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제 과부 두 사람,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하게 됐습니다.
어머니 나오미는 이제 나이가 들고 노동력이 없어요. 결국 이방에서 온 이 가련한 젊은 과부가 된 아낙네 룻이 이 단촐한 가족을 부양해야 되는 그런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때 뜬금없이 룻이 어머님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죠.
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보아스 라는 말은, '유력한 자, 부호'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부호는 땅을 많이 가진 자라는 뜻이 됩니다.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우리는 여기서 이 룻의 단정하고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인간에 대한 성실한 예우를 잃지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막 대할 수도 있잖아요. '내가 이 집구석에 시집 와 가지고 이게 내 팔자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 늙은 과부 시모까지 책임져야 되는지... 아~ 한심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룻은 시어머니의 허락을 정중하게 구합니다.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성숙도는 '인간에 대한 태도'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특별히 쉽게 할 수 있는 사람, 막 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존엄만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로서 / 대상으로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 이전에 저는 그의 신앙성숙도 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일터에서, 또는 일상에서 항상 인간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버리지 않는 성숙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2:2
룻은 인생을 사는 모든 경영에 큰 기초가 '은혜' 이어야 함을 알고 있었어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신앙인의 본질이어야 됩니다.
팔복에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그랬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은혜 없이는 못 삽니다' 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항상 여러분들이 은혜에 목말라 있어야 돼요. 은혜에 대해서 늘 배고파 해야 돼요.
별 시시콜콜한 사소한 영역에도 우리는 은혜를 기억해야 돼요.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은혜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허기, 이게 룻에게 있었어요.
이 은혜라는 통로, 혹은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얻고, 누리고, 주시는 모든 것이 자기 작용이 될 수가 있어요. 그것은 한계가 있고,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 같아요. 거품과 같아요.
그래서 똑같은 물질을 가지고 살아도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물질이냐, 내가 내 힘으로 번 물질이냐 .. 이거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룻이 기막힌 초라한 밑바닥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내가 은혜를 입으면..' 그 기대를 가지고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가요.
▲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은 지금 추수하는 사람들이 일하다가 흘린 것을 좇아다니면서 줍고 있습니다. 그 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를 거예요.
'하나님이 낮추시면, 내가 낮아지겠다. 주리면 죽겠다'는 마음으로 룻은 낮아진 것입니다. 이게 정말 인간적인 자존심, 체면, 다 불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은혜가 뭐냐? 기도를 정의할 때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내미는 거지의 손과 같다'
여러분, 은혜의 반대말은 자존심입니다. 룻은 그 밭에 나가서 열심히, 추수하는 자들이 미쳐 베지 않은 것, 또는 운반하다 흘린 것 그 남은 것들을 주우러 다닙니다.
이때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가 소유한 밭에 이르렀어요. 본문에 우연이라고 했는데, 정말 우연일까요? :2 물론 우연입니다. 그런데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누구를 통해 흐르게 하시냐면, 이웃과 사람과 만남을 통해 흘러오게 하세요.
그래서 여러분, 어린 소자와의 만남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어요.
하나님은 늘 우연을 가장하시죠. 그런데 우연이란 없습니다. 사람은 우연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섭리입니다.
자 그런데 이 '우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4절에 보니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룻이 드디어 보아스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보아스가 여기까지 왜 왔을까요? 그저 산책 나왔을까요? '왠지 오늘은 내가 그 밭에 가서 일꾼들을 격려해야 되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왔을 거예요.
그도 이 모압 여인 룻의 존재를 모른채 우연히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침"의 섭리, 하나님의 확실한 타이밍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타이밍은 오묘해요. 기가 막혀요. 우리가 급한 것뿐이지.. 하나님은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고 정확하십니다. 그 주권을 믿으셔야 돼요.
여러분 중에 뭔가 기도의 제목이 아직도 급한 게 있고, 답답한 게 있습니까? 이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타이밍을 믿습니다!' 아버지의 타이밍을 믿으세요. 그것만큼 정확한 것은 없어요.
바둑 두는 사람들은 구단쯤 되면 오십 수를 내다본다고 그래요. 바둑 돌 하나를 놓는데, 오십수를 내다보면서 둔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말이 사실인게, 나중에 복기 하는 것을 보면, 그 수백 개의 바둑 둔 순서를 그대로 복기를 해요. 다 머리에 계산하고 두었다는 거죠.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인생의ㅣ 수를 몇 수쯤 내다보실 것 같습니까? 뭘 생각을 하세요? 처음과 끝을 완전히 아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우리 신앙의 싸움은, 내가 얼마나 치성과 정성을 드렸냐의 싸움이 아니고 그분을 알아가는 싸움이에요.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다. 그분은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계획대로 반드시 목적지까지 끌고 갈 것이다.' 그 분의 전지와 전능을 믿는 거예요.
얼마나 절묘합니까? 우연 같지만 마침 보아스가 그 밭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죠.
드디어 보아스의 눈에, 하나님의 레이더에 은혜를 주기 위해서 보아스를 통해 이 룻이 포착이 됩니다.
2:5~8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뜻밖에 호의가 베풀어 집니다. 보아스는 한 눈에 이 소녀가 선한 소녀로 눈에 들어왔어요. 이것도 저는 인간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정서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 가련한 무학 소녀가 얼마나 초라해 보였겠어요? 그 일꾼들 뒤에 가서 흘리는 거나 줍는 그 소녀가 뭐 눈에 그렇게 이쁜 모습으로 비춰졌겠어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신기한 걸 생각할 수 있어야 돼요.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은데 신기한게 하나 있어요. 뭘까요?
이 소녀, 이 젊은 과부는 어떻게 이삭 줍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은혜를 목말라 하게 되었을까요? 2:2
그런 말씀을 알고 있었어요. 여러분 이 이싹 줍는 것은 율법에 규정된 항목입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고아, 과부, 이방인, 거지들 이런 사람들이 최소한 굶어죽지 않도록 배려한 하나님의 율법이었어요. 룻은 그 율법을 알고 있었던 여자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할 수 있었어요. 그 은혜를 기대할 수 있었어요.
오늘 본문은 보아스와 룻의 첫 만남과 이어지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서 밭에 나왔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열심히 이삭을 줍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보아스가 밭에 와서 룻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 두 사람의 드라마 같은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7절입니다.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룻은 은혜에 목말랐고 은혜를 구했지만 두 팔 널어뜨리고, 입벌리고 은혜 주십사고 하늘을 쳐다만 보고 있지 않았어요. 성실했어요. 부지런했어요. 열심이 일했어요.
우리가 은혜를 착각하면, 두 팔 늘어뜨리고 누워서 하들에서 떡이 떨어지도록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되는 게 은혜인줄 알아요. 아닙니다.
극단적인 성도들 가운데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애들은 지금 밥을 굶고 있고, 학교에 가져갈 돈이 밀려있는데 와이프가 짜증이 나서 '당신 어떻게 좀 해봐! 가장이 왜 이래?'
그러면 남편은 '여편네가 믿음도 없이.. 하나님이 다 하시지..' 이런 사람들을 가끔 보면, 참 등짝이라도 한 번 두드려 주고 싶습니다. 그건 은혜가 아니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성실해야 돼요.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성실한 자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부지런한 자에게 은혜가 만나지는 거예요. 그래서 일등보다 더 중요한게 개근이에요.
우리나라는 개근상을 우습게 알아요. '이 분은 뭐 대학을 우수한 출석(개근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성실해야 되고 열심을 내야 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일관된 균형이에요.
우리는 하늘의 주권을 믿어요. 그 하늘의 주권을 믿는다면, 우리는 땅의 사명을 감당해야 돼요. 그것이 조화가 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죠.
▲8~9절,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8~9).
보아스는 룻을 향해 “내 딸아”라고 부르며 그녀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내 딸아”라는 말은 나이 많은 어른이 젊은 사람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데,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부를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2:22, 3:1, 3:16
생각해 보십시오. 밭주인이나 일꾼들에게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귀찮은 존재일 것입니다.
사실 환영하고 싶은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불렀고,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를 격려합니다.
그녀를 배려할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보아스가 어떤 은혜를 베풀었을까요?
△8절과 9절에 나오는 보아스의 말을 통해 네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어느 날 여러분 집에 갑자기 가난한 사람이 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다른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으로만 오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밥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밭에서만 주워도 충분한 양식을 얻도록 할 테니,
다른 밭으로 가지 말 것을, 자신의 밭에서 떠나지 말 것을 말합니다.
보아스는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밭을 가지고 있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보아스는 룻에게 그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합니다.
룻이 낯선 곳에서 혼자 이삭을 줍다 보면 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의 여자 일꾼들과 함께 있으면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보아스가 “함께 있으라”고 말한 이 단어는
룻이 시어머니와 절대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할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룻은 여자 일꾼들과 함께함으로써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일하는 외로움도 달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보아스는 소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명령했음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건드린다는 말은 ‘추근거리다, 괴롭히다’라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보호하고 지켜주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힘이 없고 가난한 이방 여자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런 룻을 생각함으로 보아스는 미리 자신의 사람들을 단속시킨 것입니다.
보아스의 보살핌이 얼마나 자상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넷째, 보아스는 룻에게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당연히 갈증이 나서 물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이 귀한 곳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배려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은혜로 이 밭, 저 밭을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일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밭을 찾아다니며, 주인의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이런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룻기를 읽어가면서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실제로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10절,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은 룻은 어떻게 했을까요?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10).
이러한 보아스의 친절에 대해서 룻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룻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방 여인인데, 이런 자신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에이, 저 사람 재산이 좀 되는 거 같은데.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네’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룻은 엎드리며 보아스가 베푼 은혜에 감사합니다.
▲11~12절, 그런 룻에게 보아스가 다시 말합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11-12).
보아스는 룻이 남편이 죽은 후에 시어머니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리고 홀로된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이스라엘까지 온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며 위로합니다. 그녀가 시어머니를 보필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온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사실 보아스는 룻을 처음 만났지만, 이미 룻의 소식은 베들레헴 동네에 두루 알려졌기 때문에
룻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룻이 늙은 시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베들레헴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보아스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녀를 만나면 격려하고 축복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금, 그녀가 자기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이 기회에 그녀를 격려하고 베들레헴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기로 한 것입니다.
룻이 밭에 나오기 전에 시어머니에게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이라고 소망했던 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우연’을 사용하여 하신 일입니다.
보아스는 더 나아가 룻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하나님께서 룻이 행한 일에 따라 그녀에게 보상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축복하면서, 모압 사람인 그녀가 모압의 신 그모스가 아니라
전능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있다는 사실도 상기시켜 줍니다.
여기 “날개”란 말은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룻은 힘없고 연약한 ‘아기 새’와 같지만,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어미 새’가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왔고, 이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녀를 덮어줄 것입니다.
▲13절, 룻은 이러한 보아스의 축복과 격려에 매우 감격합니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13).
룻은 겸손한 태도로 다시 보아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감사하는데,
하나는 보아스가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는 점에 감사합니다.
남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스라엘을 찾은 룻에게
보아스가 베푼 은혜는 참으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보아스가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에 감사합니다.
보아스는 그녀의 형편을 잘 헤아리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말로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룻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가운데 있습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정착해야 하는 룻에게
보아스가 베푼 은혜와 배려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축복된 자리에 들어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14절, 그런데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14).
이미 룻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었던 보아스가 또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은혜 위에, 또 은혜를 얹어주는 것입니다.
관대한 보아스가 또 어떤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까?
그녀를 초청해서 음식을 주고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던 룻은 무지하게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마도 룻은 집에서 먹을 것을 챙겨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이제 이삭줍기를 시작한 룻입니다.
혹시 챙겨왔다 하더라도 그녀가 무엇을 얼마나 준비했겠습니까?
이런 룻에게 보아스는 일꾼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
이리 와서 떡을 먹으라고 권하며, 그냥 떡만이 아니라 소스에 찍어 먹으라고 합니다.
보아스는 정말 센스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볶은 곡식을 주는데,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넉넉히 줍니다.
볶은 곡식을 그냥 푸욱 퍼준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 덕분에 정말 배부르게 음식을 먹습니다. 배부르게 음식을 먹는 일,
룻이 이와 같은 일을 얼마 만에 경험했을까요?
또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보아스는 이 일을 일꾼들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가 가장 낮은 이방인 과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보아스가 자신의 일꾼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부터
그의 인격이 어떠한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처럼 탁월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15~16절, 룻이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이삭을 주우러 갈 때,
보아스는 자신의 남자 일꾼들에게 당부합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15-16).
보아스는 룻이 땅에 떨어진 이삭뿐만 아니라 곡식 단 사이에서도 주울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은 당시 밭주인들이 일반적으로 했던 일과는 반대되는 일입니다.
밭주인들은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단 사이에 다니는 것을 금했습니다.
왜냐면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욕심을 부려서 주인 몰래 곡식 단에서 이삭을 뽑을까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보통 세워둔 곡식 단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일부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버리라고 합니다.
이 같은 호의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손해를 보면서까지 룻을 배려하며 돕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 모든 일을 일꾼들에게 당부하며 거듭해서 말합니다.
“책망하지 말라, 꾸짖지 말라” 보아스는 진심으로 룻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천한 처지에 있는 가련한 이방 여인 룻을
너그럽게 대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거나, 여자들이거나, 이방인들이다 보니
추수하는 일꾼들도 이들을 무시하고 책망하기 일쑤였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아줌마 같으면 좀 책망을 받더라도,
‘에이 다같이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너무 그러지 말자고’ 가볍게 받아 넘기겠지만,
의지할 곳 없는 이방 여인 룻은 다를 것입니다.
보아스의 자상한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보아스는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이타적인, 품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보아스는 율법의 규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보아스의 사람 됨됨이가 자연스럽게 그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 보아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떠한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실천하는 헤세드, 그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렇게 룻이 하루 동안 주운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지금으로 치면 대략 20kg 정도 되는 양입니다.
룻은 정말 풍성한 은혜를, 넉넉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룻의 마음은 보아스로 인해 부요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가운데 룻이 나오미에게 행한 헤세드를 기억하시고,
보아스를 통해 다시 룻에게 헤세드로 갚아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보아스와 룻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 만남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리고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또 어떻게 전개되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이야기는 다음 3장에 계속됩니다.
◑평소에 ‘헤세드의 은혜’를 붙들고 살았던 나오미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를 만났고, 그의 인자함으로
그의 밭에서 추수 후에 떨어진 이삭을 줍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인도하심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축복하며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헤세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2:20
여기서 생존한 자는.. 나오미와 룻
사망한 자는.. 나오미 집안에 죽은 남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의 기업이 회복될 것을 의미하죠.
‘그’는 일차적으로 보아스입니다.
그렇지만 보아스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룻을 기억하시고,
또한 자기 가문이 지속되도록 보아스를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들의 배고픔을 도울 수 있는 자 뿐 아니라,
이제 그 집의 기업을 무를(구속할) 자 중에 한 사람인 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었다고 그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귀한 믿음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비극들로 인해서 이름을 마라(뜻=쓰다)라고 바꿀 만큼,
그 속에 슬픔과 아픔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은혜(헤세드)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①그래서 1:8절에 자부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면서도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습니다.
여기서 선대(hesed)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이란 말입니다.
변함없는 약속의 사랑, 자신의 피를 흘려서라도 지키는 약속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엄청난 슬픔 중에 나오미는 하나님의 헤세드 hesed 를 기억하고
그 신실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자부들를 축복하였습니다.
②또한 본문 2:20 에 나오는 '은혜'라는 단어도 역시 hesed 입니다.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hesed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 2:20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없는 가운데
그녀가 끝내 그 분의 선하신 계획을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그의 hesed 계획을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나오미처럼, 아프고, 꼬이는 삶 속에서도 ‘헤세드’를 붙잡으십시오.
요셉의 삶은 얼마나 꼬였었나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신다고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디테일한 삶 속에 하나님이 헤세드로 함께 하심이
바로 요셉을 요셉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날개 아래로 보호하시는 하나님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변함없는 언약적 사랑)가 나타나는데,
보아스가, 자기 밭에 떨어진 보리를 줍기 위해 온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2:12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마23:3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12
이 호칭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언약을 맺은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보아스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율법을 통해 자기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이 표현은 출 19:4과 신 32:11의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즉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가 마치 어미 독수리가 그 넓고 강한 날개로 새끼를 안전하게 인도하고 보호해 주는 것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아스가 룻에게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룻이 언약의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그녀가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