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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2장 1~24 라합에게서 믿음을 배우라

LNCK 2022. 1. 28. 20:04

◈라합에게서 믿음을 배우라       수2:1~24           여러 설교 정리

▲여호수아는 빠지고, 라합이 명단에 들어간 이유

히11장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익숙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기드온...
성경에 중요한 스토리들을 만들어 낸,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래서 히11장은 '믿음의 전당', 그 분들은 '믿음의 영웅들'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명단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라합입니다. 이 여인은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몸을 팔아 살아가는 이 부도덕한 여인, 
이 여인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놀랍게도 동일한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그리고 여호수아서의 주인공으로 쓰임받은 여호수아는, 이 명단에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라합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럼 여호수아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히11장에 명단이 기록된 목적이, 
장차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선별적으로 사람이 선택되었기 때문에, 이 라합이 선택된 거예요
그 여인이 다윗왕의 조상이요, 나아가 메시아의 조상이 되기 때문이었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일으키는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시고 
그들을 그땅을 점령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어져야 
그들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이 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수 있잖아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실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수1장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여호수아의 믿음을 일으키시는 일을 하신 거죠. 

그러나 여호수아만 믿음을 가졌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인 믿음을 일으키는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주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갑시다'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을 주저하면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도, 하나님이 일으키셔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정탐꾼 둘을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여보냅니다. 
보고 믿음을 가지라는 거죠. 믿어져야 믿음이 생기니까요. 

정탐꾼을 통해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라는 거죠. 

그래서 정탐꾼 둘이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 성에 들어갑니다. 
창기 라합의 집에 들어가요.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라합의 집에서는 여리고의 모든 시가지가 다 보입니다. 정탐하기 딱 좋은 곳이죠. 

그리고 창기의 집이라서, 이런 저런 사람들이 그 집에 오고 갑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의 민심을 파악하기 딱 좋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여리고 왕에게 알려집니다. 
누군가가 본 거예요. 
그래서 왕이 군사들을 보내어 이 라합의 집에 들이닥치게 합니다. 

정탐꾼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거죠. 
근데 그때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나는데 
그 창기 라합을 통하여 이 정탐꾼들이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주 지혜롭게 대처해서, 정탐꾼들을 무사히 돌아가게 만들죠. 

▲도대체 창기 라합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까요?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거예요. 

이 가나안 땅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사십년 동안 지나는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던 거예요. 

홍해가 갈라졌던 일, 아모리 족속의 시혼과 옥이라는 막강한 왕이
속절없이 전멸당한 일... 그런 소문들이 가나안 땅에 들려온 거예요. 
라합이 그걸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정탐꾼들을 숨겨준 거예요. 

수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의 도움으로 이 정탐꾼들은 무사히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보고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여리고 성에 들어가 봤더니 
그 사람들이 다 간담이 녹을 정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더이다'

그리하여 여호수아에게 정탐꾼들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여호수아도 무서워 했을 정도라면(1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여리고 성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더 무서워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확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들어가면 점령할 수 있겠구나!' 

이거는 엄청난 일이에요. 믿음이 바뀐다는 것!
근데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이 바뀌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누구냐? 창기 라합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시대에 살아도 믿음은 사람마다 다 다른 걸 봅니다. 
이 창기 라합은,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 눈으로 본게 아닙니다. 
홍해가 달라지는 것도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과 옥이 멸망을 당한 것도 
소문으로만 들은 것입니다. 

라합이 만나를 먹은 것도 아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직접 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믿은 거예요. 신분도 창기였습니다. 
도저히 굳센 믿음을 가지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소문만 듣고도 그렇게 확실히 믿었다는 거예요.
정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여기서도 입증이 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 사십년 동안이나 
그 엄청난 기적을 직접 다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았고, 그리고 뭐 불기둥, 구름기둥과 
매일 먹는 만나, 반석에서 터져나오는 물.. 그 모든 것을
바로 모세 옆에서 다 목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는 무서워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무서워한 내용은 앞서 1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죠)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었고 
그날도 아침에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도 받았어요.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무서워 했었습니다. 

정말 잘 믿을것 같은 사람은 두려워 떨고 있고, 
도무지 믿음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은 (라합은) 
자기 목숨을 거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라합 믿음의 특징

자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라합의 믿음이 발견됩니까?

▲1. 라합의 믿음은, 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왜 살려줬습니까? 
그리고 왜 여리고 군인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까? 

그것은 생명을 내건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라합에게 가장 안전해 보이는 선택은, 사실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정탐꾼들이 왔고, 또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어쩌면 라합은 여리고 성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그런 기회였습니다.
정탐꾼들이 살려달라고, 숨겨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라합이 주도적으로 실행한 일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선택이었습니까. 
근데 왜 이런 위험한 선택을 했습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8~9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라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으로 들어오면 
자기 백성들은 결코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위 구절처럼 그렇게 고백한 거죠. 

그래서 이 정탐꾼을 돕는 것이, 자신의 살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생명을 내건 위험한 선택을 해야만 했지만 
어차피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해 보자는, 위험한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은, 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이 라합의 믿음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동일한 논리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생명과 죽음을 결정짓는 선택입니다. 

모든 인류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멸망가운데 처해 있는 위험한 운명입니다. 
그런 위험속에서, 그 다가올 종말의 심판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일이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이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이치이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은 피할 수 없어도 
영원한 죽음은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육체의 죽음이라는 댓가를 치를지라도 
영원한 죽음을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살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선택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전자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며, 
후자의 죽음은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죽음인 것이죠. 

어떤 대가와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것 - 그것이 믿음인 것이죠. 그것이 살길입니다. 
라합은 살기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 두 번째로 라합의 믿음은, 은혜로 얻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전도를 받아서 지금 믿음을 가지게 된게 아니죠. 
그녀는 소문을 듣고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가 기적적으로 갈라져서 건넜으며, 
그 때 홍해에서 애굽 군대가 수장되었다는 소식,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족속들이 진멸당했다는 소식들을
그저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 듣고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라합의 집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그 소문을 빨리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소문이 자연스럽게 라합에게 믿음을 가져다 준 거예요. 

이것이야 말로 "은혜로 얻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하여 
앞서 그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한 영혼이 믿음을 가질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 임하여 
그들의 영혼을 준비시킨다는 것이죠. 
 
▲3. 세번째로 라합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전인격적 믿음"이었습니다. 

:10~11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소문을 들었다는 것은 지식적인 영역입니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라합의 마음이 녹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은
감정적인 영역입니다. 

그리고 라합은 그 지식과 감정에 기초하여
자기 의지가 움직여서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의지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의 전인격적인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도 그 점을 증거하고 있죠.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약2:25~26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와같이 우리의 믿음은 지정의가 다 포함된 '전인격적인 믿음'입니다.

▲4. 넷째로 라합의 믿음은 "세상과 맞선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해 행하신 일은, 
라합만 이 소문을 들은 게 아닙니다. 
분명히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들었는데 
오직 라합만 믿음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지만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믿을때, 내가 따라 믿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내가 홀로 외롭게 믿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 
그는 자신의 생명을 아무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거대한 종교적 악의 세력에
맞선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선택을 한 거죠. 사선을 뛰어넘는 선택을 한 겁니다. 

주후 4세기경 초대교회는, 삼위일체 논쟁으로 인해서 매우 혼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시냐, 하나님이시냐?
사람이신 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시냐? 두 분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공존하느냐?
이런 많은 논쟁으로 인해서, 교회가 극히 혼란을 겪고 있었을 때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다.' 라고 주장했을 때,
그는 황제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되어,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하면서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정통교리를 그가 주장한 것입니다.
때로는 정통 교리를 말한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때도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는 그 위험한 선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내용이 전수될 수 있었던 거예요. 

아타나시우스, 마르틴 루터..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자기가 깨달은 믿음을,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 
바로 라합이 그런 믿음이었다는 거죠. "세상에 대항하는 믿음!"

▲5. 다섯번째 라합의 믿음의 특징은 
"최소한의 지식을 가졌으나 최고의 믿음을 보여줬다"는 거예요. 

:11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이 들었던 내용은, 많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때 홍해를 가르셨다는 것,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두 족속을 진멸하셨다는 것.. 그 정도였습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라합이 깨달은 것은
'당신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복잡한 성경의 율법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라합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그가 최소한의 지식을 가졌지만 
최고의 믿음을 보여줬다는 거예요.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많은 지식, 진리의 분량이 아닙니다. 
그가 붙들고 있는 진리가 살아 있는 진리냐? 
그리고 단 하나의 진리라도 그것을 진정 믿느냐에 달려있는 거예요. 

아무리 많은 진리, 지식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견고히 붙잡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정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이 많지 않더라도 
단 하나의 진리라도 굳게 붙잡으면 
그것은 영혼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가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성경지식이 없어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진리를, 믿음으로 붙잡지 않기 때문이죠.
 
캄캄한 동굴에서 갈 길을 몰라 더듬으며 헤매고 있을 때 
그 동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그 동굴 전체가 다 환해져야 되는 것이 아니죠. 
동굴 어디선가 희미한 불빛처럼 작은 불빛이라도 어디선가 비친다면 
그 희미한 불빛을 향하여 걸어 나오면, 거기가 살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리와 지식이, 모든 것을 깨달아 아는 지식이 아닐지라도 
단 하나의 진리의 빛이 내 영혼에 비췬다면, 그 진리의 빛으로 
우리의 영혼은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더 풍요롭게, 지식을 더 풍성하게 하려하는 시도보다도 
내가 알고 있는 그 진리들을, 내가 믿음으로 굳게 붙잡고 얼마나 순종하느냐...
거기에 우리의 영적 생명이 달려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죠.
'믿음이란, 어둠속에서 비춰오는 한 줄기의 빛을 보고
그 빛에 자기 몸을 내던지는 모험이다!'

▲6. 라합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참 이스라엘의 믿음"이에요. 
그는 아모리 족속이었어요. 멸망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그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참 믿음을 보여줬다는 거예요.

사실 라합의 고백은, 누가 해야 어울립니까? 정탐꾼이 해야 어울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어울리는 고백입니다.

그의 고백은,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더 이스라엘 다운 고백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해 줍니까?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혈통으로 육신의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자만이 이스라엘인가? 
아니라는 거예요.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가, 진정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라합은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준 겁니다. 

라합처럼, 온전한 믿음이란
우리에게 여전히 죄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란 우리가 온전한 윤리적으로 반듯한 삶을 살아야 들어가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에게 죄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많은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믿고 응답하는 것이 믿음이지 
내 스스로 내 신앙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이 라합의 죄와 허물을 크게 부각시키기보다
그 여인 안에 있었던 칭찬받을 만한 믿음, 
또 모든 사람들에게 모델이 될 만한 믿음을 더 크게 부각하시는 거죠. 

세상은 선한 일은 간과하고, 악한 일만 더 들춰내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은 정반대이십니다. 

그 사람에게 많은 단점, 연약한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7. 라합의 믿음의 특징은 "가족들,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이었죠. 

라합은 자기 혼자만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12~13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친척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구원받기를 원했다는 것은,
그 라합의 믿음이 참되고 진실하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는 믿음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어느 누군가에게 이 구원의 길에 함께 가자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살아생전에 한 사람에게도 
내가 믿는 이 믿음으로 함께 구원받읍시다.. 라며 한 사람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면 
참된 믿음이 아닐 겁니다. 

가족과 친척과 지인들을 함께 구원하기 원했던 라합의 믿음은
특별한 게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믿음이었어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심판, 멸망, 정말 영원한 죽음을 믿는다면.. 
가족 친척 지인을 전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래서 사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하지 않고서 살고 있다면
사실 나는 전도대상자인 셈입니다. 

 

▲8. 라합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 '순종으로 반응'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두 명의 정탐꾼이 누구를 만났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지금 여기서 두 정탐꾼이, 라합을 만나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다른 가나안 사람을 만났다면
그 정탐꾼들은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그러면 여리고 성 정복 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겪었을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기가 막히게도, 하나님은 두 정탐꾼에게
역사의식과 신앙고백으로 무장한
준비된 사람인 라합을 만나게 하십니다.

히11:31절은 왜 라합이 지금 여기서 이렇게 두 정탐꾼을 보호했는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히11:31

라합이 자기 목숨을 걸고서 정탐꾼들을 도운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은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1 
이 말은, 라합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녀가 행했던 행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순종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여호수아는 정복의 책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는 승리자들을 옹호하는 책이 절대로 아닙니다
라합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9. 라합은 자기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 정탐꾼들이 떠날 때 라합은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제 당신들이 여리고 성을 반드시 무너뜨리고 점령할 텐데 
나와 우리 가족을 반드시 살려주시오'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당부합니다. 
2:18~10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정탐꾼이 제시한 답이 뭡니까? 
소속을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도대체 라합 당신이 누구 소속인지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라는 사실을 
아주 공개적으로 드러내라, 표식이 분명히 있어야 된다. 
창문 틀에 홍색 실을 달아서, 누구도 다 볼 수 있게끔 하라..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너희 대문 인방과 문설주 다 바르라'
확실한 표시를 하라는 뜻이에요. 

'네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냐?
그 표시를 분명하게 하라, 그 길이 살길이다!' 

그리고 라합은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 집 창문에 홍색 실을 묶었어요. 
그리고 진짜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라합과 그 집안 사람들은 건점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그 정탐꾼 중에 한 사람이었던 유다지파의 살몬과
라합은 결혼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조상,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라합은 창기요, 이방인으로 여리고 성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었는데,
예수님의 조상으로, 그 족보에 이름을 등재하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을거다!'
그랬던 그 결단이 라합을 살린 거예요. 

도대체 우리가 라합에게서 뭘 배워야 하는 거죠? 
여러분이 예수 믿는 것을 분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여러분이 도대체 누구 소속인지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네 창문에 홍색 실을 묶어라!'

 

◑적용

 

혹시 신앙에도 엘리트가 있다면, 저 같은 사람일 겁니다. 
목사 중에 3대째 목사요, 예수를 믿은지로 따지면 사대째예요. 
그러니 정말 좋은 믿음을 가질 모든 여건이 다 갖춰진 사람이죠. 

그런데 저는 참 믿음이 형편 없었어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저나 
어려운 일 닥치면 똑같이,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런 수준이었어요. 

근데 제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목사인 제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렇게 귀한 믿음을 가진 분들이 간혹 있더라구요. 

창기 라합과 같은 처지인데, 자기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가족도 없어요. 오히려 핍박만 너무 너무 심해요. 

그런데도 타협하지 않는 아주 강인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종종 보았어요. 

성경을 제대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지식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런데 정말 창기 라합처럼 
설교시간에 그저 들어서 아는 말씀 가지고 
목숨을 내 거는 믿음을 가진 분들도 있었어요. 

▲제가 2014년 안식년 때, 6개월 동안 제 목회여정에 처음 그렇게 길게 
휴가를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참 하고 싶은 것도 많고.. 
6개월 동안 가고 싶은데도 많고, 읽고 싶은 책들도 많았고... 

근데 막상 안식년이 시작되고 나니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두려움이 왔어요. 
그것은 모든 교우 관계가 다 끊어지고, 혼자가 되는 당황스러운 경험이었어요. 

그래도 안식년 기간이니까 이제 6개월 지나면,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렇지만 만약에 은퇴를 하게 되면 
'아 그때 어떻게 될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이렇게 끊어진 관계가 영구적으로 계속되는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시간이 오는 거예요. 
'아 이런 것이 은퇴겠구나!' 아직 은퇴까지 몇 년 남았겠지만, 그 느낌을 미리 느껴보는 겁니다.

쉬는 것이 행복한 게 아니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 큰 고통임이 깨달아졌어요. 
'그때 나는 진짜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할가?' 
그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왜 하나님께서 저에게, 매일 일기를 써가면서 
매일 주님을 바라보게 그렇게 하시는지... 그걸 알겠더라고요. 
예수동행일기를 쓰게 하는 것은, 교우 여러분들을 위해서 쓰게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저를 위하여 쓰게하는 거더라고요. 

이제 은퇴할 때가 오면, 이제는 담임목사의 자리에서 떠나야 되는 거예요. 
교우들과의 관계는 이제 거기서 마무리해야 되는 거예요.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