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다윗이 굴속에서 발을 가리우러 들어온 사울 왕의 옷자락을 벤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다윗을 살려주신 하나님!', 사람들 눈에는 '사울을 살려준 다윗'만 보이겠지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사실 그 '다윗을 살려주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거죠.
그래서 사울을 살려준 다윗, 또한 다윗을 살려주신 하나님,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다윗이 광야에 계속 있었다 이게 첫번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인데요.
삼상24:1 '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가 기브아로 돌아왔습니다.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죠. 앞부분의 내용과 이어서 보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잔당을 뒤쫓아서 열심히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 라는 첩보를 알려줍니다. 엔게디는 '염소의 샘'이란 뜻입니다. 실제로 들염소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입니다. 들염소들은 아주 지형이 험준한 곳에 삽니다.
엔게디는 사해의 서쪽 해안의 중부지역에 있는 천연 요새입니다. 오아시스가 있는 지역이고, 이곳에는 숨을 만한 동굴들이 굉장히 많은 지역입니다. 다윗이 지금 그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죠.
그 말을 듣자마자 사울은 다윗 추격을 나섭니다. 사울의 인생을 묵상하면서 참 피곤한 인생입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국사를 챙길 일도 참 많고, 또 외적으로 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그 일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다윗이 어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다윗을 잡으러 나서야 되는.. 쉼이 없는 인생입니다.
사실 블레셋과의 전쟁은 국사라면, 다윗과의 문제는 개인사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대규모였고, 매우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성경에 반 절밖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온통 사울의 관심은 다윗을 잡는데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다윗을 잡으러 간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오늘 본문 삼상24장에서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마음 가운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는가요? 그것은 '내가 다윗만 잡으면 된다'는 아주 이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죠.
그러면 정말 사울이, 다윗만 잡으면 그 인생이 행복해질까요? 다윗만 사라지면, 다윗만 잡을 수 있다면, 여러분 사울이 행복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에요.
오늘날 사람들도 마치 사울처럼, 자기의 인생에 불행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조건만 제거되면, 내 인생이 행복해 질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사람의 내면 자체가 불행한 사람은 불행의 조건을 제거해고 제거해도, 또 다른 불행의 조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게 돼 있는 거예요.
사울의 불행은 자기 자신 때문이었죠. 다윗 때문도 아니고 요나단이나 미갈이 다윗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실력 있는 자가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다윗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죠. 사울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 스스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
△회사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저 사람만 사라지면 내가 회사에 다닐 맛이 나겠다..'
여러분의 얼굴 표정들이 많이 공감하는 표정이네요. 그런데 교회 나왔다가, 바로 그 진상인 회사 상사를 교회에서 만나는 일도 있더라고요.
'내 인생에서 내 가족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 집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부모만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죠.
이런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사울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환경 때문이 아니에요. 내 인생의 불행한 과거사 때문도 아니에요.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골치덩어리는 나 자신인 것을 사울도 인정하지 못했고,
여러분 가운데도 인정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지셔야 돼요.
근데 제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제가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럼 이 상황에서 하나님, 다윗의 이 애매한 긴장상태를 왜 이렇게 오랫동안 끌고 가십니까?'
그것도 10여 년 이상 끌고 가셨잖아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어느 한 쪽이 물러서면 좋은데 사울은 물러설 생각이 없고, 그럼 다윗은 어떤가요?
'나도 왕이 되기로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기름부으셨으니까 나도 이 자리에서 떠날 수 없다.' 다윗이 그랬나요? 아니죠.
다윗은 유대의 땅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면 사울과 갈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 그래서 그는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을 하거나, 모압으로 망명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갓 선지자를 통해서 '유대를 떠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다시 유대 땅 헤렛 수풀로 돌아온 적도 있어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한자리에다 모아놨으니 얼마나 서로 힘들어요. 이렇게 맞지 않는 두 사람이, 왜 한 공간에 있어야 합니까?
△첫째는 사울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죠. 사실 다윗이라는 존재가 사울에게는 눈엣가시였어요.
'저 가시만 내가 뽑을 수 있다면, 저 인간만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내 인생이 평안해질 텐데..'
그런데 그렇게 계속해서 내 눈에 가시인 존재가 뽑히지 않으면 그러면 오히려 '내가 뽑혀야 한다는 사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죠.
원래 사울은 사무엘에게서 '이미 당신의 왕권은 끝났다' 라는 선언을 들었어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울은 받아들이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아예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런 경우라면, 당신이 하나님께 '저 다윗을 좀 제거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이렇게 기도를 한들, 그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응답은 뭐였습니까? 사울에게 '너가 나가라!' 였어요. '너가 내려와라' 였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좀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요. '뭐? 내가 사울이란 말이냐?'
네, 보통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사울로 묵상하진 않잖아요. 보통은 자기 자신을 다윗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을 스테레오타입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정형화시켜서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말이냐면,
다윗안에도 사울이 있을 수 있고, 사울도 회개하면 다윗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각자안에는 사울도 있고, 다윗의 모습도 있습니다. 둘 다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윗도 되고, 사울도 되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애매한 시간을 하나님이 사울에게 주고 계신 것은, 그를 서서히 괴롭히시는 게 아니고요. 사울이 명예롭게 내려올 수 있는 기회를, 아직도 하나님이 주고 계신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윗이 없어져야만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울 자기가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평안해진다는 것을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다윗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가드 든지 모압이든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죠.
여기 유대 광야에 있으면서, 사울의 턱밑에서 사울도 불안하고 다윗도 불안하고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곳에 있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 그러시는가요? 마찬가지죠. '다윗아, 너의 인생을 보호해주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어느 (이방) 민족이 아니고, 성이나 요새가 아니라, 바로 나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걸 하나님이 그에게 끊임없이 알려주시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가 곧 잡힐 것 같아요. 그런데 잡히지 않아요.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아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어요. '목사님, 저는 곧 죽을 것 같아요. 지금 상황이 너무 숨이 차고, 목이 조여 오는 것 같고, 인생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이제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제가 그럴 때 좀 야속하지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냥 죽어버리라고.. 그래야 하나님이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그 위기에서, 그냥 죽기를 각오하고 아래로 떨어지면 마치 독수리 새끼가 날개짓을 하며 나는 법을 배우듯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게되는 돌파구가, '죽는 길을 택할 때'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다윗을 하나님이 계속 광야에서, 죽음의 위기를 통과하게 하는 것은, 그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죽을 위기로 걸어들어가서, 죽음을 극복하고 죽을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죽을 위기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므로 자기는 안전하다는 것을.. 실습으로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는 거죠. 시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네 저는 정말 진심이에요. 그래서 살려고 하지 말고, 죽는 길을 택하라고 권면합니다. 근데 사람들이 그 포인트까지 내려가려고 하지 않죠. 언제나 안전지대에만 머무려고 하죠.
그래나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내가 더 이상 스스로 조종할 수 없는 그런 상황까지 들어가면 그때는 하나님이 일 하십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그 상황까지 내려가는 게, 우리는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삶의 상황에 쫓기는 삶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마귀에게 한 번 등을 보이기 시작하면, 더 무섭게 나를 공격하러 좇아옵니다. 마귀에게 절대 등을 보이면 안 돼요!
다윗은, 현재의 어려움을 인간적으로 피하려고 동쪽 모압 땅으로 갈 수도 있고, 서쪽 가드로 갈 수도 있고, 다른 데로 다 갈 수 있어요. 북쪽 메소포타미아로 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유대 광야 안에, 이 트레이닝 캠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거기서 정말 자기가 사울에게 '당신이 벼룩을 잡으러 왔느냐?'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삼상24:14 정말 벼룩 뛰듯이 여기 저기로 뛰어다니면서,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살게 만드셨어요.
하나님이 일부러 다윗을 괴롭히는 게 아니고요. 다윗에게 지금부터 훈련하시는 게 한 가지죠.
'네가 앞으로 왕이 되었어도, 오직 의지할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시다. 너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은 그 누구가 아니라, 그 어느 외국 나라가 아니라 그 어떤 강력한 군대나 성읍이 아니라, 바로 내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는 것이다!' 이걸 경험시키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이 죽을 상황이 되면, 바로 그 죽음의 자리를 향하여 그냥 들어가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구나!' 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하게 되면.. 삶이 너무 자유로워지고, 담대한 용사가 되는 거죠!
▲그래도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너무나 힘들지 않은가요? 여러분, 다윗이 십 여년을 기다렸어요. 근데 십여 년을 기다린 게 힘들다기보다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게 더 힘든 거죠. 끝 날이 안 보이는 괴로움! 이 길의 끝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여러분, 기다리다가 힘들어서, 중간에 얼마나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뛰쳐나갑니까. 성경 인물 중에서, 자기 인생에 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중간에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로 족합니다.'
하나님은 '괜찮아, 내가 진짜 아들을 준다니까. 아들 줄께 넌 믿음만 보여다오!'
또 시간이 지났어요. 아브라함이 못 참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저는 그냥 이스마엘로 만족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아들 준다니까!' 그걸로 25년을 기다리게 만드셨어요.
여러분 무슨 말씀이냐면, 기다림은 정지해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연단, 성숙시키는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의 시간을 '내 인생이 정지해버렸구나' '아니면 후퇴하고 있구나, 아니 허비하고 있는 시간이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기다리라, 믿음이 성숙해지는 시간을 가지라'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다윗에게 주시고자 하는 훈련, 그것은 '내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훈련' 이게 굉장히 필요한 훈련이죠.
내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훈련! 뭐 이런 훈련이 있나요?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장차 다윗이 왕위에 오르면 정치적인 모략과 압박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골리앗이나 블레셋 군대들은 칼로 베면 되지만 사울과 같이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이런 사람들은 손대면 안 되거든요. 그냥 쳐다보고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손 대실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훈련입니다) 왕위에 올라서도, 자기 마음대로 칼을 휘두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탑 리더가 되면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탑 리더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해요.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마음대로 할 수 있죠. 그러나 그가 만약에 왕위에 올라서,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법을 무시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여론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칼을 휘두른다면, 지휘권을 남용한다면 그도 또 다른 폭군이 되겠죠.
지금 마음대로 칼을 휘두르는 자가 되지 말아야만 앞으로 왕이 되어서도 그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술고단자들은, 사적 이유 때문에 무술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인격을 먼저 배우지 않습니까. 안 그러면 그 무술이 치명적이기 때문이죠.
그는 인생의 악셀을 밟고 싶지만, 하나님은 브레이크 밟는 연습만 계속 시키고 계시는 거예요. 십여년 동안! 십여 년 동안 브레이크 밟는 연습만 하는 거예요. '죽이면 안 돼, 죽이면 안 돼!' '이래도 나는 정변을 일으키면 안 돼!' 이 생각만 매일 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여러분,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을 한 번 시원하게 질주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왜 달릴 수 없게 만드시느냐고 질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브레이크 밟는 훈련을 하는 시간이에요. 이런 훈련은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의 20대, 30대는 브레이크 밟는 연습을 하는 시기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해야 되고, 상사에게 순종해야 되고, 리더십에 복종해야 되고,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가 이걸 계속 해야만 하는가?'
네, 해야 합니다. 그걸 하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명절에 집에 가면 또 압박이 들어오겠죠. '언제 결혼할 거냐? 너는 풀 타임 직장은 도대체 언제 되는 거냐?' 그러면 이제 막 그렇게 결심을 하고 갔지만, 속에서 울분이 치밀어 오르면서 '왜 날 못 잡아먹어서 난리냐?' 폭발합니다.
마치 다윗처럼 끊임없이 사방으로 압박을 당하고 내가 갈 곳은 없고...
여러분 그때 화내지 마세요. 부모에게 쏟아놓지 마세요. 여러분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의 부모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기분 안 좋을 때 마구 다 쏟아 놓잖아요. '내 가장 힘든 걸 건드려?' 나도 지금 막 결혼문제, 직장 문제로 스트레스가 꽉 찼는데, 누가 자꾸 그걸 건드린단 말이죠.
그럼 바로 터트려버리고,
자기를 브레이크 밟지 않으면, 그 훈련을 안 쌓으면, 지금은 당신의 편안한 자기 가족에게, 자기 부모에게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더 편안한 당신의 배우자를 만나서는, 여러분 날마다 폭발하기 시작할 겁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완전히 다 쏟아부어버리는 거죠. 그럼 관계가 금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정은 매우 불행해지기 시작할 거에요.
지금 당신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가족에게, 부모에게 잘 대할 수 없다면, 브레이크 잡는 훈련을 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나중에 결혼해서 인생이 마냥 행복해질까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지금 절제훈련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여러분이 더 편안하고 만만한 사람을 만난 상태에서는 폭언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갈수록 현대사회의 가정폭력이 심각해져 가고 있어요. 청년들은 이십 대, 삼십 대가 질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야생마가 힘이 넘칠 때 달려야지, 이 에너지를 어딘가에 쏟아부어야지..
그런데 세상이 그 야생마를 달리게 놔두지를 않아요.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마구 달리게만 놔두지 않으세요.
고삐를 잡고 컨트롤 부터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달리는 힘이 좋아도, 방향이 잘못되면 그 인생을 망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컨트롤 훈련만 받아야 합니까?
내가 스스로 브레이크를 잡는 법을 배울 때까지 입니다. 여러분 속으로 '하나님의 손에 내 인생의 고삐를 맡겨드리겠습니다' 결단하세요.
'내가 어서 빨리 준마가 되어서, 하나님 달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야생마가 아니라, 어서 명마가 되고 나서, 하나님 내가 달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마음 가운데 그런 기대감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이 유대 광야라는 펜스 안에 가둬두고 지금 준마 만드는 훈련을, 하나님은 시키고 계신 거예요.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의 부르심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엉뚱한 짓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당신에게 그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삼상24:2~3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뽑은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들염소 바위근처로 갔어요. :2 거기 동굴이 하나 있는데, 사울이 볼 일을 보려고 들어갔는데, 마침 그 굴의 깊은 곳에는 다윗과 그 일행이 이미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역에는 사울이 '발을 가리러 갔다'고 했고, 개역개정에는 '뒤를 보러 갔다'고 했는데,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잠을 자다' 와 '용변을 본다' 입니다.
아마 용변을 볼 때, 혹시나 사람들이 보게 될 까봐 자기 옷자락으로 발을 가리겠죠.
△오늘 본문의 상황이, 사울과 다윗의 인생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좇고 있는데, 오히려 다윗이 사울의 등 뒤에 있었어요.
꼬리잡기 게임을 하다보면 그런 일이 생기잖아요. 내가 상대방의 꼬리를 잡겠다고 좇아가고 있었는데 보니까 상대방이 내 꼬리를 잡으려고, 내 뒤에서 다가오는 것이죠.
사울이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지금 사울이 한참 다윗을 좇고 있는데, 다윗이 사울의 등 뒤에서 사울을 노리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역전됐죠.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냐면 지금 사울은 다윗이 보이지 않지만, 다윗은 사울이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밝은 빛속에 있다가 컴컴한 굴 안에 들어오면, 굴 속이 처음에는 안 보이는 거예요. (극장에 늦게 들어가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되죠) 그러나 이미 컴컴한 굴 속에 있던 다윗은, 사울이 너무 잘 보이는 거죠.
사울은 자신이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주도권을 다윗에게 내어주는 꼴이 되었어요.
다윗은 자신이 굴 안에 갇혀 있다(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사울의 등 뒤에서 칼을 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굴 안에 숨는 상황이 되면 '내가 이러다 죽지 않나?'
게다가 사울이 이 먼 곳 엔게디까지 찾아왔단 말이죠. 군사들이 굴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요. 그러면 다윗은 굴안에서 '이제 끝났구나' 이런 생각을 당연히 하는 것이죠. 굴은 Dead end, 막힌 골목이잖아요.
근데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상황을 역전시키신다는 거예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건지시잖아요! 할렐루야!
청년 여러분, 내가 굴 안에 있을 때 나는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굴 안에 있을 때, 원수가 나를 죽이려고 이곳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라 사울의 칼날이라는 폭풍이 지나가기까지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기 위하여, 이 굴 안에 나를 집어넣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이 굴안에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등 뒤를 보고 있었어요. 만약에 사울이 피곤해서 잠시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면 다윗을 좇아다니느라 주야로 잠 못 이루고 고생하는 불쌍한 사울을 보고 있는 것이고요.
만약에 사울이 용변을 보고 있는 것이라면, 사울은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저는 이 장면이, 우리 인생과 다윗의 인생을 너무나 특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돼요. 사울이 다윗을 좇아다니고 있고, 다윗은 피해서 도망다니는데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인생을 너무나 빤하게 잘 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난 인생,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불쌍한 인생, 마치 벼룩을 사냥하듯 자신을 매일같이 좇아다니지만 실패를 거듭하는 인생, 마음의 평안이 없는 인생, 그 불쌍한 사울의 인생이.. 다윗에겐 훤히 다 보이는 것이죠.
그런데 사울의 눈에는 다윗이 보이지 않아요. 소문만 들리지, 형체가 보이지 않아요. 신출귀몰한다는 소문만 들릴 뿐입니다.
문제는 사울의 눈에 다윗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인생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도대체 다윗이 어떤 인생을 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그 정도로 무용이 탁월하고, 그 정도로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고 그 정도로 왕이 된다는 예언까지 받았다면 그냥 자기를 향해 쭈욱 밀고 들어올 법도 한데, 다윗은 전혀 밀고 들어오지 (도전하지) 않아요.
제 상상이지만, 사울이 막 악몽을 꿀 것 같아요. 밤마다 악몽을 꾸다가 깨는 장면이 머리에 그려져죠. 다윗의 칼날 앞에, 자기가 궁지에 몰려 있는 상태 (지금 동굴 속이 바로 그런 상태죠)
한밤중에 누워서 자고 있는데, 다윗이 자기의 목 아래 턱밑에 칼을 내밀고 있는 그런 상황, 흠칫놀라서 사울은 잠을 깨는 거죠. 그런데 다윗은 눈 앞에 없어요. 늘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날마다 환청이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 앞에 나타나질 않아요. 세상의 이치대로, 세상의 소문대로 라면, 그가 나타나 자기를 공격해야 정상입니다. 사울 자기를 제거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타나지 않아요. 왠줄 아십니까? 다윗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는 것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오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거예요. 왕이 된다는 비전을 주셨고, 꿈도 주셨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목적도 없이, 내일의 계획도 없이, 하나님이 자기를 방황하게 만드시면 그냥 방황하는 거예요. 죽으라고 하시면 그냥 죽는 거예요.
나를 살리실 책임은 그분께 있는 것이고 나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은 그분의 손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윗은 그냥 자기 목숨, 자기 인생을 내려놓고 사는 거예요.
육신의 안목이 아니라, 믿음의 안목으로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안목을 포기한 사울에게는 다윗의 인생이 보이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