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그분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역사를 베푸시는 분, 특별히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첫 번째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그 표적이 나타내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 그 믿는 순간에 이 아이가 나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또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 번째 표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38년된 병자가 등장하고, 그가 고침을 받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점을, 독자인 우리들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것일까요?
◑본문 해석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이 병자에 대한 정보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38년된 병자' 그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38년은 유대인들에게 귀에 익숙한 숫자입니다. 신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을 경험하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시내산으로 가기까지 2개월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시내산에서 한 11개월 넘게 거기에 머물렀죠.
그리고 시내산을 떠나 가데스바네아 까지, 그래서 출애굽 이후 다 합하면 약 2년 정도가 됩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열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로 그때부터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진입까지 38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본문 요5장에 나오는 38년된 병자를 통해서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을 체험했던 자였어요. 그리고 거룩한 율법을, 그 어떤 민족도 받지 못했던 거룩한 율법을 소유하고 있었던 자였어요.
그러나 그들은 38년 동안이나 광야를 지났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도 여전히 그 내적인 변화나,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하나님 앞에서 병든 삶을 살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고
그래서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그 광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그 병자 역시 (베데스다 연못 가의) 기적을 체험(구경)하고 율법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병든 자로 누워있는 광야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주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또 어떤 자입니까? 그는 '오늘날의 교회의 상태'를 보여주는 자이기도 합니다.
2절을 보시면, 38년 된 병자 라는 것과 함께, 그에게 붙어있는 여러 수식어들이 나옵니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이 38년 된 병자가 지금 '예루살렘 안에 있다' 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곳이죠. 그러니 38년된 병자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습니다.
근데 특별히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문인 양문, 양문은 제사용 양들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양이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죠. 그러니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던 곳입니다.
거기에다 그 병자가 누워있었던 곳의 이름은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38년 된 병자는, 하나님의 나라 예루살렘 안, 끊임없이 제사와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자비의 집'에 *실제로는 연못 있으면서도
변화를 받지 못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누워서 병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당시 이스라엘, 오늘날의 교회,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가 어떤 자인지 배경을 살펴봤다면,
▲이제 그가 38 년 동안이나 누워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의 문제입니까?
오늘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거룩한 율법을 가지고(알고) 있으면서도 병든 삶을 살아가던 당시 이스라엘과 같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인 예루살렘안에서 은혜가 시혜되고 있는 베데스다(연못)에 있으면서도 무력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은 그를,
주님께서 만나주셨고 그와 대화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1. 그가 그렇게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병든 자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 첫 번째는 "주인/주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어요. 자 그런데 문제는 7절입니다. 병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뭐라고 대답하면 됩니까? '아멘!' 하면 되잖아요. '네' 하면 됩니다.
그런데 병자가 뭐라고 합니까? '주여, 연못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그러니 지금도 38년 동안이나 누워있는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 그가 결국은 지금도 뭘 하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께 '저를 고쳐주십시오' 라고 고침의 주체를 주권이 그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내가 저기 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체가 누구입니까? 여전히 자기인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력한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무엇이냐면 자기는 그 율법을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해 주십시오!' 라고 말해야 돼요. 그 분의 은혜에 부탁해야 되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주여, 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으면 돼요.
그런데 '내가' 저기 내려갈 수 있도록.. 그러니 그는 고침을 원했던 것이 아니고,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내가 저기 갈 수 있도록 주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거들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주체/주인이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내가 가도록, 내가 움직이도록.. 예수님은 나를 도와주는 분 정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내게 도움주시는 분 정도고, 내가 여전히 내 인생에 주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에 주인인 삶, 이것이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죠.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도와주실 주님으로! 그러니까 그분이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분을 통해 일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죠.
나 인생은 내가 일해 나가고, 그분이 내 일을 도와주시는 분, 그러니까 주가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를 통해 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 나는 여전히 은혜 안에, 하나님 나라에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38년 째 누워있는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가요?
그것은 바로 내가 여전히 내 삶에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주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를 통해 내가 일하려고 하는 이것! 이런 신앙이 참으로 무서운 것인데요, 이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속에 깊이 박혀있습니다.
△사실 제가 오늘 아침에도 이 사실을 깨달았는데 저는 매주 토요일 저녁쯤 되면 긴장이 돼요. 되게 무거워요.
제가 주일 아침에 눈을 딱 뜨는 순간 새벽에 일어나면 마음이 항상 짓눌린 것 같아요. 저는 '왜 그럴까?' 지난 삼 년 동안 그러고도 이유를 잘 몰랐어요.
근데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오늘 아침에 깨달았어요. 주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셔요.
'네가 나를 통해 일하려고 하냐, 내가 너를 통해 일하는 거냐?' *주체가 누구냐?
주일날 아침이면 저는 기도하죠.
'주여, 오늘도 성도들이 거룩한 주의 성전으로 올라오게 해주시고 오늘도 성도들의 귀를 열어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주여 오늘도 말씀을 들음으로써 주와 만남으로 영혼이 회복되게 하시고
주여 오늘도 구역 모임을 통해서 마음의 교통이 있게 하시고 주여 성도들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오늘 주일이 충분한 안식이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주를 통해서 일하려고 했지, 주가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 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언제나 주체는 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잘 되면 교만해지고, 안 되면 우울해지는 것이겠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주여, 나를 저기에 (물이 동할 챤스에) 데려가 주시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게 나를 저기 데려가 주소서..'
이렇게 여전히 내 삶의 주체는 '나'이고 주님은 그저 '도우미'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결국은 내 영혼을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엎어지게 만드는 것이죠. 이것은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많이 넘어지죠. 많이 우울해하고 많이 공황장애를 경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무게를 내가 짊어지고 있어요. 내 인생의 길을 내 힘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그가 38 년 동안이나 이런 삶을 살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주인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보면 무엇이냐면
△2. 바로 자기 생각 때문입니다. 주인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 38년 된 병자의 생각을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꼭 마치 오랫동안 5천년의 샤머니즘을 가지고 있는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뭐 천사가 내려오면.. 언제 내려올지 모르겠는데 영적인 존재가 내려오면 물이 막 움직인데요. 그러면 거기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그러니까 지금 그의 생각이 뭐에 물들어 있는가 하면,
세상적, 샤머니즘적 생각에 물들어 있다 라는 거예요.
이 세상적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오늘 이 본문처럼 천사가 가끔 내려온데요. 그래서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면 났는데요. 뭐 '전설따라 삼천리'같은 미신적 믿음이, 하나님 나라 안에도 있더라는 거죠.
2) 또 하나 세상적인 생각은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는다.. 이것은 세상적 가치, 세속적 가치입니다.
세상은 빠르고 힘 센 자가 이겨요. 자원이 많은 자가 이겨요. 성공한 자가 이겨요.
그래서 우리도 '아유~ 그래도 좋은 대학 나와야지.. 그래도 돈이 있어야지.. 그래도 일등해야지..'
그러니까 신앙은 신앙이라는, 우리 속에 깊이 파고든 세속적 생각, 그래서 그 38년 된 병자도 지금 '내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야지, 그래야 나올 수 있다' 라는 이 세상적 생각, 세속적 경쟁심이 그를 붙잡고 있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력하고 무기력한 이유 중 하나는 또 어떤 생각이 사로잡혀 있는가 하면 '율법주의적 생각'에 물들어 있다 라는 것을 보게 돼요.
(이것은 38년된 병자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에게 나타난 점)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안식일이라는 것은 모든 율법의 대명사입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서 계세요. 빛이 비취면 뒤에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림자를 보면,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은 희미합니다. 완전하지 않단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쭉 비춰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율법을 우리가 보면서,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죠. 그런데 실체가 오셔서 율법에서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던 그 부분들을 지금 가르쳐주고 있는 거에요. 안식일에 대해서.
안식일을 진짜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정말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인지..
그런데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율법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종교적인 영역에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 라는 생각,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건 안식일날 멀리 움직이면 안 되고, 자리를 들고 다니면 안 되고, 이때는 병을 고쳐도 안 되고, 이삭을 비벼서 먹어도 안 되고...
이러한 것들은 성경에도 없는, 그저 그림자를 보고서, 오해한 것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이런 것이야, 말씀은 이런 것이고, 봉사는 이런 것이야. 찬양은 이런 것이야!' 우리는 그림자를 가지고서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어떤 율법주의적인 어떤 생각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에 찾아오세요. 그러면서 우리의 생각에 계속 도전을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이냐면, 딱 생각이 고정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딱 찾아오시고 난 이후부터 이제 그 생각에 반하는 것들을 만나게 하세요. 그런 상황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그 상황들을 딱 맞닥뜨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딱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그는 틀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나는 맞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다름'으로 받지 않고, '틀림'으로 받아들여요. 물론 진짜 상대가 틀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틀렸는지/ 아닌지를 가늠해봐야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점검하는 생각이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상황을 만나게 하실 때에 거기서 나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생각이 맞는 것인가, 지금 이것이 맞는 것인가? 먼저 나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마귀적인 생각은 아닌지, 혹은 세속적인 생각이 아닌지 내 생각을 한번 점검해봐야 돼요.
△4.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배우는 생각"이어야 한합니다.
이 바리새인들과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안식일에 대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 있었어요. 근데 주님이 자꾸 도전하시는거에요. 이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분이 실체에요. 지금 그분이 '안식일은 이렇게 지키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예수, 네가 지금 옳지 않다' 라고 말해요.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8절에 가면,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러한 상황 속에 우리가 이제 맞닥뜨리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우리가 겸손하게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자세를, 개혁주의 교회, 장로교회의 표현으로 말하면 '개혁되는 생각'을 가지기를 주님은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안식일의 주인을 보고서, 안식일을 범했다 라고 말한 거예요.
△우리가 지난주에 만났던 안상혁 교수님, 제가 그분을 보면서 성경을 보는 눈이 좀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어요?
말씀을 어떻게 통으로 꿰는 언약을 가지고서 그렇게 보실까? 제가 그분하고 이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까 한 삼일 정도 계속 식사도 같이 했었잖아요.
그분과 대화를 하다 보니까 제가 한 가지 깨닫게 된 게 있어요. 이 분이 공부도 참 많이 하셨잖아요. 그런 분들의 대부분 특징은 뭘까요?
대부분은 자기가 조금 알면,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고 더 이상 개혁되려고 하지 않아요. '내가 성경을 다 아는데 누가 나를 가리킨다는 말이야?' 근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죠.
제가 이분의 특징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이분이 학교에 있는 교수님들을 전부 다 되게 존경할만한 분으로 이야기 하더라고요. '어떻게 그럴까?'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뭔가를 그들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몸에 벤 거예요. 계속해서 배우려는 자세, 이것이 바로 계속 개혁되어져 가는 '개혁주의'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미덕은 '변화'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변함 없으심'에 있어요. 그분은 변함이 없으셔야 돼요. 그러나 저와 여러분의 미덕은 '변화'입니다. 변화/개혁되어야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근데 뭐가 변해야 될까요? 일단 주인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되겠죠. 실제적으로 내 생각이 바뀌어야 돼요. 우리는 절대 내 생각을 굽히지 않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력하고 무기력하고 병든 자의 삶을 살아가겠죠.
마귀적인 생각속에 내가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세속적인 생각 속에 내가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일부 목사님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그 중에 많은 분들이 세속적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교회의 성도가 몇 명이어야 되는데, 몇 년이 지나도 늘지도 않고 교회관이 그러니까 마치 물에 먼저 들어가면 낫는 것처럼 *요5장 본문 교회의 부흥이 숫자에 달려 있는 것처럼, 혹은 어떠한 크기에 달려있는 것처럼 그런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무기력해지겠죠.
많은 교회 봉사자들이 율법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아요. 그래서 그것에 반하는 어떠한 것들을 만나게 되고 맞닥뜨리게 되면 거기에서 배우려 하지 않고, 비판부터 먼저 하죠.
제가 이번에 사경회를 지나면서 장로님들이 '마지막 날 사진을 한번 찍읍시다' 하더라고요. 부흥회 기념 전교우 사진을 찍는다고 광고하면, 빠지는 성도들은 좀 신경이 쓰이겠죠. '그래도 좀 독려를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장로님들의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제 평소 스타일은 '나는 그런거 절대 안 한다' 였습니다. 근데 전화를 끊고 한번 생각해 봤어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야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성도의 교재는, 그런 것들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집회 마지막 날, 단체 사진을 찍었고요.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 맞추지, 그런 인위적인 거 안 한다'는 제 생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38년된 병자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 38년 된 병자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주인도 바뀌지 않았어요. 생각도 바뀌지 않았어요. 이 병자가 고침을 받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요?
여러분 38 년간 광야를 지나면서도 변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아가 보실까요? 그들은 무엇이 필요합니까? 어떻게 하면 그 광야 방황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겁니까?
민20:1~4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고 있어요.
자 그런데 오늘 이 본문과 똑같은 장면이 출17장에 똑같이 등장해요. 근데 그때는 시점이 달라요. 출17장 시점은 홍해를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유월절의 기적을 체험하고 홍해를 건너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르비딤에서 그들이 물이 없어 가지고 막 불평하고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하거든요. 근데 그때도 모세와 다투었어요.
근데 그때 하나님께서 군말 없이 반석을 쳐서 물을 내주셨어요. 자 그런데 지금 이제 똑같은 장면이 어디에서 펼쳐진다고요?
그때로부터 38 년이 지나고 나서, 이제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똑같이 지금 모세를 향해서 돌을 던지려고 하면서, 전혀 변화되지 않아서 38 년 동안 그냥 환자로 있었던, 38 년 된 병자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38 년이 지나도 그대로예요.
민20:10~12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38 년 동안 병자였고 지금도 병자인 그들을 뭐라 하시는 것이 아니고 분노했던 모세를 향해서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향해서 분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야 38년 된 병자 같은 이스라엘이, 38 년이 지나고 40년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실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느냐? 그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사건을 허락했거늘 근데 너가 그들을 향해서 '반역한 너희여!'라고 말하면서 내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어.
38년이 지나면 너희가 나아질 거라고?, 나와 함께 하면 너희가 변할 거라고? 너희가 훈련을 받으면 변할 거라고? 38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야, 그건 오직 은혜야!'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 무엇입니까? 은혜인거죠.
▲오늘 본문도 한번 보십시오. 그들과 똑같이 38 년 동안 병자인 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근데 이 38년 된 병자의 치유에 특징이 있어요.
1) 첫번째는,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6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셨다 라는 거죠.
그가 38 년 동안 너무 고생했으니까 '이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라고 주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이 아니라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찾아오셨다.. 라는 거에요.
2) 자 그리고 이어지는 7~8절을 보면, 그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중에 하나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가장 들어야 될 말이 '네가 낫고자 하니?' '너 정말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고 달리고 싶으니?' '너는 주님 안에서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으니?' 라고 물으셨어요.
:7~8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뭐죠? 기회가 왔는데 놓쳐버릴 뻔했습니다. 왜요? '제가 낫고자 합니다' 하는 한 마디만 하면 돼요. 그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엉뚱한 걸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물에 좀 넣어주십시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아직 멀었네.. 주인이 안 바뀌었네..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즉시 구할 때까지 내가 기다려야지..' 라고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못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낫게 해주셨다 라는 거죠.
그리고 이 병자를 치유하는 것의 특징이 무엇이냐면 13절에, 심지어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군지도 몰라요.
사람들이 물었어요. '너를 고쳐주고, 너 보고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그는 '난 모르겠다!'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주님이 고쳐주셨어요.
심지어 14절을 보시면 그 병의 근원이 어디에 있었는가 보면, 38 년 동안 그가 그렇게 병 중에 있었던 것은 '죄 때문'이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4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런데 그가 회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쳐 주셨어요. 38 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이 표적에서 드러나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찾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신 주님 잘못 구하는데도 바른 것을 주시는 주님 누군지도 모르는 데도 고쳐주시는 주님 죄를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고쳐주시는 주님 바로 은혜의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은혜! 그거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은 '주님은 은혜로 일하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6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볼까요?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6
38년 된 병자 그 사람을 보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아유 저 38 년 동안이나 환자인 저 사람..' 이라고 자기 자신과 그 환자를 구별했을 거예요.
오늘 이 본문을 보는 저와 여러분도 38 년 동안이나 누워있는, 무기력하고 무력하고 병든 저 사람과 나를 구별하고 분리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38 년 된 환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 아닙니까?
기적을 체험하고, 거룩한 율법을 가지고 있고, 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하나님 나라 '자비의 집' 안에 있으면서도 *베데스다 하나님 앞에는 무력하고 무기력하고 병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근데 6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 그분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6b
오늘 이 질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지는 질문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딱 한 가지입니다. 내가 그동안 잘못 구했더라도.. 낫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더 이상 나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환자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뛰고 달리며 주께 영광 올려 드리고 싶은 그러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라고 낫고자 하는 바람만 있다면 그 바람에 주님이 응답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