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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4장 1~22 내 손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훈련

LNCK 2022. 2. 8. 10:09

◈내 손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훈련           삼상24:1~22           2013.09.16. 출처

본문은 다윗이 굴속에서 발을 가리우러 들어온 사울 왕의 옷자락을 벤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다윗을 살려주신 하나님!', 
사람들 눈에는 '사울을 살려준 다윗'만 보이겠지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사실 그 '다윗을 살려주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거죠.

그래서 사울을 살려준 다윗,
또한 다윗을 살려주신 하나님,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다윗이 광야에 계속 있었다
이게 첫번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인데요. 

삼상24:1 '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가 기브아로 돌아왔습니다.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죠. 
앞부분의 내용과 이어서 보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잔당을 뒤쫓아서 열심히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 라는 첩보를 알려줍니다. 
엔게디는 '염소의 샘'이란 뜻입니다. 실제로 들염소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입니다. 
들염소들은 아주 지형이 험준한 곳에 삽니다.

엔게디는 사해의 서쪽 해안의 중부지역에 있는 천연 요새입니다. 
오아시스가 있는 지역이고, 이곳에는 숨을 만한 동굴들이 굉장히 많은 지역입니다. 
다윗이 지금 그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죠. 

그 말을 듣자마자 사울은 다윗 추격을 나섭니다. 
사울의 인생을 묵상하면서 참 피곤한 인생입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국사를 챙길 일도 참 많고, 또 외적으로 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그 일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다윗이 어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다윗을 잡으러 나서야 되는.. 쉼이 없는 인생입니다. 

사실 블레셋과의 전쟁은 국사라면, 다윗과의 문제는 개인사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대규모였고, 매우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성경에 반 절밖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온통 사울의 관심은 다윗을 잡는데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다윗을 잡으러 간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오늘 본문 삼상24장에서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마음 가운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는가요? 
그것은 '내가 다윗만 잡으면 된다'는 아주 이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죠. 

그러면 정말 사울이, 다윗만 잡으면 그 인생이 행복해질까요? 
다윗만 사라지면, 다윗만 잡을 수 있다면, 여러분 사울이 행복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에요. 

오늘날 사람들도 마치 사울처럼, 자기의 인생에 불행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조건만 제거되면, 내 인생이 행복해 질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사람의 내면 자체가 불행한 사람은 
불행의 조건을 제거해고 제거해도, 또 다른 불행의 조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게 돼 있는 거예요. 

사울의 불행은 자기 자신 때문이었죠. 다윗 때문도 아니고 
요나단이나 미갈이 다윗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실력 있는 자가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다윗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죠. 
사울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 스스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

△회사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저 사람만 사라지면 내가 회사에 다닐 맛이 나겠다..' 

여러분의 얼굴 표정들이 많이 공감하는 표정이네요.
그런데 교회 나왔다가, 바로 그 진상인 회사 상사를 교회에서 만나는 일도 있더라고요. 

'내 인생에서 내 가족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 집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부모만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죠. 

이런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사울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환경 때문이 아니에요. 
내 인생의 불행한 과거사 때문도 아니에요.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골치덩어리는 나 자신인 것을 
사울도 인정하지 못했고, 

여러분 가운데도 인정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지셔야 돼요. 

근데 제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제가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럼 이 상황에서 하나님, 다윗의 이 애매한 긴장상태를 왜 이렇게 오랫동안 끌고 가십니까?'  

그것도 10여 년 이상 끌고 가셨잖아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어느 한 쪽이 물러서면 좋은데 
사울은 물러설 생각이 없고, 그럼 다윗은 어떤가요? 

'나도 왕이 되기로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기름부으셨으니까 
나도 이 자리에서 떠날 수 없다.' 다윗이 그랬나요? 아니죠. 

다윗은 유대의 땅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면 사울과 갈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
그래서 그는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을 하거나, 모압으로 망명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갓 선지자를 통해서 '유대를 떠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다시 유대 땅 헤렛 수풀로 돌아온 적도 있어요.

도대체 하나님이 왜 그러셨습니까? 
다윗은 다윗대로 힘들고, 사울은 사울대로 힘들지 않습니까?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한자리에다 모아놨으니 얼마나 서로 힘들어요. 
이렇게 맞지 않는 두 사람이, 왜 한 공간에 있어야 합니까? 

△첫째는 사울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죠. 
사실 다윗이라는 존재가 사울에게는 눈엣가시였어요. 

'저 가시만 내가 뽑을 수 있다면, 저 인간만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내 인생이 평안해질 텐데..' 

그런데 그렇게 계속해서 내 눈에 가시인 존재가 뽑히지 않으면 
그러면 오히려 '내가 뽑혀야 한다는 사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죠. 

원래 사울은 사무엘에게서 '이미 당신의 왕권은 끝났다' 라는 선언을 들었어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울은 받아들이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아예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런 경우라면, 당신이 하나님께 '저 다윗을 좀 제거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이렇게 기도를 한들, 그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응답은 뭐였습니까? 사울에게 '너가 나가라!' 였어요. 
'너가 내려와라' 였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좀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요. 
'뭐? 내가 사울이란 말이냐?' 

네, 보통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사울로 묵상하진 않잖아요. 
보통은 자기 자신을 다윗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을 스테레오타입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정형화시켜서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말이냐면, 

다윗안에도 사울이 있을 수 있고, 
사울도 회개하면 다윗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각자안에는 사울도 있고, 다윗의 모습도 있습니다. 둘 다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윗도 되고, 사울도 되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애매한 시간을 
하나님이 사울에게 주고 계신 것은, 그를 서서히 괴롭히시는 게 아니고요. 
사울이 명예롭게 내려올 수 있는 기회를, 아직도 하나님이 주고 계신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윗이 없어져야만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울 자기가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평안해진다는 것을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다윗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가드 든지 모압이든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죠. 

여기 유대 광야에 있으면서, 사울의 턱밑에서 사울도 불안하고 다윗도 불안하고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곳에 있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 그러시는가요? 
마찬가지죠. '다윗아, 너의 인생을 보호해주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어느 (이방) 민족이 아니고, 
성이나 요새가 아니라, 바로 나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걸 하나님이 그에게 끊임없이 알려주시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가 곧 잡힐 것 같아요. 그런데 잡히지 않아요.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아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어요. '목사님, 저는 곧 죽을 것 같아요. 
지금 상황이 너무 숨이 차고, 목이 조여 오는 것 같고, 인생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이제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제가 그럴 때 좀 야속하지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냥 죽어버리라고.. 그래야 하나님이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그 위기에서, 그냥 죽기를 각오하고 아래로 떨어지면
마치 독수리 새끼가 날개짓을 하며 나는 법을 배우듯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게되는 돌파구가, '죽는 길을 택할 때'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다윗을 하나님이 계속 광야에서, 죽음의 위기를 통과하게 하는 것은, 
그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죽을 위기로 걸어들어가서, 죽음을 극복하고
죽을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죽을 위기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므로 자기는 안전하다는 것을.. 실습으로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는 거죠.
시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네 저는 정말 진심이에요. 그래서 살려고 하지 말고, 죽는 길을 택하라고 권면합니다.
근데 사람들이 그 포인트까지 내려가려고 하지 않죠. 
언제나 안전지대에만 머무려고 하죠.

그래나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내가 더 이상 스스로 조종할 수 없는 그런 상황까지 들어가면 
그때는 하나님이 일 하십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그 상황까지 내려가는 게, 우리는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삶의 상황에 쫓기는 삶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마귀에게 한 번 등을 보이기 시작하면, 더 무섭게 나를 공격하러 좇아옵니다. 
마귀에게 절대 등을 보이면 안 돼요!

다윗은, 현재의 어려움을 인간적으로 피하려고
동쪽 모압 땅으로 갈 수도 있고, 서쪽 가드로 갈 수도 있고, 다른 데로 다 갈 수 있어요. 
북쪽 메소포타미아로 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유대 광야 안에, 이 트레이닝 캠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거기서 정말 자기가 사울에게 '당신이 벼룩을 잡으러 왔느냐?'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삼상24:14
정말 벼룩 뛰듯이 여기 저기로 뛰어다니면서,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살게 만드셨어요. 

하나님이 일부러 다윗을 괴롭히는 게 아니고요. 
다윗에게 지금부터 훈련하시는 게 한 가지죠. 

'네가 앞으로 왕이 되었어도, 오직 의지할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시다. 
너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은 그 누구가 아니라, 그 어느 외국 나라가 아니라 
그 어떤 강력한 군대나 성읍이 아니라, 바로 내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는 것이다!' 
이걸 경험시키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이 죽을 상황이 되면, 바로 그 죽음의 자리를 향하여 그냥 들어가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구나!' 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하게 되면.. 삶이 너무 자유로워지고, 담대한 용사가 되는 거죠!

▲그래도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너무나 힘들지 않은가요? 
여러분, 다윗이 십 여년을 기다렸어요. 
근데 십여 년을 기다린 게 힘들다기보다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게 더 힘든 거죠. 
끝 날이 안 보이는 괴로움! 이 길의 끝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여러분, 기다리다가 힘들어서, 중간에 얼마나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뛰쳐나갑니까.
성경 인물 중에서, 자기 인생에 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중간에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로 족합니다.' 

하나님은 '괜찮아, 내가 진짜 아들을 준다니까. 아들 줄께 넌 믿음만 보여다오!' 

또 시간이 지났어요. 아브라함이 못 참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저는 그냥 이스마엘로 만족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아들 준다니까!' 
그걸로 25년을 기다리게 만드셨어요. 

여러분 무슨 말씀이냐면, 
기다림은 정지해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연단, 성숙시키는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의 시간을 '내 인생이 정지해버렸구나' 
'아니면 후퇴하고 있구나, 아니 허비하고 있는 시간이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기다리라, 믿음이 성숙해지는 시간을 가지라'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다윗에게 주시고자 하는 훈련, 그것은 
'내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훈련' 이게 굉장히 필요한 훈련이죠. 

내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훈련! 
뭐 이런 훈련이 있나요?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장차 다윗이 왕위에 오르면 
정치적인 모략과 압박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골리앗이나 블레셋 군대들은 칼로 베면 되지만 
사울과 같이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이런 사람들은 손대면 안 되거든요. 
그냥 쳐다보고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손 대실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훈련입니다)
왕위에 올라서도, 자기 마음대로 칼을 휘두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탑 리더가 되면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탑 리더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해요.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마음대로 할 수 있죠. 
그러나 그가 만약에 왕위에 올라서,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법을 무시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여론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칼을 휘두른다면, 지휘권을 남용한다면
그도 또 다른 폭군이 되겠죠. 

지금 마음대로 칼을 휘두르는 자가 되지 말아야만 
앞으로 왕이 되어서도 그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술고단자들은, 사적 이유 때문에 무술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인격을 먼저 배우지 않습니까. 안 그러면 그 무술이 치명적이기 때문이죠. 

그는 인생의 악셀을 밟고 싶지만, 하나님은 브레이크 밟는 연습만 계속 시키고 계시는 거예요. 
십여년 동안! 
십여 년 동안 브레이크 밟는 연습만 하는 거예요. 
'죽이면 안 돼, 죽이면 안 돼!' 
'이래도 나는 정변을 일으키면 안 돼!' 이 생각만 매일 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여러분,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을 한 번 시원하게 질주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왜 달릴 수 없게 만드시느냐고 질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브레이크 밟는 훈련을 하는 시간이에요. 
이런 훈련은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의 20대, 30대는 브레이크 밟는 연습을 하는 시기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해야 되고, 상사에게 순종해야 되고, 
리더십에 복종해야 되고,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가 이걸 계속 해야만 하는가?' 

네, 해야 합니다. 그걸 하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명절에 집에 가면 또 압박이 들어오겠죠. 
'언제 결혼할 거냐? 너는 풀 타임 직장은 도대체 언제 되는 거냐?' 
그러면 이제 막 그렇게 결심을 하고 갔지만, 속에서 울분이 치밀어 오르면서 
'왜 날 못 잡아먹어서 난리냐?' 폭발합니다.

마치 다윗처럼 끊임없이 사방으로 압박을 당하고 
내가 갈 곳은 없고... 

여러분 그때 화내지 마세요. 부모에게 쏟아놓지 마세요. 
여러분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의 부모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기분 안 좋을 때 마구 다 쏟아 놓잖아요. 
'내 가장 힘든 걸 건드려?' 
나도 지금 막 결혼문제, 직장 문제로 스트레스가 꽉 찼는데, 누가 자꾸 그걸 건드린단 말이죠. 

그럼 바로 터트려버리고, 

자기를 브레이크 밟지 않으면, 그 훈련을 안 쌓으면, 
지금은 당신의 편안한 자기 가족에게, 자기 부모에게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더 편안한 당신의 배우자를 만나서는, 여러분 날마다 폭발하기 시작할 겁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완전히 다 쏟아부어버리는 거죠. 그럼 관계가 금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정은 매우 불행해지기 시작할 거에요. 

지금 당신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가족에게, 부모에게 잘 대할 수 없다면, 
브레이크 잡는 훈련을 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나중에 결혼해서 인생이 마냥 행복해질까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지금 절제훈련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여러분이 더 편안하고 만만한 사람을 만난 상태에서는 
폭언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갈수록 현대사회의 가정폭력이 심각해져 가고 있어요. 
청년들은 이십 대, 삼십 대가 질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야생마가 힘이 넘칠 때 달려야지, 이 에너지를 어딘가에 쏟아부어야지.. 

그런데 세상이 그 야생마를 달리게 놔두지를 않아요.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마구 달리게만 놔두지 않으세요. 

고삐를 잡고 컨트롤 부터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달리는 힘이 좋아도, 방향이 잘못되면 
그 인생을 망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컨트롤 훈련만 받아야 합니까?

내가 스스로 브레이크를 잡는 법을 배울 때까지 입니다.  
여러분 속으로 '하나님의 손에 내 인생의 고삐를 맡겨드리겠습니다' 결단하세요.

'내가 어서 빨리 준마가 되어서, 하나님 달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야생마가 아니라, 어서 명마가 되고 나서, 하나님 내가 달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마음 가운데 그런 기대감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이 유대 광야라는 펜스 안에 가둬두고 
지금 준마 만드는 훈련을, 하나님은 시키고 계신 거예요.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의 부르심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엉뚱한 짓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당신에게 그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삼상24:2~3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뽑은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들염소 바위근처로 갔어요. :2 
거기 동굴이 하나 있는데, 사울이 볼 일을 보려고 들어갔는데, 
마침 그 굴의 깊은 곳에는 다윗과 그 일행이 이미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역에는 사울이 '발을 가리러 갔다'고 했고, 
개역개정에는 '뒤를 보러 갔다'고 했는데,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잠을 자다' 와 '용변을 본다' 입니다. 

아마 용변을 볼 때, 혹시나 사람들이 보게 될 까봐
자기 옷자락으로 발을 가리겠죠.

△오늘 본문의 상황이, 사울과 다윗의 인생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좇고 있는데, 오히려 다윗이 사울의 등 뒤에 있었어요. 

꼬리잡기 게임을 하다보면 그런 일이 생기잖아요. 
내가 상대방의 꼬리를 잡겠다고 좇아가고 있었는데 
보니까 상대방이 내 꼬리를 잡으려고, 내 뒤에서 다가오는 것이죠. 

사울이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지금 사울이 한참 다윗을 좇고 있는데,
다윗이 사울의 등 뒤에서 사울을 노리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역전됐죠.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냐면 
지금 사울은 다윗이 보이지 않지만, 다윗은 사울이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밝은 빛속에 있다가 컴컴한 굴 안에 들어오면, 굴 속이 처음에는 안 보이는 거예요.
(극장에 늦게 들어가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되죠)
그러나 이미 컴컴한 굴 속에 있던 다윗은, 사울이 너무 잘 보이는 거죠.

사울은 자신이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주도권을 다윗에게 내어주는 꼴이 되었어요. 

다윗은 자신이 굴 안에 갇혀 있다(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사울의 등 뒤에서 칼을 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굴 안에 숨는 상황이 되면 
'내가 이러다 죽지 않나?' 

게다가 사울이 이 먼 곳 엔게디까지 찾아왔단 말이죠. 
군사들이 굴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요. 
그러면 다윗은 굴안에서 '이제 끝났구나' 이런 생각을 당연히 하는 것이죠. 
굴은 Dead end, 막힌 골목이잖아요.

근데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상황을 역전시키신다는 거예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건지시잖아요! 할렐루야! 

청년 여러분, 내가 굴 안에 있을 때 나는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굴 안에 있을 때, 원수가 나를 죽이려고 이곳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라 
사울의 칼날이라는 폭풍이 지나가기까지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기 위하여, 이 굴 안에 나를 집어넣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이 굴안에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등 뒤를 보고 있었어요. 
만약에 사울이 피곤해서 잠시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면 
다윗을 좇아다니느라 주야로 잠 못 이루고 고생하는 불쌍한 사울을 보고 있는 것이고요. 

만약에 사울이 용변을 보고 있는 것이라면, 
사울은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저는 이 장면이, 우리 인생과 다윗의 인생을 너무나 특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돼요. 
사울이 다윗을 좇아다니고 있고, 다윗은 피해서 도망다니는데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인생을 너무나 빤하게 잘 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난 인생,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불쌍한 인생, 
마치 벼룩을 사냥하듯 자신을 매일같이 좇아다니지만 실패를 거듭하는 인생, 
마음의 평안이 없는 인생, 그 불쌍한 사울의 인생이.. 다윗에겐 훤히 다 보이는 것이죠. 

 

그런데 사울의 눈에는 다윗이 보이지 않아요. 
소문만 들리지, 형체가 보이지 않아요. 신출귀몰한다는 소문만 들릴 뿐입니다. 

문제는 사울의 눈에 다윗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인생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도대체 다윗이 어떤 인생을 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그 정도로 무용이 탁월하고, 그 정도로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고 
그 정도로 왕이 된다는 예언까지 받았다면 
그냥 자기를 향해 쭈욱 밀고 들어올 법도 한데, 다윗은 전혀 밀고 들어오지 (도전하지) 않아요. 

제 상상이지만, 사울이 막 악몽을 꿀 것 같아요. 
밤마다 악몽을 꾸다가 깨는 장면이 머리에 그려져죠. 
다윗의 칼날 앞에, 자기가 궁지에 몰려 있는 상태 (지금 동굴 속이 바로 그런 상태죠)

 

한밤중에 누워서 자고 있는데, 다윗이 자기의 목 아래 턱밑에 칼을 내밀고 있는 그런 상황, 
흠칫놀라서 사울은 잠을 깨는 거죠. 
그런데 다윗은 눈 앞에 없어요. 늘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날마다 환청이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 앞에 나타나질 않아요. 
세상의 이치대로, 세상의 소문대로 라면, 
그가 나타나 자기를 공격해야 정상입니다. 사울 자기를 제거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타나지 않아요. 왠줄 아십니까? 
다윗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는 것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오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거예요. 
왕이 된다는 비전을 주셨고, 꿈도 주셨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목적도 없이, 내일의 계획도 없이, 하나님이 자기를 방황하게 만드시면 
그냥 방황하는 거예요. 
죽으라고 하시면 그냥 죽는 거예요. 

나를 살리실 책임은 그분께 있는 것이고 
나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은 그분의 손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윗은 그냥 자기 목숨, 자기 인생을 내려놓고 사는 거예요. 

육신의 안목이 아니라, 믿음의 안목으로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안목을 포기한 사울에게는 
다윗의 인생이 보이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게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다 노출하고 있습니다. 

▲그때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건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삼상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의 부하들이 말합니다.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오늘이야말로 그 날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줘서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하리라' 말씀하신 그 날인가 봅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을 죽일 바로 그 날이 되었다는 뜻이죠.

부하들이 동굴 속에서 다윗에게 한 얘기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갓 같은 선지자가 이미 그런 예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예언이 안 나옵니다.

 

말하자면 부하들이 불확실한 기억을 토대로 다윗을 부추기는 거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보라, 원수 사울을 지금 코앞에 데려다 놓지 않았느냐?

게다가 삼천명의 군사들도 전부 밖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다윗은 그런 인생을 지금껏 살아오지 않았어요.

누구나가 가는 길, 너무나 당연하고도 뻔한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베었어요.

아마 사울이 용변을 본 후에 자고 있었나 봐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이 다윗의 부하들과 같은 오해와 착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환경만 조성되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원하던 상황에 딱 놓이게 되면, '이거 하나님의 뜻이구나! 역시 하나님이 응답하셨어!'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많죠. 요나가 그래서 때마침 대기 중이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잖아요.

여러분 그게 응답 이었나요? 환경이 열리면 무조건 다 응답인가요?

 

사울은 다윗을 잡고 싶었는데, 다윗이 그일라 성 안에 들어가니까

'아, 하나님이 다윗을 내 손 안에 주시는구나!' 하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였어요. 착각이었죠.

사람은 각자 자기 주관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은 자기 생각일 뿐인 거예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상황이 열리는 것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는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거예요.

 

세상에 물보다 진한 것이 피고, 피보다 진한 것이 이데올로기 이고

이데올로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신앙적 신념이에요.

 

이 신앙을 가지고 영적인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큰 내면의 혼란 가운데 빠지게 되어 있어요.

깊은 자기 내면의 confusion 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에게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나

'이게 하나님의 뜻이야!' 이거 너무 쉽게 이야기 하지 마세요.

그건 굉장히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현이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다윗이 사울을 죽이는 게 하나님의 뜻인가요? (다윗의 부하들은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죠)

아니죠. 그것은 개인의 욕심에 기초한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정말 무엇인가요?

이 약속의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열방을 축복하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욕심으로 에덴동산을 망친 아담과는 다른,

정말 자신의 욕심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수 있는 리더(왕)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다윗은 '하나님, 날 괴롭히는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생각했을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 같은 인생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도대체 하나님 나를 괴롭히는게 당신의 뜻입니까? 나를 안 도와주시는 게 당신이 결정된 뜻입니까?'

라고 질문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윗처럼, 다니엘처럼,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하나님의 그 트레이닝 캠프 안에서, 훈련소 안에서

담금질을 하고, 또 담금질을 하고, 또 담금질을 해서

 

세상의 사람들과, 아니 믿는 사람들조차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영적인 순도를 가진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 그래서 시대를 바꾸는 것..

그것이 (광야를 배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죠.

 

'아 나는 그런 사람으로 선택받기 싫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 훈련의 시간이 계속해서 연장될 것 같아요.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다윗이 옳았습니다!

 

사울은 다윗만 죽이려고 했는가요? 아니죠.

자기 아들 요나단이 반대 의견을 내놓으니까, 요나단도 죽이려고 했어요.

 

다윗을 한번 도와줬다고 놉의 제사장들과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을 칼날로 쳤어요.

그러면 사울에게만 이런 잔인성이 발견되는가요?

 

다윗 편이라고, 다윗의 사람들은 전부 선인들 인가요?

여러분 세상을 너무 선과 악의 단순 구조로 나누지 마세요.

 

사울에게도 일부 선한 점이 있고, (사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까지 국민들에게 존경 받는 리더십이었어요.

대체로 백성들이 사울의 말에 잘 따랐다는 점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어요.) 

다윗에게도 앞으로 드러나게 될 악한 점도 있어요.

그것은 사울의 부하, 다윗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을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 24장뿐만 아니라, 26장에 한번 더 똑같은 상황이 나오죠.

 

여러분 그러면, 이 사람들이 지금 이런 마음을 갖는 게 잘못 됐느냐? 사실 정상적입니다.

지금 사울의 등이 보이는데, 저 등에 칼만 꽂으면 우리의 방황이 이제 끝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고생이 끝나게 되어 있어요.

 

다윗은 왕위에 오를 것이고, 우리는 그의 좌우편에 영광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어떻게 유혹이 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 사람들은 칼을 쓰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들은 쫓겨다니는 피해자이고, 사울은 좇아다니는 악인이기 때문에

그를 당연히 죽여도 된다고 말하는 이 사람들을 잘 보세요.

 

▲사무엘상과 사무엘하까지 그 이후의 역사를 쭉 훑어보면

나중에 다윗의 부하들이 어떻게 되냐면, 권력의 자리에 오르니까, 정말 마음대로 칼을 휘두릅니다.

 

다윗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군대 장관이 누구였나요? 요압이죠.

근데 사실 요압이란 이름은, '야웨' 라는 말과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진 합성어예요.

그렇지만 그는 이름과 달리 철저히 자기중심이었죠.

 

요압이 사무엘하를 보면, 평화협정을 하러 온 아브넬을, 인사하는 척 하면서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는

그 칼을 줍는 척 하면서 아브넬의 배를 찔러 죽이죠.

 

나중에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뒤에, 사실 압살롬이 죽임을 당하고 이 반란이 다 끝났어요.

다윗은 평화의 시대를 가져오기 위해서, 상대편 군대의 군대장관을

이스라엘 군대의 탑 리더로 세우기를 원했죠. 그래서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세웁니다.

 

그러다보니 요압이 군대의 탑 랭킹에 있다가 밀렸거든요.

저 아마사를 제거해야 자기가 탑 포지션에 올라가니까, 인사하는 척 하면서 수염을 잡고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이죠. 이게 요압이었어요.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이라고 뒤에서 사주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지금 칼을 휘두른다면, 나중에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 철퇴를 휘두르게 되어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20대, 30대 때, 여러분의 손이 깨끗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손에 피를 흘리는 것이 습관이 되면

 

즉 여러분이 자기 가족에게 함부로 말하고, 독설을 내뱉고, 부모의 가슴에 칼을 꽂으면

여러분의 나중의 삶은, 여러분이 직장에서 상사가 되고, 가정에서 여러분이 리더가 됐을 때

여러분의 주변은 초토화 되는 거예요.

 

왜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 힘이 있기 때문에, 내 손에 칼이 쥐어져 있기 때문에

뭐든지 내 마음대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칼을 휘두르지 마셔야 돼요. 

 

여러분의 손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여러분이 땀 흘리지 않은 것들을

여러분의 손에 이익으로 쥐기 시작하면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금방 혼탁해지게 돼 있어요. 깨끗할 수가 없어요.

 

지금 여러분의 손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테리 쿠퍼가 지은 <비판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인 기준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크리스천들이 사람들을 끌어안는 것보다, 비판의 기술만 너무 늘었어요.

 

그래서 늘 높은 성경적인 기준을 갖다대다 보니까

그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서, 자기가 회개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그 기준을 남에게 들이대서, 남을 판단하는 거예요.

 

또 한편 교회에서는, '비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건강한 분별력마저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를 한번 따라 보세요. '분별하되 비판하지 말라!'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기억하세요. 비판을 하면 안 됩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뭐냐면, 지금 건강하게 어떤 판단력을 가진다는 개념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면 자체가 어두워지면, 그러고 나면

정말 상대방이 어떤 문제가 있어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가 '판단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주위 사람들을 싸잡아서 다 비판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상대방이 사울과 같은 악인이기 때문에 칼을 써야 되는 거냐 맞다'가 아니라,

'내가 악인이기 때문에 칼을 휘두르고 있다면' .. (나도, 다윗의 부하들도) 사울과 다를 바 없다는 거예요.

 

이게 사실 본문 13절입니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그래서 다윗은 '나는 악인이 아니기 때문에, 악행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왕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분별하십시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분별을 하셔야 돼요.

선과 악을 분별하면서도,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과 관용 사이에 온전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은

장래의 리더십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죠.

 

 

◑옷자락으로 가릴 수 없는 진실

 

제가 오늘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옷자락으로 가릴 수 없는 진실'입니다.

 

24:5~6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의 부하들은 뭐 당연히 그 방랑의 세월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강했죠.

그래서 사울을 죽이자고 했고요.

 

그럼 다윗은 왜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는가?

정말 죽일 속셈이었는가? 사람들의 말에 충동을 받았는가요?

 

윗이 나중에 고백하지만,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사실 그러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다윗의 마음이 굉장히 아팠어요.

저는 이 다윗의 마음을 보면서 '정말 좋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윗은 옷자락을 사울에게 보이면서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는데 안 죽이는 거야' 이걸 지금 보여주면서

 

자기 마음 가운데 사실은, 사울에게 억울함을 표현하고 싶은 것도 있고,

분노도 있고, 원망도 있고

왜 사람의 마음에 그런 것이 없겠어요?

다윗의 마음에 여러 가지 동기가 뒤섞여 있는 거죠.

 

그리고 교만한 마음도 조금 있었겠죠. 사울이 다윗을 아무리 쫓아다녀도 다윗을 잡을 수 없었고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다윗이 그런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을 가지면서, 사울을 향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5절에 보면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이 찔렸다!'

 

그의 마음이, 이 도망자의 세월을 지내면서도

이 악인을 대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부드러운 마음이었던 것이죠.

 

▲자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그가 벤이 옷자락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옷자락이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세 가지로 살펴 보겠습니다.

 

1) 옷자락은 보호를 의미한다.

이 겉옷은 사람을 추위와 더위, 눈과 비, 해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특별히 가난한 자에게는 겉옷이 매우 중요합니다.

 

낮에는 이 찌는 듯한 햇볕 때문에 피부가 타들어가기 때문에 겉옷이 필요하죠.

겉옷이 밤에는 살을 에는 추위가 있기 때문에, (일교차가 심함) 그 추위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하죠.

그래서 예수님이 겉옷을 저당 잡았다고 해도, 해가 지기 전에 그 겉옷을 돌려주어라 말씀하신 거죠.

 

2) 옷자락은 임재를 의미한다.

겉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그 겉옷을 보면, 그 사람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사장은 에봇을 입었고, 왕은 옷자락에 술이 달린 왕복을 겉옷으로 입었어요.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을 가득 덮고 있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환상 가운데 봅니다. 사6:1

 

또한 엘리사는 엘리아에게 부름을 받을 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기 겉옷을 던져주죠.

그 겉옷이 자기에게 걸쳐 지고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3) 옷자락은 구속, 구원을 의미합니다.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보아스가 밤 중에 자다가 깨니까, 룻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당신의 옷자락을 펴서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 표현은, '당신이 우리의 무너진 가문을 일으켜주시고

당신이 무너진 나의 인생을 살려주십시오..' 이런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12년이나 혈류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구원(치료 포함)을 받았죠.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옷이 결국에는 모두 벗겨지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돌아가셨어요.

 

여러분 사울의 겉옷자락이 잘려나갔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겉옷자랑만 베었다.. 단지 옷을 못 쓰게 만든 그 의미 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거는 사울의 인생에 매우 상징적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위 세 가지, 보호와, 임재와, 구원이 그에게는 다 박탈당한 거예요.

 

1) 첫째, 그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없어졌어요.

삼천명의 특수부대원들이 자기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요, 하나님이라는 그 인생에 최대의 보호처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위기 가운데, 위험가운데 노출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한 인생,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생이

어디를 가든 그의 인생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2) 두 번째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버렸어요. 

사실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가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거절했던 것이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실 수 없는 상태 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라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 아니 한 때 성령으로 감동되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나면요,

그러면 공황상태가 됩니다. 텅 빈 상태가 되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표현을 해야 될까요?

 

여러분 2~3년 연애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가, 갑자기 헤어지잖아요. 마치 그런 상태입니다.

텅 빈 상태예요. 올인했다가, 다 비워진 상태예요.

마치 그런 것처럼 완전히 텅 비어있는 상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상태!

 

3) 세 번째, 그에게 구원의 길이 사라졌어요.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그에게는 아예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죠.

중독자들이 '내가 이것만 하면' 살 것 같아요.

아니죠. 그의 인생에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내 불행의 조건을 제거해야만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구원이 없는 거예요. 결국에 나중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까

신들린 여자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까?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사울은 왕궁에 있어도, 사울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도, 너무나 외롭고, 너무나 춥고,

너무나 힘든 인생이 된 것이죠.

 

다윗에게 자기 옷자락이 베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인생을 덮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옷자락이 베어졌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사울이, 다윗이 자기 옷자락을 들고 펄럭이는 그 순간에

예전의 사건이 하나 떠올랐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삼상15:26~28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간절히 매달려서, 제발 이 백성들앞에서 나의 체면을 좀 살려달라고

그렇게 사울이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자기 옷을 떨치고 떠나려고 하니까

사무엘의 겉옷자락이 찢어졌어요. 사울이 그만큼 간절히 매달렸던 것이죠.

 

근데 사무엘이 그 찢어진 옷자락을 보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이처럼 이 나라를 찢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에게 주겠다.' 라고 하나님 말씀하신다.

'너의 왕권은 끝났다. 너의 인생은 끝났다.' 이걸 선언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 매달려야 되는데,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거예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는데,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사람을 붙들고 상황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면서,

자기 인생의 문제의 진정한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청년여러분,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울의 인생은, 출구가 없는 미로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미로안에 계시지 않았어요. 임재가 떠나버린 비참한 인생의 말로입니다.

 

저는 오늘 사울의 인생을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도, 내 인생의 불행의 조건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그 집착!

그것을 오늘 하나님 앞에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유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내 인생이 새로워질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사올 뿐이겠습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유대 광야를 떠나지 못하게 하시는가?

왜 이 힘든 시간을 아직도 지금까지 유지하고 계시는가?'

 

이 힘든 상황에서 사람이 아니고, 군대가 아니고, 성읍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점점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후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왜냐면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심을 믿기에

담대한 하나님의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