 유치하기까지한 '양털 기도'를 한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응답해주셨지만,
습관적으로 이렇게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기도는 아닙니다.
급하고 긴박할 때, 드린 SOS 기도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왜 이걸 응답해 주셨는가요?
모세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막9:22~24절이 생각났어요.
귀신 들린 아들이 있었는데, 귀신이 그를 넘어뜨리면 거품을 물고 난리가 나는 거잖아요.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는데 제자들이 고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데려왔어요. 예수님께 데려오면서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이
'뭐든지 할 수 있으시다면 뭔가를 해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그랬더니 그 아버지의 대답이 참 희한합니다.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자기가 안 믿는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믿습니다. 그런데도 좀 많이 흔들립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세요!' 이런 뜻입니다.
'믿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는데, 안 믿어집니다. 제발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
이런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혼내시는 게 아니라
정말 그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셨어요. 그리고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어요.
기드온도 믿고 싶어요. 순종하고 싶어요. 군대까지 3만2천명을 모아놨어요.
그리고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몸부림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신 겁니다.
야곱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라 말씀까지 하셨고
라반이 야곱을 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셨어요.
그럼에도 아직도 야곱은 믿음이 없어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하나님께 언약의 말씀을 받았는데도
그 말씀이 이루어질 거라는 것이
환경과 상황을 놓고 보건데
그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몸부림치는 거예요.
글쎄요. 이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어떤 때 보면, 우리가 확신이 없어서 기도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확신이 있으면 너무나 평안하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없어서 계속 몸부림치며 우리가 기도하는 거에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비하셔서,
야곱을, 기드온을, 모세를,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런 유치한 기도에도, 때로는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매번 이런 불신의, 점치는 듯한 기도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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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7:1 미디안 -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에게서 난 후손들이다(창 25:1-4).
그들은 유목민이었으며 외국과도 무역을 했다.
요셉이 바로 이러한 생활을 하던 미디안 족속에게 팔렸다(창 37:28).
한편 이러한 미디안 족속이 거하던 땅은 모세와 아주 중요한 연관을 맺기도 하였다.
즉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해 도망친 곳이 곧 미디안 땅인데
그는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었다(출 2:15-22).
7: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산에서 구멍과 굴...만들었으며' - 팔레스틴 땅은 대체로 석회석으로 되어 있어서
천연동굴이 많았으며 또한 인위적으로 굴을 파기도 쉬웠다.
굴은 창고나 무덤(마 27:60)뿐 아니라 일시적 거처나 피신처로도 곧잘 사용되었다(삼상 22:1).
그러기에 이와관련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했다고 언급했다(히 11:38).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도 핍박을 피해 동굴 생활을 했으며
유대 종파 중 에세네 파 사람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쿰란동굴에서 생활했다.
이와같이 사람들이 산속의 구멍이나 굴에서 생활했던 이유는 인적을 피할수 있고
타인의 공격을 쉽게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의 침략을 받아 패퇴(敗退)하자 그곳으로 도망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즉 그들은 적을 대항할 힘이 없었으므로 적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설령 적이 온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 쉽게 방어할수 있는 높은 산의 동굴로 피신했던 것이다.
한편 이런 이스라엘의 생활은 당시 미디안으로 인해 입은 그들의 고통이 매우 컸음을 잘 나타내 준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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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글삿6장에서 기드온에게 나타난 3가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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