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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5장 19~28 내 신앙은 왜 늘 제자리일까

LNCK 2022. 2. 12. 16:10


◈내 신앙은 왜 늘 제자리일까       마25:19~28        2022/02/06 출처


◑신앙생활이 정체되어 있는 오늘날의 신자들

오늘은 좀 현실적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 신앙이 늘 제자리여서 고민이거나, 신앙이 정체되어 있는 분들이 계실 텐데 
그런 분들을 위해서 잠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처음에 신앙생활을 할 때, 각 사람의 체질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뜨거운 체질이고, 
어떤 이는 미지근하고, 어떤 이는 차갑습니다. 

자기 신앙적 체질에 따라 여러 가지 방향이나 결과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체질이던 간에,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마음의 여진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 '여진'을, '변화'라고 말하기에는 좀 너무 거창하고 
그러나 달라진 게 전혀 없다고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만히 삶을 들여다보면, 그래도 좀 달라진 게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은 잠깐이고, 어느 지점에 가보면 
대부분 신앙이 또 멈춰져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본인도 그것을 문제라고 인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체'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그 상태에 적응하며 계속 살아버리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예배에 참여하거나, 
어떤 유튜브 설교라도 듣노라면 
잠시 마음에 불이 지펴진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은 잠시이고,

다시 일상생활 속의 염려나 걱정거리에 빠지게 되면 
마음을 빼앗겨서, 신앙의 성장은 고사하고 
그냥 그대로 마음이 굳어져 버리는 거죠. 

자 이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두고, '저 사람은 지옥갈 사람이야, 저 사람은 회심한 적이 없어' 
이렇게 단정이 지을 수가 없는 게, 
그들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삶이 변질되거나 타락하지도 않았어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도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신앙에 진전이 없다는 것도 깨닫고 있어요. 

그러다가 이따금씩 영혼을 깨우는 설교를 듣게 된다면 
'아 정말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늘 제자리지? 
왜 늘 나는 그냥 같은 자리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고 있지?'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막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미워지는데 또 뭘 시도하려고 하는데도 잘 안 돼요. 
'나는 늘 제자리구나. 나는 구제불능 아닌가?' 이런 생각 속에서 살다가 

또 어제는 변화되지 않은 내 자신이 너무 미웠는데, 
글세 오늘 자고 일어나면, 또 어제 마음 같진 않은 거예요. 
오늘은 신앙 컨디션이 조금 올라온 것 같아요. 그렇게 나 자신이 밉지가 않아요. 

그 날 하루는 좀 괜찮은 것 같았는데, 
그러나 그 다음날에 보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영적인 무력감속에 또 하루를 살아가는 거죠.

자 이렇게 신앙이 정체되어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늘 신앙이 제자리인 분들은 여러 원인이 있겠죠.
그 원인을 좀 살펴보면요.

▲첫 번째, 신앙에 대한 개념에 <지식적 오류>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셨어요. 호3:6

몇 가지 예를 좀 들어볼게요. 이런 사람은 백프로 정체될 수밖에 없어요.

'구원론'에 대한 지식에 오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구원파의 이론,
잘못된 구원론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구원은 어느 시점에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무조건 상급을 받는 것에 치중해야 된다..'

    
그러니 전혀 신앙생활에 진전이 없죠.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니 신경을 안쓴단 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정체되는 거죠.

2) 또한 믿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해 구분을 하지 못하면 
신앙이 정체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믿는다는 것은요, '따르고 순종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거죠.
'그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그 지식적인 믿음,
그걸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결혼하신 분들이 여기 많으신데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결혼을 합니까? 

대부분 상대를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결혼을 하고 
한 평생 같이 가는 거 아니겠어요? 
'믿음'이란 그런 겁니다. 거기엔 '신뢰와 따름'을 포함합니다.

근데 일부 신자들 가운데,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전혀 살지 않는 것입니다. 
거의 세상 사람과 똑같은 수준으로 살아요.
그러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게 아니죠.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아직 결혼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다니는 게 다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순종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건 믿는 게 아닙니다.
그건 지식적으로 아는 거에 불과해요.
이런 수준의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1년 365일 신앙이 정체되어 사는 거죠.

3)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개념이 없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하나님을 예를 들어 너무 엄격한 분으로 인식하면 

내가 좀 순종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은, 나를 늘 회초리를 들고 때리고 혼내고.. 이런 분으로 여긴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기가 죽어서 어떤 마음이 드냐면 
'나는 저분을 만족시키기가 상당히 어려워' 하면서 
신앙을 놔버리고 자포자기 하는 거예요.

즉 신자들이 하나님을 '율법주의적인 하나님'으로 보는 거죠.

4) 반대로 하나님을 '온통 사랑'이라고만 보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죄를 짓고 어떤 잘못이 있어도 
하나님은 항상 나를 용서하시고 봐주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에서는 전혀 순종과 헌신이 나타나지 않는 
방종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이런 경우를 사람들이 '무법주의'라고도 표현하기도 합니다.
무말씀주의, 무율법주의죠.

자기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적용이 안 되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을 무법주의로 잘못 믿는 거죠.

△자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우리가 바른지식을 알아야죠.
하나님은 진실로 공의로우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심판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항상 구원의 기회를 열어주시고 
우리가 죄지었을지라도 결코 범죄자나 죄인 취급하지 않으세요.

언제든지 진심으로 회개만 하면 '네가 언제 그런 죄를 지었냐?'는 듯이
또 다시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거예요.

그런데 만일 균형을 잃고, 어느 한 쪽 극단에 치우쳐버리면 
탕자처럼 아버지 앞에 돌아왔는데도, 자유하지 못하고 계속 눌려있게 되고요.

반대로 자기가 주님과 멀어졌는데도, 
안심하고 회개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지식적 오류'에서 빠져나와야 됩니다.

▲2. 두 번째 신앙생활이 정체하는 이유는,
<내가 내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문제에요.

여러분, 현장에서 성도들을 보면서 제가 뭔가 말해 주려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반응이 즉시 '내가 내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하지 마세요)

근데 보십시오. 내가 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그 자체에 
자기 스스로 안정감을 갖는 겁니다.. 

왜 거기에 안정감을 둘까요?
왜냐하면 '난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거죠.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이미 후한 점수를 주고 있어요.. 

그런데 신앙이 그럼 잘 성장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오히려 고인 물이 되어 버려서 
자기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괜찮은줄 알지만
사실 아무런 알맹이가 없는 거죠. 계속 신앙의 정체 가운데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그거 교만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나이다.' 마25:25

'제가 잘 보관하고 있었으니, 주인님, 이제 당신의 돈을 가져가십시오' 
이렇게 꽤나 자신있게 얘기하는 겁니다. 

자 이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자기 신념이 투철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땅에 이 한 달란트를 파 묻고 있을 때 
옆에서 5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2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어도  
전혀 그들로부터 도전받지 않는 거예요. 자 이렇게 고인 물이 된다고요.

이건 뭐냐면 교만이죠.
'여러분 신앙에 당신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뭔 말을 해주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대뜸 이래요. '나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알죠'
이 말은 잔소리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참견하지 말라는 얘기에요.

여러분 내가 정말 나 자신을 잘 안다면 
내 상태가 지금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뭔가 배우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고, 도움의 요청을 해야죠.

 

근데 그것을 안 해요.
그건 고집이고, 아집이고, 교만인 거예요.

차라리 자기의 상태를 모른다고 했으면 
오히려 알려주고, 그 사람을 구제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자기가 다 안다'고 말하는 바람에, 
그 사람에게 말도 못 꺼내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교만과 아집에 빠져서 사는 겁니다.
그 교만의 성격 때문에, 결국 끝까지 손도 못쓰고 무덤까지 가버리고 말아요.

▲신앙이 정체되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게 아주 결정적인 원인이죠.

여러분, 신앙이 정체된다고 하시는 분들, 
정말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시간을 할애하시고 
시간을 투자하고 계시나요?

제가 제 나름대로 신앙 훈련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신앙성장은 공부와 운동하고 너무 비슷해요.

공부와 운동은 투자한 시간에 절대적으로 비례합니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절대 공부를 잘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사실 특별새벽기도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자기가 공부를 평소에 열심히 하는데' 달려 있어요.

자기가 공부는 안 하고, 신앙의 힘을 빌려서 
어떻게 시험을 잘 보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서
그런 기도는 응답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기도할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고요)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근육이 팍 생기고 식스팩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오랜 기간동안 매일 일정 시간을 투자해야죠.

게다가 운동이나, 공부나, 신앙이나.. 
근육을 사용한다는 건 동일하더라구요.

공부할 때는 공부에 필요한 근육을 사용합니다.
두뇌 근육, 생각 근육,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엉덩이 근육을 써야 되죠.

운동할 때는 각 운동 부위에 따라 신체의 근육을 다양하게 쓰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도 꼭 필요한 근육이 있어요. 특히 어떤 근육일까요?
마음 근육이에요. 이 마음 근육을 반드시 사용해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시간을 쓰지 않으니 
이 근육이 전혀 사용이 안 되니, 쪼그라들어버리는 거예요.
(노인되면 근육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사용 안 하면 뭐든지 쪼그라듭니다)

여러분, 지금 하고 계시는 일(직업)에 
제법 그 일을 잘 하시려면, 제법 두루두루 그 일을 잘 아시려면 
최소한 현실적으로 3천시간을 투자해야 된다고들 말합니다. 
하루에 세 시간식 투자하면 약 3년이 걸리죠.

우리도 하루 일과가 있어요. 직장생활 하시지 않습니까. 가사 일도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을 가만히 보면, 아무리 바쁘다고들 말을 해도
자기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내서 그렇게 투자하고 있는데 

과연 여러분이 신앙을 성장하고 싶어 하시면
현실적으로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고 계시냐? ... 이 말입니다.

그런 건 다 무시해버리고, 하루에 성경 한 장 읽고 있어요.
그것도 건너 뛰다 보니 일주일에 2~3장 읽어요.
이렇게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신앙도 성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정체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시간투자가 없으니까요!

기도도 마찬가지고요.
기도만 하려고 하면 왜 이렇게 좀이 쑤시는지요.

 

그래서 일부러 제가 제가 기도시간을 더 할애합니다.
교회와서 설교 마치고서라도 여러분, 기도 좀 하시라고요. 
언제 기도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기도나 말씀에 시간을 전혀 안 내는 상황이니 
공부 안 하고 성적 오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운동 안 하고 근육 키우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거죠.

뭐가 들어와야 그걸 가지고 묵상을 하고 적용을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 마음 안에서 영적인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잖아요. 근데 뭐가 들어오는 게 없어요.
아무것도 안 넣어주고 있다고요.
그런 가운데서 여러분이 아직 영적으로 다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 돼요.

당연한 말이죠.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죠.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일주일 동안 뭐가 지금 여러분 마음 만에 들어오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하루에, 그리고 일주일에,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투자하는 시간이 
참 부족할 수 있습니다.

△자 혹시 여러분 중에 하루종일 직장 일 때문에 지치신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자기 전에 성경이라도 한 장 읽고 자야 되겠다 싶어서
그것도 잠자리에 누워가지고 성경을 폅니다. 

그러면 거의 성경을 펴두고 잠이 들게 되죠.
아침에 일어나보면, 성경이 온통 구겨져 있습니다. 

'설교 좀 들어봐야 되겠다'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서 핸드폰을 켰습니다.

근데 뭐 카톡 카톡 카톡 소리가 나고
여기 저기서 오는 카톡에 다 답해 주고,
또 메일도 확인하고... 
그러니까 설교자는 핸드폰 안에서 자기 혼자 계속 떠들고 있는 거예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웃을 일이 아닌데요.. 

△그리고 '평소에 뭐 바빠서 제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맨날 바쁘다고 그럽니다. 

근데 그 사람에게 막상 여유가 생기면 
그 시간에 부족했던 기도 채우고, 성경 읽습니까? 

여러분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뭐 휴가를 받든지, 시간이 딱 났어요.

그때 그가 교회 기도실에 와서 성경 읽고, 기도합니까? 
만일 여러분이 바빠서 진짜 못하다가, 
시간이 났을 때 기도실로 찾아들어가서 기도하는 사람이 계시면 
그 분은 위로부터 권능을 받을 거예요.

대부분 사람들은 '바쁘다, 바쁘다'고 맨날 얘기하면서 
정작 여유 시간이 생기면, 또 다른 세상 일에 빠져서 살아요.

또 여가 시간에 다른 사람을 쓸데 없이 참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화통은 왜 그렇게 붙들고 오래 있는 겁니까? 

그 전화 통화 시간을 길게 다 보내고 나서, 자기는 또 시간이 없어서 
성경 읽을 시간이 없고, 기도를 못한데요.

여러분, 불행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참 형편 없는 시간을 드리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바라는 것은, 또 아무지게 바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보내 시간이 일주일에 한 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신앙이 정체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요건 좀 다른 케이스인데, 제가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어요. 
자신이 정치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인 중에 
지금 제가 위에서 언급한 원인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도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이냐면 경건생활에 시간도 잘 씁니다. 
말씀 가운데 은혜받고 기도생활도 합니다. 나름대로 잘 싸워가고 있어요. 

그런데 번번히 죄에 걸려 넘어지는 거예요. 
감정적인 문제에 넘어져서 화를 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염려도 되고 막 그래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니까 
'아 내가 성도인데, 어떻게 이렇게 살고 있지?' 하면서 좌절이 되는 거예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여러분 이런 사람은, 신앙이 정체되었다고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다 넘어지게 마련이죠. 

문제는 얼마나 빨리 '회복 탄력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거죠. 
나는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 하려고 애쓰는데 
자주 무너져서 너무 가슴 아프다..는 사람들은, 신앙 정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다시 뛰어나갈 힘을 반드시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지, 율법의 종교가 아닙니다. 
은혜의 종교예요. 

제 멘토께서 저희들에게 늘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늘 똑같은 죄에 넘어져요. 근데 10번 늘 넘어지다가

어느날 싸워서 한 번을 이겼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면,

'넌, 이놈아, 아홉번이나 넘어지냐?'면서 혼내시는 하나님이 아니세요.

 

열번 중에 한 번을 싸워서 이기면

'네가 한 번은 이겼구나, 이제 두 번을 이겨 봐, 세 번을 이겨 봐'

이렇게 격려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죠.

 

여러분의 양심이 압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면서 노력하고 싸우고 있는지.. 여러분의 양심이 알아요.

 

그러다가 인간의 굴레가 있기 때문에 어쩌다가 넘어진 것은

주님이 다시 용서하시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러면 다시 십자가 붙들고 일어나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을 또 다시 걸어가는 거예요.

 

넘어짐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문제는

성화나 거룩에 아무 관심도 없고, 그냥 말만 번지레 하고 있으면서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러면 이 신앙의 정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정체의 문제는 <소망>의 문제에요.

소망의 대상을 다시 하나님께로 바꾸셔야 됩니다.

이게 여러분이 첫 번째 하셔야 될 일이에요.

 

자 신앙의 정체는, 쉽게 말하면 마음이 식었다는 거죠. 그러면 왜 마음이 식을까요?

더 이상 하나님이 소망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가 왜 미지근해 졌을까요?

소망의 대상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돈과 물질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불을 지피고 있다가, 불을 옮겨서 다른 것에 불을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여기는 식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불을 딱 꺼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더 이상 가열하지 못합니다. 태우지 못해요.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불이 꺼져버리면

여러분이 직면하시는 인생의 장애물들을 태우질 못해요.

극복하지 못하고, 헤쳐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신앙이 정체되면, 더 이상 인생의 장벽들을 뚫을래야 뚫을 수가 없고, 자꾸 막혀요.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사라져가게 되면

신앙으로 내 인생에 찾아오는 어려움을 이겨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소망에서 인내가 나오는 법입니다.  

소망은 인내를 낳아요. 내가 소망하게 되면 인내할 수 있어요. 견딜 수 있고 버틸 수 있다고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조금만 참으면 면류관을 받을 수 있어'

'내가 조금만 견디면,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어!'

'내가 오늘만 이기면, 믿음을 잘 지키면, 주님께 칭찬이 있을거야!'

 

소망을 여기에 두면 고난을 이길 수 있죠.

사도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소망을 하나님께, 그리고 천국에 두니까,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소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소망을 두면 안 된다는 거죠.

 

히10:32~35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들이 이렇게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이것을 기쁘게 여긴 이유가 뭐래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소망이 있으면 인내하고 열심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에게 소망을 두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열심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큰 책망을 듣죠.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요.

 

신앙도 동일합니다. 소망에 달려 있어요. 이걸 제가 알아요.

제가 어느날 '마가의 다락방'이 제 영혼의 소망인 것을 깨달았어요.  *인천지역 기도원

 

신학대학을 다니면서도 수업시간에, 저는 늘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갈 생각만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 철야(집회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는 거예요.

 

서울에서도 다락방을 향해 갔고요.

제가 고향 춘천에서 잠시 봉사하고 있을 때에도

춘천에서도 목요일만 되면 4~5시간 걸려서 매주 인천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버스의 안내방송에 '이제 다음 정차할 역은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지금은 역이름이 바뀌었음)

그러면 제가 막 마음이 뛰었어요.

 

제가 그때 알았어요. 소망이 생기니까 달려가요.

그러나 소망이 걷어지면 달려갈 수가 없어요. 전진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의 신앙의 정체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계신지 확인하십시오!

 

혹시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것에 소망을 두고 있진 않습니까?

그러면 롯의 아내처럼 될 것입니다. 

 

▲2. 두번째 우리가 정체된 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왜 주님이 왜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게을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 게으른 종아!' 하지 않으시고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하셨습니다.

게으른 것은 악한 것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그가 가진 한 달란트 마저 빼앗아서

열달란트 가진 자에게 줘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개인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찾아나서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하고 가만히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 잘 보여준 서적이 <천로역정>이에요.

거기 보면 장차 망할을 성을 떠나는 '크리스천' 순례자가

왕이 계시는 왕국을 향해 자기가 길을 찾아나섭니다.

 

은혜를 받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 그때부터 찾아나서는 거예요.

신앙인은 이와 같이 순례자인거죠.

그래서 내가 뛴만큼, 내가 의지한 만큼, 내가 노력한 만큼 얻어지고

(신령한, 영생의) 결과를 차지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우리가 주인에 대해서 잘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라는 주인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얻었지만,

무조건 다 갖다 주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 구원의 밥상을 갖다놓으셨지만

여러분 우리가 이 밥상을 먹지 않으면, 여러분 이것은 빼앗겨지는 것이에요.

 

우리가 본문 달란트 비유에서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은,

심고자 하고 뭔가 이윤을 남기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그만큼 더 맡기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5달란트를 왜 그 사람에게 주셨을까요?

그 사람은 5 달란트를 다시 남길 마음이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맡기신 거예요.

 

2달란트 가진 자는, 2달란트를 남길 마음이 있으니까, 2달란트를 맡기신 거고요.

 

그에게 1달란트 맡기신 이유는, 1달란트 정도밖에 남기지 못할 것 같아서 

1달란트만 맡기신 거예요.

그런데 주인이 돌아와 보니까, 그 1달란트도 남기지 못한 거예요.

 

만약 그가 5달란트 남길 사람이었다면, 그런 소망을 갖고 있었다면,

그에게도 5달란트를 주고 떠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문제가 뭐예요? 실행이 문제에요.

신앙의 정체는, 실행이 멈춘 상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될까요?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 됩니다. 

△제가 제 영이 살고, 정말 종이 되는 길을 알고 싶어서

제가 제 멘토목사님께 얼마나 힘겹게 눈물 겹게 찾아간 줄 아세요?

 

숱한 눈물 줄줄 흘리는 그 많은 훈련을, 제가 어떻게 받았는지 아시냐고요?

예 제가 또 제 멘토 목사님의 아버님인, 박목사님

그 분께 배우고 싶어서, 그분 계신 곳을 찾아가고,

그분과 정말 돈독한 사이가 되기까지

제가 많은 시간 기도하고 찾아간 거 아세요?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돼요.

 

근데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곳을 찾아가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지금 만나고 계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 조언을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일하고 계시는데, 그 일하고 계신 현장을 찾아가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기 위해서 어떤 노력까지 했는가요?

성경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의 서신들이 소실되지 않고 우리 손이 주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먼저 바울은 예수님을 알아가기 위해

자기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다 갖다 버렸어요.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한 분을 소유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동안 쌓아왔던 세계 석학인 그 바울이

모든 지식과 자기 학문과 가치와 사상과 가진 모든 재능을 버린 거예요. 배설물처럼요.

 

그는 그리스도를 닮고자 일부러 자기가 고난의 종으로 살았다는 거예요.

빌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너무나도 경험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죽어야 부활할 수 있으니

자신도 예수님을 본 받아, 고난의 종으로 던져버렸어요.

 

내가 예수의 죽으심을 본 받아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어,

나는 고난에 참여한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알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생애를 불같이 받쳤어요.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내가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다 경험하려고

내가 일부러 고난에 들어가고, 내 자신을 제물로 주님 위해서 바치는 사람 있습니까?

오늘날 찾아보기 정말 어렵습니다.

 

바울은 이 많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 많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지구 상에서 바울이 가장 칭송을 받는 거죠.

 

바울은 예수님이 데리고 다니셨던 12제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역을 한 것은,

그가 그만큼 예수님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썼던 서신이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바울은 다른 제자들보다 할 말이 이렇게 많죠?

왜 이렇게 풀어놓을 이야기 보따리가 2~3배 다른 사도들보다 많죠?

 

그만큼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갈망했어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요.

여러분, 투자하지 않는데, 신앙의 정체는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는데, 우리는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것도 집중을 못합니다.

벌써 졸고 딴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신앙은 주님의 은혜에 내가 응답하고 결단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얘기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그 은혜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 구원입니다.

 

근데 이 균형을 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만을 강조하고,

혹은 반대로 '인간의 의지'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은혜 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일부 장로교인들

자기가 순종하기 싫어할 때, 이럴 수 있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될 일들을 하지 않고

책임회피적 삶을 살고

죄가운데 빠져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 영혼은 안전하다, 안전하다 하고 방종하며 삽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찾아와 주셔서 구원 받는 거지.. 하면서 은혜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변질되고 타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인간의 의지만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눌려있고, 자기를 심하게 괴롭히는 쪽으로 나아가

고행의 고통을 겪기 쉽습니다.

그리고 내가 노력을 해야 구원받을 것이라는 착각을 갖고 있죠.

 

그래서 여러분, 신앙은 이 둘의 조화를 적절하게 이루어내야 건강한 신앙, 신학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근데 그 조화를, 인간은 잘 해내지 못해요.

하나님이 찾아오신 은혜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인간인 내가 적절히 조화시키지 못해요.

 

그래서 우리 쪽에서 구원받기 위해 가장 안전한 방법이 뭐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강하게 붙들고,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

이게 구원에 있어서 제일 안전한 길입니다. 이게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신학적인 논쟁이 많습니다. 칼빈주의니, 알미니안 주의니..

그런데 한쪽 극단으로 너무 쏠리면, 너무 치우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상호보완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저도 목사지만 뜨거운 때가 있었고, 식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제 삶을 개인적으로 돌아볼 때, 목회자로서 참 별로였을 때가 언제였냐면

제가 산기도를 잠시 쉰 적이 있었습니다.

 

꽤 오래동안 산기도를 계속했었는데

한 1년 정도 산기도를 쉰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산에 드문드문 갔고, 어느 때는 몇 달 동안 쉰 적도 있었어요.

왜냐면 저녁에 제 시간이 너무 없는 거였어요.

그 시간에 저도 목사로서 자기계발도 하고, 어떤 목회에 필요한 연구도 해야 되는데 

저는 그런 시간을 한 시간도 가지지 못한 거예요. 매일 산기도를 올라갔기 때문에요.

 

그래서 저도 산기도를 잠시 중단하고, 나도 장래 목회를 위해서

나 스스로 좀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그 찰나에 또 저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깨도 수술하고, 손가락도 수술하고, 성대도 수술하고...

연속해서 세 번을 수술하다보니, 산기도를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그래도 제 삶이 제 계획대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뭔가 산기도를 올라가지 않는 그 시간에, 제가 평소에 미미했던

그런 생산적인 자기계발적인 일을 좀 해보려고 했습니다.

 

근데 잘 되지가 않고, 이상하게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고

삶에는 몇 가지 문제되는 일들이 생기고, 쉽게 풀리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여러 문제들을 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어제 어느듯 몸도 회복이 되었고, 깁스도 다 풀고 했으니,

다시 산에 올라가서, 제가 제 문제를 가지고 그날 전도사때부터 기도했던 그 자리에 가서

무릎을 딱 꿇었습니다.

 

근데 제가 산에 다시 올라간 첫 날, 그 무릎을 꿇었던 그 날을 제가 지금 잊지 못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주님이 제 마음에 음성을 들려주셨어요.

제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내가 너를 기다렸다'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기도하자마자 성령의 임재가 제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얼마나 잘 되던지요.

 

그런데 제가 너무 놀란게 뭐냐면

기도가 잘 되어서가 아니고

'아니 그러면 내가 그 동안에, 산에 올라오지 않은 그 시간 동안에

주님이 나를 다그치셨어야 되는데..'

'너 그러면 안 돼!, 빨리 산으로 뛰어올라와야 해!' 그런 감동이나 뉘앙스를 전혀 주시지 않으셨어요.

그냥 가만히 저를 기다리기만 하셨더라고요.

 

저는 그 날 산에서 기도하는데, 제가 꼭 탕자 같았습니다.

꼭 탕자가 아버지 품에 안긴 것 같았어요.

너무나 형편없었던 이 죄인을, 아버지가 어루만져주시고

'어서 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줄 아니?'

 

그 주님의 음성이 제게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제가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고,

무너졌던 기도의 단을 다시 쌓아올렸고,

그리고 바로 바로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했어요. 놀랍게도요!

 

기도는 내가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땅에서 기도만 했는데,

하늘에서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지금 이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셨고,

그리고 손대는 일마다 주께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그때 깨달았던 게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한다고 임하는게 아니라,

내가 (기도하기를) 결단한 그때 시작되는 거구나..'

 

생각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내가 결단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기도의, 헌신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

내가 내딛지만, 내가 내 힘로 내 딛는 것 같지만,

주님이 그때부터 이끌고 가시는 거예요.

 

십자가는 내가 지는 것 같지만

십자가를 지고 난 후부터는, 그 십자가가 나를 이끌어가요.

 

(은혜와 인간의 결단,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 사이의 조화를 우리가 잘 깨달아야 합니다.

너무 한쪽 극단에만 치우치면 안 됩니다.)

 

오늘 내가 결정, 결단하고,

내가 산기도를 다시 시작한 그 날부터

마치 삼손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한 것처럼

주님의 은혜가 내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그 순서를 따지자는 게 아니고)

너무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는 일변도의 신앙에서,

인간의 결심, 인간의 열심, 인간이 실행.. 이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크게 보면 그게 다 은혜이지만요!

 

그러나 인간 편에서의 응답, 결단, 순종의 발걸음이 없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할 수도 있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만 믿고 바라고..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극단적 신앙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순종이 응답하고, 따라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