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인간의 죽음과, 인간의 삶은 하나님께서 생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가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교적 간단하게 사울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냥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다. 전사했다.' 라고 하는 짤막한 기록이 전부가 아니죠.
누구나 죽을 수 있고 특별히 왕이라든지 전장에서의 최고사령관은 싸우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사울의 죽음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단순한 죽음 측면보다도, '그가 왜 죽었느냐? 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게 되었느냐?'
'하나님께서 사울을 어떻게 세우셨고 어떻게 그 인생을 매듭짓나? 왜 여기 이런 모습으로 사울은 자기 인생을 끝맺나?'
이런 점에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짧은 본문을 통해서 사울의 죽음, 그리고 사울의 시신을 처리하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모습,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또한 어떻게 죽음을 대비해야 할 것이고, 또 죽은 자들에게 우리는 어떤 예우를 갖춰야 하느냐? 그런 걸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3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삼상28장에 이어서 이 본문(31장)은 연속돼야 되는 것이죠. 계속 블레셋 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은 준비되어 왔고 이제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울이 지금 북부전선에서, 길보아 산이라고 하는 갈릴리 근처에 있는 북쪽산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다윗은 가장 남방 네게브 제일 남쪽에서 그것도 블레셋 땅 안에서 아말렉 족속과 전쟁을 치렀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삼상30장)
지리적으로 정반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서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죠. 사울은 블레셋 과의 전면전을 치르고 있고
비록 작은 전쟁이지만, 다윗은 시글락을 거쳐서 브솔 시내를 건너서 아말렉 족속을 뒤좇아서 그들과 전쟁을 치러서 모든 전리품을 거두고 돌아오는 승리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순간 지금 사울은, 자기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는 거예요. 따라서 사울의 죽음은, 사실 다윗의 시대를 열어젖히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면 사울은, 왜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자기 인생의 일단락을 지어야 했을까요? 사전에 예고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역사의 길이로 보면 결코 사울은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던 게 아니에요. 40년간 왕위에 있었다면 굉장히 나름대로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뭘 했느냐는 것이죠. 사실 그는 집권 2년차 되던 때, 첫번째 큰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자주 충돌했어요. 자주 부딪쳤습니다. 결국 진멸해야 될 가나안 7부족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족속이 블레셋 족속이고 또 끝까지 내어쫓지 못한 까닭에, 그들을 진멸하지 못한 까닭에 계속해서 시달리다가, 오히려 전세가 역전되어서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우리가 사사기를 거쳐서 사무엘상으로 넘어왔습니다만 사사시대 전체는 하나님의 의도와 달리 실패한 통치 체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사사에 따라서는 괜찮은 인물도 있었죠. 그러나 많은 사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그 땅 가운데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정을 요구한 거거든요.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로 있을 동안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두 아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 제도로는 안 되겠다. 우리에게도 왕이 필요하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근심하고 있는 사무엘을 달래십니다. 백성들이 '왕을 허락하라'며 하도 떼를 쓰니까 왕 실습제도를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이 세워진 것 아닙니까. 초대왕으로 세워진 이 사울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대로 나라를 잘 다스렸냐? 그렇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요구해서 왕을 얻긴 얻었는데 사무엘은 근심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왕이 세워지면 이런 모습일 거다.. 라고 가르쳐 줬어요. 이런 폐해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백성들은 떼를 써서 왕을 요구했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을 세워줬어요.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년차 되던 해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첫번째 경고장을 받게 돼요.
불과 집권 2 년째인데.. 그게 13:13~14절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삼상13:13~14
여러분 이런 말을 듣고 누가 기분이 좋겠어요? 아니 왕된지 몇 년이나 됐다고?
사울이 왕이 된지 불과 2년째인데, 사무엘로서는 사실 7일만에 가겠다 그러다가 번제를 드려야 되는데 사무엘이 안 왔단 말이에요.
사울로서는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끝까지 좀 기다리는데, 7일째가 되어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주관해서 번제를 드린 것 아닙니까?
물론 7일이 다 지난 건 아니지만 (7일 오후에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아니 백성들은 자꾸 떠나기 시작하고 일부는 동굴에 숨고, 전쟁이 지금 뭐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
길갈에서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서 번제를 드렸는데 사무엘은 오자마자 이런 예언을 전한단 말이에요.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보면 알지만, 요나단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고 적진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부자가 힘을 합쳐서 전쟁을 이겨냈어요.
그러나 그 이후로 사울의 머릿속에는 뭐가 각인이 됐겠어요? 사무엘의 이 예언! 하나님께서 이미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이 사실 때문에 그는 그 예언에 붙들려서 더 이상 한 치도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예언은 최후통첩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예언은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입니다. 드리지 말았어야 해야 번제와 화목제를 자기가 주도해서 드렸고, 자기가 주도해서 안 될 제사를 제 마음대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인데, 이 경고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거죠.
그는 두 번째 경고, 치명적인 경고를 또 받게 됩니다. 첫번째 경고를 어떻게 우리가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는 정말 왕위가 긴 왕이 될 수도 있었겠죠.
근데 어이없게도 사울은, 그 경고의 의미를 놓쳤고, 또한 오해했고 또한 자기에게 잘못 적용했어요.
△그는 두 번째 아말렉과의 전쟁을 치를 때 또 한번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됩니다.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왕위 축출 선언이에요. 그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지만 아각 왕을 죽이라고 하셨는데 안 죽였어요.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 하셨는데 안 했습니다. 전리품은 다 태워 없애야 되는데, 좋은 건 다 가졌어요.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긴 것이죠.
두 번째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울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을 버렸어요.
사람들 눈에는 여전히 사울은 왕입니다. 계속해서 그는 왕위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사람이 보기에는 저 사람이 지금 왕이에요. 여전히 왕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안 중에는, 이미 왕의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을 수 있지 않습니까?
뭐 예를 들어서 저 같은 사람은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설교도 하고, 목회도 하는 목사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아마 목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죽을 거예요.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을 자꾸 어기거나 하면 경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를 무시하면 하나님은 '내가 그를 이미 버렸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단 말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말씀은 오간데 없고, 자기 생각만 가지고 몸부림치고 산다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욕망을 가지고 몸부림치고 산다면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두렵게 하신 말씀이 그 말이란 말이에요. '너희가 아무리 주여 주여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면, 너희들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제일 비참한 게 뭐예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인 줄 알았는데 이미 하나님은, 버린 왕이 되고 말았단 말이에요. 그 증거가 뭐예요?
이후로 2차 경고를 무시한 사울에게 닥친 일들은 왕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모습이 되고 말아요.
그는 오직 관심이 다윗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이없게도, 그는 모든 국가의 힘을 기울여서 그를 추격하고 그를 죽이는데 온 신경을 다 쓰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를 떠났기 때문에, 그는 악신에게 시달립니다. 귀신에 시달려요. 자기 시기심을 어쩌지 못합니다. 폭발적인 분노를 어떻게 할 줄 몰라요.
다윗을 가까이 불렀다가, 창을 두 번씩이나 던져서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을 감싸는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막말을 퍼붓습니다.
그리고는 최정예 병력을 동원해서 다윗을 잡으러 다니는 거예요. 다윗이 너무 기가 차서, 24:14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좇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좇음이니니다.' 하도 좇아오니까 다윗이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아니 이스라엘의 왕이 지금 누구를 좇고 있습니까? 누구를 따라다니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를 좇아다녀야 됩니까? 이스라엘 왕이 싸우면, 누구와 싸워야 합니까?
이 얘기를 들으면, 정신이 제대로 바뀐 왕이라면, 정신이 번쩍 들었어야 돼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여러분, 블레셋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다윗이란 말이에요. 그 다윗은 정신없이 지금 쫓기다 쫓기다 못해서 블레셋 으로 망명을 갔어요.
그러면 여러분, 그 다음 수순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이 쫓겨다닐 때도 침략을 했는데
블레셋이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싫어하는 다윗이 자기 영토안으로 들어왔는데 다음 수순이 뭐예요? 전면전이죠. 전쟁 안 하겠어요?
이스라엘 왕이, 블레셋이 가장 싫어하는 다윗을 잡으러 다니는데 나라가 편안할 리가 있겠어요? 그래서 길보아 산에서 전면전이 발발한 거예요.
전쟁은 어이없게 너무 쉽게 끝납니다. 이스라엘이 한 번도 블레셋의 기선을 제압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는 사울과 아들 셋 다 죽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궁수들이 사울 왕에게 집중하는 바람에 그는 중상을 입지요.
◑31:4~6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당시 패색이 짙어지거나 패전이 분명해지면 왕이나 최고사령관에게는 두 가지 길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거죠.
하나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수치를 겪기 전에, 생포당해서 온갖 고통과 고문과 부끄러움을 겪기 전에 그냥 자결할 것인가?
사울은 자결을 선택했어요. 무기를 든 자란 호위대장 같은 사람 아닙니까.
어쨌든 그에게 '나를 죽이라' 그러니까, 그가 주저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냥 본인이 칼 위에 엎드러져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니까 호위대장도 그렇게 사울의 뒤를 따라가죠. 뭐 옛날 전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나 사울의 죽음은, 혼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날 자기 세 아들 다 죽고, 가까이 있던 측근들 다 죽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뛰어난 군사들도 다 죽게 된단 말입니다.
한 지도자의 비참한 말로가 이스라엘 전체의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죠.
사울이 자결하는 모습,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요? 사울 왕과 같은 이런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마쳐야 되느냐? 이걸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에요.
사실 성경에는 이렇게 자결하는 모습이 사사기에도 나와요. 아비멜렉도 이렇게 자기 무기 든 자의 칼에 찔려서 죽습니다. 삿9:54 악한 자라도, 가급적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죠.
비록 그가 인생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 실패한 인생조차도 과거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할 것인가?' 그걸 적어도 생각했다는 거예요.
△이건 매우 중요한 삶의 기준입니다. 우리 모두 죽을 거 아니에요. 근데 어떤 모습으로 죽기를 원하십니까?
전혀 생각 안 해보신 표정들이신데, 어떻게 죽어야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죽음이냐? 이 말이죠.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우리가 결정할 수 없을지라도 불쑥 찾아온 죽음을 맞아야 할 때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할지는, 늘 평소에 생각을 하고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소명에 합당한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믿음의 본으로 삼도록 권고하단 말이에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삶의 본을 보여준 선배들이 중요하지만 그 선배들이 죽은 모습들을,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한단 말이죠.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을 당시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내가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가? 어떤 죽음이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에 합당한 죽음인가?'를 같이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날 신자들처럼, 마치 평생 안 죽을 것처럼 그냥 정신없이 살아가는 건, 우리가 한번 깊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그런 문제라는 것이죠.
지금 코로나19 때문에 장례소식이 많이 들립니다. 졸지에 뭐 황망하게 장례식을 치른 사람들 소식도 들리고 어떻게 장례 절차를 제대로 밟기도 어려운 그런 급작스런 죽음들이 있잖아요.
그냥 덜렁 유골함 하나만 받고, 그냥 일방적으로 장례종결 통보를 받는 이런 죽음들이 있단 말이에요.
이런 시대를 우리가 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죽어가야 할 것인가? 이걸 준비해야 하는게, 현실적인 문제란 말이죠.
△사실 삼손같은 사람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어요. 그는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 눈 밖에 난 삶을 여러번 살았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블레셋에게 생포되어 가지고 감옥에 갇히고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떤 죽음을 죽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삿16: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그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죽을지를 이렇게 결정을 했어요. 그는 비록 살아있는 동안 사사로서 삶을 충분히 제대로 못 살았지만 지금 눈이 뽑히고 기껏 맷돌이나 돌리면서 블레셋의 조롱거리가 되고 그들의 신전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이런 모습이 되고 말았지만
그는 '사사로서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맞는 죽음은 어떤 죽음 이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마지막에 그는 이런 죽음을 택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삼손이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도, 죽을 때 블레셋 사람들을 더 많이 죽였다'고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에 합당한 죽음을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또한 그런 죽음을 죽기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왜 이렇게 열심히 삽니까? 왜 이렇게 잘 살려고 합니까? 잘 죽기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아무리 열심히, 잘 살아도.. 잘 못 죽으면 .. 그의 인생 전체는 실패로 결론 나는 것입니다.
병원 왜 다닙니까? 왜 헬스클럽에 다녀요? 잘 죽기 위해서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우리가 그냥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었다.. 그게 진정 잘 죽는 게 아니란 말이죠.
크리스천으로서 내가 잘 죽는다는 것은 뭐냐면, 우리의 삶도, 우리의 죽음도 '하나님을 위한 것, 내 소명과 사명을 다 마치는 것' 그게 잘 죽는 것입니다.
그게 되지 않으면 결코 '나는/그는 잘 살았다, 잘 죽었다'는 말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사는 동안에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사는 길이요,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죽는 죽음이란 말이에요.
*소명 : 하나님의 부르심, 직업이나 은사적 부르심 calling, vocation 사명 : 그 소명에 따라 행하는 일, 사역 mission 그러므로 소명을 받아서, 사명을 감당하는 거죠.
어쨌든 사울은 끝까지 하나님을 등진 결과, 본인만 죽은 게 아니라 온통 그냥 떼죽음을 당하게 한, 처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 길보아 산 전투에서 패한 결과가 이렇게 나옵니다.
:7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골짜기 저쪽'이란, 이스라엘 건너편 쪽인데,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사람들이에요.
블레셋이 전략을 어떻게 짰는가 하면, '골짜기 저쪽'을 차단하는 바람에 즉 북쪽에 있는 지파들이 남쪽에 있는 지파들과 연합할 수 없도록 하는 바람에
그들은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고 방관자적으로 있다가 전세가 기울어 패색이 짙어지자.. 도망가기 시작을 했어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말압니다.
그 다음에 '요단 건너쪽'에 있는 사람들은 므낫세 반 지파가 그쪽에 있었는데 이들도 물론 전쟁에 참전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사울이 패전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들도 피란을 떠나기 시작해 가지고 남쪽으로 루우벤 지파와 갓지파가 있는 쪽으로 이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남유다 부근만 제외하고는 나머지 많은 영토들을 잃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에 사울 왕이 왜 세워졌냐는 말이에요. 왜 그들은 왕을 달라고 그렇게 떼를 썼어요?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해서죠.
우리가 왕이 있어야 주변 다른 국가들처럼 우리의 재산이나 생명이나 집이나 땅이 잘 지켜질 것이라고 왕을 요구했는데 결과는 뭡니까?
지금까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 가장 많은 땅을 잃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는 결과를 맞고 말았단 말이에요.
그들이 사사제도를 싫어하고, 왕 제도를 요구해서 왕 제도를 실습해본 결과 초대왕 사울이 낳은 결과는 뭐냐 하면,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결과를, 하나님께서 말 안 해주고, 안 가르쳐 줬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가르쳐 주신 얘기예요. 하나님께서 다 가르쳐 주셨어요.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그런 날이 올 건데, 그때는 너희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이거 다 얘기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역대상 기록에 보면, 사울 왕의 죽음의 원인을 다시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분석해서 기록을 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그가 마지막 블레셋 과의 전쟁에서 활에 맞아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역대상 기록에 따르면
대상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여기서 사울의 죽음 원인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죠. 1)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일차 경고, 이차 경고 때 돌이켰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죽게 하시지 않죠.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 뜻을 관철하고자 했던 사람이란 말이에요.
우리도 만약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내 생각이 앞서고 성경 말씀보다도, 내 계획이나 뜻이 늘 앞선다면 우리가 어떤 죽음을 맞게 될 건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좇아도 죽습니다. 우리는 그런 죽음을 순교라고 말해요. 그러나 사울의 이런 죽음은 '죄값'이라 말한단 말이에요.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죽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죄값을 치른 것입니다. 죽기는 다 죽는데,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두가지 길 밖에 없단 말이에요. -순교의 길이 될 것이냐,
-자기 죄값으로 죽을 것이냐?
순교라고 말해서 여러분 겁먹지 마세요. 목이 잘리고 무슨 고문을 받다가 죽는 것만 순교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매일 매일 살다가 죽으면, 그것도 순교란 말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았다면 종교적인 의식이나 절차를 내가 다 행했지만 그 뜻과 무관하게 살았다면, 그는 죄값을 치르는 죽음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사울이 죽은 이유 두 번째는 그가 신접한 여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거에요. 대상10:13
이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예요. '신접한 여인에게 가지말아라'
레20:6~7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러분 이런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말이죠. 정말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끊어버리겠다고 말씀을 하세요. 여러분 '끊는다'는 것은 죽는 거 아니에요. 이런 사람들을 좇아다니니까!
신18:10~12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여러분 '길흉을 말하는 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미래의 길흉을 알고 싶습니까? 내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인가, 안 좋은 일이 있을 것인가, 그걸 알고 싶습니까? 관심을 아예 끊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안 좋은 일이란 없습니다. 안 좋아 보이는 일은 있겠죠. 세상에 비극이라고 말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안 좋은 일이 없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섭리하시니까요!
그러니까 좋은 일이 있을 것인가, 안 좋은 일이 있을 것인가? 아예 관심을 끊으시기 바랍니다. 일일운세, 그런 걸 쳐다보지도 마세요. 재미로라도 보지 마세요.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거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에요. 백성 중에 끊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일이에요. 오늘 이 시대가 이런 걸 너무 가볍게 생각해요. 재미 삼아 해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공중파에서 이런 것을 얼마나 많이 만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걸 이스라엘 왕이 했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울도 무당들을 쫓아냈던 적이 있었어요. 삼상28:9 그러나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하는 게 끝입니까? 돌로 쳐 죽이라고 했어요.
사울은 사실은 반만 순종했어요. 뿌리를 뽑으라고 하셨는데, 가지만 자른 거죠. 그랬다가 사울은 나중에 자기가 무당을 찾아가는 그런 꼴을 보인단 말이에요. 이게 그가 죽음을 맞은 두 번째 이유이죠.
3) 세 번째는, 그는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니 왜 안 물었어요? 본인이 뭐 어마어마하게 억울할 거예요. '내가 하나님한테 안 물었습니까?'
삼상28장에 보면, 그가 어떻게 물었는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상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하도 물었는데, 답을 얻지 못해서 신접한 자를 찾아갔다는 거예요. 28:7
사울 자기는 물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안물었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힙니까? 왜 그럴까요?
그 답이 이사야 59:1~2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이 안 듣는 질문을 물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답답한 일이 일어났다고 물어봐야, 답을 얻을 까닭이 없지요.
저와 여러분들이 기록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어리석은 삶입니다. 무슨 뜻이 그렇게 궁금해요?
여기 성경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이 다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 내 뜻을 묻는 이유가 뭐에요? 우리의 길흉 때문에 그런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자꾸 묻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이 당시에는 성경이 없으니까, 기록된 말씀이 없으니까 그들은 물었어요. 하나님의 꿈으로 환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림과 둠밈으로 얘기해 주셨어요. 또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여호와께 물었지만, 이렇게 꿈도 안 꿔지고, 우림과 둠밈도 대답이 없고 (옛날에 우림과 둠밈도 뭐 빛깔이 좀 변해서 그 뜻을 분별했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사무엘이 죽고나서 무슨 선지자도 없어요. 그러니 사울은 '내가 확인할 길이 없어서 무당에게로 나는 갔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네가 안 물어서 .. 죄값으로 죽었다' 는데 사울은 '내가 안 물었습니까? 내가 얼마나 많이 물었습니까? 그런데 대답이 없었잖아요!' 여러분 이 간격을 조심하셔야 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가 물었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그럼 뭐에요? 이제 하나님이 이사야서를 통해 주신 답은 뭡니까? 우리 죄가 가리워져서, 이미 우리한테는 답할 의향이 없으신거에요.
삼상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할 때 하나님을 존중하는 대가로, 존중하는 우리 태도를 보고 대답을 하시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평소에 경멸하는데, 경멸하는 태도를 보고 대답을 하시겠냐는 말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평소에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고 살아가느냐? 그 태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갈림길 아닙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존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얼마나 우리가 애를 쓰고 수고하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하루 종일 묵상되는 말씀이 있습니까? 아니면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하나님의 말씀만 종일 생각하다가 기적을 경험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는 여러분들이 일이 안 될 수록 일을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이 안 되면 안 될수록, 붙든 말씀,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하루 종일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불필요한 생각들이 다 사라지면서, 생각에 가닥이 잡히고, 생각의 방향이 선명해진단 말이에요.
욕심이 죽 끓듯 끓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물은든, 무슨 대답이 들리겠어요?
△다윗은 하나님이 어떨때, 어떻게 응답해주셨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에요.
시18:25~26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평소에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저렇게 다윗이 정리를 해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사특해가지고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스르는(꾀에는 꾀로 응답하심) 것만 보게 된단 말이에요.
저는 정말 이 시대가 '하나님이 고개를 돌리셨나?' 그런 두려움이 가끔 있어요. 이렇게 우리가 정말 살아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길을 자꾸 고집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 기도를 들으시겠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저와 여러분들이 단 한 절 말씀이라도 내 생애 이루어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빈껍데기입니다. 죽을 때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뭐 얼마나 가지고 갈 게 있습니까?
'그저 단 한 절 말씀이라도 내 인생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 그것만 영원히 가지고 갈 수 있는 거예요.
참 안타깝게도 사울은 모두 다, 그냥 다 끌고 죽어 죽으러간 거나 마찬가지죠. 무슨 집단 자살하러 간 거나 마찬가지예요. 한 지도자의 부당한 결정이나 분별력은 이런 결과를 초래한단 말이에요.
◑8~10절,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당시 전쟁의 관행입니다. 밤에 싸우고 나면 누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날이 밝으면 전부 와서 이제 전사자들, 적군들의 시체 가운데 그들의 소유물을 수거하는 작업이죠.
갑옷을 벗기기도 하고, 뭐 귀중품이 있나 살펴보기도 하고 그래서 누가 죽었는지도 신원확인이 되는 거에요.
근데 길보아 산 전장터에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죽음이 확인이 됐어요. 그랬더니 우선 사울의 목을 자르고, 그 목과 갑옷을 벗겨가지고
일단 블레셋의 주요 도시들에 퍼레이드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갑옷은 아스다롯 신당으로 가져가죠.
당신은 전쟁의 승리를, 신이 승리로 자축할 때니까,
그와 그 세 아들과 시체는 벧산 성벽에, 마치 뭐 옷걸이에 옷을 걸어 놓듯이
시신을 성벽에 걸어놓은 거예요. 참 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죠.
◑그런데 11~13절까지가 사울의 죽음에 관한 각주처럼 달려있는 말씀이에요.
:11~13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이스라엘의 많은 지역 가운데서 왜 하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었을까요?
앞서 11장에 보면, 그 당시에 암몸의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북동쪽 국경)를 침략하면서
'전부 항복해라, 안 하면 너희 눈을 다 빼버리겠다' 이렇게 위협하며 나왔어요.
그래서 이제 막 당황해가지고, 일주일만 말미를 달라고 하고,
그러고 가서 이제 금방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사울에게 부탁했더니
사울이 그 당시에 이제 소 12 토막을 내서 12지파에게 보내고, 30만 명이 동원이 돼요.
엄청난 병력이 동원이 된 겁니다. 그야말로 사울은 암몬을 순식간에 제압합니다.
그래서 길르앗 야베스가 구원을 받은 것이죠.
아니 이스라엘 왕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았다는 것입니다.
벧산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20킬로 이상 떨어진 굉장히 지형이 험준한 곳이에요.
그러니까 건장한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서 적군을 피해서 아주 위험을 감수하고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사를 잘 지내주었다는 것이죠.
그냥 한 줄 붙어있는 말이지만,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이라면 누구나 적군이 침략하면 방어해 줘야죠.
그런데 어떤 주민들도 그 감사를 표시하지 않았는데,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그 암몬 나하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억하고
본인들이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으면, 그 정도 책임지셔야죠. 뭐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구원받은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당연한 일이 되어서, 더 이상 구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40년이 지났든, 사백 년이 지났든, 2천년이 지났든
그 일을 오늘 현재에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감사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