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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9장 20~27 노아

LNCK 2022. 2. 14. 11:40

https://www.youtube.com/watch?v=gQawiZwL1Rg

 

◈노아                    창6:8~9, 9:20~27                   2019.11.22. 출처

 

※빨리 보실 분들은 화면 중반의 ◑적용 부터 보세요!

 

제가 이번 학기 M. Div. 선택과목으로, 우리 합신 학우들하고 같이 
<사료강독>이란 과목을 통해, 캘빈과 루터의 사료를 읽으면서 
서로 비교하며 공부(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루터와 함께 있는 창세기"라는 제목으로
성경공부를 매주 인도하고 있어요. 
덕분에 이번 학기에는 루터와 캘빈의 창세기 주해 또는 창세기 설교를 아주 많이 읽고 있습니다. 

캘빈은 1559년 9월 4일부터 
그 이듬해 5월 10일까지 창세기강해를 1장~20:7절까지 
자그만치 97편의 강해설교를 했어요.                                                주1)

루터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10년 동안 
신학교에서 창세기를 강해합니다. 
그 강해가 8권 분량으로 나와있어요. 그리고 그 책들이 얼마나 두껍습니까.

그러니까 이 종교개혁의 두 거장이,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창세기를 강해하고, 가르치시고, 또 설교를 했습니다. 

캘빈이 노아에 관한 설교로 17편을 했고요. 
루터도 노아에 관한 성경강해를 한 200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하고 있어요. 
근데 이제 제가 현대주석서보다, 종교개혁가들의 주석을 읽으면서 은혜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오늘 (합신 채플 시간) 제 설교의 대부분은 
캘빈과 루터의 설교와 강해의 표절입니다. 
표절도 한 5백년 전 사람의 것을 표절하면 
그거는 학위도 받을 수 있고, 칭찬도 받고 그래요. 

 

◑오늘 본문 창9장 <노아의 함에 대한 저주>의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6~8장으로 거슬러 가야돼요. 

'왜 하나님이 노아를 선택하셨는가? 
노아와 노아의 가족이 왜 선택을 받았는가?' 
이 질문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창6:9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7:1에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향해서 '방주로 들어가라' 말씀하신 다음에 그 이유가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

노아는 자기 시대에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노아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죠. 

그런데 이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을 해야 됩니다. 
캘빈이 이 바로 이 구절들을, 
히11:7절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노아는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 
히11:7절,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노아에게 있는 의는 
'어떤 행위와 율법을 지켜서 얻은 공로적 의가 아니고, 믿음에서 나온 의다'
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에 근거해서 캘빈이 이렇게 주해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노아를 이미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도(히브리서 기자)는 노아가 믿음으로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로 그는 모든 공로를 제외 시킨다.' 

△루터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있고요. 
한 가지 더 덧붙여서 벧후2:5을 인용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이 가진 성경에 창6:9, 7:5절 옆에다
히11:7, 벧후2:5 이렇게 볼펜으로 기록해 두시면 되겠습니다. 

벧후2:5에 보면, 노아를 가리켜서 
'의를 전파하는 노아'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루터는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설교자였다' 
그러니까 '본인이 의인' 이라기보다는 
'의를 전파하는 설교자였다'는 거죠. 

루터는 그 다음에 바로 질문을 합니다. 
'이 의가 누구의 의겠는가? 노아 자신의 의, 즉 사람의 의겠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이고, 
곧 창3:15절로부터 약속되었던 약속된 후손,
곧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었다. 

진실로 노아의 믿음은 희귀한 믿음이었다. 
약속의 자손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과 자의신의 가족을 위로했다.' 

이렇게 이제 두 종교개혁가가 '의'의 문제를 짚고 있습니다.                                 주2)

▲여러분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족보를 보시겠습니다. 
5:21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5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28 '라멕은 182세에 아들(노아)을 낳고'
:32 '노아는 500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좀 이상하죠. 노아의 그 가족이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다 일찍 결혼했잖아요. 그 당시 백세 때는 일찍 한거죠.

그리고 자녀도 2백세 되기 전부터 낳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5백세가 되도록 아이가 없었어요. (적어도 다른 이보다 3백년 이상 늦은 겁니다)
이 부분을 루터가 굉장히 주의깊게 봤어요. 
그래서 '노아는 5백세 즈음까지 독신주의자였다' 라고 본거죠.

 

그래서 루터는, 노아가 자녀를 늦게 가진 이유로
-왜냐하면 이 타락한 세상에서 자신의 아이를 바로 키울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아마 독신으로 살았거나 애를 낳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곳곳에 가서 오늘날 선교사처럼 사역하느라고, 
 수도승처럼 살았고, 결혼할 시간이 없었다.. 라고 보는 거죠. 

노아가 그랬는데, 즉 의를 전파하며 살았는데    *벧후2:5

세상은 여전히 회개를 안 했고,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에 심판을 선언하셨죠. 
그 때가 노아가 480세 경입니다.

심판을 선언 받고, 방주를 직은 기간이 대략 120년이니까,

그리고 홍수가 노아 6백세에 났어요.  7:6

그리고 나서 (물로 심판하시리라는) 심판을 선언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이 '너 결혼해라'
해서 노아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보는 거예요.  
  5:32 '노아는 500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아이를 낳았다는 의미 자체가 이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의미죠. 
그러니까 노아가 독신은 한 거죠. 거의 5백세 까지요.

△근데 이 부분을 캘빈도 굉장히 관심을 갖고 주해합니다. 
자 적어도 캘빈의 시각에 따르면,

노아가 방주에 타기 전에 며느리 셋을 봤는데 
그러면 방주에 타기 전에 세 명의 며느리가 시집 와서 아이를 낳았어야 했는데 
노아 집안에 아이가 없었던 거예요.

 

근데 이게 은혜라는 거예요. 당시 세상이 워낙 타락해서, 애가 없어서 애들이 오염되지 않았고,

나중에 홍수 후에 애들을 낳아서, 새로운 세상에서 애들을 낳아서 키운게.. 은혜라는 거죠.

첫째 며느리가 결혼했는데 불임, 
둘째 며느리가 결혼했는데 불임,
셋째 며느리도 결혼했는데 불임인 거예요. 

노아가 '아 인류의 멸망이구나! 홍수의 유일한 생존자인 우리 가정도 자녀가 없으니
온 인류가 멸망이구나!' 하고 처음에는 생각했을 거예요.

 

이 부분을 캘빈이 어느 구절에서 주해를 하냐면 
창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런데 그 은혜가 무엇이냐? 
캘빈이 주해합니다. '불임의 은혜'라는 겁니다.                                     주3)

 

근데 '노아의 의'를 그래서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아는 본질적으로 우리랑 다른 의인이 아닌 거죠.
그냥 환경에 의해서얼마든지 감염될 수 있고, 오염될 수 있고,
부패성을 가질 수 있고,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이 이제 그 생각을 한 겁니다.  행위의 의가 아니었다는 거죠.

지금까지 창5~6장을 살펴봤고요. 
창7~8장의 대표적인 내용을 한 가지씩만 좀 살펴보겠습니다. 

 

◑노아방주에 이제 복음적인 의미인데요. 
노아방주는 교회를 상징하는 하나의 예표적 모형으로 누구나 해석을 합니다. 

근데 참 칼빈 목사님이 통찰력이 있었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 설교에서 노아방주, 그러니까 창7:1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곧 무슨 명령이냐면 
무덤으로 들어가라는 명령과 똑같다.' 
그래서 캘빈이 그려내는 노아방주는요. '무덤'입니다. 

그러면서 캘빈은 이런 얘기를 해요. 
'우리는 명백히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간 것이 
마치 삶을 버리고 죽음으로 나아간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방주란 공기도 없고, 달이나 태양도 없고 
지상생활에 모든 도움과 수단이 없는 상태로 밀폐된 선박입니다.'  
(방주라는 히브리어 '테바'가 상자, 모세가 누웠던 갈대상자도 '테바'죠)

그게 성경 기록만 보면, 위에 창문 하나만 뚫려있는데 
설마 창문 하나로 환기가 됐을까 해서 
이제 노아방주를 복원하는 분들이 다 창문들을 만들죠. 근데 원래 방주에는 옆창문이 없었어요.

혹시 창문들을 만들었다 해도, 여러분 가축 축사에 한 번 들어가 보셨어요? 
그 냄새를 정말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방주에 물이 들어오면 안 되니까, 틈새를 역청으로 발랐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냄새나고, 축축하고, 어둡고.. 무덤과 같은, 죽음을 상징하는 
거기로 들어가게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도, 배 밖에서 홍수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께서 방주안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거죠. 

'하나님은 그를 이끌어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그를 보존하시는 바
그 방식이란, 마치 사람이 목을 자르면서 너는 살리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캘빈의 주해)

아주 역설적이죠. '목을 딱 치면서 너는 살리라'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다루신다는 거예요. 

캘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노아는 무덤에 들어갔고, 마치 불쌍하게 죽은 자처럼 거기에 쳐박혔습니다.' 

△자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까요? 
우리 신자의 '죄죽임 교리'로 적용합니다. *mortification

우리는 매일 같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살아있으면서도 우리는 우리를 죽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곳에서도, 노아가 선택받은 그 이유가 
노아 자신의 '의'라는 말도 없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을 상징하는 방주 안에서 
노아가 그 방주를 탔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통한 심판이죠.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함께 죽는' 거죠.
  
그 죽음이라는 주제, 심판이라는 주제를
방주 안으로까지 갖고 들어오는 거예요.
캘빈의 이런 주해는 이런 굉장히 깊은 통찰력이 있어요.           

*창8장에 관한 루터의 알레고리적 해석                주4)

▲근데 캘빈의 주해, 그의 통찰력을 또 하나 나누면, 
'방주 안에 있었을 때 노아의 마음이 어땠을까?' 

캘빈도 루터처럼 설교하실 때는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진술을 하시는 것 같아요. 
여러분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캘빈이 뭐라 그랬냐면 
'노아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겠죠. 뭐 방조안에서는 좀 두려움도 있고, 심판받는 와중에 
뭐 기뻐 찬송 하기는 좀 힘들었겠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아니요. 방주에 나와서도, 방주에서 나온 이후 죽기까지도 
노아는 기뻐하지 않았대요. 노아의 인생에는 기쁨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캘빈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제가 읽어드릴게요. 
'노아가 이런 광경을 보면서 마음에 큰 슬픔을 가진 것이 확실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현세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 신자의 기쁨이라는 것에는 
온전한 기쁨이 아니고, 큰 탄식이 있다는 거예요.

가만 생각하면 맞죠. 우리끼리 모여서 너무 즐거운 것도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그 영혼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여기서 마냥 즐거워할 수만 없고, 세상을 향한 탄식이 있다는 거죠. 신자에게는!

그러니까 신자의 기쁨에는 슬픔과, 탄식이.. 
나만 위한 탄식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 앞에 울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우리의 실존(현실)이라는 거에요. 

'방주안에서는 세상을 향한 탄식이 있습니다. 
노아는 더럽고 일시적인 인생보다 더 높은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홍수 이후 살았던 삼백오십년 동안 결코 즐겁지 않았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한 거죠)

우리 신자의 이 땅에서의 삶이 그렇다는 거예요. 거꾸로 생각하면 또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 기쁨이 있죠. 예수 믿는 즐거움이 있고 찬양이 있죠. 
그것은 그래서 천국의 맛을 보는 거에요. 

천국의 맛만 보는 것도 이렇게 기쁜데, 온전한 기쁨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새하늘과 새땅의 기쁨을 생각하면 그때는 얼마나 즐거울까요? 


◑자 지금까지 창세기 5장, 6장, 7장, 8장을 대략 살펴보고
지금 본문 9장에 이르렀어요. 
이 배경을 가지고 본문을 읽으면, 본문의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노아가 함에게 저주성 예언을 하잖아요. 
근데 일단 노아의 탄식으로 규정합니다. 캘빈의 주해는 그렇게 해석해요. 

노아가 탄식하는 이유는 '도대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뭐냐, 
도대체 우리가 홍수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의미가 뭐냐? 하는 의미의 문제고요. 
굉장히 실존적인 문제에요. 

노아의 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노아가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다음 세대에는 인류만 빼고 지상천국으로 만들려고..' 
거의 환경 우상론자처럼 말입니다.

노아가 그 사명으로 자기가 부름 받았다 생각하는거죠. 
그러니까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받기 전까지는

자연생태계 보존까지 사명 감당하고, 조용히 무대에서 빠져나와 죽는.. 
그런 우울한 기대를 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 라고 본 거죠.
자신과 자기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노아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받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생태계 보존의 사명을 감당하고 나면, 
'세상 사람들이 홍수 심판 받아 죽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죽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에요.
그 방주는 무덤이라 그랬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반쪽짜리 복음이에요.
그 거기(율법)까지 간 건 잘한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그런 의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없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잘못된 추론을 하냐면 
그래서 우리는 망해야 된다.. 이렇게 된 거예요. 

이런 생각에는 그리스도가 빠진 것이죠. 
그러므로 노아의 그 스토리 안에서,

복음은 
그러므로 우리 안에 나를 구원할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의를 붙잡아 야 된다,
하나님에 의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라는 거죠. 

▲일단 오늘 사건의 중대성에 대해서 루터가 이렇게 얘기해요. 
사실 당시 남은 인류에 노아가 가장이죠. 그건 한 나라의 왕이나 마찬가지죠. 
어떻게 보면 새 역사를 창조하는 아담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어요. 
얼마나 할 일이 많았겠어요. 

게다가 아주 통찰력있는 얘기도 많이 해요.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는 '가인을 잡아 죽여라' 하나님이 안 그랬는데 
지금부터는 '살인한 자를 잡아 죽여라' 그 말이 정부를 세우는 것이라고 얘기해요.  9:5~6

그러니까 일종의 정부도 조직해야 되죠. 법 체제를 마련해야 되죠. 
얼마나 노아가 바빴겠어요?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 하나를 기록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어쩌다가 술 먹고 취해가지고 
실수로 자기 자녀 함을 저주하고.. 이런 에피소드가 아니라는 거에요. 

루터도 캘빈도 
'이것(함에 대한 저주)은 노아의 공적 행위, 교회의 공적 행위였다'라고 동의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노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 세상이 죄 때문에 망했다면, 지금부터 노아가 이제 새 역사를 써야 되잖아요. 
새역사는 당연히 의의 역사가 되어야 되겠죠. 

의의 역사가 되어야 되겠다는 사명감이 없었을까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심판으로부터 면제받고 
이렇게 구원받고 인류의 새 역사를 쓰는 거 아니냐? 

그런데 뭐 10세대, 100세대 지나서 죄가 나온 것도 아니고 
노아가 자기 몸에서 낳은 함의 모습 안에서 '죄 바이러스'를 본 거예요. 

세상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가지고 (영화 '부산'에서 처럼)
어떻게 해서든 감염 안 된 사람을 따로 격리해 가지고 
겨우 인류의 99%퍼센트가 감염돼서 다 망하고 
이제 감염 안 된 딱 한 가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자... 이렇게 됐는데 

가만 봤더니 좀비 바이러스가 노아 방주에 탔던 겁니다.
바로 자기 몸에서 나온 홍수 후 1세대 에서 

똑같이 죄 때문에 멸망당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그 죄의 바이러스를 본 거죠. 

실존적으로 얼마나 노아가 낙망했겠어요? 
'이러려고 내가 방주를 만들었나?' 

지난 진짜 120년의 모든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새 역사를 쓰기 시작하는 이 첫 장에서, 죄가 발견되고 
저주를 선언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이 역사를 새롭게 시작해야 될 의미가 무엇인가?' 

선지자 노아에게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그래서 저주와 심판만을 예언한 것이 아니고 
9:26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 

왜 셈의 하나님이라 그랬을까요?
셈의 계열을 통해서, 족보를 통해서 오실 메시아, 
그러니까 자기의 모습만 봤으면 나 영화의 결론과 같아요. 
그 결론으로 밖에 갈 수가 없는데, 

노아방주에는 아담의 씨만 탄 것이 아니고 
창3:15절에서 예언하신 메시아, 이 죄악을 정말 구원하실, 
그 좀비 바이러스를 완전히 치료하실, 그 메시아의 씨, 메시아의 의가 같이 타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이 말은 곧 무슨 의미냐? 
'노아자신도, 자신의 의로 자기 하나를 구원할 만큼 의로운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메시아에 의존해서 구원받아야 되는 죄인일 뿐이다.' 
그것을 이제 노아가 선언을 한 것입니다. 

루터와 캘빈 모두 이러한 해석에 동의를 하고 있어요. 

◑적용입니다. 
사실 이거하려고 제가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거죠. (밑밥을 깔은 거죠)

제가 정말 많은 주석서를 보고, 설교도 들었는데 
다시 루터, 캘빈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캘빈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너무나 탁월한 설교를 하셨어요.
제가 캘빈과 루터의 설교를 많이 요약해서 
세 포인트를 여러분께 나누고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해요. 

▲1. 첫번째는 루터의 적용인데, "가정에서의 적용"이에요. 
루터는 이제 오늘의 에피소드를 
모든 신자, 특히 부모를 가진 모든 자녀들,
자녀를 가진 모든 부모들에게 이렇게 적용을 해요. 

"함은 아버지가 술 먹고 취한 모습,
그렇게 의로웠던 아버지가 타락한 모습에 실족합니다."  

실제로 함이 실족한 게 죄라고요. (이것이 통찰력이에요.) 
우리가 어떤 지도자가 타락할 때, 
유명한 교회의 목사가 이렇게 타락할 때 분노감이 생길 수 있죠. 그리고 실제로 실족해요.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게 죄일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 

"내가 너무 실족했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라는 말의 동기가 
자기 자신은 그 사람보다 의롭고 거룩하고 경건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었다면,  
실족한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게 함의 죄였어요."

함은 정말로 아버지의 넘어짐 앞에서 실족했어요. 
근데 그 마음에 '나는 아버지보다 의롭고,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 아버지가 실족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정죄한 거에요. 
이것이 함의 죄의 본질이라는 거예요. 

함이 놓친 것은 무엇이냐면 
함은 원죄와 인간의 약점을 가진 아버지 노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함이 '하나님'을 빼놓은 거예요. (하나님은 여전히 노아를 인정하십니다)

자기 아버지가 연약한 모습, 죄를 짓는 모습을 드러낼 때 
자녀들은 마땅히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속으로 라도 실족하지 말고 

이런 아버지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마땅히 봤어야 된다는 거죠. 
하나님은 아버지 노아를, 죄인을 진실로 용서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기의 가족도 봐야 된다는 거죠. 

△함과 대척점에 셈과 야벳이 있습니다. 
셈과 야벳은 실족하는 유혹을 극복한 것이, 하나님이 칭찬하신 내용이에요. 

하나님은, 함이 실족하는 것을, 함(우리)의 책임으로 돌리는 거예요.
이런 면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도전이 됩니다. 

그래서 실족할까봐, 두 아들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고 접근하여 허물을 가렸죠. 

아버지의 죄악을 직시한 거예요. 

그러나 자기가 실족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수치를 보지 않고 가린 겁니다. 

'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라고 루터는 얘기합니다. 
" '보라 우리 아버지가 넘어지셨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자들을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다루신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같은 사람의 죄와 허물의 실체를 보고, 감당할 실력과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 가족 사이에서도, 내 배우자, 부모, 자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지금 우리 자녀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엄마 아빠들은 너무 알고 싶어하죠. 그래서 자녀의 카톡 프사(프로필 사진)을 유심히 봅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프사를 바꾸는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정말 자녀나 아내나 남편, 부모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내가 보고 산다면.. 가정이 다 깨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족을 맡기고) 나는 자세히 모르는 게 약이에요. 

우리 인간은요. 사람의 허물을 직시하고, 그것을 감당해낼 실력이 안 됩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아니면, 남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다 우리는 감당하지 못하죠. 

그러니까 셈과 야벳의 행동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부모를 너무 사랑하니까, 
부모의 상처, 부모의 과거가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거를 덮는 겁니다. 

근데 이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의 행위'라고 루터는 주해를 하고 있어요. 
이것이 셈과 야벳의, 아비의 허물을 덮는 그 행동을 
하나님께서 예배행위로 받으셨다.. 순종의 행위로 받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너무 부모님한테 한을 품지 마세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교훈이에요. 

부모의 허물이 밝혀지잖아요? 
우리 특히 저같이 목사 아들인 경우에, 
'아버지가 강단에서 저렇게 선포하시는데 집에서의 삶이 다르다..' 

왜 실족을 하십니까?
자기가 아버지보다 낫다고 생각하니까, 비판하고 실족하는 겁니다.
함처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셈과 야벳처럼 그것을 덮으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를 목사로 일평생 그렇게 사용 하신다면 
내가 뭐길래 아버지를 판단할 수 있겠나요? 그리고 덮으시길 바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그랬어요. 

루터 목사님은 그렇게 주해했는데 
가슴에 와닿더라고요.
  
이 루터의 해석에 이어서 캘빈이
저와 여러분 같은 사역자를 위해서 적용하고, 또 회중을 위해서 적용합니다. 

 

▲2. 사역자에게 적용
소제목을 붙이면 '노아의 꿋꿋함' 
또는 '노아의 설교자로서의 지조, 설교자로서의 일관성' 이라고 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알기 쉽게 하면 내용상 '노아의 설교자로서의 뻔뻔한 일관성' 이라고 붙일 수 있습니다.

노아가 자기를 흉보는 함을 저주했으니까요.

 

제가 캘빈의 주해를 읽어드립니다. 
"우리는 노아에게 있는 이 꿋꿋함을 응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맡기는 모든 종들이 가져야 할 그런 꿋꿋함 말입니다. 

 

이것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결함과 악덕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길을 제시하고 
입으로 뿐만 아니라, 말한 바를 자기 삶으로 확인해주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아무런 결함도 없는 천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의 어떤 결함에 괴로워 하고 
심지어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있음을 안 다음에 

이것을 알고나서 

그가 자신의 설교의무를 게을리하고 모든 용기를 잃는다면 
그가 저지른 죄는 
이렇게 저렇게 범죄한 것보다 더 클 것입니다. 

(자 잘 들어보세요.) 왜 입니까?

내가 설교단에 오르면서, 내가 누군지를 바라본다면,

유감이지만 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런 완전함으로 말씀을 전할 수 없을 것이고

나와 다른 여러 사람들을 권면할 수 없을 겁니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오물에 빠져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통째로 남아있어야 하며

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이 설교자의 연약함에 따라, 선포되는데 방해 받아서는 안 됩니다."

 

쉽게 예를 들면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라' 이걸 설교하고 싶은데

나의 실체를 보니까, 나같은 불효자가 없어요.

'아~ 이건 내가 설교 못하지!, 이건 넘어가!' 이것처럼 큰 죄가 없다는 거죠.

나의 연약함에 맞춤형 설교를 하지 말라는 거에요.

 

내가 비록 도덕적으로 실패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통째로 선포되어야 하는 거죠.

이게 설교자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명이에요.

 

그러면 나의 실체를 보는 겸손은 어떻게 적용하느냐?

그것은, 나처럼 못난 연약한 신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자기와 같이 실패하고 초라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권면하고 포기하지 않는 그것으로 적용해야지

말씀선포 자체를 축소시키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도전하시는 아주 엄중한 적용이죠.

 

▲3. 회중에게 적용

똑같은 엄중함으로 회중에게 이렇게 캘빈 목사님이 도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부분은 잘 들으시고 메모하셔서, 여러분의 설교 중에 인용하세요.

왜냐하면 설교를 듣는 회중이 꼭 알아야 되는 내용이에요.

 

"모든 설교를 듣는 모든 이들은, 자신들에게 설교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요구되는 만큼 그렇게 완전하지 못할 때에도

매우 겸손하게 이 교훈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설교자의 불완전함이, 하나님이 비방받아야 할 이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이 천사가 아니고, 이들에게서 이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거룩함이 없다 해서

이들의 악덕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존엄에 해를 가해야 될까요? No

 

이것을 우리는 '저 설교자 는 나보다도 못하네.

그런데도 그가 다른 이들에게 설교를 해?

왜 그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지 않나?'

이렇게 회중은 말할 계기로 삼아선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거룩한 직분을 욕보이는 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통용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론의 여지없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노아의 오늘 이 본문의 예언은 한낱 우화에 불과하고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술 취한 모습, 자기의 수치를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까지 노출시켜서 수치를 드러내셨을지언정

'나는 좀 자숙하는 시간이 필요해' 이렇게 안 그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을, 노아는 선포한 거예요.

 

저에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시고

또 회중에게는 그것을 감안하고

그럼에도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아멘! 으로 응답할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죠.

 

△제가 이 캘빈의 설교 중 '적용' 부분이 너무 좋아서

'적용'만 갖고 사실 설교를 할 수도 있겠다 생각해서

'적용'에 아주 예외적으로 설교 소제목을 붙였어요.

그게 뭐냐면 "의가 없는 자라도"

 

찬송가 494장 '만세 반석 열리니'의 3절 가사예요.

'빈손들고 나아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그래서 노아 가정에서 조차도 그들 안에 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노아를 선지자로, 설교자로 세우고, 그에게 소명을 맡겨주셨어요.

 

저와 여러분의 스토리와 무엇이 다르냐고요.

그런데 '의가 없는' 저와 여러분 같은 이러한 주의 소명받은 사역자들이

어떻게 설교하고, 어떻게 목양하고, 어떻게 부모님을 대해야 되고,

아내를 대해야 되고, 자녀를 대해야 되는지가.. 오늘 본문에 잘 계시되어 있는 거예요.

 

제가 이제 그렇게 여기에 설교원고를 썼는데요.

오늘 우리가 채플 시작하기 전에 찬양인도자가 나와서

그 6백곡이 넘는 찬송가 중에 한 곡을 딱 골라서 불렀는데

'만세 반석 열리니' 찬송가 494장이었어요. 제가 어제 설교원고로 준비한 찬송가와 일치했어요.

 

제가 온 몸에 소름이 진짜 쫙 돋았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오늘 제 설교를 확증해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남았는지 (제가 설교 원고 중에 준비한 그 3절을, 우연의 일치로)

'3절을 다시 부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까 채플 시작할 때, 다같이 또 불렀던 것입니다.

제 마음에 큰 감동이 물결쳤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여러분, 이제 목회지로 파송되시면서

의가 없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럼에도 소명을 주십니다.

 

같이 기도하고 마칠텐데요.

우리 찬송가 494장 3절만 또 한 번 더 부르고, 제가 축도하고 마치겠습니다. 

..................................................

주1)
분량이 약 1700 페이지 정도 되고요.        *편당 약 17페이지
주석까지 합치면 약 2200 페이지 정도 됩니다. 

 

주2)

오늘 설교제목이 '노아'인데, 
똑같은 제목으로 2014년에 <노아>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비추(추천 안 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듣고 영화를 봐야 되겠다. 굳이 이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성경에 있는 얘기는 빼고, 성경이 없는 얘기는 넣고.. 그러니까 좀 실망스럽죠.

그럼에도 오늘 본문의 노아와 관련해서, 
그 영화에서 다룬 소재 두 가지 정도를 나눠보려고 해요.

첫번째는 불임 입니다. 
셈의 아내로 엠마 왓슨이 나오고, 
노아로 럿셀 크로우가 나왔는데, 

근데 노아의 아들 셈의 아내가 아이를 못 낳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방주에 타서, 다음 세대를 이어야될 여자가 불임이라는 거예요. 
(영화에 함, 야벳은 아직 독신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노아는 무슨 생각이 드냐면, 
'이제 우리가 노아 방주에서 동물들을 다 내보낸 다음에는 
우리 인류는 이제 멸망하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 대사로 나올 겁니다. 

그랬는데 방주에 타기 직전에, 무드셀라가 셈의 아내에게 안수를 해줬는데 불임이 치료가 됐어요. 

그래서 셈의 아이를 임신하죠. 

그때 노아가 막 미쳐버리죠. 
그래서 '이 아이가 남자 아이면 살리지만, 여자 아이면 내가 죽인다.' 

그래서 이제 노아가 거의 정신이 나가서 
나중에 막 죽이려고 하는 그 장면, 그게 이제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죠. 

그런 거 보면서 교인들은 실족합니다. 
노아를 거의 미친 사람, 실성한 사람처럼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근데 이제 저도 그 내용을 알고 
막상 루터와 캘빈의 성경 주해를 읽으면서 
노아 가정의 '불임'이라는 주제가, 
그동안 우리가 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이다.. 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주3)

제가 칼빈의 주해를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심지어 그의 자녀들은 비록 결혼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불임의 상태로 간직하셨기 때문에 후손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들에게 자녀들이 있을 경우, 그들이 남은 자들과 더불어 부패할 것이다.' 
애를 키우다보면, 유치원도 보내고 학교도 보내고 
그러면 불신 세상 하고 어울리고, 그러면 타락하고 이렇게 될 거 아니냐? 

따라서 이 집안에 순결이 보존되지 않고서는 어떤 씨를 간직할 방법이 내게 없다. 
비록 부친이 늙고 노쇠하지만 그래도 내가 특별한 은혜로 
그와 그의 자녀들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타락할 것이다.' 

특별한 은혜가 '불임의 은혜'입니다.  (캘빈은 이렇게 해석했다는 겁니다. 또 캘빈 당시에 독신이 많았고요)
그래서 심판이 임하기 전까지, 아무 자손을 주시지 않고 

방주에서 나왔을 때 이제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실 때 
그때 노아의 가문에 태의 문을 열어서 
이제 새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거죠. 
흥미롭죠. 저도 이걸 읽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안 해 봤었거든요. 

 


주4)
창8장으로 넘어가면 루터가 굉장히 흥미로운 주해를 했는데요. 
제가 이 말을 하고 나면, 이제 천국에 가서 루터 목사님께 좀 야단맞을 것 같은데 

35~45세가 되어서, 루터의 신학이 성숙했어요. 
젊었을 때는 자기 입으로 이렇게 얘기했어요.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에 내가 달인이었다.' 
근데 성경을 풍류적(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이제 나는 아주 싫어하고 증오한다.'까지 강한 표현을 해요. 

'왜냐하면 알레고리적 해석 안으로 들어가면 
성경에 본래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루터는 이제 굉장히 알레고리적 해석하고는 선을 그었습니다. 

신학이 성숙할수록 '내가 옛날에 깨닫지 못했다가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걸 존중해줘야 돼요. 자꾸 그의 과거 발언을 들춰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하도 알레고리적 해석에 중세 교인들이 익숙해져가지고 
꼭 그걸 해야 된다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루터가 하나의 샘플로 얘기를 하는데, 너무 흥미로워요. 

노아방주에서 이제 까마귀가 날려보내고, 또 비둘기를 날려 보냈잖아요. 
이제 루터가 이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까마귀는 율법을 상징한다. 까마귀는 까악까악 울면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걸 계속 외치는 것이다'   레18:5
그래서 까마귀는 율법을 상징한다고 보았고요, 

그런데 중요한 건 뭐냐면, 그 까마귀가 노아 방주로부터 날아간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거죠.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입니다. 

그러나 노화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빙빙 돌죠.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 의존해서 '내가 의롭게 되겠다' 이런 태도를 갖는 신자는 
영원히 안식을 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자 복음을 상징하는 게 비둘기입니다. 
그런데 비둘기가 한번 날아가고, 두 번 날아가고, 세 번 날아가죠. 

첫번째 날아간 것은 '율법의 시대, 구약시대다. 구약시대에도 복음이 있었다. 
그러나 안주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아직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시대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의롭게 되는 것은 복음의 원리다.' 

두 번째 날아갔을 때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왔잖아요. 
비둘기는 올리브 열매를 안 먹는데요. 
그걸 물고 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이다.. 라고 보면서, 

근데 올리브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은혜를 상징하지 않느냐? 
그래서 그거는 복음의 시대를 이제 상징한다.. (라고 풍유적으로 해석했고요) 

세 번째 날아가서 비둘기가 안 들어왔죠. 
그거는 앞으로 종말론적으로 구속사의 완성이에요.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됐기 때문에, 돌아올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서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이런 거에 너무나 시간을 투자하지 말아라' 
이렇게 루터가 얘기했고, 이제 캘빈이 그에 대해 이런 논평을 합니다. 

루터라는 말은 언급 안 해도, 루터가 주해한 모든 것을 
'다 헛된 해석이다.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렇게 평했죠. 풍류적 해석이었으므로!

그래서 캘빈은 '성경에 자연스럽고 문자적인 의미의 충실해라!' 이렇게 권면했어요. 

그래서 켈빈이 설교하고 주해할 때는, 늘 루터의 책을 펼쳐놓고 대화하면서 했습니다. 
근데 이제 캘빈은 신사에요. 
비판할 일에 있어서는, 루터의 이름은 언급 안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