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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9장 1~41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LNCK 2022. 2. 11. 15:43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요9장1~41절        2022.01.30.출처

 

◑도입 /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가지 표적

 

우리가 연속해서 살펴 보고 있는 요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내진 메시아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 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믿게 하기 위하여서 선별된

7개의 표적 Sign 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 다시 기억을 살려서 정리를 해보면

1) 첫 번째 표적은 요2장에 나왔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이건 기적 Miracle 이 아니고, 표적 Sign 입니다.

그래서 뭘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까?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첫번째 표적이었습니다.

 

그분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역사를 베푸시는 분, 
특별히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첫 번째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요2:7~8

  

2) 두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표적'을 주심으로써

그분은 '네 아들이 살아있다' 라는 말씀을 믿고 갔던

그 왕의 신하의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래서 이 표적은

'예수는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 역사 하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고요.

 

3) 세 번째 표적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면서

물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간 것이 아님에도

 

38년이나 지났음에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

변화된 모습이 전혀 없는 그들에게 은혜주셔서

가나안 땅에 보내 들여주셨던 것처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역사 하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예수가 어떤 분인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 분을 어떻게 대해야 되는가?

를 보여주시는 것이죠.

 

우리는 큰 바람이나 기적이나 땅이 갈라지는 것 같은

그런 기적적인 능력들을 원하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열심히 아닌, 그 분의 열심!

나의 수고가 아닌 그분의 은혜

우리 삶 가운데 임한다.. 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라는 것을

요한복음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표적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4) 이제 이 7개의 표적 중에 중앙에 있는 표적,

네 번째 표적이 무엇입니까?

 

5천 명을 오병이어 로 먹이신 사건,

그래서 떡을 찢으셔서 (떼서) 그들을 먹이셨던 이 사건을 통해서

 

'나는 나의 죽음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내 자신이 찢어짐으로서

너희를 구원할 생명의 떡이다.' 라는 것을

네번째 표적을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중심이 되는 십자가를 보여주는  이 '오병이어의 표적' 이후에

 

나머지 3가지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이후에

그 구원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5)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 하심으로써 다섯 번째 표적은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우리와 한 배에 오르심으로써

우리의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6) 이제 본문 요한복음 9장은

여섯번째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단순한 기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를 보여주는 표적이다.. 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6번째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래에서 3가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7) 참고로, 7번째 표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입니다. 요11장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초월하시는 분, 부활을 주시는 분을 나타냅니다.

 

 

◑1. 그 첫번째 오늘 이 6번째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보는 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다..

라고 말씀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9장 1절에 는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 지라'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맹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요9: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자를

주님께서 그냥 스쳐 지나가시지 않고

그에게 찾아 가셨고, 다가가셨고,

 

그리고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세요.

 

주님이 쉽게 그냥 말씀으로 고쳐주시면 되지

왜 굳이 이러한 행동 절차를 거치셨을까요?

 

이건 표적이죠.

뭔가 보여주려고 하시는 그분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 본문을 보면 처음 사람을 창조하시던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사람이 지어지는 순간이 어떠한가를

위 구절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비슷하게 요9장 본문에서도 '땅의 흙'이 나오죠.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듯이, 빚으셨듯이


그 이후에 그 코에 생기를 하고 불어 넣으시니 
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십니다. 창2:7절이 연상됩니다.

 

이 날이 안식일인데, 예수님이 또 일을 하십니다.

처음 안식일을 지으실 때 일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또 다시 처음 사람을 지었던 그 재료(흙)를 가지고 일하셨어요.

지금 '재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맹인을 구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흙을 맹인의 눈에 붙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실로암 물은, '보냄을 받은 물'이란 뜻입니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보냄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보냄을 받고,

또한 우리에게 생수 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은, 처음 사람을 창조하던 그 순간을 고스란히 반복하시면서,

'새창조'를 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처음 사람을 진흙으로 지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진흙을 이개시고

그것을 눈에 바르시고,

그 다음에 '보냄 받은 물, 보냄 받은 성령으로' 씻어서..

 

그러니 이 순간은, 하나님이 사람을 재창조하시는 순간이고,

우리를 성령으로 씻으시는 순간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성령으로 씻으셔서 구원을 주셨더니

오늘 본문 7절에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맹인 되었던 자를

-다시 창조하셨고

-씻으셔서, 구원하셔서

-보는 자가 되게 하셨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을 보지 못하다가 눈을 떴을 때, 그 사람은 가장 먼저

무엇이 보고 싶을까요?

아마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쳐다볼 것 같습니다.

 

평생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기적적으로 눈을 떴습니다.

그때 그는 가장 먼저, 물이든, 거울이든.. 그것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자기 자신을 보니, 어떤 모습입니까?

이는 맹인을 뿐만 아니라, 걸인이었습니다.

추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럽고, 못난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으면

예수는 우리를 '보는 자'로 변화시키셔서

먼저 나의 추악하고 더러운 모습,

모난 부분, 더럽고 이러한 모습들을 먼저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맹인이 무엇을 보게 됩니까?

바리새인들 앞에 계속 섭니다.

'네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됐느냐?'에 대답을 자꾸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이렇게 눈을 뜨게 해 주셨다'고 증언해도

끊임없이 자기 말을 믿지 않고, 그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세상의 악함, 하나님을 막아서는 세상의 더러움과 어둠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난 이후에, 그가 쫓겨난 이후에 예수님을 또 다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셔서

우리로 보게 하시면서

먼저 나 자신을 보고, 나 자신의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보고,

그리고 세상의 악함과 어둠도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게 하시는 (점점 알아가게) 분이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표적을 통해서

맹인(우리)을 '증거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매우 독특하고,

특별히 하나님 편에서나, 예수님 편에서는 너무나 벅찬 본문입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계속 대적하는 상황가운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셔야 했고,

그 누구도 예수님에 대하여 변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변호하다가 옥에 갇혀서 죽었고요,

그 후로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스스로 변호했고, 스스로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을 보면, 이 맹인이 왜 맹인으로 태어났는가?

라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9:3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이유가, 그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예수를 증거하는 자)을 나타내고자 하셨는데,

지금 그것이 이 현장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보는 자가 됨과 동시에, 세상에서 예수를 증언하고 있는 증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데,

먼저 11절을 보시면, 그가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 자체를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1

 

증거자란,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 진리를 증언하는 자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1절을 계속 보면, 예수가 오늘 본문에 4번 정도 반복되어 나오는데,

'그가 내 눈을 뜨게 했다' 라고만 말을 해도 되는데,

그런데 계속해서 뭐라고 말하느냐면 '그가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씻었더니 내가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보는 것'이 주된 그의 증거가 아니고

'진흙을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했던

그 분의 역사, 이것이 그의 주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니 맹인이 지금 주장하는 것은

'내가 지금 본다'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새롭게 창조하셨고, 나를 고치셨고, 나를 보게 하셨다'라는

그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언이란, 예수를 드러내는 것이고,

예수가 나를 구원하셨다 라는 것, 예수가 나를 고치셨다 라는 것, 예수의 구원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증거(또는 증언)입니다.

 

결국은 그래서 30~33절을 보면,

그는 계속해서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맹인은 말하기를  '당신들은 이상하다. 평생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던 분들이,

성경을 달달 외우고 계신 분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다'

 

그러니 맹인이 지금 또 증거하고 있는 것은,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이시다.. 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씻어 우리로 보는 자가 되게 하심과 동시에

보는 자는 당연히 세상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증거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라고 본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요9장 본문이 이제 마지막으로

이 본문의 흐름속에서, 예수님은 그를 어떤 자가 되게 하셨는가요?

그가 바로 맹인(우리)을 예배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놀랍게도 이 날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게 된 그 순간부터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었는데,

그와 동시에, 또 한편 그는 '예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일날 함께 드리는 것도 예배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예배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고,

 

예배란 결국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먼저 뭔가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먼저 예배란, 우리가 오늘도 모여서 말씀을 듣고, 그 분을 찬양하고,

우리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예배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이 맹인의 모습속에서, 그가 지금 점점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예배자가 되었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면, 예수에 대한 그의 앎이

계속해서 변화되고, 발전되고, 완성되어진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그가 먼저 음성으로만 들었던 예수에 대하여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1


예수 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알고 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지나서 17절에서 보면,

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2)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7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이십니다'.. 라고 맹인이 말합니다.

 

3)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 맹인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3

 

즉 맹인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37~38절에서, 그가 예수님을 뭐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주여 (퀴리오스)' 라고 예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단 번에 확 다 알게되는 것도 좋겠죠.

 

그러나 대개의 경우, 우리는 영원히 예수에 대해서 점진적으로 알아가게 되고

예배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찾아오신 귀한 한 분,

그리고 내게 말씀을 주시는 선지자,

아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야

아 그분은 나의 삶의 주인이다.. 라는 사실을 그가 점차적으로 알아가면서

 

그(우리)는 보는 자가 되고, 그 다음에 세상 속의 증거자가 되지만

이제 하나님을 알아가며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배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예배는 또 엎드리는 것입니다.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을 다시 보면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가 절했습니다. 경배한 것입니다. 엎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맹인이 걸인이었습니다.

날때부터 보지 못했고, 거지였습니다.

이는 언제나 세상 앞에 엎드리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삶을 살았냐면, 엎드려서 세상의 것을 구하던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상의 것을 많이 얻으면 기뻐하고, 적게 얻으면 슬퍼했던 삶을 그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 맹인의 모습은, 세상에 엎드려있던 우리의 모습이요,

세상의 것에 울고 웃던 우리의 모습이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가 드디어 이제 보게 되고

보게 된 이후에는 예수께 엎드리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굴복하고 복종하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자가 되었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배란,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

-아는 그 분을 향해 엎드리는 것

-그리고 예배는, 이 시점에서 그것이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곧 예배입니다.

 

오늘 이 본문 요9장을 보시면, 참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런 사람이 한 명 나옵니다.

이 맹인의 부모를 보십시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지금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이 맹인의 부모를 소환했습니다.

그래서 '날때부터 맹인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서 그 부모를 불렀단 말이죠.

 

그런데 그 부모가 얼마나 지금 감격스러운 순간이겠습니까.

내가 자녀에게 물려준 것이라곤 어둠 밖에 없고, 맹인된 삶 밖에 없는데

그런 내 자식의 눈을 뜨게하신 예수님께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

이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예수를 주로 시인하거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출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출교는 단순히 오늘의 개념으로 출교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그냥 당시 사회에서 거의 생매장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부모는, 그 고마우신 예수님이 감사하기는 한데,

'저가 내 아들인 것과, 날때부터 소경이었는데 지금 그가 보는 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데,

우리 아들한테 물어보세요. 아들이 장성한 어른이니, 쟤한테 물어보십시오' 라고 

아들에게 떠넘긴 것입니다. 출교당할까봐 무서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요12장에 보면, 비슷한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12: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런데 맹인이 두 번째 바리새인들에게 소환을 받았습니다.

갔을 때, 그냥 이렇게만 증언해도 됩니다.

어차피 자기가 눈을 떴으니까 '아~ 그 분이 진흙을 이겨서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그래서, 제가 그대로 했더니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자기에게 일어난 일만 그대로 증언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 두 번째 소환되어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으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눈을 뜬 것 밖에 저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해도 될 터인데

 

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30~33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맹인이 이 날 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출교당하여 유대 사회에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그는 먼저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심적으로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나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했던 것처럼

 

맹인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그 운명속에, 같은 그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그 날, 모든 것을 잃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을 보고, 그분을 알아가고, 그 앞에 엎드리고

그분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예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맹인에게 일어났던 일이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진정 구세주로 믿으면, 출교와 같은 불이익을

세상에서, 가정에서, 친구관계에서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갈등을,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맹인처럼!

 

그 후에 그가 예수님을 다시 만나서 어떻게 합니까?

예수를 자기 주(퀴리오스, Lord)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9:35~38

 

맹인은 그분에게, 세상 앞에서 엎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보는 앞에서, 주께 계속 엎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만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저와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날 때부터 내 죄때문인지, 부모 죄때문인지는 몰라도

날 때부터 우리는 주님을 보지 못했던,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했던 맹인이었고,

 

세상 앞에 엎드려 세상 것을 구하던

걸인과 같은 삶을 끊임없이 살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 맹인을 지나쳐버리도 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맹인(우리)에게 찾아가셨고,

 

눈도 뜨지 못하니,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주님이 내게 다가오셔서

 

내가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그분이 다시 우리를 흙으로 빚으시고

실로암 못, 보냄을 받은 물, 성령으로 씻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이후에

나를 보게 하셨습니다. 영안을 뜨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상도 보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도 보는 줄 믿습니다. 먼저 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날, 이 사람에게 이루어졌던 그 일 그대로

우리에게도 이루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상속에서 증언자, 증거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친구와 가족들에게, 우리를 보내십니다.

눈을 떠서 예수를 보게 되었다면,

증언자(증거자)가 되시고.. 

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