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설교의 주제)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윗의 이야기를 읽어가고 또 묵상하면서 다윗이라는 3천년 전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읽어가며, 우리가 웃고 때로는 박수치고 때로는 기뻐하고 슬퍼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윗이 만난 하나님, 다윗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다윗처럼 자주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윗이 드디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전쟁을 통해서 왕이 되거나 또 무슨 술수를 부려서 왕이 되거나 계략이나 계책.. 등 좋지 않은 방법으로 왕이 된 게 아니에요.
그는 열두 지파가 한 마음이 되어서 그와 언약을 맺고 왕위에 추대되는 과정을 잠잠히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무능해서가 아니에요.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이 땅에 왜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존재해야 하는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라가 통일되는 것을 원했던것이죠.
오늘 그렇게 통일이 되는 모습,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삼하5:1~2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나왔어요. 헤브론은 지금 유다 지파의 중심지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죠.
이스라엘 전체 지도로 보면, 헤브론은 남쪽에 조금 치우쳐 있는 곳입니다. 이곳으로, 북쪽에 있던 11 지파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다윗에게 나왔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다윗에게 '우리 왕이 되어 달라' 라고 스스로 자청하게 됩니다.
어느 나라에 이처럼 '왕이 되어 달라'고 백성들이 다함께 자청하는 이런 사례는 참 보기 드뭅니다.
그 당시에 절대 전제 군주제와 같은 세계에서 그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실 싸워서 쟁취하거든요.
근데 지금 다윗은, 싸우지 않고, 권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나아왔다'고 하지만 역대상 12장에 오면, 35만 명이 이제 헤브론에 오게 돼요. *대상12:23~40
정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인 것은 아니고, 12지파의 대표들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였겠죠.
그런데 이들이 나와서 지금 왕을 지금 삼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면, 세 가지 이유를 들어요.
1) 첫째는 '왕은 우리와 한 골육이니이다.' 뻔한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왜냐면 다윗은 어쨌거나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기도 하고 그 시글락에서 살면서 이렇게 또 유대로 출몰했던 사람이어서 어떤 오해가 있을 수도 있고 '저 사람이 과연 우리 이스라엘 민족의 한 구성원이 맞나?' 하는 그런 미심쩍해 하는 소리들도 일부 있었겠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은 '그는 우리와 한 골육이다. 한 형제다' 이 확인이 중요한 거죠..
왜냐면 신17:15절을 보면, 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때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신17:15
반드시 자국민 중에서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야 한다는 거예요.
'이 조건에 합당하기 때문에, 당신을 우리가 왕으로 세우고자 한다..' 이렇게 권력이 지금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 이 당시에 어떤 나라도, 이런 왕 옹립 제도는 없었다는 거예요. 절대군주 국가가 대부분이었던 고대사회에서 이스라엘은, 일종의 입헌군주제 와도 같은, 발전된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서 대단히 중요한 싸인이에요. 성도는 다르다는 거죠. 지금은 국민투표에 의한 선거가 보편화되었지만
여러분 지금 본문은 무려 3천년 전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과 어떤 계약 관계로 왕권을 행사하도록 초청 한다는 것은 이건 그 당시로서는 특별한 선례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서 세워지고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첫번째는 '당신은 우리의 형제다'
2) 두 번째는 당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부터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나라들과의 전쟁 때마다 당신은 우리를 승리로 이끔으로써 우리를 도왔던 사람이다.. :2
어쨌든 다윗, 당신의 과거 전력이 정말 우리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섬겼던 흔적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는 얘기란 말이에요.
3) 세 번째는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라, 네가 통치자가 되어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사무엘을 통해서 그에게 기름 부을때부터 네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다' .. 라고 예언되어졌다는 거죠. :2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을 때, 양을 몇 마리 치고 있었을 뿐입니다. 목동이었어요. 주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의 지도자는 꼭 목동출신이어야 한다.. 이런 말은 아니지만 '목자같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양떼에 관심을 두고 돌보는 자질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 문화에서는 '목자' 라는 말이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죠. 그러나 가나안 땅이나 중동 지방에서는 목동, 목자의 삶이 어떤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왕, 군주가 아니라 목자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유교 문화에 젖어 있는 나라에서 가지는 '가장'의 의미와 이스라엘의 '목자'의 의미는 상당히 다르죠.
우리나라의 가정/교회/사회 공동체의 지도자가 유교적 가부장적 가장이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목자의 개념을 가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삼하5:2
목자는, 무기력한 양떼를 돌보는 사람이에요. 양의 고집스러움, 양의 연약함, 넘어지면 제 힘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존재예요. 눈이 너무 근시어서 앞이 어디인지도 분별하지도 못하는 존재예요.
목동이 없으면, 양은 방향을 분별도 못하는 존재에요. 앞서가는 자를 따라가다가 몽땅 들에서 절벽아래로 떨어져 죽는 존재들이에요. 온몸에는 냄새가 나는... 하나도 양은 매력적인 데가 없지만 그 양떼를 끊임없이 돌보는 목자의 심정.. 그게 지도자의 심정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목자로 오셨단 말이에요.
사울이 왜 전장에서 죽고, 다윗이 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느냐? 목자와 같은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2
저는 여러분들이 기업의 사장이 되었건, 여러분들이 뜻을 품고 정치에 나가건 뭘 하든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로서 사람들을 섬기겠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을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불렀고 *요10:3 이름을 붙여 줄 만큼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각각의 양들을 돌보았고, 양들은 그런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가 부르기만 하면 양우리에서 나가고 들어가고 하는 이런 관계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한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런 마음, 그런 심성, 그런 중심, 그런 자세를 가져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에요.
◑3절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아까 입헌군주제라는 말을 드렸습니다만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서 다윗과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맺었다는 거예요.
그냥 단순한 고대 근동의 한 나라에서 왕관을 씌워주는 대관식.. 이런 개념이 아니에요. '언약을 먼저 맺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한마디를 꼭 기억하십시오! '언약을 맺다' 왕이 되는데 언약을 맺었습니다.
후에 장 자크 루소같은 사람이 '사회계약론' 이런 주장을 했지만.. 백성들의 권력을 사실 모아서 왕에게 위임하는 거란 말이에요.
신정국가까지는 아니어도 민주주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권력, 권리를 모아서 그 권력을 대신 행사해 달라고 맡기는 위임계약, 위임관계에 따라서 정치 시스템이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치제도의 뿌리가 본문 같은 성경적 근거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장로들이 모여서 '당신은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 선한 목자가 되어 달라' 이런 계약을 한단 말이에요.
지금 어쨌든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는 것은 언약관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 다른 국가들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3 이 말 뜻은,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들 앞에 왕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언약, 계약으로 체결한 것입니다. 백성들과!
이것은 다윗이 왕권을 마치 신의 권위로 마구 휘두르겠다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왕권신수설'과 같은 다윗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겠다는 뜻도 아니고,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을 물어 잘 다스리겠다는 뜻이고, 백성들은, 그런 왕의 통치를, 잘 받아들이기로 서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왜 왕위에 올랐느냐? 원래는 사울이 왕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사울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펼치는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세속 왕들처럼 오직 자기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고,
백성들을 목자로서 보살피는데 등안히 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불명예퇴진을 하게 되었고 이제 다윗이 새로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왕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자인지를 '백성들과 언약식'을 통해서,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통치를 펼치겠다는 것이고, 백성은, 그런 왕의 통치를 진심으로 따르겠다는 .. 언약, 약속, 다짐, 선서이었던 것이죠. 주2)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다윗은 지금 세번째 기름부음을 받는 겁니다. -사무엘에게서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될 때, 삼하2:4 -지금 헤브론에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삼하5:3
◑4~5절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자 이때 보면, 우리가 이 언약을 맺고 왕이 되는 날까지 그는 7년 반 동안 헤브론에 머물러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헤브론에서 자기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골육간의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결국은 삼십세에 왕위에 올랐고 7년 반 동안은 유다 한 지파를 다스렸고 그리고 나머지 33년 동안은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 당시에 공직에 올라가는 나이가 30세였어요. 그 당시에 30 세가 되어야 공직에 나아갈 수 있는 나이였는데, 그 30세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그를 연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30세에 시작하십니다. 요셉도 마찬가지고. 그 당시에는 그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공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올지라도 오늘 본문의 다윗 얘기를 읽어가면서, 다윗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알아가면서
우리 자신이, 고난속에서 우리가 견뎌내야 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이걸 놓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비록 그가 아둘람 동굴에 있을 때 사회부적응자, 범죄자, 빚진 자... 어떻게 보면 세상이 버린 자들로만 아둘람 동굴에 4백 여명이 모이게 되었어요.
사람은 누구와 같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변합니다. 사람은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 닮아가게 돼 있어요. 미워하면서도 닮고, 좋아하면서도 닮고..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을 닮아갑니다.
그러나 다윗은 범죄자들하고 같이 있다고 해서 그의 인격이 범죄자들처럼 변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여러분 되게 고난을 많이 겪으면, 고난을 겪는 환경 속에서 사람이 변하게 되어 있어요. 악한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악해지는 거죠.
왜 젊은 나이에서부터 신앙이 중요하냐? 신앙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언약적 기초 위에서 자기 인생을 세우겠다는 믿음의 결단이고,
그래서 내가 어떤 환경에 노출되고, 내가 어떤 고난 가운데 들어갈지라도 그 하나님과 관계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내가 맺는 다른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그런 인간적 신뢰의 기초를 허물지 않게 되는 거죠. (십계명을 지키니까요) 그래서 젊은 때부터 더 큰 인격, 더 높은 인격, 더 넓은 인격이 되는 겁니다. 그런 유일한 길이 신앙의 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자녀들을 아무리 교육 시키고 아무리 여러분들이 잘 양육하더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신앙, 올 곧은 신앙, 참된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게 약하면, 교회도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져요. 교회 지붕 위에 십자가 세운다고 교회입니까?
그 건물에서 우리가 예배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 받으시는 예배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골방에서 혼자 앉아서 눈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정말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과의 신뢰, 하나님과의 언약적 기초 위에서 내 삶을 세우고야 말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처럼 받으시고,
그렇지 않고 오늘 늘 세상을 닮아가기 위해서 애쓰고 세상을 동경하면서, 세상 속에서 몸부림치는 가인과 가인의 제사는 지금 이 시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예배를 안 받으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처럼,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서 사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 무슨 약속을 하건,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된단 말이에요.
우리가 서구 문명, 서구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사회는 과거에 이런 언약적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나라가 강성하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기독교의 점차적 붕괴로, 그 모든 기초가 다시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를 만났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거짓이 난무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진리가 왜곡되고 심지어 역사관이 비틀어지고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말이죠.
더 잘 교육을 시키면 됩니까, 더 좋은 학교를 보내면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우리가 본질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이 교회 속에서 우리가 계속 묵상하는 건 뭐에요?
하나님과의 그런 신실한 언약적 (=말씀의) 기초 위에 다시 우리가 교회를 세우자! 우리 인생이 다시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우리 자녀들을 여기서부터 출발시키자!
따라서 부모와 자녀들과 약속을 하면, 부모가 목숨을 걸고 자녀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고
부모가 한번 결혼의 약속을 했으면, 목숨을 걸고 그 결혼언약을 지켜내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라야 결혼에 대한 꿈을 갖게 될 것이고, 가정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인생에 대한 소망을 갖지 않겠어요?
이게 다 무너져 있는 세상을 살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비슷하게 살아가지고 뭐가 하나 달라질 게 있겠냐는 것이죠.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나요? 하나님은 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나요? 왜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시나요?
무슨 대단한 능력 때문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가 하나님과 맺은 이 신실한 언약적 기초의 삶 위에서 그는 인생을 살아갔기 때문에
그가 아둘람 동굴에 있을 때나, 시글락 공동체에 있을 때나, 광야를 전전할 때나 어디에 가나, 어디에 있으나.. 그는 주변 사람들을 닮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인격을 점점 닮아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다윗 인생 얘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점점 깊이 묵상하는 사람이 되고,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신앙을 부어주시는 목적이란 말이에요.
신앙가지고 뭐 할 건데요? 뭐 하려고 신앙을 갖고 사는 겁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매주 예배를 드리는 겁니까? 왜 매일 성경을 읽는 겁니까?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세상처럼 살아가려면.. 이걸 뭐하러 다 이런 힘든 삶을 살겠어요? 우리가 이런 이런 신앙생활의 수고를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따라서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동안 그는 비로소 세상 나라들과 구별된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기초를 다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초가 다윗이라고 하는 인격,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한 인격속에서 시작되는 일이란 말이에요.
우리는 제도를 바꾸면 나라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신기술이 나오면 사회가 달라질 겁니다. GDP가 3만불 에서 7만 불되면 더 달라질 겁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인격이 달라지는 부분은 없단 말이에요.
우리 인생의 기초, 우리 삶의 기초, 이 나라의 기초, 그걸 어디서부터 우리가 새롭게 해야 되느냐?
그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맺은 이 언약적 기초 위에서, 우리의 기초를 새롭게 할 때만 가능한 일이 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이 땅에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죠.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게 되고 진리 위에 인생의 기초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죠.
다윗의 왕권이 그냥 강성해졌냐?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그런 기초를 확인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울과는 다른 왕이 되었고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가 다스리는 또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지를 한번 보자는 겁니다. 그걸 사무엘하 뒤에 써 놓고 있죠.
◑6~7절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헤브론의 문제는, 지정학적으로 남쪽으로 치우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이 되면, 어디를 새로운 수도로 정해야 되느냐? 많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루살렘은 헤브론보다 위쪽이에요. 그래서 유다 지역의 북쪽 끝에 있어요. 또한 사울 왕의 베냐민 지파 최남단 끝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의 북쪽 경계와 베냐민 지파의 남쪽 경계에 있는 게 예루살렘이에요.
근데 가나안 7부족 중의 하나인 여부스 족이 사는데 이게 철옹성, 천혜의 요새와도 같아요.
왜냐면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 서쪽에는 힌놈의 골짜기가 남쪽에서 서로 만나지요. 그래서 북쪽을 제외하고 계곡이 (마치 해자처럼) 밑을 파고 있어서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진 것과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 누구도 거기에 쉽게 침공을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예루살렘 성을,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래로 누구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곳 주인 여부스 사람들이 자신만만해요. 그래서 다윗이 지금 예루살렘 성을 치겠다고 그러니까 여부스 인들은 '야 우리는 맹인들하고 다리 저는 사람들만 있어도 너네들을 물리칠 수 있어!' 하고 반응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공략하지 않습니다. 부하들 몇 사람 소수를 데리고 공략을 해요.
그런데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 보면, 히스기야 수로 라는 게 있습니다. 그건 히스기야 때 만든 거고요. 다윗 당시에는, 기혼 샘으로부터 물을 끌어 올리는 수직에 가까운 수로가 있었어요. 다윗이 그 수로를 통해 공격한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나오지만 요압이 앞장 서서 수로를 뚫고 들어가서 거의 무혈입성을 하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여부스 족속이 그냥 방심하고 있다가, 완전히 예루살렘 성을 빼앗기게 됩니다. 따라서 이 성을 빼앗는 것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어요.
첫번째는, 이 성이 이스라엘 전체로는 거의 중심 지역에 가까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제의를 하거나, 모임을 가지더라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지리적 중심의 가지는 상징성이 크다는 거에요.
그리고 거기에 성전을 세우면, 모든 사람들이 절기 때마다 제사를 드리러 올라올 터인데 전국에서 얼마나 모이기 쉽겠습니까? (우리 나라로 치면 위치상 '구미' 정도 될까요?) 두 번째는, 이때까지 누구도 공략하지 못했던 이 예루살렘 성을 쟁취함으로써 사실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모든 지파들에게 놀라움과 기쁨의 선물을 어떻게 보면 이 다윗이 '왕 취임 선물'을 본인이 백성들에게 준 거나 마찬가지에요.
'여부스 성은 우리가 못 뺏는다'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윗은 뜻밖에 너무도 쉽게 그걸 공략한 거에요.
세 번째로, 도읍을 신도시로 옮기게 되면, 그 땅의 기득권 층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여부스 사람들은 다 쫓아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이제 다윗성이 된 거예요. 다윗의 전리품이나 마찬가지죠.. 거기 새로운 성읍에다가 무엇이든지 새로운 계획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기쁨이 있단 말이에요. 새 집에 이사 가도 기쁘지만, 새 도시를 차지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 다윗의 기쁨이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진짜 다윗이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8~10절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이 여기까지 오는데, 제 혼자 힘으로 온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이걸 다윗이 잊지 않는 사람이 된 거죠.
사람은 조금만 권력을 잡아도 완전 달라집니다. 사람이 순식간에 변하는 걸, 저는 너무나 자주 봤기 때문에, 이런 게 놀라운 거예요.
다윗은 왕이 되고 나서도, 사람이 안 변하는 게..
안 변하는 게 사실은 기적에 가까워요.
그 상태가 지속이 되는 것.. 그것 또한 신앙의 힘이죠.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지만, 내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왕이 누군지를 하루도 잊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이게 다윗의 위대한 점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점점 더 강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강성하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자꾸 시험에 들어요.
그러면 다윗이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강성해졌다, 부유해졌다, 잘 됐다! 우리도 하나님 믿으면 그렇게 강성해져야 되지 않냐? 부유해져야 되지 않느냐? 잘 돼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이 '강성함'의 뜻을 우리가 조금 더 깊이 묵상해야 된단 말이에요.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잘 돼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잘 되는 게 정상아닙니까.
돈도 많아지고, 권력도 생기고, 무슨 다윗의 성도 생기고 모든 사람한테 존경받고 신망받는 이런 길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자칫 그런 쪽으로 쏠리게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해서, 사도요.한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가 잘 된다는 게 과연 뭐냐? 신앙 안에서 잘 된다는 것은 언약적 기초 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잘 되는 거기 때문에
첫째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이 되면 내 영혼이 잘 되어야 된단 말이에요.
영혼(신앙, 믿음)이 잘되는 게 먼저라는 겁니다. 여기서 '잘 된다'는 뜻은, 단순히 강해진다는 뜻보다도, 형통하다는 뜻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뜻은 '관계가 바르게 진행된다'는 뜻이에요.
'잘된다'는 것은,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고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형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언약적 기초가 회복되면 요셉이 감옥에 있어도 형통하고, 보디발의 집에 있어도 형통하고 총리가 되어도 형통하고, 우물 속에 빠져도 그런 형통한 사람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에게 왜 신앙이 중요합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었고, 또 가져야 합니까?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튼튼해야 된단 말이에요. 이게 '잘 되는' 거란 말이에요. 요삼1:2
그래서 사도요한이 기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삼1:3~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잘 되는 거란 뭐냐?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걸 말한단 말이에요.
참된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보다 잘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해서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몸부림치는 삶! 그 자체가 형통한 삶이요. 진실된 삶이요. 그게 잘 되는 삶이란 말이에요. 그게 팔복의 삶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말하는 팔복의 삶이란 우리가 무슨 큰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는 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그렇게 잘 되는 것, 애통할 줄 아는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긍휼을 베푸는 것, 마음이 청결한 것, 화평할 줄 아는 것, 심지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이런 것들이 '잘 되는' 삶이다. 이 말이에요.
다윗은 지금 왕이 되고, 다윗 성을 빼앗고, 점점 더 이렇게 부강해지는 나라를 건설했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그는, 그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위에서 그 인생을 구축했기 때문에.. 이런 열매들이 나타났다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그 외적 열매 (성공, 부유) 보다도, 그 사람이 어떤 씨앗을 뿌렸고 어떤 삶의 자리에서 살고자 했는지를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형통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날마다 그걸 잊어버리면 정말 불행한 결과를 얻는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경우에 있든지, 어떤 환경에 있든지.. 형통, 강성해지고 있다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강성함'이란 단순히 물질적으로 풍부해지거나, 권력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때 강성함이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더 견고해지고 있다.. 우리 삶이 더욱 샬롬을 누리고 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점점 더 드러내는 삶을 향해 가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우리를 통해서 증거되고 있다.. 신실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또한 우리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에서도 산 증거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격이 더 넓어진 삶, 우리의 성품이 더욱 더 여유로워진 삶.. 이런 삶을 살고 있다..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 이토록 지독하게 배신하고 이토록 지독하게 사람을 모함하고 이토록 지독하게 사람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이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의 성품이 파괴되지 않고, 우리의 인격이 무너지지 않고 우리가 진실되게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그게 다윗의 삶이고, 그게 다윗의 언약의 삶이고 그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 시작했더니 이제 이웃나라와의 관계도 어떻게 되었는가? 그걸 지금 뒤에 11~12절에 나옵니다.
◑11~12절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이스라엘에는 제대로 된 목재가 없습니다. 두로 지역을 가면, 지금은 요르단 인데, 거대한 백향목 숲이 있습니다. 그 나무를 다윗에게 보내서, 왕궁을 짓도록 한 거예요.
다윗이 요구 했습니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더니, 이런 이방 나라가 하나님이 임재하는 나라에 대해서 경외감을 품게 됐고 스스로 선물을 보내 올 만큼 관계가 달라졌다는 말이에요.
저는 여러분들의 인생에 이런 일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변하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끝끝내 살았더니 사람들이 놀랍게도 '당신을 보니 하나님을 보는구만, 당신을 보니까 나도 교회가고 싶구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정말 뇌물이 아닌 선물을 받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게 다윗이 일생 동안 경험하는 놀라운 삶의 간증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간증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게, 시23편입니다. 지금 우리 다같이 시23편을 봉독하겠습니다.
시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 때문에 나를 의의 길로 걷게 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내 영혼때문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시23:3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분이 사랑이에요.
하나님은 뭔가 부족해서, 우리한테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에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가 먼지와 티끌로 돌아가겠지만 그 분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할 때 '이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셨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목적이 이스라엘 나라가 세상 나라와 구별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나라를 허락하셨구나!'
이렇게 다윗이 일생동안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나 때문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는 나'의 신앙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죽는 날까지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순서를 착각하지 마십시오. 나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이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날마다 고백하는...
그래야 단 한순간도 겸손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걷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도대체 무엇이 간데 우리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렇게 우리를 놀라운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까?
하나님, 다윗처럼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고난 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어려움조차도 하나님이 나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어렵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주님께 붙어있는 나뭇가지가 되게 하시고, 열매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죽으라고 부르셨다고 한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고백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이 어렵고 힘든 시대 정말, 갈수록 악이 만연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도 악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악에서 건져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유혹에 지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형상 붙들고, 하나님과 함께 이 광야길 완주하는 인생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요즘도 이스라엘과 가까운 북아프리카에 가보면, 그런 관습이 이어져 내려오는데 양을 <집 가까이>에서 치는 시기에는, 주로 그 집의 막내가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치는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마을 주위의 풀이 다 말라서, 먼 곳까지 이동해서 양에게 풀을 먹여야 하는 시기도 있는 거죠.
그때는 타 부족과의 마찰 등 여러 위험요소가 있고, 또 집을 떠나는 기간도 길기 때문에 집의 형들, 어른들이 양을 치러 나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37장에, 야곱의 아들들이 <멀리> 양을 치러 나갔고, 거의 막내에 속하는 요셉은 집에 남아 있었던 거죠. 다윗과 반대로요. 주2) 요즘도 비슷하게 취임식에서 '선서'를 합니다만, 도덕적이 아니라, 정치 경제 등 현실적인 선서들을 하죠. 요즘은 헌법이 있어서, 그 헌법에 의거해서 대통령을 선거로 뽑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은, 왕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왕을 세우는 어떤 법적 근거가 필요했는데 그게 '다윗과 백성들 사이의 언약'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당시 다른 고대 국가들과는 달리 입헌군주제 성격을 띈, 즉 백성의 대표가 왕을 세우는.. 아주 발전된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그 기초는 하나님이 왕을 택하심 아래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