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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3장 1~17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다

LNCK 2022. 1. 31. 08:19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다 - [여호수아 3:1-17] - YouTube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다     수3:1~17            2021.03.21.출처


우리가 성경을 읽고 깊은 은혜를 받기 원한다면 
항상 성경 그 사건 속에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일이 참 좋은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유명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이 있는 
여호수아 3장을 함께 나눌 때 
동일하게 여러분이, 그때 요단강 동쪽 편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또 요단강을 실제로 건너는 무리들속에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한번 오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이 참 두려운 일이었지만 
두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그들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아~ 가나안 땅 거민들이 우리를 더 무서워하는구나' 
그래서 그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인 거예요. 믿음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믿는 쪽으로 가게 만드는 거죠. 

▲그러나 그들 앞에 어떤 군사가 서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여호수아가 맨 앞장서서 간 것도 아니었고요. 

그들이 처음 가보는 길, 요단강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그 길을 갈 때 
맨 앞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세웠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갈 길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갑니다. 
그런 신앙고백이었던 거죠. 

그들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데, 앞에 이제 요단강이 펼쳐집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 땅인 거에요. 

그런데 요단강에 물이 가득했습니다. 그 시기가 보리 추수 때여서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었고, 그래서 요단강에 물이 그 제방뚝 까지 가득했다고 했어요. 
건널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장정들 중에,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건널 수 있겠지만 
노약자, 어린 아이들은 건널 수 없는 깊은 물이었던 거죠. 

자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다시 한번 약속하십니다. 
3:7 '내가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그러면서 그 요단강을 건너라는 겁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그 물이 제방까지 차서 흐르는 그 요단강에 
발을 내디디라는 거죠. 그러면 요단강물이 마르겠다, 흐름이 그치겠다.. :8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여호수아가그렇게 명령합니다. 
'요단강에 발을 내디려라' :8 
그리고 제사장들이 순종의 걸음을 내디딥니다. 

그때 요단강이 정말 딱 그치는 것입니다. 
그 강물의 흐름이 그쳐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마른 땅이 되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넙니다. 

▲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왜 이런 방법을 쓰셨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유는,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가나안 족속을 다 내어 쫓는 과정에서 
꼭 이와 같이 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의 걸음을 내디디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고 
그 가나안 족속을 다 내어쫓아 주시겠다는 거죠. 

:10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널 필요도 없이 
아주 수월하게 벌써 일찍 38년 전에, 가난한 땅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지시했어요. 

출14:13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홍해를 건너는 믿음의 역사였어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나요?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하신 이 엄청나고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며 믿기만 하면 
그러면 우리는 다 구원받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그렇게 하셨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광야로 들어가서 2년이 지나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가장 가까이 갑니다.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 거기는 가나안 땅 남단 접경입니다. 
가장 빠른 길로 가면 그 길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출애굽 2년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해요. 
신1:21 '주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약속한 그 땅을 차지하라' 

이제 가나안 땅에 발만 내디디면,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정당꾼들이 보고한 내용을 듣고 
'그 가나안 땅에 거민들은 엄청나게 크고 강하더라 
성읍은 너무나 견고하더라.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그 말에 그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담이 녹아서 
아니 그냥 그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갈라진 홍해로 들어간 것처럼, 들어가기만 하면 그 땅을 주시겠다는데 
그걸 못 한 거예요. 

그리고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우리가 여기서 다 죽겠구나' 그리고 그들은 38년 동안 그 광야를 헤매고 다 죽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만 이제 요단강 앞에 온 거예요. 

이제 38년만에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이 요단강만 건너가면 이제 가나안 땅이에요. 

하나님께서 '먼저 순종의 걸음을 내디디라' 
가데스바네아의 때와 똑 같아요. '먼저 걸음을 내디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정말 믿고 순종의 걸음을 내디디면 
가나안 땅은 너희들의 것이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없으면 
가나안 땅은 약속만 받았지, 누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건 그대로 우리들의 문제에요. 
우리들에게도 가나안 땅이 있고, 요단강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것은 전적으로, 정말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기만 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나의 구주인 걸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받아요. 

그러나 약속하신 가나안의 축복은 
이제부터 순종의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됩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의 구원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순종할 믿음이 없는 성도들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뭘 말씀하시던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뭘 요구하시던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지 순종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나안의 축복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지/ 아닌지는 
거기서 결정 나는 거예요.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 입니다.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이 갈라지는 은혜를 체험해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는 받고 싶은데, 순종은 없다면 
여전히 요단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맹인이면서도 아프리카 케냐의 선교사로 가 계신 안정규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참 도전받은 게 있습니다. 

아프리카 그 원주민들의 예배는 얼마나 열정적이고 뜨거운 지... 
우리처럼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예배를 못 드리는 사람들이더라고요. 

춤을 추면서 찬송하고, 몇 시간씩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너무너무 믿음이 좋은 줄로 생각했대요. 

그런데 가만히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보니까 
그들 중에는 살인자도 있고, 강도도 있고... 그렇더랍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정말 기가 막힌 어떤 사연이 있어서 
사람 죽이는 일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런 사람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되죠. 
그런데 매주 죽이는 건 좀 문제가 있잖아요. 

아니 어쩌다가 남의 것을 훔칠 수도 있긴 해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정말 그런 사람도 거듭나서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매주 강도 짓을 하면 좀 곤란하죠. 

매주 사람 죽이고, 매주 강도짓 하고 
그리고 주일에 교회 와서 '예수님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세요.' 

처음에는 그 믿음이 귀해 보이더니 
나중에는 너무 가증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시간에 '오늘은 예수님의 보혈이 다 떨어졌다'고 
그랬더니 교인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워 하는지... 

그러면서 '그럼 이제 뭐가 남았냐?'고 
선교사는 '이제는 여러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몸만 남았다...'고 
(여러분도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라는 뜻)

그런 설교를 하실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참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인 것 같아도 
그 아프리카에 있는 원주민이나 우리나,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사실 크게 다를 바가 없어요. 

우리가 매 주일교회 와서,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은 게 
그게 진짜 믿음 이라면, 그러면 삶이 달라져야지요. 

그런데 매번 똑같은 죄를 회개해요. 매번! 
지난 주에 회개했던 그 죄, 오늘도 회개하고.. 
한 달 전에 회개했던 그 죄, 오늘도 또 회개하고.. 
그러면 매주 살인 저지르고, 강도짓 하는 그 사람들이나 다를 바가 뭐 있나요? 

순종은 없고, 은혜는 받고 싶고... 
이런 사람은 아직 요단강을 못 건너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축복을 듣기만 들었지 
실제로 누려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느는 사람들이에요.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일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네 고향 친척의 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 
어디라고 말씀도 안 하셨어요. '가다가 보면 여기다.' 이렇게 할 테니까 떠나라.. 
참 순종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의 걸음을 내디디고 떠납니다.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넌 거예요. 

그때 이미 아브라함은,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넌 겁니다. 
그러니까 복의 조상으로서의 삶을 산 거예요. 

80세의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로 왕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다 해방시키라, 내놓으라!' 
이런 말을 담대하게 바로 왕 앞에 가서 하게 됩니다.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넌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정말 구원을 받았다면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는 역사가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정말 놀라운 삶을 사는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가나안 땅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고 기독교에서 생각을 해왔어요. 
'요단강을 건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례식에 가면, 장례식 찬송가 중에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런 찬송을 부르잖아요. 

사람이 죽으면 요단강을 건너가는 거고, 
그러고 나면 영원한 천국이 있다.. 그런 정도로만 요단강을 이해하고 있어요. 

여러분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확하지가 않아요. 

예수를 믿은 우리에게도 다 가나안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데 
그 가나안의 축복은, 하나님이 왕이신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해요. 

가나안은 현재 우리 모두가 다 누리는 거예요. 
죽고 난 다음에 가는 천국 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이 오실 때,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지만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그때부터 그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가나안)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삶을 살면,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럼 요단강은 뭐죠? 우리에게 있어서 요단강은 뭡니까? 
나는 죽고 예수를 사는 거예요. 왜냐면 요단강은 죽음을 의미하죠. 

우리 자신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정말 믿는 것, 
그게 바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고, 완전한 순종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으면, 예수 믿는 삶은 정말 놀라운 삶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일상의 삶 속에서 
나는 죽고 예수를 사는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정말 중요해요. 
(요단강을 건너는 삶이 너무 중요해요)

여러분, 일상의 삶을 절대로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칼빈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극장'이라고 이런 표현을 썼는데 
실제로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은, 하나님의 극장과도 같아요. 

하나님이 만드시고 연출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배역을 정하시고 
하나님의 스토리를 써가시는.. 정말 기가 막히는 하나님의 극장이에요. 

세상도, 여러분의 삶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는 매일 같이 
하나님의 드라마를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극장을 보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이런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거예요. 

아침에 눈을 뜰 때, 정말 하루가 기대가 되는 거예요. 
기가 막힌 오늘 하루, 하나님의 한 편의 어떤 드라마를 보는 거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실제로 그렇게 매일 하나님의 드라마를 보는 감격을 
누리는 성도는 너무 드물어요. 

예수를 믿기는 했는데, 여전히 매일 매일의 삶은 
두려움과 혼란, 낙심, 염려로 점철되어져 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더 그런 점이 우리 가운데 더 짙게 드리워져 있어요. 
매일매일이 두려워요. 매일매일이 혼란스러워요. 

여러분 요단강 강물에 발을 처음 디딜 때, 제사장들의 심정은 어땠겠어요? 
지금 강뚝까지 물이 가득 차 있어요. 
거기에 먼저 발을 내디디라는 거예요. 

그때 제사장들은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얼마나 갈등도 되고 
얼마나 혼란스럽기도 하고,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이, 그렇게 두렵고 염려가 되고 혼란스럽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요단강 앞에 있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앞에는 요단강이 흐르고 있는 겁니다. 
법궤를 짊어졌던 제사장들이 똑같은 경험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디뎠어요. 그리고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깜짝 놀라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요단강이 그쳤어요. 마른 땅이 열렸어요. 

그리고 법궤를 메고 강 한복판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어요. 

지금 우리들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거예요. 
순종의 발걸음이 필요해요. 

여러분,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릴 때 
만약에 농부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씨 뿌릴 농부가 한 사람도 없어요. 

지금은 비록 날씨가 쌀쌀한 봄이지만, 
그러나 이제 곧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온다는 거죠. 

지금 농부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농부는 알지요. 
그런 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죠. 믿음으로 뿌리는 거예요. 봄에! 

그리고 가을에 실제로 거두는 거죠. 
예수 믿는 우리의 믿음의 삶, 순종의 삶이 그와 꼭 같은 거예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 대로만 하면, 아무 것도 못하지요. 
근데 예수님이 길이세요. 
예수님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할 뿐이에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말 한마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라고 하는 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 이 하라고 하는 말 
그 말을 하는.. 이런 순종이 필요한 거죠. 

집에서 가족들끼리도, 여러분이 일터에서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하고 
거기서 함께 일을 한다 하더라도 
말 한마디, 얼굴 표정 하나, 행동 하나까지도 
오직 순종함으로만 하는...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지는 역사를 경험한다니까요.

몇 주 전에 '밤에 부르는 찬송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전했어요. 
그 후에 어느 분이 메일을 제게 보내 오셨어요. 

자기는 음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음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얼마나 참 영적으로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마음속에 다시 음란한 생각이 확 치밀어오르는데 
그때 번개같이 두 가지 생각이 들더래요. 

이런 음란을 탐닉하는 것은 순간적인 즐거움이지만, 
성령께 순종하는 것은 영원한 기쁨이라고... 

그리고 밤에 부르는 찬양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과거에 자기가 힘들때 은혜받았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마음속에는 음란한 생각이 확 치밀어 오를 때, 
항상 그러면 음란에 무너졌었어요. 

근데 이제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한 거예요. 
그가 불렀던 찬송가 가사가 참 귀하더라고요. 

'나 비록 넘어지며 흔들리지만 
내 주 안에 거하며 나를 붙드시니 
내 생각을 주께로 돌리고 
주시는 평강의 옷을 입습니다.' 

비록 음란한 생각으로 
이게 찬송인지 아닌지 본인도 헷갈릴 정도였지만 
분명한 것은 '찬송하라' 하시는 성령의 감동이 
자기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음란에 사로잡혀 음란한 일을 저지르는 자가 
지금 찬송을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더 마음에 놀라운 것은 
그런 자기가 부르는 그 찬송을, 누가 듣겠어요? 
근데 우리 하나님이 들어주시죠. 

늘 음란의 넘어지기 잘 하는 그런 내가 부르는 찬송도 
하나님이 귀 기울여 
오직 그분이 내 찬송을 들으시는 분이더랍니다. 

한참을 울면서.. 그러다보니 찬송을 못했다는 거죠. 
여러분, 지금도 순종의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주님은 역사하시나? 내 삶에도 기적이 일어나나?' 
순종의 한 걸음을 통해서 경험하시게 돼요. 
여러분은 순종의 걸음으로 요단강을 걷는 사람입니까?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니까요. 
여러분이 진짜 성경속에 들어가서, 여러분이 성경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요단강을 건넌 사람일까?' 
완전한 순종의 결단으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말씀에 순종해 보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의 삶 속에는 정말 수많은 간증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순종의 결단이 없으신 분들은, 홍해처럼 다 갈라지고 나면 
그러면 지나가긴 하겠지만 
이런 분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처럼 
'들어가기만 하면 주겠다'고 해도 못 들어가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