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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1장 1~40 신약 성도 역시 서원한 사람

LNCK 2022. 1. 7. 15:52

◈신약 성도 역시 서원한 사람            삿11:1~40                여러 설교 정리

 

본문의 줄거리는 생략합니다.    

 

◑입다와 그리스도

 

우선 입다 안에 숨겨져 있는 메시아의 모형을 구체적으로 살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입다는 사생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로부터 쫓겨납니다.

 

그건 이 세상에 사생자로 오셔서 율법주의자들에게 쫓겨나

결국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고 결국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입다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입다가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찾아 온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삿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나를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내게 구원을 요청하느냐고 합니다.

아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똑같은 소리를 하시지요?

‘나를 버릴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나에게 구원을 요청하느냐?’  ↙

(삿10:13-14)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보세요. 똑같은 소리를 하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입다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 입다가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행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바로 이 이야기가 입다의 이야기 속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 사생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 총회 밖으로 내쳐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총회 밖으로 내쳤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다는 메시아의 모형인 것입니다.

 

▲또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사기 11장 3절을 보시면

그 입다가 거하던 땅이 '돕 땅'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에레쯔 토브’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땅을 지으시는 장면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후렴구가

계속 붙지요? 같은 단어(토브, good)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땅, 그것이 바로 ‘토브 에레쯔’입니다.

거기에 입다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상징하는 입다가

‘토브 에레쯔’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돕 땅

 

입다를 따르던 무리들은 신약 성도에 비유

그런데 그는 세상의 적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하늘의 나그네처럼

그렇게 외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다와 함께 암몬이라는 대적과

싸울 그의 군사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세요.

 

(삿11: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입다에게 몰려와 입다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잡류’입니다.

그 단어 히브리어 ‘레크’는 ‘empty, vain, worthless’입니다. *공허한, 무가치한 자

 

그러니까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망해서,

세상적으로 볼 때 완전히 비워지고 망해서,

가치 없는 자들로 전락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락 김성수 목사 사사기 강해 중 스크랩)

 

◑입다의 신앙

 

입다는 앞서 삿10장에서 설명했지만, 이스라엘에 사사(지도자)가 부재했던 시절에 나타난

영웅이었습니다. 암몬 자손이 치러 올라왔지만, 이스라엘이 대항해서 진을 펼쳤지만,

정작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할 장군이 없었던 것입니다. 10:17

그러니 평소에 군대장관을 키워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급박한 혼란 가운데, 이스라엘 장로들이 찾아간 인물이 바로 입다입니다.  11:6

정확하게 말하면,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쟁이므로 길르앗 장로인데, 어쨌거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입다는 우리나라의 홍길동이나 임꺽정에 비유될 수 있겠습니다.

정규군은 아니었으나, 의적이나 산적 비슷하게 살면서 무예를 연마했던 인물이었죠.

 

3절에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라고 했는데,

'잡류'는 무슨 죄인들이란 뜻이 아니고, 그냥 '별 볼일 없는 자들, 흙수저들'로 보면 되고요,

'출입하였더라'는, '이리 저리 다녔다'는 뜻입니다. 특별한 주거가 없으니 유랑생활 하는 것이죠.

 

▲입다가 상당한 신앙인이었다는 것은, 9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1) 9절,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과거 개역은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그는 인정한 것입니다.

 

2) 입다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는 진실한 신자였음을 11절에서 볼 수 있어요.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그냥 산적이나, 시정잡배가 아니었고.. 상당한 신앙을 갖춘 '영적 지도자'감이었다는 거죠. (30절조 참조)

그래서 결국 사사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신자가 사람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고
고독한 중에 신앙을 지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시는 한 때가 오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를 박대하던 자들(길르앗 장로들)도 그에게 절하게 됩니다.

나중에 입다가 그들의 '머리가 되었으니' 절한 거나 마찬가지죠. 미7:7~8, 계 3:9 참조. 

 

요셉을 이방인들에게 팔아버린 그 형들은 마침내 그에게 찾아와서 
그에게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죠. (창 37:27-28, 42:6)

3) 또한 그는 암몬  자손을 반격하기 전에,  먼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하여 
암몬 왕에게 사신을보냈습니다(12~27). 물론 외교적 협상은 결렬되었지만요. :28

그러므로 입다는 신앙이 진실할 뿐 아니라  지도자적 자질로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암몬 왕과 협상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24

 

그모스는 원래 모압의 신인데, 암몬 왕에게 '네 신 그모스'라고 한 것은, 입다의 말실수 라기 보다는

당시 암몬 왕이, 모압 출신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쨌든 사족이고,

중요한 것은, 입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우리가 차지한다'는 굳센 신앙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4) 그런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습니다. (29절)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이제 전쟁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항상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사모할 영이십니다. 오늘 내게도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기름부음이 임하시면,

전쟁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도 불완전한 인간이라서, 그의 신앙의 단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아래 성급한 서원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입다의 서원  (신약성도도 서원한 자)

 

*앞서 입다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해석했으나, 이중적 의미로 여기서는

'작은 예수'인 신약성도로 해석합니다.

 

아마 입다는 이번 전쟁의 승패에 곧 자기 인생의 승패가 달려 있다는 사실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승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님께 일종의 뇌물을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입다는 지금 길르앗 장로들과 협상했듯이, 암몬 왕과 협상했듯이,

그렇게 하나님과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다의 서원은 아주 간교하고 계산적인 약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확증(도장)을 받아내려는 불손한 행동이었다.

 

문제는 입다의 서원이었다. 입다는 하나님께 맹세한 대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차례다.

그런데 하필이면 입다를 환영한 사람이 바로 입다의 딸이었던 것이다(34절).

 

당시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여인들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노래하는 풍습이 있었다.

아마 이때 입다의 딸도 아버지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소고를 잡고 춤추며

아버지를 영접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딸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입다에게는 돌이 킬 수 없는 비극이 되고 만다.

 

이제 입다는 딸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 딸은 무남독녀, 즉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재물로 바쳐야 하는 입다의 심정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입다의 서원과 승리의 상관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서원 때문에 입다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것일까?

만약 입다가 서원하지 않았다면 전쟁에서 패했을까?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우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금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물로 삼는 제사는 이교적인 제사 풍습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지만,

막상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내려 치려고 할 때 그 손을 멈추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이삭의 몸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하나님께 기꺼이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이삭을 제물로 받으시고,

후에 부활시키실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브라함 역시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시리라 믿고 칼을 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굳이 아브라함의 제사를 멈추셨다.

하나님은 인간 제물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서원을 요구하셨다거나,

입다의 서원을 받으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저 입다 혼자 서원하고, 자기가 한 서원 때문에 혼자 고민하고,

혼자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물론 ‘서원’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원을 할 때는 항상 신중하고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입다처럼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 서원을 한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이다.

 

또 만약 하나님께 서원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죄가 된다.

그러므로 서원을 할 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해야지

하나님과 협상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한 서원을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입다의 서원과 승리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을까?

 

삿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삿10:13).

 

그러면 이번 기회에 암몬 족속에게 완전히 박살나서

실컷 고생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시고 구원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하는 곤고를 모른 척 하실 수 없었다(삿10:16).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돕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암몬과의 전쟁은 입다의 군사력이나 서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것이다.

 

어쨌든 입다는 제멋대로 내뱉은 서원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졌다.

서원한 대로 딸을 제물로 바치면 인간 제사를 금지하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되고,

반대로 서원을 이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죄가 되고 만다.

과연 입다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입다는 한번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딸에게 “내가 이미 하나님께 맹세를 했으니 돌이 킬 수가 없다”고 말한다(35절).

 

그리고 결국 서원한 대로 딸을 제물로 바친다(39절).

입다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끝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기드온과 아비멜렉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거절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입다는

자기 손으로 하나밖에 없는 딸을 바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만다.

 

이렇게 입다는 제멋대로이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이용하려고 하는 불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는 이런 입다를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입다의 순박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의리 때문이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고, 눈꼽만큼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입다는 어떤가? 비록 잘못된 서원일지언정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무모하다 싶을 만큼 충직한 의리가 있었다.

 

물론 입다의 서원(인간 제사) 자체는 율법에서 금하는 일이다.

그러나 입다가 그 서원을 지킨 이유(하나님과 맺은 약속이기 때문에)는 율법과 일치하며,

하나님께 칭찬 받을 일이었다(민30:2, 신23:21).

 

신약 성도 역시 서원한 사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겠다고 서원을 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간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함께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믿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거듭남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서원을 맺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서원을 어떻게,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예 깡그리 무시하고 제멋대로 사는가?

아니면 입다처럼 비록 어리석고 무모하고 모자랄지언정

어떻게든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어리석은 충직함도 받으시고, 들어 쓰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른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하며 순종한다면,

얼마나 더 우리를 귀하게 쓰시겠는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귀하게 여기라! 하나님과 맺은 서원을 지키라!

주일 예배를 지키고, 말씀 생활, 기도 생활을 지키고, 경건한 삶을 지키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기 위해 힘쓰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의 믿음의 선진으로 세우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하나님과 맺은 서원을 반드시 지키는 의리의 사람 되기 바란다.

                                                           (*이 단락 썹 목사 사사기 강해 중 스크랩)

여러분, 올바른 서원은, 일단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그릇된 서원은 자기가 남에 대해 서원하는 것이다.

 

과거에 한국에, 아들을 임신하면 주의 종으로 서원해버리는 어머니들이 있었다.

본문의 입다도 자기가 아닌, 제 삼자에 대한 서원을 한 것이다.

 

서원에 대해 여러 갈래의 의견이 나눠져 있지만,

일단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남에 대한 서원은 하지 말 것, 자신에 대한 서원은 매우 신중하게 할 것!'

 

그리고 율법에 '서원을 무르는 조항'도 나온다.

어린 소녀가 아빠의 허락 없이 서원한 경우,

또는 아내가 남편의 허락 없이 서원한 경우에는.. 무를 수 있었다. 민30:1~8

 

그리고 드물지만 이런 혼란도 있다.

어떤 청년선교집회에서 목사나 주위 사람이 '너는 선교사 되라고 내가 기도(서원)했어!'

또는 교회 권사님이 청년에게 '너는 목사, 사모되라고 내가 기도(서원)했어!'

 

그러면 대개의 경우, 그 타인의 기도(서원)을 들은 사람은,

그런 말을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주님의 다른 인도하심이 있었겠지만) 그 청년이

선교사, 목사, 또는 사모의 길로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특별한 아주 드문 예외는 있겠지만, 타인의 서원은 일단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혹시 그 타인의 서원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본인이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해서,

본인이 직접 응답받고, 본인이 직접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이 올바른 서원이다.

나에 대한 남의 서원에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