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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22:11 내가 사랑하는 것을 닮아간다

LNCK 2022. 1. 23. 07:29

◈내가 사랑하는 것을 닮아간다           계22:11, 약4:8       2021/12/26녹취, 정리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계22:11

제게 많은 분들이 상담을 요청하실 때, 기도에 대해서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하면 오래동안 할 수 있습니까?' 
또 그리고 '오랜 기간동안 어떻게 빼놓지 않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또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겁니까? 
'이런 느낌이 들면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저런 음성이 들려오면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참 이런 질문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기도를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음성을 듣고 싶어하는 쪽에 
많은 분들이 치중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채널은 여러 가지거든요.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깨달음이 올 때도 있고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혹은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고 
하나님의 메세지는 알 수 있는 법인데 

유독 이렇게 기도하다가, 내게 스쳐지나가는 생각이나, 어떤 이미지나 
내 내면의 소리.. 이런 것에만 의존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 같은 경우는 
어느 교회에서 예언을 가르친다고 하면, 거기 득달같이 달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언을 배워가지고 오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훈련하고 하는데...

자 여러분, 제가 분명히 얘기하지만 
예언은 훈련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은 
반복 훈련한다고 그 음성이 들려오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근데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그런 쪽에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자 이렇게 내가 하고 싶어하는 부분을 신앙생활에서 찾게 되어 있어요. 

△제가 어떤 분을 통해서 이런 고충을 들었습니다. 
처음에 그 분이 교회를 잘 섬기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다가 
어느듯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갑자기 바뀌어서 다른 신앙의 색깔을 내더라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분이 이 교회 질서를 그동안 잘 따라온 게 아니고 
교회에 있으면서도 계속 그것(예언, 은사 신비 등)을 마음 속으로 탐하다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얘기해주는 (그 교회 바깥) 사람을 만나니까, 
이제 자기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그러니까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안에 있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는 얘기죠. 
지금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려드리고, 
삶을 정말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점장이처럼)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거죠. 
그 어떤 자기의 선호도, 호기심등으로 인해서 
신앙생활을 그쪽으로 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가 있어요. 

내 내면의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소리이거나 
내 욕심의 소리가 들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걸 하나님의 음성으로 단정짓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삶은 낭패를 보고, 또 심지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이, 항상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시끄럽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 오히려 섬기고 희생해야 되는 것이 정상적인 루트인데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해주는 대언자로, 
심판자로 살다가.. 교회의 질서를 깨는 경우가 많죠.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극단적 폐해를 지적함)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예요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맺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정확히 들릴 수가 없죠. 이건 상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건데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거죠. 

그런데 왜 그들은 굳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고, 그걸 고집하는 걸까요? 
그건 거기에 내 욕심이 들어가 있고 
그것을 통해 내가 타인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는
자기 신앙의 우월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몰라요. 
자기는 죄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기도만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는 죄를 버리지 못하고 돌이킨 적이 없으면서도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이 안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릴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여러분의 신앙이 답답해지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서 괴로우신 분들이 계신다면 

여러분 점검해야 될 건 뭐냐면, 
영분별이나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다시 배워야 되겠다..가 아니고 
하나님과 여러분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주님과 내 관계가 온전한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과의 평소 관계가 다 무너졌는데, 막 급한 일이 생기면 
뭐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떼쓰는 분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정말 부담스러워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음성만을 듣고 싶어하니 
그 듣기 원하는 음성이, 또 주님의 뜻이 아니니, 들려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또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을 듣고 싶으니까 
그걸 들으려고 쥐어짜다가.. 엉뚱한 소리 듣고, 그 결과 황당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 기독교의 신앙을 답답하게 하는 원인은 
기독교 신앙이 잘못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이 이상한 게 아닙니다. 

내가 별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앙은.. 기도 이전에, 하나님 음성 듣기 이전에.. 관계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속에서도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자 우리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죠. 
아는 사람이 있고, 친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 이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아는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알 뿐이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친한 사람은 어떨까요? 
그 사람의 인격과 삶과 가치관과 정보.. 등 모든 것을 다 공유하고 나누는 사이가 
바로 친한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질문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하나님과 아는 사이입니까, 아니면 친한 사이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한 사이가 되기 원하십니다. 
이 관계를 그토록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하고 싶은데 
혹시 그 방법을 모르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면 
여러분,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자 우리가 한 사람과 친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것만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 어느 사람과 친해졌어요. 무조건 이 조건을 충족시켜야 됩니다. 그게 뭐죠? 
시간입니다. 시간! 

여러분이 누군가 깊이 있는 만남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있따금씩 '나도 성령님과 가까워지고 싶고 
성령님이 내 삶에 함께 해주시는 삶을 원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게 뭐냐?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당신은 얼마나 성령님과 시간을 같이 보내시냐? 이 말이에요. 

마음은 그런데, 나의 일과의 대부분은 사탄과 이 세상의 풍조와 
불순종하는 아들들의 영들과 함께 살아놓고 
말은 '나는 성령님과 동행하고 싶어요' 합니다. 

여러분, 누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시간만 가지고는, 또 깊고 친밀한 관계가 맺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도 중요하지만, 관계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역시 이 조건을 충족시켜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에 잘 맞춰져야 합니다.
내가 성령님의 요구와 바램에, 잘 순종해야 됩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려면, 
그 분의 가치관(성경)과 내 삶이 잘 맞아야 됩니다. 

여러분, 왜 신앙생활이 힘드냐면, 내가 하나님의 가치관과 잘 맞지 않아요. 
그러니까 신앙은 자꾸 성장하거나 늘지를 않는 겁니다. 

내 스타일만 여전히 고집하고, 
내가 하나님(성경)께 맞추질 않으니 관계 형성이 안 되는 거죠. 

진정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진정한 관계는 사랑이죠. 
내가 상대를 사랑하면, 그때부터는 give and take 계산은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하나님께 뭘 맡겨놓은 것처럼 
항상 뭘 요구하고.. 안 주신다고 따지고..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 그냥 하나님께 나아와도 (특별한 음성이나 체험이 없어도)  
그냥 기쁘고 행복한 것이죠. 

그래서 신앙은 관계라는 거예요. 관계! 
계산적 관계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것만 머리에 꽉 집어넣고 계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행동을 해야 될지가 보입니다. 

▲자 이 부분을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엘리를 세웠지만, 엘리 제사장의 죄악으로 인해 
엘리에게서 촛대를 거두어서 사무엘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지팡이로 세우시는데 
이 어린 사무엘이 성소에 머무를 때였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죠.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때 사무엘이 눈이 번쩍 떠져서 엘리 제사장에게 갑니다. 
'제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너를 부른 적이 없다. 어서 가서 자거라' 
그래서 사무엘은 다시 자려고 누었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
이렇게 세 번째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어요.
사무엘은 또 엘리에게 갔습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이 이렇게 말했죠.
'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를 부르신 것 같다. 
네가 누웠다가 다시 그 음성이 들리거든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해라'  

그래서 사무엘이 그대로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삼상3:10

저는 성경에서 이 대목을 참 좋아해요. 왜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성격이 급해가지고, '야 아무개! 왜 전화를 빨리 안 받아? 
전화를 빨리 받아야지, 지금 일이 바빠 죽겠는데!' 이렇게 막 윽박지르시지 않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너 빨리 일어나!
내가 엘리 그 친구 땜에 아주 속이 부글부글 끓어
내가 엘리를 칠건데, 너 그걸 지금 가서 전해라' 이러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무엘을 찬찬이 부르시면서 사무엘의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참 이 대목을 볼 때, '하나님은 정말 따뜻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이와 같이 사무엘에게 명령하시는게 아니라 
사무엘이 스스로 반응하게 하고, 지금 자신을 부른 존재가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알게 하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사무엘을 부르는 이 과정을 보세요. 일방적입니까, 관계적입니까? 
이게 얼마나 관계적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부르는 이 사랑의 관계가 느껴지십니까? 
이게 우리 하나님이세요. 

이렇게 사무엘을 부르는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주 끈끈한 사랑의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혜로웠던 사무엘은, 이 관계를 평생토록 유지했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 내내 사무엘은 하나님과 정말 친구처럼 대면하면서 
친밀한 대화를 주고 받았고,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갔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무엘을 부르시는 이 과정을 기억해야 돼요. 

 

또한 이 관계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자발성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렇게 사무엘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앞에 나오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앞에 나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면으로 여러분을 부르실 겁니다. 
오늘 저의 메시지를 통해서도 부를 수도 있고 
여러분 삶속에서 여러 방면으로 여러분을 부르실 때 
어떻게 해야 되냐? 스스로 반응해서 일어나서 나오는 여러분이 돼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걸 가장 기뻐하시는 '관계적 신앙'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이 관계를 딱 붙잡지를 못해요. 
그래서 대부분 이 관계를 놓칩니다. 

▲보세요. 실제적인 예로, 여러분이 예배를 자꾸 실패하잖아요.   *청년예배 설교
여러분, 예배라는 것이 관계거든요. 
'예배하다'고 라는 말은 헬라어로 '그 발에 입맞추다'  *프로스큐네오
즉 경배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근데 예배를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 사랑의 손길을 딱 거절해버리는 거죠. 

왜 여러분 예배에 실패하십니까? 하나님과 동행에 왜 실패하십니까? 
이 문제를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되고, 여러분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패한 거예요. 

그래서 신앙의 실패는 관계의 실패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 평소 신앙 생활이 잘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데서 이유를 찾지 마세요. 
이제부터 내 신앙이 왜 이렇게 늘지 (성숙되지) 않느냐? 
다른 데서 이유를 찾지마세요. 정말 본질을 벗어난 그런 생각들입니다. 

자 오늘 이것을 또 어디서 찾아볼 수 있냐면 
계3:20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얼마나 부르시고 
함께하기 원하시는지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기독교가 이 구절을 조금 오해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이거는 앞뒤 맥락을 무시하고, 그냥 이 구절만 가지고 와서 
이 구절을 초신자들을 가르칠 때, 새가족 교육때 이걸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이 구절은, 불신자나, 
이제 믿을까 말까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구절이 아니고 
이 구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라오디게아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한 주님의 마지막 처방전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거는 바로 무슨 말씀이냐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적으로 냉랭해주고 식어지고 미지근해진 
그런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거예요. 

오늘도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세요. 
그런데 우리가 못 듣고, 못 열고, 또 일부러 안 열어요. 

여러분, 들었는데 문을 안 여는 경우가 있잖아요.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 이것을 요구하시고, 순종하기 원하시는데 
여러분이 일부러 그걸 안 들어요. 그런 적이 있으시죠? 

왜 이러느냐? 다른 것(우상)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문을 못 여는 거예요. 
자 어느 남자가 정부와 바람이 나서 어느 집에 같이 있어요. 
근데 아내가 낌새를 알아채고 미행했다가 그 집 문을 두들이는 겁니다. 
'문 열어!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할 때, 어느 남자가 문을 딱 벌컥 열어주겠습니까?

왜 그렇죠, 왜 문을 못 열어주죠? 
다른 것과 지금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문을 못 열어주는 거예요. 
아니 문 두드리는 소리도, 아예 자기 귀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어떤 진단을 내리셨어요?
'너는 지금 영적으로 미지근해졌다.' 그거는 뭐예요? 
주님 말고 다른 어떤 것(우상)과의 관계가 아주 뜨겁다는 거죠. 

그래서 계3:20절은 얼마나 관계적인 말씀인지 몰라요. 
여러분 그래서 오늘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수'가 없어요.  계3:20

동시에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사람은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가까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 분, 점점 신앙의 연수는 늘어가고 있는데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 무엇이 느껴지죠? 누가 보여지죠? 

제가 여쭤볼게요. 여러분 제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나요? 
만약 안 보이잖아요.. 그럼 저도 영락없이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어디에 있어야 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닮지 못하는데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근심과 걱정의 대부분은 경제적인 거죠. 
노후 대책, 건강, 자녀 문제... 여기에 온갖 근심거리를 두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 여기에 근심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것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증거죠. 

거듭난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이 내속에서 안 보이면 스스로 고통스러워 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삶 속에서 예수가 보여지지 않으면 고통스러워 한다고요. 

토저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로 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로 변화되어 가고 있느냐가, 중요하고 두려운 문제'라는 거예요. 

여러분 변하고 계시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변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계시냐? 이 말이에요. 

지금 여러분 중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가 겁이 나고 두려운 분이 계십니까?'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이냐를 스스로 알 수 있는 지표가 이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그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재미난 것은요, 제 멘토 목사님 밑에 제자들이 많을 거 아닙니까? 
근데 다들 멘토 목사님을 사랑해요. 

그래서 그런지 참 그 제자들의 행동거지나 말투를 보게 되면 너무 신기예요. 
스승의 모습이 나와요. 제스처까지! 
목소리나 어떤 말투까지, 자기도 모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결국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어 있다는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이런 것이 대상을 잘못 설정하게 되면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물론 저도 이런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제가 요즘 제가 걱정되는게 뭔지 아세요? 
저희 교회 부교역자들이나 청년들이 저를 따라하게 될까봐.. 겁이 덜컹 납니다.

'저를 분명히 닮을텐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제 잘못된 것을 차츰 배워갈까봐.. 이게 걱정이에요. 

혹시나 제 잘못된 점을 사역자들이 배워가서 
자기 삶 속에 해가 일어날까봐.. 이게 저는 걱정이 돼요. 

자 사도요한이 부분을 이렇게 분명히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게 계시록 22:11절이예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계22:11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내 삶의 행동이 이렇게 나타난다는 거죠. 

따라서 내가 누구를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누군가를 동경하고 사랑가는 것은 한낱 취향이나 기호 따위가 아닙니다. 
이거는 나를 드러내주고 있는 거예요. 
내 가치관과 내 성향이 그러하다는 거죠. 

 

따라서 여러분,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상가를 흠모하고, 어떤 정치인을 사랑하는데 
이분들이 잘못된 분들이에요. 그런데 묻지마 하고 그 사람들을 따라가요.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압니까? 
진리를 들었어도, 진리가 아니라 (팽개쳐두고)
사상이나 그 사람의 것들을 따라가더라고요. 

여러분 역사적으로 보십시오.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다 공산주의자들만 따랐던 게 아니에요. 
이들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개인(공산당 지도자)에게 매료를 당해버리니까 
그 사람이 그동안에 배워왔던 진리가 작동하지 않고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그 혁명 전선(현장)에 참여해서, 같이 사람 죽이고 나라 망치고 있더라는 거예요. 

이게 참 무서운 일이에요. 

내가 누구를 흠모하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 신앙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내 신앙에 성장이 일어나기도 하고, 신앙에 기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첫째되는 계명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게 뭐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또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셨습니다. 마22:37

▲제가 찬양으로 예배를 인도하다 보면, 예배에 집중을 못하는 분들이 많이 보여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초 체력이 없어요.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예배 때 너무너무 힘들더라는 거죠. 

그러다가 예배를 마치게 되면, 바로 그때부터 어디서 생긴 힘인지
아주 활기차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향해 막 달려나가는 거죠. 
집에 식구들 밥 차려 줘야죠. 아이 학원 보내야죠. 가서 영화 봐야죠. 
가서 얼른 친구 만나야죠. 다 풀이 죽어있다가 갑자기 기운이 소생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들 한테는 막 달려가게 돼 있다고요. 

물론 예배 때 힘들어하는 분들 보면 이해를 해요. '직장생활하다가 얼마나 힘들까?' 
그런데 그렇게 힘든 사람도, 뭐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는 활기가 대단해지죠.
우리가 주님앞에 이런 사랑의 열정을 회복하기 원하는 마음을 갖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러분 요즘들어 제 안에 심각한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들안에 느껴지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삶 자체를 매우 지루해 합니다. 코로나19 영향인가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마는 굉장히 싫증을 잘 내고, 지겨워하고 지루해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까 사회 전반이나 교회가, 보면 다 다운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실제로 목회자들이 위기의식을 가지고 집회를 열어도, 잠깐이에요. 잠깐! 
사람들의 열정이 올라가는 것 같다가도 금방 다시 제자리로 갑니다. 
사람들이 살짝 들뜬 것 같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풀이 죽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예전보다 많은 분들이 예배나 어떤 하나님의 일 앞해서 
임팩트(충격)를 경험하지 못할까요? 이건 굉장히 미지근한 분위기에요. 
여러분 아십니까? 제가 지금 고민이에요. 이 부분이 고민이라고요. 

제가 우리 교인들만큼은 적어도 이런 기복이 없어야 되겠다.. 고 기도합니다. 
한번 올라왔으면, 이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가 목회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갖습니다. 
이 분위기 자체가 여러분 금방 제자리로 돌아갈까봐 걱정이에요. 

 

이거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저는 생각했어요. 이제 깨달아집니다. 
왜 이렇게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않고, 덮지도 않은 미지근한 분위기가 심할까요? 

이게 마지막 때라서 그래요. 마지막 때로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이 식어지거든요. 
성경 그대로입니다. '아 그렇구나 뭘 해도 반응이 없구나. 
피리를 불어도 잠깐 춤 추는 것 같다가도, 금방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애곡하는 소리를 내도 슬퍼하는 것 같다가, 금방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구나!
지금이 마지막 때이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는 때이구나!
아 참 굉장히 두렵습니다. 이거구나! 마지막 때라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는 바람에 
교회들이 타성에 젖어 있어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 
교회에서 아무리 정말 대단한 걸 열어줘도, 모든 행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요즘 타성에 빠진 교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왜 그렇다고요? 
더 이상 교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는 거에요. 

세상과에 끈적한 관계 때문에 배가 불러서 
하나님의 것이 들어가래야 들어가질 않아요. 
그래서 전반적으로 타성에 젖어서 살기 때문에 
모든 신앙생활이나 일반생활 전반에 냉랭함이 서려 있는 거예요. 

▲이번에 저는 광주 집회를 다녀왔어요. 거기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제가 숙소에서 혼자 기도하며 생각하는 시간을 좀 보냈습니다. 
집회를 준비하는데 문득 참 두려운 생각이 제게 들었어요. 

'내가 점점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변화되어 가고 있긴 한데 
과연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지?' 깊이 생각해 보았어요. 
'지금 나는 어떤 목사가 되어가고 있는가?' 

그러면 제가 늘 체크하는 것은 뭐냐면 
설교와 설교자 사이에 괴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체크합니다. 

설교를 어느 교회에 가서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복음을 지금 주일마다 전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복음을 전하는 것과, 내가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에요. 
제가 설교를 하고 있지만, 집회를 인도하지만 
나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 설교를 하고, 지금 사역을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제 스스로 따져물어 보았어요. 

설교를 하는 doing 이 아니라 
설교자 being 에 무게중심을 두려고 제가 애를 씁니다. 
그런 경각심을 혹시 잊어버리진 않았나? .. 숙소에서 한 번 스스로 되새겨 보았어요.

왜냐면 여러분, 말쟁이는 연습하면 돼요. 
그런데 삶으로 복음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아요. 
말은 해도, 사는 건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요즘 제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너는 지금 어떤 목사이냐?' 이 질문의 핵심은 이겁니다. 
'내가 뭘 사랑하느냐?'의 문제더라고요. 

내가 어떤 존재냐의 문제는 
내가 지금 뭘 사랑하느냐의 문제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 책상에 앉아서, 옆에 있는 메모지에 놓고 적어봤어요. 
'오늘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가, 종교 스타가 되기 원하는가?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는가?' 심각하게 스스로 한 번 물어봤어요.

물론 저는 종교 스타가 될만한 건덕지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냥 한번 종이에 적어 본 거예요... 

(스스로에게 질문) '너는 지금 이 바빠진 사역 가운데 네 목적이 뭐니?'
저는 그 메모지에, 예수님께 동그라미를 치면서 
'주님 제가 예수님 닮기 원합니다.'라고 제가 선언을 했어요. 

근데 그 외침은 곧장 이 질문으로 저를 다시 데려가더라고요.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나? 나는 어떤 종류의 되고 싶은 목사를 사랑하나?'

게다가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저에게 은혜를 주셨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혹은 내 어떤 롤모델이 있으면 
그 사람은 내게 해 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참 사람들은 이상하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걸 내어주셨는데 
그 예수님을 따라갈 생각은 안하고 
어느 새 내 욕심과 내 자아가 투영시킨 그 누군가, 또는 그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더더욱 분명히 깨달았어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내가 이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무엇이 보여지고 싶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무엘을 그렇게 사랑의 관계로 부르셨듯이 
오늘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며, 사랑의 관계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이 뭔지 아세요? 
자발적으로 그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고 
시간을 두고 그분께 맞춰드리며, 
그분께 가까이 감으로 인해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에요. 

저는 이 말씀을 참 오늘 여러분과 함께 되새기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4:8

내가 사랑하고 내가 갈망할수록 
그분은 나의 주님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삶속에 어지럽고, 오염되고, 때로는 추잡한 일들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이 모든 것들을 걷어가시고, 예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이 보여지는 삶으로, 나를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