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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4편 1~7 허허벌판에서 비 맞기와 벼락 맞기

LNCK 2022. 1. 14. 17:54

◈허허벌판에서 비맞기와 벼락맞기            시54:1-7                -09.05.13.설교스크랩-

 

▲독일에 ‘스토테른하임’이라는 마을에 가면

‘루터스타인’이라고 하는 돌멩이가 하나 있어요. ‘루터의 돌’이란 뜻입니다.

‘루터의 돌’이라고 이름 붙여진 기념비가 하나 있습니다.

 

1505년,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시절,

광부로 일하시는 아버지를 방문했다가

친구와 함께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스토테른하임 마을의 벌판에서 비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비를 피해서, 나무 밑으로 들어가서 친구와 함께 기다리는데

벼락이 떨어지면서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그 참담한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던 루터가

‘성 안나여,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나를 지켜주시옵소서.

내가 이제 사제가 되겠나이다.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서약을 하고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그리고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도사가 된 후에도 그 벼락을 맞아 죽는 친구의 모습을 마음에 기억하면서

항상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어떤 수도사보다도 자주 고해성사를 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고 해요.

누구보다도 많이 참회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늙은 신부님께서 ‘루터야, 좀 죄를 한꺼번에 모아서 갖고 오면 안 되겠냐.

너무 그렇게 자주 와서 나한테 죄를 고백하지 말고 좀 모아서 갖고 오너라.’

라고 얘기할 정도로, 루터에게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이 큰 문제였기 때문에

 

고민 고민 하다가, 결국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자기 개인적인 답을 얻고는,

그 답을 얻은 말씀으로, 기치를 내걸고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스토테른하임의 벌판에서 그 비를 계속 맞고 걸어갔으면

아마 벼락이 자기에게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에요.

비를 피하기 위해서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가.. 벼락을 맞고 친구가 죽습니다.

 

▲루터의 이 사건을 그냥 쉽게 우리 삶에 한 번 빗대어 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삶, 우리 하루하루 삶은 ‘벌판에서 비맞기’와 같습니다.

허허벌판이라는 것은 비를 만나게 되면, 비를 피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어디 피할 데도 마땅치 않고, 비를 꼬박 맞을 수밖에 없어요.

 

인생의 벌판에서 내리는 비가 뭡니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에요.

 

하나님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계획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참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안 된다는 것이

주님의 고백이었어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주어지는 모든 사소한 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낚시 할 때 ‘현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찌가 움직이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물 속의 물고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눈에 보이는 현실은

사실은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흔들고 계십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찌를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이

비처럼, 장대비가 되어서 내리고 있는 벌판이에요. 벌판.

 

산위에도 하나님의 뜻이 비처럼 내리고, 바다에도 하나님의 뜻이 비처럼 내려서

물속에 수많은 물고기가 살고 해초가 삽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리심이 장대비가 되어서 만물에 내려오는 것이 이 세상이에요.

 

▲비를 무조건 피하다가는.. 벼락을 맞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피하다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를 피해서 허허벌판에 나무 하나 발견하고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비를 피해버리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환란의 길을 떠나서, 자기 스스로 살 길을 찾는 것이지요.

 

주어지는 현실을 수용하지 않고, 내가 극복하려 하고

내가 개선하려 하고, 내가 그것을 판단하며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벼락 맞아요. 조심해야 합니다.

 

▲시54편의 배경

오늘 시편 54편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다윗이 십광야 수풀에 숨어있을 때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십광야 수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바로 앞에서 그일라라고 하는 도시가 있는데

그 그일라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요.

 

그러니까 다윗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블레셋사람을 물리치고 그일라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그일라에 있다고 하는 소식을 사울 왕이 듣고 내려온다고 하자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사울에게 넘겨줄까요? 안 넘겨줄까요?’

 

그때 하나님께서 ‘넘겨줄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일라를 구해줬는데도 불구하고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립니다.

다윗을 넘겨주려고 밀고를 해요.

이때 다윗이 피한 곳이 십광야입니다. 그런데 십광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요.

 

십광야에 있다는 사실이 사울의 귀에 들어가자

사울 왕이 쫓아오고, 다윗이 그 십광야에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다윗이 급하게 도망을 가려고 하는데,

다윗을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사울왕이 ‘이번에는 기회를 잡았다’ 싶은데,

갑자기 ‘블레셋이 쳐들어왔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쫓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건들을 배경으로 해서, 시편 54편이 씌어진 것이에요.

 

▲다윗의 자기중심적 기도?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오늘 이 표현들이 약간 불경스럽다 할 정도로,

그리고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라고 느낄 만큼.. 표현들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표현들인가 하면,

 

5절,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악으로 악인에게 갚으신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의 기준을 세우셔서 악인을 심판하실지언정

악인에게 악으로 갚으십니까?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행위 중에 악이 있습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그것도 ‘내 원수에게’,

하나님의 원수도 아니고,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내 원수에게’ 하나님이 악으로 갚으시고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주님이 성실하셔가지고, 기껏 하는 일이 내 원수를 멸하시는 겁니까?

완전히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울 왕의 자기중심적 표현

그러면 다윗이 이 시를 지은 똑같은 사건을 두고서,

사울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살펴봅시다.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다윗이 십광야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발한 자들에게 사울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삼상23:21

 

그리고 바로 앞에 그일라에서,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 왕에게

다윗을 넘겨주려고 밀고 할 때, 또 사울 왕이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다윗을) 내 손에 넘기셨도다.  삼상23:7

 

다윗은 다윗대로 ‘하나님은 나를 돕는 하나님이고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이다.’

사울은 사울대로 ‘하나님이 다윗을 내 손에 넘기셨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나에게 다윗이 숨겨진 곳을 밀고하였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럼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일까요?

내 하나님입니까? 내 원수의 하나님입니까?

 

그럼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누구의 하나님인 걸 가려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3절, 낮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에게도 원수에요.

자기 앞에 하나님을 둔 자가 있고, 두지 아니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면 알아요.

 

지금 다윗이 뭐하고 있어요?

10년 동안의 도망자세월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쫓겨 다니면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3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죽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다윗이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라고 느끼면서

시기심이 발동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사울에게 하나님이 왕권을 주셨습니다.

사울이 원한 것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니고 꿈꾼 것도 아니에요.

요즘 말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은혜로 주셨어요.

 

주신 왕권이 다윗이 쳐들어와서 뺏은 것도 아니고

뺏겠다는 것이 아니고, 뺏으려는 마음도 먹지 않고 있는데

사울이 자기의 왕권을 지키려고 다윗을 향해 칼질을 합니다.

 

이제 정의를 내려요.

누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은 사람이냐?

‘자기 삶의 기반을 자기 스스로 확고하게 하려고 행동하는 자,’

그 행동 속에는 남을 해치는 것까지 포함을 시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삶을 확고하게 다지려고 하는 자가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지 않는 자요,

 

허락하시는 삶 속에서 장대비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지 않는 자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섭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 삶의 환경을 거부하고

내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가려고 나무 밑에 들어가는 자, 비를 피하는 자,

섭리의 비를 피하려는 자... 입니다.

 

그리고 결국 사울은 벼락을 맞게 됩니다.

비참한 심판의 최후를 맞게 됩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떻습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 하나님께 따질 수도 있어요.

하나님, 우주를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허락지 아니하시면 떨어지지 아니하는

그런 주권의 하나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울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까?

골리앗에 맞서듯이 맞설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 왕,

사울 왕에게서 장대비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뜻을 본 것입니다.

저 사울 왕이 나를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가 세운 왕이다...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왕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시련인 줄 알고 받아들이고 도망합니다.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죽이지 않습니다. 세 번이나. 왜요?

하나님의 섭리가 세운 왕인 것을 믿습니다.

허허벌판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고스란히 다 맞는 거예요. 다 맞는 겁니다.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는 다윗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이시니이다. 시54: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도와서 기껏 도운 결과가 도망자입니까?

 

왜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사울 왕의 손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십니까?

이게 ‘구원’이라 할 수 있으며, ‘돕는 거’라 할 수 있어요?

 

근본적으로 나를 쫓아오는 사울 왕을 죽여주셔야지요...

 

그러나 다윗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세운 저 사울 왕이 나를 쫓아온다는 이 현실을

도망을 가면서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다.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낙헌제라는 건 뭡니까?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거예요.

 

낙헌제. 기쁠 樂자입니다.

기쁨을 드리는 것이에요. 나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는 자들의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사울도 똑같이 여호와하나님을 부릅니다. 어떻게 부릅니까?

자기가 자기의 삶을 구축하고 공고히 하기 위하여 액션을 취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자기 멋대로 갖다 끌어 붙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어지고 있는 모든 현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수용하며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이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는 자라는 거예요.

 

▲내가 잘 되는 것이, 원수에게는 악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악으로 갚으신다’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해주신 게 있어요. 그걸 하나님이 이루실 거예요.

그걸 하나님이 이루셔서 열매가 맺혀지면.. 그게 사울에게는 악이에요.

 

하나님이 악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사울이 원수지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주어지는 다윗에게 허락하시는 최선은

내 원수에게는 저절로 최악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악을 행하시는 게 아니에요.

사울에게 악을 행하시는 게 아니라 내게 최선을 주시는 것이

상대적으로 나를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최악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