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자가 받는 복 수15:1~ 63 여호수아 장별 설교 2021.08.15.출처
♣수15장의 개요
수15장은 "유다 지파의 땅 분배"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다른 지파에 비해서 비교적 광활했습니다.
대략 우리나라 충청남도 크기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수15장의 줄거리를 분해하면
1~12절까지, 유다지파의 동서남북의 경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3~19절까지, 갈렙이 헤브론과 드빌을 취함. 20~마지막 63절은, 그 곳의 120개 성읍 이름을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1~12절,
서쪽에는 지중해 바다가 경계이고 동쪽에는 사해 바다가 경계이고 북쪽은 대략 예루살렘까지가 경계이고 남쪽은 가데스 바네아가 있는 신광야가 경계입니다.
(나중에 유다지파가 받았던 남쪽 지역은 여호수아서 19장을 보면 시므온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게 됩니다. -아래 지도 참조-)
20~63절을 세분하면,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러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20
21~ 32절은, "남으로 에돔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 즉 남방 지역에서 얻게 된 38개 성읍들이며,
33~ 47절까지는 "평지"에서 얻은 40개 성읍들,
48~ 60절에서는 "산지"에 속한 36개 성읍들이,
61~ 62절에서는 "광야"에 속한 6개 성읍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설교 시작 ...........................
여러분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이, 가장 복된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본문 수15장 말씀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파 별로 땅을 배분하는데 가장 먼저 유다 지파에게 배분된 땅에 대한 기록입니다.
유다 지파가 받은 땅은, 가나안 땅의 가장 가운데 있는, 또 가장 많은 성읍이 있는 지역을 배분받았습니다.
그 말은, 유다 지파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지파의 장자가 받을 분깃을
받았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야곱이 마지막에 세상을 떠나기 전에 12아들을 축복할 때 장자의 축복을 첫째 아들인 르우벤에게 주지 아니하고 요셉과 유다 지파에게 줍니다.
요셉 지파에게는 장자의 명분을 주고 유다 지파에게는 실질적인 장자의 통치권을 줍니다.
오늘 이 땅 분배에도, 그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유다 지파는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을 배출하는 지파가 됩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해서 40명의 왕이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 유다 지파가 받은 그 땅이, 왕의 도읍지가 다들 됩니다.
헤브론도 그렇고, 예루살렘도, 베들레헴도 왕도(왕의 도시)가 다 유다 지파가 받은 그 지역 성읍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시죠. 지금도 이스라엘 국민을 유대인(유다지파)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참 놀라운 복을 유다 지파가 받았습니다. 어떻게 유다 지파가 이런 복을 받았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장자의 행동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가 장자답게 살았기 때문에 장자가 받을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을 때 그때 야곱의 아들들이, 그래도 양식이 있는 애굽에 가서 요셉이 총리로 있는지는 모르고, 식량을 얻으려고 떠나게 되는데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양식을 받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도 죽었는데 베냐민마저 잃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로 베냐민을 애굽 길에 동행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 나선 사람이 유다입니다. 유다 자신이 베냐민을 반드시 책임지겠고 만약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가 그 생명을 대신하겠다고 그렇게 약속을 하고, 겨우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유다는 이렇게 가족공동체를 위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도 내어 놓을 각오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냐민이 도둑 누명을 쓰고 애굽에 붙잡히게 되었을 때 유다가 나섭니다. 자기가 베냐민 대신 종이 되고, 자기가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그렇게 가족을 살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했던 사람이 유다입니다.
그 유다의 삶을 보면, 그는 철저하게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일을, 그리고 자기는 희생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래서 실질적 장자 지파가 된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할 때, 그 요셉을 살려주기 위해서 차라리 우리가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이 요셉을 파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래서 요셉을 죽음에서 건져준 사람이 유다입니다.
▲또 유다에게는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성경에 굉장히 길게 나오는데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입니다. *창38장
유다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큰 아들 '엘'이 다말과 결혼하여 자식이 없이 갑자기 죽습니다.
그때 당시의 풍습에 따라서, 둘째 아들 '오난'을 다말에게 들어가게 했는데, 그도 일찍 죽습니다.
유다가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셋째 아들 '셀라'는 다말에게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그러자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여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임신을 하게 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다가 대노합니다. 다말이 행음한 것으로 보고, 그 며느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이 며느리 다말이 이 아이의 실질적인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 유다 임을 증표로 알립니다. 그때 유다가 그걸 보고 왜 며느리 다말이 그렇게 (속여서 임신) 했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고 사실 그 아이가 자기 아이 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며느리 다말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면, 자기의 부끄러운 일은 감춰질 수도 있는데도 '그가 나보다 옳으니라' 하면서 며느리 다말을 살려줍니다.
그때 그 며느리 다말이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됐는데 그 베레스의 후손에서 훗날 다윗 왕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유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일, 공동체를 위한 일,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장자 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 후에도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가 전쟁에 나가면 언제나 맨 앞장, 선두에 섭니다. 그 당시에 전쟁은 맨 앞에 서는 부대가 희생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나올 상황이었는데도 나중에 인구 계수를 해보면, 항상 유다 지파가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복을 주신거죠.
▲오늘 본문 여호수아 15장에도,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하는 기사가 나옵니다만 갈렙은 이 가나안 땅을 단순히 '복'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갈렙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복'이기 이전에 '사명지'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힘들고, 어렵고, 아무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헤브론 산지를 내게 달라고 자원 하므로
이스라엘 지파들이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서로 신경 쓰고 하는 그렇게 예민한 상황을 극복하게 해 준 사람이죠.
그 갈렙이 바로 유다 지파 사람이었고 바로 유다 지파가 어떤 지파인지를 보여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 지파에게 그렇게 복을 주신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동족 공동체를 위해서 살았던 바로 그 유다가 어떤 복을 받는지를 하나님께서 수15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그저 유다 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유다처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장자권도 받아야 되고요!
예수를 믿는 우리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고후5:15절에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고,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계신데 내가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는 거죠.
이제는 오직 내 생명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성도,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고, 성도가 그렇게 살 때 그런 참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유다가 그렇게 살았던 겁니다.
도대체 나는 죽고 예수를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있는가? 산 증인이 필요하죠.
▲우리 모두가 다 증인이지만 저는 하영룡 목사님이 늘 생각이 납니다. 그분이 쓰신 <페이버 Favour> 라는 책에 보면,
하영룡 목사님이 세 번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 법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는 일을 두 번까지 밖에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분은 세 번 심장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이유는, 첫번째 심장이식 수술을 받을 때 그가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심장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준 일이 기록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책에 쓰고 있습니다.
그가 34 살 때, 두 살 세 살 어린 두 딸을 둔 가장으로서, 심장이 다 망가지고 그리고 심장이식 수술을 해야 되는 정말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다행히 이식받을 심장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수술 바로 직전에 응급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어떤 한 여인인데, 지금 당장 심장이식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된 여인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하영룡 목사님은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심장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심장을 그 여인에게 주세요!' 주치의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 심장이식 수술을, 다른 사람에게 포기하고 넘겨버립니다.
그리고 7일 후에 그는 의식을 잃어버립니다. 다행히 심장이식 할 또 다른 심장에 생겨서 그가 수술은 받았지만 온전한 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됐습니다.
세 번째 심장이식 수술을 받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런데 그가 첫 번째 심장을 양보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심사해서, 그가 한번 더 심장이식 수술을 받게 된 거죠.
그를 잘 아는 미국인 목사님이 어느 날 하영룡 목사님에게 '당신에게 왜 그렇게 행운과 같은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라고 묻더랍니다.
하목사님은 '나도 그게 궁금해요. 당신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 미국 목사님은 '당신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사는 겁니다.
▲하영룡 목사님이 '팀 하스'라는 건축회사를 세웠는데 그것은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회사의 사명선언문에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돕기 위해서, 그 회사를 설립했다'고 했습니다.
하영룡목사님은 항상 무슨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것이 더 희생하는 일인가?' 그게 그 목사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부활해 함께 사는 사람이 된 것은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하심이라는 거죠.
우리가 다 복을 받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복을 받는 삶을 사는지는, 정말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부담스러운 말처럼 느껴지지요? 그러나 여러분 진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 믿게 되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그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진짜 그 사람이 복을 받을 사람인 거죠.
◑오늘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호수아 15장을 이 광복절 주일에 설교하게 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묵상했었습니다.
그리고 '아~ 주님께서 여호수아 15장에 오늘 광복절에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교회와 성도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들이 속해 있는 나라와, 그 민족을 위해서 살게 될 때 그것이 교회와 성도에게 복이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국교회는 2천 년 선교역사상 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케이스라고들 말합니다.
그렇게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닌데도 교회가 그렇게 부흥되고, 교회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는 이런 케이스가, 세계 다른 나라에 쉽지 않다는 거죠.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이렇게 복을 주시는 걸까요? 지금부터 1백 년 전 한국 교회의 초창기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그때 당시에 우리 기독교는 이제 복음이 전해진지 30년도 채 안되는, 정말 신흥종교였죠.
그때 당시 기독교인 수는 15만 정도가 되는, 조선 전체 인구의 1퍼센트 정도도 안 되는 그런 아주 작은 그런 종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교회는 31운동, 일제를 대항하여 이 민족독립운동을 기획하고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하고 실천하였던 구심력이 되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예배당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삼일운동에 교회가 앞장섬으로 인해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서 붙들려서 감옥에 들어간 이들의 25%가 기독교인이었고 여성들로만 따지면 80%가 넘게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인 중에 16인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죠.
31운동, 독립운동은 민족의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되는 일인데도 그때 당시에 교회는 그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 평양 지방 감리사였던 무어 선교사님의 기록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지방회를 개최하려고 할 때 조선목사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회하면 좋겠다 하니, 이렇게 말한 까닭은
(감리교 지방회) 목사가 모두 28인 인데, 그 중 14인이 감옥에 갇히고 4인은 강제로 사직하고, 남은 이가 불과 10인이라. 집사 품 받은 자는 10인 중 8인은 감옥에 있으니 2인만 남았기 때문이라.'
우리 민족의 고통 때 당시 교회는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보고, 기독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열린 거예요.
그 후로 1920~30년대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 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기독교는 급성장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것은 그저 자랑스러운 과거지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는 한국 교회가 감당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평화로운 통일은, 우리의 모두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통일을 도대체 어느 누가 중심이 돼서 감당할 수 있습니까?
북한은 어쩌면 하나님이 버린 땅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우리만 아닙니다.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 세계에 북한을 위해서 그토록 기도하고 헌신하고 그리고 실제로 행동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음을 봅니다.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북한을 버리지 않으셨구나' 하는 생각을 정말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외국인으로서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서, 북을 위해 섬기는 사역자들, 그 귀한 종들을 만나면,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적으로는 남북한이 평화로운 통일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왜냐면 두 쪽 다 만나보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너무 심하다는 거죠.
'이렇게까지 적대감이 심한데 과연 평화로운 통일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은 인간적으로는 그런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 이 지경에 우리가 있습니다. 도대체 여러분은 그 어떤 누구가, 남과 북의 평화로운 통일의 중심 역할을,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이 분명한 교회와 성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지금 현재 우리의 형편은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고 할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 국민들, 또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 중에도 지금 생존의 한계에 부딪힌 것 같은 위기 상황에 있는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되나?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길러야 되나? 지금 정말 이러다가 다 죽는 거 아닌가?' 이런 처지에 있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나 전 세계의 처지를 보면, 위기감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도 아십니다. 왜 모르시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런 사명을 이야기하는 게.. 사치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우리의 먹고 사는 것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그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냐는 겁니다.
여러분 결국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유다 지파에 대해서 읽고 그리고 예수 믿는 성도의 삶의 특징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믿음이, 우리가 진짜 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느냐/ 아니냐 하는 것을 결정합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지식인들, 많은 지도자들이 일제 말기에 친일 행각을 했습니다. 이유가 뭐였습니까?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독립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일본의 지배 아래 살아야 된다'
그들이 세계 정세를 보고, 그들의 판단력으로 당시 상황을 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결론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나 우리 자손들은 그저 편히 사는 길로 가야지.. 그러려면 친일 행각을 해야 되는 거죠.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천추의 한을 남기는 그런 처신과 행동을 한 겁니다.
지금도 그 가문이 친일 행각을 했던 것만 공개되면 그 후손들이 어쩔 줄 모르는 지경이 되지 않습니까!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죠. 이 사실을 진짜 믿으면, 어떤 어려운 처지, 어떤 위기 상황에도 우리 자신도, 우리 후손도 잘 되는 길로 가게 됩니다.
믿음이 결정하는 거예요. 애국지사들, 그 후손들이 고생 많이 하던데...
실제로 정말 그렇습니다. 부모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고 전 재산을 드리고 했으면.. 그러면 후손들이 잘 살아야 되잖아요. 후손들이 고생하는 걸 보고 '다 쓸데없는 일이야, 결국은 실속있게 살아야 돼!' 이것도 자기 믿음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다 지파의 이야기를 읽게 하신 것은 진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십니다.
이 일은 개인만 아니고 교회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우리 교회가 잘되는 길이고, 우리가 잘 되는 길입니까?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 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가 '힘들고 어렵고 정말 괴로워도 십자가를 지라. 그러면 마지막에 십자가가 너를 질 것이다. 대신 져 줄 것이다.' 옳습니다. 결국은 믿음의 싸움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이국 땅을 돌고, 그리고 탈북한 청소년들 '하늘꿈 학교' 학생들입니다. 거기 선생님 한 분이 이런 글을 쓰셨어요.
'저는 탈북한 학생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적이 많습니다. 저 자신이 충만하지 못한 날에도, 그들 앞에만 서서 말씀을 나누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확 임하시는 것처럼 뜨거움을 느낍니다.
하늘 꿈 찬양팀 아이들과 전체 예배를 준비하며 같이 손잡고 기도할 때에도 성령님이 비둘기같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북한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직 못 다한 사랑 고백이 많으심을 깨닫습니다. 또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북한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잘 보셔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면!
본문 수15:21~62절까지 보면 120개의 성읍이 쭉 열거되어 나옵니다. 유다지파에게 준 성읍이죠.
그러나 다 빈 성읍들이라서,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게 아니고 그 성읍들은 전부 다 싸워서 점령해야 될 성읍들입니다. 엄청 부담스러운거죠.
그런데 여러분 부담스러운 차원으로만 보면 그렇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복이지 않습니까.
그 120개 성읍은 '너희들이 싸워 점령할 땅이다.' 그러니 여러분, 부담스러워 보이는 땅이 사실은 복인 겁니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민족을 위해 기도를 시키는 거지? 왜 나에게는 유난히 이렇게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하시는 거지?' 그게 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진짜 믿어야 합니다. 행20:35 그동안 움켜 쥐려고만 하며 사셨습니까? 이제는 정말 주는 일이 그게 진짜 복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 여러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서로 그렇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같이 손잡고 설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여러분 남에게 상처 주는 말, 험한 말, 이제는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제는 우리 후손들 생각도 해야 합니다.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갈까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라, 사명을 위해서 살아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는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살아놓고 하나님 나라 위해, 사명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면 주님 앞에 서는 일이 기쁘기만 하겠습니까?
오늘 유다 지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복은 이렇게 받는 거구나' 내게 인간적인 조건은 뭐 내가 장자가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영적인 장자답게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살지 않고 하나님을 정말 믿으니까 이제는 내 생명되신 주님을 위하여 어쨌든지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일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그렇게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수고했다. 내 종아!' 그런 말씀을 꼭 들으십시다. 이제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