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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9장 1~6 온전한 순종

LNCK 2022. 2. 15. 10:58

◈온전한 순종      출19:1~6         2020.02.02. 여러 설교 정리

2020년은 1월부터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제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사랑과 순종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출19:1~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430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탈출하게 되었고, 이제 셋째 달이 되었습니다.  

시내 광야의 시내산 앞에 도달했습니다. 보통 산기슭이라 그러죠.

지난 두 달간의 기간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죠. 

열 가지 재앙으로 당대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이집트를 무력화시키고 
탈출한 것도 놀라운 기적이었고,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2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바다를 건너온 것도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양식과 물을 구할 수 없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터뜨려서 그들을 마시우게 하셨다는 것이죠. 

▲구약의 전체 분량이 총 39권, 929장 23,213절입니다. 
근데 이 구약의 상당한 분량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을 선택하라면 
단연 엑소더스,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럼 도대체 하나님은, 이 놀라운 기적을 왜 일으키셨는가요? 
기적을 위한 기적은 아니었죠. 
바로 오늘 본문에 이 장면(시내산 언약)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을 광야 한가운데로 불러내셔서 
그들과 사랑의 언약을 통해서, 결혼식을 하시고자 하는 마음!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출19장에서 결혼식(너희는 영원히 내 백성이라는 언약식)을 하시고,

그 언약 조문이 다음 장인 출20장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모든 법의 헌법에 해당하죠.

그 하위법은, 출애굽기 21장부터, 민수기, 신명기에 걸쳐 쭈욱 나옵니다.   

 

먼저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은 19:5~6절을 통해, 퍼로퍼즈(청혼)를 하십니다.

5~6절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리고 모세에게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셨죠. :6b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을 내려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청혼(퍼로퍼즈)을 전달합니다. :7

 

그러자 백성들은 청혼을 OK로 승낙합니다. 그게 8절이죠.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그러자 모세가 백성의 뜻을 다시 여호와께 전합니다.  :8b

 

그러자 쌍방 합의가 이루어져서 이제 언약식, 결혼식이 치러지게 됩니다.

백성들이 준비해야 될 사항은, 옷을 빨고 성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4

 

그러자 드디어 시내산에 하나님이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산 정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대표 모세를 거기로 부르십니다.

 

시내산 (혼인)언약은, 그 당시 나라들 사이에 유행하던 '종주권 조약' 형식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지배국은 종속국을 보호해주고,

대신에 종속국은 지배국 왕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신랑 신부 언약도 마찬가지죠).

그 충성을 다하는 언약이 대표적으로 다음 20장인 십계명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역시 신구약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인데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친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시내산 언약의 장면은 보면,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결혼식'이었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영원토록 보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시내산의 결혼식'은 결코 성대하거나 화려한 결혼식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야외에서 세팅한 스몰 웨딩 정도라고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신부가 2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왜 스몰 웨딩인가요? 
그건 하객들이 없기 때문이에요. 
광활한 광야와 드높은 하늘 외에는 다른 하객들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거대한 구름 기둥이 솟아있고, 시내 산정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상상만 해도 엄청난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광야의 적막강산 한 가운데, 그 백성을 불러 내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사랑 언약을 맺으시고 있어요. 

▲그 내용의 시작이 3~4절의 말씀입니다. 
19:3~4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모세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너는 야곱의 집, 즉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이게 첫번째고요. 

두 번째는 '내가 행한 일을 너희가 직접 보았다' 입니다. 

자 이 두 가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첫번째는 창세기를 읽어보면, 야곱은 도망자 신세였죠. 
인간적인 욕심이 많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허락해주신 하나님, 
'내가 너희 선조들과 맺은 언약을 지금 완성하려는 것이다'.. 라는 것이죠. 

두 번째는,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놀랍게 구원했는지.. 
너희가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무슨 신부 보쌈하듯이 
강제 결혼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데려오신 게 아니라는 거죠. 
'너희가 직접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경, 그 사랑의 증거로서 
그들의 기적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죠. 


◑자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5절 말씀입니다.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우리말성경) '그러나 이제 너희가 내게 온전히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특별한 내 보물이 될 것이다.' 

위 구절은 히브리 성경에 접속사 '아타'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뜻이죠.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내게 온전히 순종하라' 여기에 밑줄을 그으셔도 좋겠어요. 
'내게 온전히 순종하라' 개역성경에는 '내 말을 잘 들으라' 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샤마'인데, '듣는다(들으라)'라는 단어에요.

시28:2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도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똑같은 개념, 똑같은 단어입니다. 

왜냐면 '사랑의 언약'이라는 것은 
쌍방간의 관계, 상호간의 관계이기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성경의 명령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시28:2 

또한 우리에게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 명하시는 거죠. 출19:5

 

△올해 교회 표어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잖아요. 
하나님이 그 명령을 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전심전력으로, 전 존재의 사랑으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 말을 경청하라' 명령하실 수 있는 것은 
내 입술의 모든 말과, 내 마음의 모든 묵상과 
내 안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의 파편까지도 
하나님은 우리를 경청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 
거짓말장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말 그분의 말씀을 소중하게 듣는다면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거죠.

 

내 보물이 되리라 (개역에는 '내 소유가 되리라)  19: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너희가 내게 온전히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특별한 내 보물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물로 사용하신다는 거죠. 

무엇인가가 보물이 될 때는 
세 가지의 가치 때문에 보물이 됩니다. 

1) 첫째는 부여된 가치 때문에 보물이 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보물입니다. 
자녀가 능력이 있어서,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고통을 주는 자녀라 할지라도 부모에게는 보물입니다. 
왜요? 부모가 그 자녀에게 부여한 가치 때문이에요. 

우리들이 하나님께 가치 있는 보물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가치가 부여된 보물인 거죠. 

2) 또한 지불된 가치를 통해서 보물이 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보물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에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가치 있는 보물인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3) 세번째, 쓰임 받을 때 그것은 가치 있는 보물이 됩니다. 
첫번째 두번째 보물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다 이루신 거예요. 

그러나 세번째는, 우리의 순종에 따라서 
우리가 특별한 보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가치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느냐.. 결정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 좀 내버려 둘 수 없습니까?' 라고 항변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너무너무 사랑하신 분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 버팀목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다 끊어놓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기 위해서 내버려 두시지 않는 거에요. 

불은 순수한 금 아닌 것은 다 태워버립니다. 
세상의 없어질 것들은 다 태워버리는 것,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불처럼 우리를 연단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거예요. 
'너희가 내게 온전히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문제는 우리가 온전히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역사 속에 나타났습니다.

출24장에 보면, 모세를 통해 율법을 낭독해 주시까 
'아멘 아멘 우리가 순종하겠습니다!' 그 고백은 진심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순종을 다짐했던 이들이 한 것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배역했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전심을 다한 순종은 
우리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순종을 이루신 분이에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순종을 이루신 단 한 분은 
바로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맺어주신 새 언약, 예수님의 피로 맺은 그 새 언약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놀랍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 특별히 구약성경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에 일치를 
'청종'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Listen and Obey   *들을 청, 따를 종  *히. 샤마, 출23:21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하나라는 것이죠. 나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성경에는 '순종'이라고 번역했고, 
개역성경에는 '듣는다'라고 번역을 한 거예요.  *히. 샤마
'듣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개역이 '듣는다' 라고 번역한 것은, 
그저 누구의 말을 듣는다 hear 의 뜻이 아니고, 
엄마가 아이에게 '엄마 말 잘 들어!' 할 때의 '듣는다'입니다. 성경이 그런 뜻이죠. 

그런데 우리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님이시여' 같이 행할 때가 있어요. 
저희 사춘기 두 아들들이 요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세요. 
멀뚱히 저를 쳐다만 보죠. 

근데 제가 이 표현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찾아보니
김소월 시인의 "초혼"이라는 시가 있더라고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이 없는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부른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이 시의 배경을 보니까, 시인이 사랑하던 이가 죽은 이후에 부른 노래에요.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불러도 대답을 할 수가 없다는 절규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생각을 해본다면 
분명히 내가 살아 있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라면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데 
어찌 내가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추억 속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성경지식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현재진행형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 이 순간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거예요. 

제가 어제 이렇게 묵상을 하다가, 제 대학교 3학년 때가 생각났어요. 
한 25년 전에 제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정말 그 전에는 앉아서 열심히 공부만 했어요. 

그런데 책을 펼쳐도 그 사람 생각밖에 안 나고,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죠. 참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쪽지 하나를 그 사람에게 받으면 너무나 감동적인 거예요. 
그리고 장문의 편지를 받으면 더 감격적인 것이었죠. 

누구길래 그러냐? 지금 제 룸메이트(아내)입니다. 
그래서 편하게 말씀을 드리는 거죠.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언어를 
하나도 놓칠 수 없을 만큼 소중해지는 것이에요.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제게는 잘 안 들립니다.' 왜 안 들릴까요? 

물론 그런 분에게 '하나님의 음성 듣기' 강의를 들으시라고 할 수도 있고 
훈련코스를 받으시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제가 그런 분들에게 상담을 할 때는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권면해요.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구구절절 나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이 감격적으로 다가온다면 
매일 매순간 나를 환란가운데서 건지시는 그분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한다면 
어떻게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겠어요? 

캐나다 밴쿠버에서 유스코스타 Youth Kosta 를 할 때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상담을 신청할 수가 있는데, 한 학생이 상담 신청을 했어요. 
밴쿠버에 온 지 2 년, 그리고 오자마자 전도를 받아서 교회를 다닌지 2년 되었대요.

근데 이 친구를 딱 보니까 고1학년인데 
어린 친구지만 굉장히 영적인 사람이더라고요.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그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제 안에 하나님의 음성인 것 같기도 하고, 내 생각인 것 같기도 한데 
이걸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죠. '이 집회에 친구들 몇 명이 같이 왔냐고?' 
너댓 명이 갇이 왔대요. 

자 그러면 이렇게 집회를 하고 쉬는 시간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 
내 친구들이 어디 있나, 이 1천명 가운데서 찾는 게 쉽냐/ 어렵냐? 물어보니
금방 찾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들이 내게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자기에게 친밀한 존재이기 때문이랍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도 금방 눈에 띄게 돼 있어요. 
많은 소리들 가운데도 또렷이 들리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평생을 했을 지라도 
정직하게 대답해야 되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정말 소중한 존재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내게 친밀한 존재이신가?' 

내가 지식적으로 그분의 말씀을 아는 것 말고, 
정말 그분의 음성에 내가 친밀하게 다가가고 있는가요? 

사실 성경전체가 절절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잖아요. 
'내가 너희를 오히려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만큼 너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라는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하시는 거잖아요. 성경은,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는 이야기이니다. 

여러분, 성경이 왜 이렇게 두꺼워졌나요? 
똑같은 사랑 이야기를, 마치 드라마나 영화처럼 
시대만 바뀌고, 주인공만 바뀌고, 계속해서 그 배후에서는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계신 것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쪽지 하나만 받아도 반가운데 
장문의 편지를 받고 감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이 너무 두껍다, 읽을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여러분 사랑하면 묵상하게 돼 있어요.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이 끊임없이 내면에서 반복 재생되게 돼 있다고요. 
자꾸 맴돌고 떠오르는 것이죠. 

또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성경 말씀대로 사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지킵니까?' 

제가 창세기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러분 이 사람들이 
정말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그대로 다 행위 완전하게 지켰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게 아니에요. 

이 말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이 말씀이
나를 위한 그분의 최선의 사랑의 말씀 이라는 것을 신뢰하고 
기꺼이 최선을 다해 순종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간 사람들이 복을 받았어요. 

사실 세상에 소중한 것 치고, 쉬운 것은 없습니다. 
학생들 공부 열심히 하는 거, 이거 쉬운 일 아니에요. 
사업가가 사업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니에요. 
우리가 건강을 지키겠다고 꾸준히 운동하는 것도, 여러분 결코 쉽지 않잖아요. 

그러나 내가 그 일에 애정을 갖고 우선순위를 두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아버지와 자녀들의 사랑, 
또 한 가지는 연인의 사랑
아니면 남편과 아내의 사랑으로 표현을 많이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이 두 가지 사랑의 색깔이 너무나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가 다 공감하는 것인데요. 

연인들은 데이트도 하고, 그리고 집에 가면서 또 전화하고 
집에 와서 또 문자 보내고, SNS하고 그러잖아요. 
그렇게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것에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내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은 
정말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전인격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잔소리로 들리잖아요. 
'야 내가 언제까지 저 잔소리를 들어야 되나?'

여러분 이게 굉장히 결정적인 차이점이에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잔소리로 들리는가? 
아니면 사랑의 속삭임으로 들리는가? 

전자인 분은, 말씀을 지키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아니 말씀을 단 하나도 지키기 힘들어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리는 분들은 
그 음성을 따라 사는 것이 행복한 거예요. 
그게 감사한 거예요. 자발적인 거예요. 

자 오늘 본문에 가장 중요한 5~6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말 성경 '그러니 이제 너희가 내게 온전히 순종(샤마)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특별한 내 보물이 될 것이다. 
온 땅이 다 내 것이지만,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여라'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과 사랑의 결혼식을 맺고 
순결하고 거룩한 신부가 되고 나면 
세상의 많은 존재가 있지만 '특별한 존재가 되게 해주시겠다' 이런 약속이에요. 

▲여러분, 펜이 있으면 번호를 매겨보셔도 좋겠어요. 

-첫 번째는 5절에 특별한 보물, 
-두 번째는 6절에 나오는 제사장 나라, 
-세 번째는 거룩한 민족입니다. :6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맺어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때문이라고 했죠. 

이것을 우리나라 역사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어명에 순종하는 사람, 

'특별한 보물'이라는 표현은 '성은을 입는' 것이죠. 

그리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된다'는 것은 
성전과 성민이 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명을 따르는 사람이 
성은을 입고, 성전이 되고, 성민이 되는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존재와 대상으로 삼으십니다. 

△결혼식 주례를 많이 하면서, 결혼식장에서 보면 
요즘은 이런 얘기하시는 분들이 좀 드문데 
가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좀 어려울 때가 있어요. 

'신랑이 아깝다. 신부가 아깝다..' 이런 표현이에요. 
그건 굉장히 틀린 말이거든요. 

물론 좋은 의도로 이야기한 것이지만, 여러분 결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최고의 존재가 되기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그 두 사람의 사회적인 백그라운드가 어떻게 됐든 
그 사람이 경험치, 능력이 어찌됐든 상관없이 
사랑은 '등가의 법칙'입니다. 

서로에게 최고의 존재가 되는 것, 
서로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 결혼이잖아요.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 작가 맥스 루케이도가 <너는 특별하단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죠. 
그림 동화책이에요. 그런데 이런 상황 설정입니다. 

앤닉 이라는 작은 나무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예쁘고 멋지고 재능있는 앤닉들에게는 별 표를 붙여주는 거에요.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별표를 
다른 앤닉들이 '당신은 너무나 훌륭합니다'하고 이렇게 별표를 붙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볼품이 없고 재주가 없는 앤닉들에게는 검정색 점표를 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주인공 펀치넬로가, 자기 온 몸에 검정색 점표를 뒤덮고 있는 존재거든요. 

 

왜냐하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점표가 늘어날수록 지나가던 다른 앤닉들이 이유 없이 점표를 더 붙이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루시아라는 다른 앤닉을 만났는데, 얘는 희한한 존재인 거예요. 
별표도 없고, 점표도 붙어있는 게 없는 거예요. 

'아니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그러니까 루시아가 '엘리 아저씨를 만나러 가봐, 나는 엘리 아저씨를 만났을 뿐이야!' 

'엘리'는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펀치넬로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엘리 아저씨를 만난 날,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듣죠. 

'다른 앤닉들이 너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중요하지 않아.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지! 
너는 특별한 존재란다. 왜냐면 내가 너를 만들었기 때문이야. 
너는 내게 소중한 존재란다!'

펀지넬로는 이 아저씨의 말을 듣고 그 공방에서 나와서 
'정말 그런가 봐'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 몸에서 검정색 점표가 하나 뚝 떨어지는 거죠. 

너무나 신나고 기뻐서 '와~ 나는 정말 특별한 존재인 것이 맞아!' 라고 외치는 순간 
자기 온 몸을 덮고 있던 검정색 점표들이 모두 다 떨어져 나간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러분이 한 사람 한 사람은 특별한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의 칭찬 한 마디에 우쭐해지고 
사람들의 비난 한 마디에 낙심하고 위축되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나를 향해서 
'세상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너는 특별한 존재란다.' 

"내 소유(보물)가 되겠고" :5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너는 나에게 특별한 보물과 같은 존재란다.' 
이 말씀, 이 음성을 들으면 
우리 영혼에 놀라운 자유와 해방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특별한 존재이시고 
내가 하나님께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인 것이죠.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의 보물이 된다     출19:5         *설교 제목

신명기 33:26절 말씀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성경의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녹음기를 틀어놓듯이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는 뭐냐면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다!' 이거에요. 

저도 한번 따라 보세요.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나님이 듣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계속 하시는 거예요. 
'야, 나만큼 너를 사랑해 줄 존재는 없어! 
나만큼 너를 구원해줄 존재는 없어! 
나만큼 너를 생각하는 존재는 없어!' 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셨는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그 고백을 하는 순간, 

하나님이 '그래, 나에게도 너처럼 특별한 존재는 없어!' 
라는 쌍방간에 이 놀라운 최고의 존재라는 사랑의 고백을 나누는 날이 
바로 사랑의 결혼식을 이루는 본문 출19장 시내산의 장면인 것이죠. 

▲그러나 의문을 던질 수 있어요. 
'아니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놔두시고 
왜 유독 이스라엘만 특별한 보물이라고 하셨는가?' 
이렇게 형평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의문이 생길 수 있어요. 

그런데 참 놀랍게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명의 발상지도 아니었습니다. 
강대국도 아니었어요. 물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역사상 위인들이 많았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들은 유리방황하는 유목민들이었고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끊임없이 침탈을 당했던 약소민족이었어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갈망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생각하신 거예요. 

다시 한번 질문할까요? 
'왜 하나님은 여러 많은 민족들 가운데, 그들 이방인들은 해당이 되지 않고, 
이스라엘이 특별한 보물로 사랑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편애나 집착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민족들과 이스라엘이 
한 가지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게 오늘 우리가 출19:5절에서 보았던 
'내게 온전히 순종하고' 이에요.    *선택, 은혜에 대한 성도의 반응response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내가 온갖 시험과 유혹가운데, 절망과 실패가운데서 무너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신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은 세상에 자랑거리를 갖춰야되는 것도 아니고 
행위 완전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오늘날 이 시대는 상대주의가 극대화된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진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느냐? 모든 종교의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는 것이다. 
어떤 신이든지 사랑하고 잘 숭배하면 된다.' 

근데 거기서 멈추지를 않죠. 
서구사회에서는 어떻게 한 남자가, 한 여자만 사랑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한 여자가, 한 남자만 사랑할 수 있느냐? 어차피 불가능하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영적인 세계, 종교 영역에서도 다원주의적 관점이고 
인간 사회에 대해서도 다원주의적 관점이에요.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정말 서로 사랑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제 삼자가 개입하기를 원치 않죠. 
사랑은 배타성을 갖게 돼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런 사랑의 배타성은 '폐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순수성'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인정할 것은 이 상대적인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게 모순이자 역설인거에요. 

사랑은 배타적이게 되고, 그 배타성은 순수성을 추구하는데 
순수하려면 절대적이어야 되거든요. 

사랑에 빠지는 인간 자체는 상대적인 존재인데 
그 상대적인 존재가 사랑에 빠지면, 절대적인 것을 갈망하게 되어 있어요. 
(즉 나만 사랑해 주세요)

즉 변하지 않는 사랑, 지속적인 사랑, 배신하지 않는 사랑, 
영원한 사랑을 갈망한다고요. 

세상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걸 갈망하게 되어 있다고요. 
왜 그런가요? 
그것은 이 사랑이 인간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을 행복하게 하겠다고 해서 
인권을 이야기하고, 휴머니즘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인간 사회가 행복해지지 않아요.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요. 
영성이 회복되어야만, 도덕성이 회복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험해야만 
우리 가정에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 만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죠. 
그냥 약간 뜬구름 잡는 것 같은 표어로 생각하시나요?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가정에 진정한 사랑이란 이루어지지 않아요. 

신명기 6:4~5절 말씀 다시 한번 고백하겠습니다. 
(우리말 성경)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같은 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창조주이시고,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완성자이시기 때문이에요. 

나를 조성하신 하나님 외에는, 내 영혼에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존재는 없어요. 
목숨을 내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외에는 
'내 영혼에 주인'이라고 고백할 분은 없는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동행하시며 
나의 인생을 완성하시는 성령 하나님 외에는, 
영원한 동반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은 유한합니다. 
왜냐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유한하기 때문에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배신하고 떠나기도 하고 
그 사랑이 멈추기도 하고, 그 사랑이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이 무상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나누는 사랑도 무상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만은, 오직 하나님만은 
무상한 사랑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을 끌어 안으시는 거예요. 

그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려운 길이 아니라 
감격적인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할 때, 누군가 한 사람이 진짜 사랑에 빠지면 
그리고 그 사랑이 나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되면 
내가 온 세상을 얻은 것 같다.. 이런 표현을 쓰잖아요. 

사람 하나 사랑하면서 무슨 온 세상을 얻나요? 
이게 사랑의 절대성 이라는 가치를 반영하는 말이에요. 

별거 아닌 것 같죠.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하나님 한 분을 뜨겁게 사랑할 때 
우리 영혼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가 받아야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사랑합니다' 이 찬양 부르며, 함께 사랑을 우리 마음으로 고백하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