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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30장 16~31 어떻게 분배해야 하나?

LNCK 2022. 1. 13. 11:57

[LIVE] 어떻게 분배해야 하나? _조정민 목사_20211212 - YouTube

◈어떻게 분배해야 하나?            삼상30:16~31             2021.12.12. 출처


인생에 최악의 상황이 오면, 사람은 두 가지 반응으로 갈라지게 되죠. 
사람이 최선으로 변해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피폐해져서 최악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본 불에 탄 시글락 공동체의 처참한 모습, 
감당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 둘의 태도는 극명하게 상반됨을 보았어요.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지만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들을 품고, 그들을 데리고 아말렉 족속을 뒤쫓기 시작하는 것이죠. 
자기를 죽이겠다는 사람들을 품고, 또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광야에서 죽어가는 한 애굽 소년을 만나죠. 
그런데 추격해 가다가 브솔 시냇가에 이르자,

다윗의 6백명의 무리 중에 2백명이 못 가겠다고 주저 앉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나무라거나 닥달하거나 강제로 일으켜 세워서 같이 가지 않습니다.
그들을 시냇가에 쉬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또 남은 4백 명을 데리고, 아말렉 족속을 뒤쫓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시작이에요. 

 

 

◑아말렉을 추격해서, 모든 것을 되찾아오다  

 

삼상30:16~17 '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꽤 큰 규모의 아말렉 군사들입니다. 
시글락 공동체만 습격을 해서 약탈한 게 아니에요. 

아말렉은, 블레셋 마을들과 유다 남쪽 네게브 지방의 여러 마을들을 습격해서 
닥치는 대로 휩쓸고 다 빼앗은 것이죠. 전리품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또 얼마나 흐뭇했겠어요.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은 당연하죠. 
정신없이 그냥 자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다윗은 새벽녘부터 기습을 시작해서,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 아말렉 족속을 진멸합니다. 

아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낙타를 돌보고 있던 젊은이들만 살아서 도망가고 
나머지는 전부 다 죽음을 맞게 됩니다. 

▲여러분 뭐든지 일이 잘 될때가 위험한 거예요. 
어려울 때는 깨어 있지만, 일이 잘 풀려나가면 방심하기 쉽습니다. 

보초만 좀 제대로 세워놨더라도 아말렉이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너무 자신만만했고, 너무 흥겨웠고, 너무 좋았던 것이죠. 
아마 다윗 일행이 전장에서 급히 돌아온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전리품을 두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 방심이 처참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마을들을 습격하고 다닐 때는, 누가 이런 결말이 나리라고 생각을 했겠어요? 
그 많은 전리품을 앞에 두고 파티를 시작할 때 
그들의 인생의 결말이, 이렇게 처참하게 끝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윗과 그의 무리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불에 타버린 시글락 공동체를 바라보았을 때 
'이게 끝이구나' 해서 그 난리를 피웠던 것 아닙니까. 다윗을 돌로 쳐죽이려고 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끝이라고 말하시지 않으면, 끝은 아닙니다. 
인생의 끝은,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인생의 끝을 결정하시는 분은, 인생의 주인되신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함부로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 끝났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상황이 어려워서 끝났다? 아니요. 끝난 게 아닙니다. 

다윗 일행은 빼앗긴 것만 되찾았습니까? 자기들 것만 되찾은 게 아니에요. 
아말렉이 다 빼앗아 놓은 것들이, 지금 다 다윗 무리의 수중에 전리품으로 들어왔어요. 

무슨 말입니까? 
최악의 상황이 최선의 상황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서 왔더니, 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삼상30:18~20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다윗이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정말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던 이래로, 이렇게 기쁜 날도 없었을 거예요. 
함께 따라다니던 이들, 아둘람 동굴에서부터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오늘 이렇게 기쁜, 이렇게 많은 전리품들을 눈앞에 보고 
정말 흥분했던 적은 없었을 거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윗을 돌로 치자고 했던 자들이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을 해요.  :20

누가 이 소리를 제일 먼저 질렀을까요?
아마 다윗을 돌로 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이 
가장 큰 소리를 질렀을 것 같아요. (만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 호산나 난리가 났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아십니다. 군중의 함성, 무리의 고함소리를 아신단 말이에요.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 사람들 속에 뭐가 있는지.. 

그리고 호산나 라고 외치는 백성들의 그 고함과 그 함성 소리가 
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는 함성으로 바뀔 것을  
예수님이 몰랐겠습니까? No

여러분, 세상의 소리에 너무 귀기울이지 마십시오. 
그 소리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엊그제까지 그렇게 목숨까지 바칠 것 같이,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에요. 
그런 자가 등에 칼을 겨누는 일이 세상에는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그런 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자들을 데리고, 아둘람 동굴에서 시글락 공동체로 넘어왔고 
그들을 데리고 또 아말렉 족속을 뒤쫓았고 
그들을 데리고 전쟁을 치러 나가서 이겼다는 거예요. 

그럼 이게 기적아닙니까? 
그럼 이런 기적을 경험하면 사람이 바뀝니까? 좀처럼 안 바뀝니다. 

다윗은 이들이 누구인지를 잘 안단 말이에요. 
돌로 치자고 한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다윗의 전리품이다!' 라고 떠드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자기가 지금 더불어 사는 사람이 누군지를 잘 안단 말이에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속속들이 알지만, 그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울었고, 그들과 함께 웃었다는 거예요. 
그게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수많은 무리, 수많은 군중들과 함께 
정말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그리고 언제 변할지 모르는 그런 자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환란 만난 자들이었어요. 
빚진 자들이었습니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어요.   삼상22:2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다 거두어 주었더니, 
어느 날은 돌을 들었다가 
어느 날은 환성을 질렀다가... 
그러고 살아가는 거에요. 

아말렉의 전리품을 다 빼앗고 나니까 '이게 전부 다윗의 전리품이다' 
180도 돌변해서 이렇게 환호성을 지르는 거죠. 


◑연약한 자들을 품는 다윗

:21~22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아말렉을 치고 난 후에, 다윗 일행은 브솔 시내까지 다시 돌아왔습니다. 
남아있는 2백 명 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2백 명들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저 4백명의 무리가 가서 어떻게 정말 돌아올지/ 못 돌아올지 궁금해하던 차에 
전리품을 잔뜩 가지고 돌아오는 걸 보고 반가워서 달려갔을 거에요. 

▲근데 다윗이 먼저 2백명에게 문안했다고 돼 있습니다.  :21
안부를 물었다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다윗은, 보통 사람 같으면, 
뭐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다윗은 2백명이 달려오자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면서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다는 거에요. 

먼저 '잘 지냈냐, 잘 있었느냐, 우리가 가 있는 동안에 별일 없었느냐?' 
이렇게 물었다는 거예요. 

이게 다윗의 성품이에요. 다윗의 인격입니다. 
여러분이나 저같으면, 저들을 향해 눈을 째려보았겠죠. 

'자식들, 따라오라고 할 때 따라오지도 않았고..
전쟁하러 가는데 힘들다고 중간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이지..' 

어떻게 보면 유약한, 심약한, 비겁한 자들이고, 쓸모 없는 자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들에게 따뜻하게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이 상황에서 누가 시비를 걸까요? 
다윗과 함께 갔던 4백 명이 시비를 걸죠. 

 

'너희 2백명 한테는 돌려줄 물건 없다. 그냥 처자식이나 데려가라. 
떠나라,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근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자들 2백 명을 향하여 
그 자들을 누구라고 말합니까? 

보니까 성경은 이렇게 기록을 했어요. 
'악한 자와 불량배들' 이라고 말합니다. :22

'불량배'란, 우리가 성경에서 흔히 듣는 '벨리알'이라는 뜻이에요. 
'가치가 없는 자, 소용없는 자, 무익한 자'가 벨리알이에요. 

아니 전쟁을 치르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성경은 그 공로자(4백인)들이 '벨리알이다. 악한 자들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과 10년 가까이 그렇게 지낸 사람도 있고, 
다윗과 함께 예배를 드린 자도 있고, 
다윗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어 기도한 자도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여전히 '악한 자 또는 벨리알'이라는 거예요. 

다윗이 그들이 악한자, 벨리알인줄 모르겠어요? 
그러나 다윗은 '악한 자들이여!'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자 보십시오. '형제들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3


◑연약한 자들과 전리품을 함께 나누다

: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24~25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여기서 다윗이 전리품을 나누는 규례를 제정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셔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온 아말렉 군대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기에, 
그래서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 전리품이다..' 
뭐 말이 좀 긴 것 같지만 뭐에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주신 것이다.. 이 말입니다.  

이 4백명은, 지금 우리가 가서 죽을 힘을 다해서 
목숨 걸고 싸워서 다 빼앗아 온 것이다.. 이게 전리품에 대한 
자기들의 정의와 생각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정의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셨기에, 
지금 이스라엘 하고 싸우지 않고, 아벡에서 시글락으로 돌아왔고, 
시글락에 와서 비록 모든 것이 처참하게 황폐화되었지만 
그러나 아말렉을 좇아 갈 수 있게 하셨고 

그리고 또 애굽 종을 만나서, 그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서 
그들을 습격해서 아말렉을 다 처치하고, 이걸 되찾았단 말이에요. 

어느 것 하나 다윗이 움직이지 않고 된 일은 없어요. 
그러나 다윗은 전리품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전리품이란 뭐냐?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은혜로 주셨기에, 
내 손에 쥐어진 것이다! 이게 전리품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너희가 지금 저 2백명과 전리품을 나누지 말자' 
이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실 지금 '분깃이 동일하게 가른다'
이러면 여러분 얼마나 4백명이 불편하겠어요? 

2백명은 전쟁에 따라오지도 않고, 브솔 시냇가에 앉아서 그냥 쉬고만 있었는데 
'그들하고 지금 전리품을 같이 나누겠다' 라고 하는 다윗의 선포, 다윗의 결정에 대해서
그들은 얼마나 속에서 불끈불끈 하겠어요? 

▲그런데 사실은 이스라엘은, 원래 이런 기준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기준이에요. 

모세 때, 모세가 미디안 족속들하고 싸우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민31:25~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사로잡은 사람들과 짐승들을 계수하고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의 절반은, 나가서 싸운 군인들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후방에 있었던 백성들에게도 주라는 거예요. 

다윗은 이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싸우러 나갔던 군사들에게도 적용을 한 거란 말이에요. 

최전선에서 싸웠건, 아니면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했건 
동일하게 나누자는 것이죠. 

사실 다윗이 삼상25:13절에 그들에게도 미션(임무)을 안 준 건 아니에요. 
25:13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여러분 시글락에서 (불에 타고) 남은 자원들을 다 챙겨가지고 온 거란 말이에요. 
무거워서 더 이상 못 가요. 

그러니까 군장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가장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서 
모든 물건을 다 2백명에게 맡겨놓고 
진짜 칼 하나씩만 차고, 가볍게 추격한 거란 말이에요. 

어쨌건 2백 명도 그들의 소유물을 지키는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 4백 명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 역할과, 자기들의 실제 전장에서 싸움은 
어떻게 비교가 되냐, 어떻게 동일하게 취급할 수가 있느냐? 그 얘기죠.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느 쪽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답을 주신게 
마태복음 20장의 이른바 '포도원 품꾼 비유'입니다.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사람이나 
퇴근 무렵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다 한 데나리원씩 받았어요. 

누가 입이 나왔습니까?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죠. 
얼마나 화가 났든지 이 사람이 뭐라 그러잖아요. 
'(한 데나리온을)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20:11~12

예수님께서 뭐라고 답합니까? 차갑게 대답하십니다. 
마20:14~16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포도원 주인은, 돈 벌려고 포도원을 만들지 않았어요. 
일손이 부족해서, 퇴근때까지 사람을 불러 모은 게 아니에요.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고용되지 않는 사람들을 고용하기 위해서, 그들을 불렀단 말이에요. 

고용조건은, 한 사람 한 사람과 같은 고용조건을 맺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고용한 대로, 계약 조건 맺은 대로 지급했는데 
왜 너희가 불만이냐, 내 것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왜 너희가 시비냐?
너희는 너희 것이나 가지고 가라!' 

▲여러분 지금 다윗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앞으로 다윗이 세워나갈 이스라엘 왕국이 
어떤 기초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인가? .. 에 관한 얘기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런 얘기, 이런 천국 비유를 반복해서 들려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기초 위에서 세워지는 나라인지를 
말씀해 주고 계신것이란 말이죠. 

그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람들의 재능, 사람들의 능력, 사람들의 헌신 정도... 

그런 것들을 척도로 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부름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걸 우리는 '공로주의' 라고 말합니다. *meritocracy(능력주의)
이건 평등주의와 늘 배치되는 개념이에요. *egalitarianism

사도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12:21~27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서, 공로주의가 부당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얘기는 뭐예요? 
'약한 것이 더 중요하다, 약한 우리의 지체가 더 요긴하다..' 이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눈에 안 보이는 심장이 중요합니까, 눈에 보이는 손발이 중요합니까? 
보이는 손발보다도 때로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장기, 
장기를 꺼내놓고 보면 흉측하겠죠. 

여러분이 다듬고 뭐 예쁘게 꾸미고 오고, 멋지게 옷을 입고 앉아 있지만 
안의 장기 하나씩 꺼내놓고 보면 가관아니겠습니까. 

그걸 감싸기 위해서 몸이 있단 말이에요. 
그 연약하고 요긴한 것들을 감싸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 밖에 있는 드러나는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름대로 공로주의에 철저하게 쪄들어 있었던 사람이에요. 
누구와 비교하고 견주어도 그는 꿀릴 게 없다고 생각한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하나님을 알고 보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그분의 은혜에 젖고 보니까, 
'아~ 내 눈에 덜 요긴하게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구나!'    *장기에 비유

여러분 이걸 깨달아가는 게 신앙의 성숙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우리는 금그릇, 은그릇 같이 그 소재에 따라 사람을 측정하는 잣대가 되어있지만 
그건 하나님의 잣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잣대는 깨끗하냐/ 불결하냐? 
쓰일 준비가 되어 있냐/ 쓰일 준비가 안 되어있냐? 이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그릇 자체는 아무 공로가 없단 말이에요. 

사실 성경은 이 얘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창12:2절에 아브라함에게 뭐라 그럽니까? 
'네가 창대하게 될 것이고 네 이름이 크게 될 것이고.. 네가 복이 될것이라' 말씀합니다. 
 
핵심은 '아브라함, 네가 복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복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게 복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는 게 복이란 말이에요. 
그 이상의 복은 없습니다. 

△근데 마귀는 말이에요. 이걸 다 공로주의로 바꾼 단 말이에요. 
마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는 여러분들이, 자기에게 경배하기만 하면 모든 걸 다 준데요. 
그래서 뭐 사탄종교도 생기지 않습니까. 

사탄종교 의식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하는 만큼 보상이 있단 말이에요. 

왜 그게 어때서요? 자본주의 원리인데요! 

여러분, 공산주의도 72년 만에 종식선언을 했지만 
자본주의도 지금 말미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에요.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지탱해왔던 것은 
자본주의적 속성 때문에 지탱해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이 땅 가운데 뿌리내리게 했던 기독교 정신, 
성경적 가치, 믿음의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 몫을 포기하고,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삶의 모습들 때문에 
그게 지탱해왔던 것이란 말이에요. (*자발적 부의 분배)

따라서 복음이 쇠퇴하면, 자본주의처럼 끔찍한 제도가 없어요. 
지금 그런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는 말이죠. 

지금 자본주의는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에요. 안 보이세요? 
그래도 또 비트코인에 투자할 사람은 하겠죠.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살후3:10~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이건 정반대되는 말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얘기에요. 

이건 게으른 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과 
약한 자들을 돕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나 한 데나리온씩 준다고 
게으름을 부리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는 것이냐? 

지금 바울이 뭐라 그래요? 
'그런 사람들은 먹지도 말라' 그래요. 

일할 수 있는데 '그냥 나는 실업수당 받아먹고 살지 뭐' 

어쨌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능력이 있고, 맡겨진 책임이 있는데 
그렇게 게을러서 부당하게 살고자 하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에요. 

성경에는 달란트 비유도 있고, 데나리온 비유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달란트 비유 : 마25장의 능력주의,  데나리온 비유 : 마20장의 평등주의, 둘이 보완됨)


▲그래서 이제 다윗이 정말 이런 엄청난 결정을, 그 당시에 한 거란 말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그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그런 하나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를 경험했단 말이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커서 
나누지 않을 도리가 없는 자가 된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도 
우리는 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한순간에 공로주의에 빠지기 때문에 
수많은 시비와 갈등과 불만이 생깁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는 줄로 믿으십시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정말 열정을 가지고 살았지만 
그 열정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원받음으로 인해서 
그의 패션이 컴패션이 되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인간의 열심과 열정이 아니라 (패션이 아니라)
그것이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열정이 되었어요. (컴패션이 되었어요)

즉 공동체를 품을 줄 아는 열정, 
연약한 자를 돌볼 줄 아는 열정, 
사회적 약자를 돌볼 줄 아는 그런 열정으로 바뀐 단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먼저 구원하신 까닭입니다. 
그게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란 말이에요. 

▲따라서 다윗이 이렇게 오늘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나.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나 
동일하게 분배를 결정한 이 모습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초대교회는 어떻게 탄생한 것입니까? 
인간의 욕망을 따라 나누고자 하는 분배의 원칙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따라 나누고자 하는 공동체적 가치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지금 얼마나 많은 세상적 기준이 들어와 있는지 몰라요. 
얼마나 많은 세상적 가치가 여기에 들어와 있는지 몰라요. 

뭘 헌금을 더 해야 마일리지가 올라가는 줄 알아요. 
더 많이 헌신하게 해서, 마일리지를 더 높이 쌓아서 
직분을 획듣하는 줄로 않단 말이에요. 

그걸 교묘하게 부추겨서 교회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헌신이랍시고, 그걸 자꾸 하나님의 일로 포장을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무슨 일을 더해서 더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일을 덜한다고, 구원의 가치가 줄어듭니까?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비할 수 없는 가치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적 가치를 더 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쓰레기와 같은 것들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앞으로 다윗 왕국,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까지 이어질 이 왕국의 속성은 
세상이 말하는 이런 공로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는 말이에요. 

교회가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과 가치와 질서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세상보다 더 못한 곳이 되고 말죠. 

은혜를 말하지만, 이건 은혜도 아니고 
공로주의가 안 된다고 말은 하지만, 모든 질서는 공로주의에 기초해서 운영하게 되면 
이건 뭐 얼토당토 않는, 그야말로 교회가 아닌 것을 교회로 그냥 믿고 살아가는 
기형적인 제도를 만들고 만다는 것이죠. 

따라서 3대째 그리스도인입니까, 모태신앙인입니까? 
교회를 위해서 뼈빠지도록 일했습니까? 

그게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증거일 수는 있어도 
그게 구원의 가치를 더하는 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와도 구원의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시험들지 않아요. 

먼저 와도 자기가 쌓은 공로가 너무 중요해서,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그는 또 다른 바리새인, 율법학자, 제사장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단 말이에요. 

제가 매일같이 설교한다고, 여러분들보다 더 공로가 많은 줄 
착각하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겠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에 
우리의 섬김이나 헌신은 
그냥 자발적으로 하는 선행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하는 어떤 선행도, 구원의 조건이 안 되듯이 
우리가 하는 어떤 선행도, 하나님을 위한 마일리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불편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세상처럼 자꾸 만들어 놓는단 말이에요.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진정한 교회됨을 위해서 
오늘 다윗의 이 분배원칙을 잊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나마 교회에서나마 아마 이 원리가 실천되지 않으면 
세상은 못 견딥니다. 

세상은, 가정과 교회라는 공로주의를 벗어난 하나님의 기관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사회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이지 
사회 그 자체 능력으로는 유지가, 감당이 안 되는 곳이에요. 

그래서 사탄은 교회와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 이외에는 하는 일이 없지만 
가정에서까지 공로주의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 가정,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정에서는 
애가 5등하다가 1등하면 용돈을 두 배로 준다든지 
전교 일등 했기 때문에 여름에 휴가를 보내준다든지.. 
그런 짓은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것에 어쩔 줄 몰라서, 그냥 공부를 하고 싶어 하고 
공부는 내 체질이 아닌 아이는, 
그 아이가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아이가 되도록 기도하는 부모가 되어야지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공로주의 시스템 속에 자녀를 떠밀어놓고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남기를 바랍니까? 
어떻게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랍니까? 
어떻게 정신병 안 걸리기를 바래요? 

우리 어른도 견디기가 힘든 세상인데 
이 무한경쟁을 견디시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견디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견디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과의 경쟁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살아내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 기쁨이 더 큰 능력이 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어떤 것보다도 큰 능력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근거란 말이에요. 

즉 신앙 자원, 믿음 자원, 은혜 자원, 성령 자원입니다.


◑외부로도 나누다

:26~31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자 이 마을들은 주로 유다 남방지역에 있는 성읍이에요.
그리고 유다 지파의 마을들입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 출신이에요. 

그는 주로 이 유다 지파를 근거로 도망을 다녔어요. 
특별히 그를 괴롭힌 곳은, 십과 그일라 라는 두 마을입니다. 
다윗을 사울에게 고발했어요. 
그러나 나머지 마을들은 그를 늘 받아줬거든요. 

지금 다윗에게는 엄청난 재물이 생겼어요.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재물이죠. 
사실 일생동안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정말 이제는 걱정 없이 배불리 당분간 먹고 살만한 제물이 생긴거에요. 

그렇지만 그 재물을 쌓아 놓지 않습니다. 
그런 군사들과 모든 참전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동일하게 나눴지만 
그가 남은 재물들을 
그동안 이 아말렉 족속들에게 시달리기도 했거니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기억하고, 선물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뜻밖의 재물이 생기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다윗은 뜻밖의 재물이 생겼을 때, 그 재물을 흩어 나눌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거 쌓아놓는 바람에 얼마나 인생이 썩는지 아십니까? 
그걸 쌓기 때문에, 지금 자본주의가 얼마나 썩어가는 자본주의가 되는 지 아십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 세상 전체가 위기에 빠지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지혜롭게 나눌 줄 알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아말렉 족속이 쌓았던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다윗은 친구를 얻는 데 썼다는 것입니다. 

눅16: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잠18:16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뇌물이 아니에요. 보통 뇌물이 길을 넓게 한다고 살아가는데 
그게 아니라, 뇌물은 멸망의 길이에요. 
정말 선물로 인생의 길을 넓히는 자, 
존귀한 자 앞으로 나아가는,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41: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예 그렇습니다. 복이 뭐예요? 남을 돌볼 수 있는 것보다 복된 게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재앙의 날에도 그를 건져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은 재물을 가져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짙은 그늘가운데 있어요. 
아니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따라서 눅1:77~79절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고자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눅1:77~79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여러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뭘 가졌건, 뭘 누린다고 착각을 하건,
죽음과 사망의 음침한 곳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오셨단 말이죠. 

그리고 우리를 진실로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때, 두 가지가 한번에 해결이 돼요. 
-하나는 갖지 못한 자들의 분노가 수그러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가진 자들의 탐욕도 바람처럼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이웃을 붙여주시는 까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연약한 지체들을 사방에 두신 까닭은 
그건 그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방편으로 
그들을 내 주위에 두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 것 가지고 돕습니까? 
누구도 내 것 가지고도 돕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울 수 있는 것도 주셨고 
도우겠다는 믿음도 주셨고 
돕겠다는 건강도 주신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것 하나 주시지 않은 것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뭘 자랑하겠으며, 뭘 내세우겠으며, 뭐 어떻게 교만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본문을 우리가 같이 읽으면서 
정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얼마나 세상과 부딪치게 될지를 잘 압니다. 

그러나 세상과 전혀 다른 길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결단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우리는 우리식 대로 살아감으로써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드러납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에 알려지겠습니까?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을 증언하겠습니까? 

세상처럼 살아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드러나겠어요? 
누가 교회로 오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분배방식, 
다윗이 실천한 배분의 철학 
이런 것들을 우리 삶에 적용해 나갈 때 
하나님이 드러날 줄로 믿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