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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장 1~4 기다리지 못해 망한 가정

LNCK 2022. 1. 21. 07:55

 

◈기다리지 못해 망한 가정            룻1:1~4        2013.12.02.설교녹취, 정리

 

C S 루이스는 말했죠. '기독교를 한 단어로 정의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은혜이다!'

참 맞는 말 같습니다.    

기독교를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은혜'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가장 잘 설명한 책이 사실은 <룻기> 입니다. 

그래서 <룻기>에는 한 멸망한 집안에 
어떻게 다시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는가를
소중히 담은 원리가 감춰져 있어요. 


◑룻기는 사사기 시작 시기에 일어났던 사건

우선 <룻기>의 시대적 배경을 좀 볼까요?

룻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룻기>의 배경은 사사기 시대입니다. 동시대입니다.
그래서 <룻기> 자체는 굉장히 평화롭고, 또 들녘이 나오는 등 목가적인 배경이지만
그 배경에 깔고 있는 분위기는,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음산한 배경음악 같아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1:1

그리고 사사기, 왜 그런 시대를 도래케 했는가요?
출23장에 이런 기록이 있어요.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안에 모든 원주민들을 차례대로 다 쫓아내라'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부탁했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들어간 이후에 사사기는 
1장부터 무슨 얘기가 나오냐 하면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정직하게 얘기하면, 쫓아내지 못한 게 아니라, 쫓아내지 않았던 겁니다. 

그 가나안 땅에 타락한 문화가 이스라엘에게는 매력이 있고 좋았어요. 
그래서 사실은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았던 겁니다. 

그 결과가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의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룻기>는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출발합니다. 

▲마1:5~6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여기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만났던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데, 
그럼 룻의 시어머니가 라합이란 말입니다. 

그럼, 룻기의 시대적 배경이, 사사기의 말기가 아니라 
성경 순서상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나오므로, 사사기 말기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사기 초기 라는 뜻입니다.

그럼 흉년은 사사기 초기에 왔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얼마 안 있어 흉년이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가정은 그 흉년을 버티지 못했어요. 견디지 못했어요.
여호와께 묻지 않았어요. 그냥 피하고, 벗어나고만 싶었습니다.

룻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여러분 이 가나안 땅은, 오랜 세월 하나님이 히브리 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을 통해, 그들을 인도해서 들여놓은 땅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땅이고, 하나님이 인도하신 땅인데 
그 땅에 흉년이 들어요.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명하여 가라하신 뱃길에도 폭풍우가 있었어요. 
심지어는 예수님이 타고 주무시며 가던 배에도 광풍이 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병에 안 걸리고, 무병장수 하는 건 아니에요. 
인생들이 겪는 모든 즐거움, 눈물, 고통, 수많은 사연들을 성도도 똑같이 겪습니다. 

문제는 흉년의 문제가 아니라 
어차피 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 타락된 세상에서 
창조물이 다 피폐해지고 생명을 잃어버리고 타락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그러진 모습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그래서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흉년이 있어요. 
문제는 흉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흉년을 대처하는 성도이 자세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근데 오늘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이 엘리멜렉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조금 더 정확히 번역을 하면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다'라는 
상당히 그럴 듯하고 괜찮은 이름이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어디를 찾아봐도, 어디를 뒤져봐도 
이 흉년 앞에, 엘리멜렉은 일절 하나님 앞에 묻지 않고 
'모압의 드림'을 꿈꾸고 모압 땅으로 넘어갑니다. (아메리칸 드림에 빗대어)

대상10: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사울이 버림 받았던, 
그리고 그 집안의 촛대가 다윗의 집안으로 넘어갔던 이면에는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이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새해에는 하나님께 많이 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구하는 자, 하나님을 두드리는 자에게 만나 주십니다.

그런데 사울도 그랬고, 성경 전체 속에서 또 우리 인생 속에 
항상 멸망하는 자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인생의 결론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는 인생의 태도는, 뒤집어 보면
'내 뜻대로 살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됩니다. 

그래서 가장 겸손한 삶의 태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의 삶이에요. 

기도 없이 사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에요. 교만한 사람이에요. 
그 앞 길이 불확실한 사람이에요. 믿습니까?

그래서 늘 기도의 자리를 목말라하시고,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시고 
여호와께 묻는 인생의 훈련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자꾸 물어봐야 돼요. 캄캄해도 답답해도 암울해도 물어봐야 돼요. 
'하나님 이건 뭡니까? 이건 왜 이런 거죠?' 
말이 안 되는 일이 있어도, 물어봐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대꾸해주시고 반응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했습니다. 시73:28

자 엘리멕렉 가정이 이렇게 묻지 않고 떠난 길, 그 땅이 모압입니다. 
여러분, 흉년이 들자, 하나님께 묻지 않고 미련 없이 모압 땅으로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입니다. 
살다보면, 가끔 우리에게도 피하고 싶은 인생의 문제, 고난, 어려움이 극심한 일들이 닥쳐요.
그때 우리는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해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엘리멜렉에게는 그게 없었다는 거죠. 순간 고난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요.
그래서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일가족이 화를 당하게 된 거죠.

인간이 가장 못 하는 것 중 하나는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을수록 못 기다립니다.

이번에 신년도 신임 교역자들을 새로 모집하는데, 4백여통의 이력서가 들어왔어요.
거기서 70명만 골라서 면접을 보고서,
최종적으로 몇 분만 새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여러 교회에 복수 지원을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서류를 내고, 다른 교회에도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그 분께 전화해서, 이제 청빙이 결정되었다고 하니까
그 분은 'OO교회에 청빙이 안 될 줄 알아서, 다른 교회에 가기로 결정되었다'고 하더라고요.
하루 전날 그게 결정된 것입니다.

하루만 더 기다렸으면 되었을 터인데, 하루 차이로 다른 교회로 가게 되었지요.
물론 그럴 수 있죠. 그 교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고, 그 교회에서 더 잘 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우리 교회에 이력서를 낼 때, 다 기도하고 냈을 것 아닙니까.
목회자가 사역지를 결정하는데, 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다리지 못하여" 그 분을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깊은 분은 기도하고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분은, 고난이 오면, 기도할 줄도 모르고, 기다릴 줄도 몰라요.
엘리멜렉이 기다릴줄 몰랐다는 거죠. 엘리멜렉은 여기서부터 실패했어요.
그냥 무슨 고난이 닥치면, 인간적으로 자기 살길을 순식간에 찾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싸움입니다.
잘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림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열망을 가지고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여기서 '거류'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잠깐 머문다는 말이 아니고
뿌리를 내려서 살겠다는 의지를 담은 말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뿌리를 내리겠다는 마음은 아니었을 겁니다.
잠시 이 흉년만 피하자.. 그런 마음으로 고민없이 가볍게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롯도 보면, 처음부터 소돔 성에 들어가서 살지 않았어요.
먼저는 그 근처에 장막을 치고 살았어요.
처음에는 들어가서 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는 왜 소돔 성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을까요?
점점 조금씩 한 발짝씩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소돔 성과 함께 멸망을 당했죠. 간신히 목숨은 건졌습니다만

1:4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처음엔 잠시 다녀오자는 생각으로 내려갔는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기간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됩니다. 못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환란을 엄청 당하고는, 돌아온 탕자처럼 .. 결국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생이 호락호락 내 뜻대로 움직여 지는게 아니에요.
한 번 발목이 잡히면, 거기서 쉽게 못 빠져나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아니면, 어둠의 권세 잡은 자
이 둘 중에 하나가 나를 붙잡게 되어 있어요. 한 번 잡히면 쉽게 발을 못 뺍니다.
끝장 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해요. 엘리멜렉 가정이 그랬다는 거죠.

눅15:장의 탕자도 처음에 자기 몫 챙겨서 떠날 때는 룰루랄라 기가 막혔을 거예요.
이방 땅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갔다가 언제 돌아올 마음이 일어나죠?
'주렸을' 때가 아닙니다. '주려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제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결국 이 가족은 10년 동안 돌아오지 못하고, 1:4
모압 땅에 머물며 갖은 수난과 폭풍우를 겪게 됩니다.

꿈을 좇아갔지만, 거기엔 꿈이 없었어요.
더 몰락해 가는 길밖에는 남은 게 없었어요.
결국 가장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습니다. 

말론(병들다는 뜻) 기룐(끝장이 나다는 뜻)이 죽습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사건이 지난 다음에 쓰여집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들은, 본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후대에 지어서 붙인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말론과 기룐이 그렇게 인생을 허망하게 마감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죠.

한 집안에 남자 셋이 죽고, 여자 셋이 남습니다.
이 집은 폭삭 망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떠난 결과가 이렇게 비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 있어요.
하나님은 진정한 은혜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먼저 다 허물어 버리십니다.

우리 상식에는 굉장히 잔인하신 것 같지만
이게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입니다.
무너져야 새 집을 짓기 때문입니다. 있는 집 위에다 새 집을 지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들이 붙들고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은 다 허물어 버리십니다.

 

그때 고향 땅에 하나님이 풍년을 주셨다는 소식을 흘러흘러 듣습니다.

나오미는 결단을 하고, 고향 땅 베들레헴(떡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돌아가 보니 동네사람들이 한 눈에 알아봅니다.

나오미란 이름은,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나오미가 듣고, 자조적인 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시오!'

'쓰라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한 번도 나오미는 마라로 불려진 적이 없습니다.

계속 나오미로 나옵니다.

 

우리는 자신을 '마라'로 여길 수 있어요.

'나는 스펙도 없고, 집안도 별로고, 흙수저이고...'

 

여러분, 그 세상 끈이 끊어져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튼튼한 은혜의 줄에 붙들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마라'로 여겼던 나오미를, 결코 '마라'로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나중에 나오미의 결말을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