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wMf5IysaPhc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상3:4~15 2020.02.09.출처
오늘은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서 "온전한 소원"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왕상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후일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나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상당한 부담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선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는 물론,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가 소원을 아뢰지 않고, 오늘 한 가지 특별한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4절에 읽은 것처럼, 솔로몬은 하나님께 1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의 1천 번째를 본받아서
1천일을 하나님 앞에 계속 새벽기도를 하거나
1천일동안 철야기도를 하거나.. 이런 분들이 있으시죠.
꼬박 3년 두달을 매일같이 새벽기도를 해야 되는 기간입니다.
제가 1천번제에 대해서 이 숫자가 얼마나 큰 숫자인가 좀 계산을 해봤는데요.
양 1천 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라고 할 때
이 번제라는 것은 제물을 완전히 태우는 것입니다.
소요 시간을 계산을 해봤는데, 한 마리를 각을 떠서 완전히 태우는데
만약에 굉장히 화력이 세서 한 10분 정도 걸리고,
또 기브온 산당이 상당히 규모가 있는 큰 산당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번제단을 동시에 10개를 사용한다고 했을 때도
1천마리 번제를 드린다면 16시간 40분이 걸리더라고요.
아침 6시에 시작한다면,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했을 때
당일 밤 10시 40분까지 해야 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아마 하루에 1천마리 번제를 다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주일 내내 하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추정을 하는데
이 추정이 더 맞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1천번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해야 된다고 의무로 주신 제사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솔로몬 자신이 원해서 한, 즉 의무가 아니라 자원 제사였습니다.
과연 누가 시킨다고 그런 일을 수고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왜 그렇게 했는가요?
솔로몬은 최고의 하나님께, 자기 최선의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솔로몬의 그런 지극정성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셔서
(1천 번제를 마친) 그 밤에 솔로몬에게 꿈에 나타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5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마음에 어떤 것을 굉장히 갈망하고 소망하면
꿈 속에 나타난다고 얘기를 하죠.
그런데 그런 심리적인 측면말고, 영적으로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통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이 (소통) 안 하실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모든 채널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세요.
왜냐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소통의 채널들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 하나님께서, 꿈에서 솔로몬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셨는가요?
'내게 구하여라.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5
그러니까 '뭐든지 구해라!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들어주겠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이상하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야 되지 않나?
솔로몬, 너는 왕이 됐는데, 너는 이런 왕이 되어야 된다.
너에게 이런 자질들이 필요하다. 이것을 구하고, 이것을 사모해라!'
이렇게 명령하시고, 일방적으로 지시하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오히려 그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그의 소원을 물어보셨다는 것이죠.
성도님들 가운데 목회자에게 와서 끊임없이 질문들을 많이 하십니다.
'제가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해도 될까요?
제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도 될까요?
제가 이 직장에 들어가도 될까요?
제가 이 집에 이사를 가도 될까요?'
뭐 목회자가 답을 정해주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마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쪽지로 받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 그러면 물론 마음에 동기가 다양하겠지만
여러분 그렇게 질문을 할 때
과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진정 알고 싶은 것일까요?
정말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향해서
어떤 마음이신지.. 헤아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요?
아니면, 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봐 혹시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내 인생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 다 헤아리지 못해도
그냥 정답만 알고 싶은..
내 인생의 실패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 심리라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역으로 우리에게 반문하시는 거에요.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너의 인생을 향해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자꾸 묻지 말고
너는 내게 무엇을 원하니?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왜 하나님이 질문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와 행복한 동행을 원하시기 때문이에요.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내가 기뻐서 가는 길을, 함께 가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인생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생은 강박적인 정답 찾기가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자발적인 선택과 헌신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정답을 찾아서
내 인생의 시간 낭비를 하거나, 에너지 낭비를 하거나
고생하거나, 절망하거나, 실패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그러나 인생이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고생을 하고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사랑이라는 진정성으로부터 출발한 인생의 선택과 헌신,
그게 진짜 인생을 사는 거예요.
인생에는 특별한 정답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최고의 기능을 수여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라는 거예요.
이 자유의지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은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한다 할지라도
내가 스스로 자기 주도적 결정권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다.. 라는 뜻이죠.
그러면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가 뭘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왜 자유의지를 주셨나요?
소책자 가운데 독일의 여성신학자가 쓴 책인데
<하나님은 왜 세상에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아주 얇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하는 아주 명쾌한 대답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랑이 완성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유의지'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억지로 결혼을 강요해서 할 수 없고요.
억지로 집에다 가둬놓고 나만 그를 좋아할 수 없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죠. 그건 공포 영화죠.
여러분 사랑이 완성되려면, '자발성'이 필요한 거예요.
즉 '자유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와 비전과 목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정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헌신할 대상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여기 존재하면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위해서
제 인생을 헌신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이 명확해지면, 내가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인생의 각론의 정답은 다 나오게 돼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소원"에 대한 메시지를 나누고 있는데요.
잠13:12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을 속히 이루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더디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께 친한 척 하면서
소원을 좀 이뤄달라고 해요. 그거는 앞뒤가 안맞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소원보다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서 하나님 곁에 다가가는 사람,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이 소원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 자유의지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이 일어나기 원한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소원이라는 마음의 기능이 망가질 때가 있어요.
사람들 가운데 "소원의 역기능적" 증상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굉장히 여러가지가 있지만, 세 가지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1. 소원의 역기능적 증상 첫 번째,
내 안에 있는 <소원의 기능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의무감으로 살다보니까,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내 마음의 원함'이라는 것 자체를 묻어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 주위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사는 거예요.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조직이 요구하는 대로 살다보면
정작 오늘 하나님의 질문처럼 '너가 원하는 게 뭐냐?' 이렇게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할 말이 없는 거에요.
왜요?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하나님이 만약에 이렇게 질문하면 당황스러워할 겁니다.
'아니 무슨 말씀인가요? 내가 뭘 해야 되는지 얘기를 해주셔야죠.
제게 뭘 원하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반문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오늘 예를 드는 경우는, 누군지 알아내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청년부 담당할 때, 외국계 기업에 취직한 한 청년자매가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했고, 지혜롭고, 성실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자매님이에요.
그런데 어려서부터 아주 강한 어머니 밑에서
어머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면서, 사춘기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순종하면서 지냈어요.
당연히 공부도 열심히 했고요.
직장을 고를 때도, 엄마가 정해준 직장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회사는 외국계 기업이라서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업무를 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자기에게 안 맞는 거예요.
왜냐면 늘 요구하고 명령을 받은 것만 행했으니까요!
그러니까 회사의 업무하고 계속 안 맞고 어긋나다가
결국에는 그 회사에서 퇴출이 됐어요.
어머니가 그 딸을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회사에 들여보낸 딸'이었는데
자랑스러운 딸이 부끄러운 딸로 전락하고 나서
그 딸을 감정적으로 너무 많이 공격한 거예요.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님께 불순종을 하고 집을 가출했어요.
가출해서 많이 방황한 것도 아니고, 그냥 친구들 집으로 도망다녔어요.
제가 이 친구가 찾아와서 상담을 해서
'넌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너는 앞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는 누군가가 너에게 원하는 것을 해오던 인생이었기 때문에..
이제 앞으로는 너가 원하는 것을 해야 된다.'
그런데 이 친구가 딱 두 가지 얘기하더라고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한탄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저는 더 이상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에요.
저는 더 이상 엄마를 자랑스럽게 해주는 딸이 아니라고요..'
그 자책을 끊임없이 하고,
또 한 가지는, '제가 원하는 거요? 저는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옷도, 친구도, 학교도, 학원도, 전공도, 직장도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인생은 내가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닙니다. 살아줄 수도 없는 거예요.
대학도, 직장도, 심지어 배우자도 부모가 정해주는 건 아닙니다.
'소원'의 기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기능인데
그 기능을 자기가 마비시켜 버린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잖아요.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앞에 두고도
'네가 선택해라'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셨는데
여러분은 왜 자녀를 그렇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하시나요?
우리는 자녀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너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질문)
▲소원의 역기능 두번째는,
<소원의 기능을 억누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차피 인생을 살아보니까,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소원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거예요.
섣불리 무엇인가를 원했다가
그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너무나 많이 실망할 테니까
너무나 큰 상처를 받을 테니까
'아 나는 그냥 소망 자체를, 소원 자체를 품지 않겠어요.' 합니다.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이 1.5세인데
부모님 직장따라서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해외에서 이사를 다닌 거예요.
그런데 가는 곳마다 당연히 친구들을 사귀고 싶죠.
그런데 친구들 사귀고 나면, 너무너무 친해졌고 떨어지기 싫은데
그냥 예고도 없이 아빠가 회사를 옮기면, 집을 옮겨야 되는 거예요.
부모 직장이 옮기면, 다른 도시로 옮겨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 가운데 이제 트라우마가 생겨서
친구들을 사귀고 싶지만, 어차피 슬픈 이별을 할 거기 때문에
'나는 아예 친구를 사귀지 않을 거야, 가까이 하지 않을 거야!'
그런 결정을 한 거예요.
여러분, 굉장히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이죠.
자기 인생의 아픔과 어려움이 생길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어린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평생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갔다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너무 많이 상처를 받을 거야..'
내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게 제 소망입니다..' 하고 기도 했는데
하나님이 '아니 그건 안 돼!' 하시면, 나는 너무 상처를 받을 거기 때문에
아예 나는 하나님하고 친해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아예 기도를 시작하지 않겠다..' 이런 분들이 있어요.
절망하지 않기 위해, 앞서 소망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상당히 쿨한 척 하지만
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과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3. 소망의 역기능 세 번째는,
<소원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내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겠다고 인생을 살잖아요.
근데 결과적으로 내가 소원하는 것과 정반대방향으로 가는 분들이 계세요.
학생들 가운데도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근데 이게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안 되잖아요.
그럼 (자포자기해서) 그냥 막 가는 경우들이 있어요.
좋은 인생을 살고 싶었어요. 훌륭한 인생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근데 잘 안 되잖아요. 그러면 자신을 더 망가뜨리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결혼생활, 부부생활 정말 행복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거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되면, 화가 나서 일탈하고, 너무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시는 분들이 있어요.
자녀를 끔찍이 사랑하고 이 아이를 위해서 10년, 20년 너무너무 헌신했는데
아이가 배신하고, 인생을 성실하게 살지 않고, 부모에게 계속 어깃장을 놓고
그러면 그 배신감때문에, 그 상처 때문에
오히려 아이를 내치고 거절하고 미워하는 그런 부모님들도 있어요.
자신의 소원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리는 케이스!
사실 이런 심리가 이제 극단으로 가면,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나오는 겁니다.
△저는 한때 자살 묵상을 많이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물론 지금은 묵상 안합니다.
한때 그 묵상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심리를 잘 알아요.
왜 자살을 하는 줄 아세요?
잘 살고 싶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죠.
잘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죽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잘 살고 싶은 마음이, 그 열망이 큰 사람들이
죽고 싶은 결정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이 잘 살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붙잡아 주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기를 축복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기도는 하지 않고, 심리적으로만 소원을 품고 있으면
이 소원은 망가지기가 너무나 쉽다는 거에요.
역기능으로 가기가 너무나 쉬운 거예요.
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건강하게 소원을 품고, 소원을 이루어 가는 법을 배우면
여러분의 내면도 건강하고, 인생도 건강할 것입니다.
소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중인데요..
▲소원이 무엇인가요?
사전적 정의를 보면 '바라고 원한다' 이런 거에요.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제가 2009년 9월에 캐나다에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대학청년부를 맡았는데
그때 상황이 좀 어려웠기 때문에, 뭐 한 2년 정도 정말 정신없이 사역만 했던 것 같아요.
두 아들과 교제할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버지 학교>에서 권면하는 대로
자녀가 둘 셋 있어도, 한 사람씩 데이트를 하라고 이렇게 알려주거든요.
그래서 큰아들하고 데이트 하고, 둘째 아들하고 데이트하고
따로따로 불러내서 해봤어요. 큰 아들이 초등학교 4 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불러내서 같이 맛있는 밥 먹고, 코코아 사 주면서
신나게 코코아 마시고 있는데 제가 물어봤어요.
'아들아, 너 아빠에게 소원을 말해 봐, 아빠가 꼭 들어줄게!'
그랬더니 얘가 눈이 동그래져서 '정말이냐고'
'정말이지!'
근데 아들이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아빠 통장에 있는 돈을 다 내놔'
'아니 왜 갑자기 그런 요구를 하느냐, 이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자기가 캐나다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예요.
귀국한지 2년이 지났는데도, 자기는 캐나다에 돌아가고 싶고
밴쿠버에 있는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고..
거기는 친구들이 뭐 정말 뭐랄까요. 좀 분위기가 달라요.
아들이 한국에 오자마자 막 초등학교 2~3학년 애들이 입이 거칠고 욕을 하고
뭐 선생님이 자들고 다니면서 학생들 등을 때리고.. 얘가 너무 놀랐어요.
처음에 저는 뭐 그런 것도 모르고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는 줄 알았죠.
아이에게 소원을 물어보고 나서야 '정말 힘든 시간을 가졌구나..' 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저희 아들들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던 이유는 뭐냐면
그래야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을 갖잖아요.
아빠와 아들 사이에 속마음을 털어놓는
그런 친밀한 관계 형성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아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랑과 헌신의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어요.
이것을 오늘 설교 주제와 맞춰서 설명한다면 이런거죠.
'아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아들이 아빠를 바라보는 시간을 좀 가졌으면.. 하는 거죠.
△제가 어제 아이들과 관련돼서 과거에 제가 좀 써놨던 노트들을 꺼내서 읽어 봤는데
아내가 저한테 글을 써준 적이 있어요.
'여보, 둘째는 아빠를 잘 찾지 않는데 (아주 어렸을 때입니다)
근데 첫째는 아빠 언제 오냐고, 아빠 보고 싶다고, 아빠랑 놀고 싶다고 그렇게 아빠를 찾는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한참 써서
제가 감동해서 막 눈물이 울컥하는데, 그 글의 마지막 줄이 이거에요.
'그런데 아빠가 선물을 갖고 오면, 선물만 뜯어보지 아빠는 안 쳐다본다고..'
어쨌든 간에 여러분 아이들이
자기의 필요가 채워지면 부모를 안 쳐다봐요.
근데 자기가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바라는 게 있으면
그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부모를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더라고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하나 주시겠다고 하면서 25년을 질질 끄셨잖아요.
한국동요가 하나 생각이 나더라고요. '두껍아 두껍아 새집 줄게 헌집 다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들 줄게 믿음 다오'
'아들 줄테니까 나 좀 한번 바라보겠니?'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제가 하나님 믿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들을 안 주세요.
그래서 '아 그러면 저는 뭐 다메섹의 엘리에셀로 제 후계자를 삼겠습니다.' 했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니! 너한테 아들을 준다니까!'
'네 믿습니다!'
그래놓고 또 즉시 안 주세요.
그래서 '그러면 제가 이스마일을 후계자로 삼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니, 내가 너에게 아들을 준다니까!'
하나님께서 계속 그걸로 25년을 끄시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25년을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게 무엇인가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라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바라기 인생'이 되기를 원하시는거에요.
25년을 끌었기 때문에 25년 동안 계속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거예요.
결국에 25년만에 아들을 주셨잖아요. 그리고 나서는
하나님은 (죄송합니다만 치사하게) 그 아들을 또 제물로 바치라고 그러잖아요.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이제 내 Abraham 가 원하는 걸 얻었으니까, 더 이상 하나님 바라볼 일이 없거든요.
근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면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시는 거예요.
정말 뭐 이거는 가슴 아픈 이야기죠.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가 얼마나 마음이 짠한 이야기인지
가정을 이루어서 살다 보면 알잖아요. 주1)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소원을 통해서
'하나님 바라기'를 하기를 원하시는 거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시죠.
'바라다'라는 말, make a wish, hope 뭐라고 표현을 하든지,
바라다 라는 말은
-바라보다.. 라는 의미와
-기다리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기대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소원하는 바를 내 능력으로 다 채울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 아쉬울 게 없고, 하나님께 바랄게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인생에 고난과 결핍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도록 훈련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참 힘든 시간이지만,
아브라함은 25년을 참 힘겹게 그 시간을 지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시려는 그분의 소원 또한 이루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자 이렇게 정리를 해봅니다.
왕상3:6~9절 내용은, 제가 그냥 말씀으로 설명을 드리겠는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게 구해봐라,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그때 솔로몬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저희 아버지 다윗은 훌륭한 인물이어서 하나님께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고
주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이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여러분 지혜란 무엇인가요?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바꿔서 이야기하면,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이 정도 쯤은 내가 결정할 수 있지' 이게 아니라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에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솔로몬의 대화를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죠.
'넌 뭘 바라니?' 하고 소원을 물어봤더니
'저는 하나님을 바랍니다!' 이렇게 대답을 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그 대답이 얼마나 흡족하셨겠어요?
그래서 10절 '솔로몬이 이렇게 구하자 주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마음에 기쁘셨죠. 이게 정답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와 장수까지 주셨습니다.
왜냐면 솔로몬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두 가지를 구했거든요.
내용으로 정리를 해보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내게 맡겨주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
왕이 됐어요. '아~ 나는 이렇게 대단한 자리에 올랐어' 하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게 맡겨주신 백성들을 바라봤어요.
시선이 자기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백성들을 바라보니까
그런 솔로몬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기쁘셨다.. 라는 거예요.
솔로몬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동행이 이루어진 것이죠.
내가 어떤 사람하고 친하다고 얘기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나 이렇게 해줘!' 이걸 편하게 얘기를 못해요. 그러면 그 관계가 진짜 친밀한 걸까요? 아니죠.
내가 누군가에게 정말 바라는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은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관계,
그게 친밀한 관계이고 신뢰관계인 거잖아요.
△그래서 오늘날 '소원'에 관해서 두 가지 신앙적으로 조심해야 되는 유형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살펴보세요.
1) 첫번째는 소원자체를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내가 뭘 요구하기가 미안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는 뭘 원하니?'
'괜찮습니다. 그냥 제 일은 제가 알아서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하나님 하고 별로 친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저는 별로 그렇게 막 매달리고 구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상당히 쿨한 신앙인 것 같지만, 하나님하고 친밀하지 않은 거죠.
하나님이 자꾸 왜 '구하라]고 해요?
그것은 우리와 친밀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하드타임을 주기를 원하시는게 아니에요.
결핍과 고생의 시간을 주시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해지기를 원하시는거에요.
2) 두 번째 정반대 케이스인데, 자기 욕심을 소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분들은 하나님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알라딘의 램프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이거 해주셔야죠. 저거 해주셔야죠.'
당연하게 마치 자기가 부리는 종처럼, 요구하듯이 그렇게 해요.
마구 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것도 잘못된 극단이죠.
하나님은 오늘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건강하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오늘 본문의 솔로몬처럼, 부르심의 자리에서 온전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솔로몬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질문하신 것처럼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이니?,
내가 그것을 이루어주겠다!' 라고 질문하실 때
우리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어요.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원합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원합니다.
그리고 제게 맡겨주신 이 소중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입술에 이 기도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 자체를 원해서 물질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들어주셔야 되는 아무런 합당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을 통해서, 이 시대에 힘들고 아파하고 외롭고 지쳐있는 사람들을 살려내는 데
쓰인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기쁘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가는 소원이 먼저입니다.
솔로몬의 1천 번제를 먼저 드리세요. 먼저 영적으로 온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소원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 적인 영향력과 지위와 자리를 구합니까?
근데 그거 자체가 목적이라면, 내 영광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이 들어주셔야 될 아무런 합당한 근거가 없지만
하나님 나를 높여주시면, 제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향력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생명을 살리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가는 소원이 더 먼저입니다. 솔로몬의 1천 번제를 먼저 드리세요.
그 사람의 소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자녀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것이 그냥 나의 기쁨, 나의 욕심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과 믿음의 가정을 세워서
세상에 소망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 자녀를 통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가는 소원이 더 먼저입니다. 솔로몬의 1천 번제를 먼저 드리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 오주님 우리의 기도가 솔로몬의 기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소원이 솔로몬의 소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주1)
제가 그 아브라함에 대해서 묵상을 하다가
집에서 이걸 테스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어요.
캐나다에 있을 때였는데 저희 둘째가 막 두돌이 지났을 때
거실에서 저녁 식사하고 혼자 그림 동화책을 읽고 있었어요.
제가 식탁에 앉아서, 이렇게 아들을 보고 있는데, 너무 너무 사랑스러운 거에요.
그런데 등을 돌리고 이렇게 동화책을 보고 있는 아들의 뒷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얼굴 좀 한번 보고 싶은데..
어떻게 그날 제 손에 추파춥스 젤리 사탕이 하나 생겼어요.
딸기와 크림맛에 정말 달콤함을 거부할 수 없는 젤리사탕이 하나 생겼어요.
그래서 제가 이 사탕을 보고, 아들을 쳐다보기를 번갈아 하다가
'내가 한번 테스트를 해봐야겠다' 아브라함하고 똑같은 세팅이죠.
아들을 불렀어요. 'OO아 사탕 줄게!' 그랬더니 해맑은 미소로 제게 달려왔어요.
'아빠 뽀뽀' 그러니까 당연히 사탕을 먹기 위해서 아들은 제 뺨에 뽀뽀를 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제가 '그런데 조금만 더 책을 보다가 와'
그러더니 애가 또 책 읽으러 가는 거예요.
그거를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세 번째는 'OO아, 사탕 줄게!' 그러니까 약간 이렇게 저를 째려보더라고요.
'진짜 주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이런 표정이었어요.
그러다가 왔어요.
제가 껍질을 까서 아들의 손에 쥐어줬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입에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제가 '그런데 아들아, 잠깐만! 그 사탕 아빠 줄래?'
잔인한 질문이죠. 그런데 아이가 제 앞에 딱 내밀면서
'아빠 먹어!' 그러는데 너무 너무 눈물이 나더라고요.
'내가 이 사탕을 나에게 바친 너를 위해서 평생 무엇이든지 해주겠다!' 막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 결심이 제 마음에 충만해지더라고요.
제가 아들을 안고 '아들아, 아빠가 사탕을 원하는 게 아니야,
우리 아들을 원하고 너무너무 사랑해! 고마워, 사탕은 네가 다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