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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9장 1~7 임재가 끊어지면 결국 무너진다

LNCK 2022. 2. 19. 09:34

◈임재가 끊어지면 결국 무너진다     행19:1~7, 눅11:11~13       2022/02/13

 

여러분 요즘에 교회들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2018년에 코로나 전에는 한국의 교회가 한 해에 3천 개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후에는 더욱 심각해졌어요. 

제가 통계자료를 보니까 너무 가슴 아프지만 말씀드립니다.
많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문을 닫았는데요. 
2021년 12월 기준으로 한국교회 수를 6만 5천 개로 보았을 때 
16%인 1만4개 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결과가 나왔습니다. 

중앙일보 2022년도 1월 17일자 기사를 보니까 
미주 지역도 참 심각한데요. 미주지역 내 한인교회는 
지난 2019년에 조사에 의하면 3,514개 교회였는데 
2,798개로 무려 658개의 교회가 문을 닫아서 약 20%가 줄었습니다. 

특히 LA지역은, 미국 전역에서 한인교회가 가장 많은 도시인데 
거기서도 불과 2년만에, 한인교회가 무려 37%나 급감했더라고요. 

LA지역 한인교회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팬데믹으로 많은 교회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30%이상 문을 닫았다는 점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또한 최근 코로나-오미크론 발발로 인해서 
여러 교회들이 지금 교회에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원활하지 않아요. 

지금 저희 교회도 인원을 대폭 줄여놨는데 
사람들이 모이기가 쉽지 않고, 뭔가 시도하기는 커녕 
참으로 모이기도 힘든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 때인 줄 믿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교회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겁니다. 

'우리가 이때에 어떤 교회로 나아갈 것이냐?' 라는 문제입니다. 
자 지금 코로나 상황이 좀 지나고 나면 
여러분 앞으로의 미래가 핑크빛 미래라고 혹시 예상하십니까? 

아마 그런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은 적을 겁니다. 
앞으로는 더욱 더 통제 불가능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이 찾아올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시대 속에서 끝까지 
어떤 교회를 추구해야 될까요? 우리는 분명히 생각해 봐야 됩니다. 

더 심한 전염병이 오고, 또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우리가 지향해야 되고, 우리가 달려가야 될 교회는 어떤 교회냐? 
성령의 임재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예배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가 와서 예배가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가 살아 있고, 
말씀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해주시고, 
찬양과 기도 가운데, 감격이 터지고, 은혜가 터지고,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죠. 

성령의 임재를 맛볼 수 있는 교회만이 
어떤 시대가 찾아오던지 간에, 흔들림없이 시대를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 어떤 교회를 좋아하십니까? 어떤 교회상을 좋아하세요? 
아무리 대단한 학문과 지식이 넘쳐나고 
또 정말 무릎을 탁 치고 가슴이 뛸만한 대단한 통찰력이 있고 
교인들의 친화력이 뛰어나가지고 그냥 막 으샤으샤 한다 할지라도

만일 그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그곳은 결과적으로 교회로서는 참 살아남기가 어려울 겁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인정할지라도, 그 교회를 하나님이 인정하셔야 돼요. 
그러려면 교회는 영적인 곳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교회가 도서관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강연장이 될 필요도 없고 
사교장이 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가 모이지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게 없어요. 
성도의 교제가 교회 안에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교회 생활 못하는 거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교제 때문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놓치고 있으면 
이건 지금 앞뒤가 안 맞는 얘기에요.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서 
죄와 탐욕에 물든 우리 마음을 정케하시고 

그리고 우리 영혼육을 준비하게 하셔서 
이 교회가 천국을 예행연습하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령의 임재 가운데 바뀌어지지 않는 한 
교회는 종교인들이나 잡배들이 어슬렁거리고 
여가나 즐기는 공간이 되어버린다는 거죠. 

더군다나 앞으로의 교회는 더욱 전투함이 되어야 돼요. 
지금까지 어떠한 위력을 발휘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더 강력한 화력으로 세상 앞에 전투함으로 서야 되는 게 교회입니다. 

여러 혼란과 위기의 파도가 있을텐데 
그거를 거쳐 올라가고,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적들과 전투를 치러야 하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데 

성령의 충만함 없이, 지식으로, 프로그램으로, 교세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세상을 과연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걸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사탄은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 복음은 있어도, 성령을 빼버립니다. 
기도가 있어도, 성령을 빼버려요. 

정통은 맞는데, 거기서 성령을 빼버리고 
교회 건물은 건재하는데, 성령의 역사가 없어요. 
이렇게 만들어 버린다고요. 

그러면 사람들이 교회를 다녀도, 임재의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니까 
교회를 주일마다 오는 게 고통스러운 거에요. 

제가 이따금씩 '주일이 되면 교회 가는게 힘들다'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왜 그러냐면, 주일에 자기가 고통을 겪는데요. 
은혜가 하나도 없는.. 성령의 임재가 전혀 없는 교회에 가서, 거기에 앉아 있으려니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거에요. 

자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 나가면 안 되겠죠. 큰일 나는 거죠. 
동영상으로 때우면 그거는 불순한 거죠. 

그래도 교회에 가서, 본인이 기도에 불을 때고 
하나님 앞에 열정적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되겠죠. 

여러분, 임재의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면 
교회 안에 임재가 없으면,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시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이 변합니까? 
강대상에서 아무리 설교자가 설교를 잘 준비해도 
성령의 역사없이는 조금도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영향력, 성령없이는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를 얼어붙은 기관으로 전락시키려고 하는 거죠. 
사탄이 성령을 빼버리는 거예요. 교회 활동에서! 

이제 앞으로 임재가 없는 교회는 살아남기가 어려울 겁니다. 
뭐 당연한 얘기죠. 성령의 활발한 움직임이 없는데 
세상과 두드러진 차이점이 전혀 없는데, 거기 뭐 어떤 생명력이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모이기도 힘들어하고, 세속화는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사람들의 관심사는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도무지 집중하기 어려운 이 때에 
예배의 냉기가 가득하고, 따분하고, 임재가 없으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도, 점차 신앙을 잃어가게 될 거라는 거에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정신없이 교회생활을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사모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어떠한 명목상의 교인들, 가짜 교인들이 이곳에 앉아 있을 지라도 

임재가 충만해서 '내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왔는지' 
'내가 얼마나 회개가 필요한지' 
깨달아져서 고꾸라지고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길튼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될 것이냐? 
저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는 누가 만들어 갑니까, 목사님이요? 
'목사님이 기도를 더 열심히 하세요.
당신이 설교준비를 더 철저하게 해오세요. 
우리를 은혜 받게 만들어 보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식으로 절대 목사 혼자 이런 교회를 못 만듭니다. 
제가 아무리 기도 하고, 잘 준비하고 나와도, 
위에서 기름 부어주시지 않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못합니다. 

두 번째 성도님들께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예배는 냉랭합니다. 
참 신기하죠. 기도 열심히 했어요. 준비 나름대로 철저하게 하고 단에 서거든요. 
그런데 예배가 냉랭할 때가 있어요. 이게 왜 그런지 아세요? 

앉아 있는 청중이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없어요.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요. 

코로나가 저희 교회에 준 한 가지 유익이 있다면 
각 부 예배가 많아졌잖아요. 그렇죠.

(예배인원 제한이 있어서) 예배인원을 나누다보니까, 예배 횟수가 많아졌어요.

 

그런데 어떤 예배는 참 죽어요. 어떤 예배는 활발히 살아납니다.

이게 뭘까? 도대체 똑같은 설교를 준비하고, 똑같이 기도 하고 나왔는데 뭐가 달라진 걸까?

 

회중들의 마음이라는 거죠.

따라서 여러분, 성령의 임재가 우리 안에 가득한 제일 빠른 길은

설교자도, 성도님들도 함께 준비되어서, 아멘!

성령의 비를 내려 주실 것을 사모하면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 그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눅11:11~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을 구하고 있는가? 여러분 자신에게 물으셔야 돼요.

내가 예배당에 올 때, 성령님을 의식하고, 성령님과 교제하기를 사모하며 오고,

 

예배를 마치고 나아갈 때, 성령님과 동행하기로 결단하면서

저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시는지요?

 

우리가 그 성령님 사모하지 않는 한, 그분은 우리에게 절대 오실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는데요.

사실 교회분위기 자체가 '성령'이라는 글자 조차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 교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교회의 지도자들은 말씀을 강조하면서 '말씀 말씀!' 하는데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거에요. 

여러분 근데 이게 굉장히 어폐가 있는 게, 말씀을 누가 주시는 거예요?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죠. 

그런데 그 성령의 언어인 설교가운데 
성령의 언급이 전혀 없고.. 

그리고 성령을 얘기하게 되면 광신도 취급하고 
어떤 성도가 통성기도 시간에 방언으로 막 기도를 하게 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눈살 찌푸리고 툭툭 치면서 
'우리 교회는 방언하면 안 돼요.[ 이렇게 암시주고 누르고... 
여러분 이런 교회가 아직도 꽤 있습니다. 

'성령'에란 말만 꺼내도, 무슨 열광주의자, 광신도취급해서 
왕따같이 취급받아서 교회 생활을 도무지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럼 교회는 뭘 합니까? 
늘 예배는 지식적인 말씀풀이로 가득하고 
기도는 한 자락도 없고, 냉랭하고 싸늘하기 짝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도 자신들의 교회가 잘 가고 있다고 
우리교회 성도들은 아주 골고루 잘 먹여서 포동포동 영적으로 살이 쪘다고 
착각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있다는 거죠. 

왜요? 그들의 이유는 간단해요. 
교회에 말씀이 있다는 거죠. 
여기 성경대로 내가 설교하고 있는데 뭐가 잘못 됐냐는 거죠. 

여러분 근데 이게 참 안타까운 얘기입니다. 
여러분 음식 조리를 하시려면, 후라이판에 음식재료만 올려두면 
알아서 음식이 됩니까? 불이 있어야죠. 

설교준비 다 했다고 끝나는 거예요? 
이 설교에 성령님이 불로 역사하셔야 돼요. 
그래야 역사가 일어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불을 알려주지 않아요. 불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성령의 역사도 모르고 신앙생활 합니다.

방언이 전부는 아닙니다만, 
조금도 그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무슨 역사가 일어나면 이상하게 쳐다보고... 

또 어떤 교회는 무슨 능력과 이적만 나타나면 신사도 라고 하면서 
도매금으로 그렇게 매도하고... 
참으로 안타까운 그런 환경이 한국교회 내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 그런 맥락에서 본문 행19장을 보게 되면 어떤 사람들이 나오냐? 
알려주지 않아서, 몰라서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떤 불신자나 이제 갓 믿은 초신자들이 아니라 
바로 세례요한의 제자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있을 때, 
세례요한의 제자로 추정되는 열 둘쯤 되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이들은 세례요한의 사역과 가르침을 정통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때 바울이, 그들 안에 뭔가 허전한 것을 느꼈는지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랬더니 뭐라고 얘기하죠? 
'우리는 성령이 계심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행19:1~2

그때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죠. 
요한의 물세례밖에 모르던 그들이 
성령의 불세례를 받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해요. 

자 여러분, 이들을 통해서 또다시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 겁니다. 
바울이 혼자 성령역사를 일으킨 게 아니에요. 

바울을 통하여 만난 성령님, 그들이 성령님을 경험하고 나서 
그들이 또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죠. 

그렇기에 어느 누군가가 전해주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왜 우리는 성령님을 구하거나 찾지 않을까요? 
그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적이 없거나, 들은 적이 없거나, 혹은 체험이 없기 때문이죠. 
체험이 없었어요. 

자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교회들은 
말씀과, 순종과, 체험이 한데 어우러진 균형적인 신앙을 추구해야 됩니다. 

제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감사한 것은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된 성도님께서 저희 교회에 방문하셨어요. 
설교를 아주 쭉쭉 빨아들이듯이 잘 들으시더라고요.

자 설교를 다 듣고 나서 통성으로 우리 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때 이분은, 그냥 방언을 받아버린 것입니다.
통성기도하다가, 갑자기 방언이 터진 것입니다. 신앙생활 한지 얼마 한 된 분이요.
그리고 기쁨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나 주셨습니다.
초신자인데 시작부터 성령님을 경험하고 체험하신 겁니다. 

그분은 무슨 생각이 드시겠어요? 
'정말 이게 관념속에 신앙이 아니고 
무슨 박물관속의 성경이 아니라 
성경말씀 그대로 방언은 있고, 하나님이 살아역사하시는구나!'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주님이 임재를 누렸어요.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임재 가운데 드리는 예배나 체험이 없게 되면 
그냥 늘 습관과 타성에 젖어서 
성령에 대해서 원하지도, 찾지도 않고 그리고 돌아가버리십니다. 

왜 그럴까요? 모르니까요. 
지금 에베소 지역에 있었던 열 둘쯤 되는 이 제자들처럼 모르면 
성령에 대해서 모르면, 성령을 못 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오직 맛을 본 사람은, 그 임재에 굶주리게 되는 거예요. 

제가 그런 의미에서 제 얘기를 하면 
저는 하나님께 정말 너무 감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는 어릴 적부터 기도원 생활을 했어요. 
조금만 버스 타고 가면, 비록 건물은 초라한 그러한 한옥집 같은 작은 기도원이었지만 
그곳에서 저는 어렸을 때 신앙이 뭔지 눈을 떴어요. 영의 세계를 알게 됐습니다. 
은사와 권능이 뭔지 알게 되었어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거기서 어떤 부흥회 오셨던 강사님을 통해 
'너 잠깐 앞으로 나와라' 해가지고 나갔을 때 
그분의 손을 통해서 저는 방언을 받았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때부터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보통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겪지 못할 그런 체험들을 저는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중에서 영적으로 뛰어난 분들이 있었습니다. 
진짜 은사자들이 있었어요. 저한테 그래요. 
'너는 앞으로 목사의 길을 걷게 될 거라고'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저희 어머니나 저나! 

왜냐하면 목사님이라고 하면, 예수님 다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아가냐? 나는 목사가 아니다.. 
그렇게 부인하면서 빙빙 도망다녔거든요. 
그런데 지금 지나고 보니까 그 말씀들이 다 성취가 됐어요.

마가의 다락방에 또 올라갔더니 박 목사님도 
'넌 이제 네 길을 찾았다.' 그러니까 성취가 돼버린 거 아니에요. 

신학생이 된 후에도 주님이 저를 인도하셨던 곳은 
'마가의 다락방' 기도원이었어요. 
하여간 저는 계속 기도원, 기도원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거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저는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하나님께서 이제 찬양 인도 자리에 세워주셨어요. 
그 찬양인도를 통해서 저는 참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성령님을 배워갔어요. 

소위 '붙들려서 하는 찬양인도'를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 성님께 붙들리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요. 
세션 들은 죽어납니다. '저 사람만 서면, 너무 길게 하는 거예요.' 

아주 그러니까 자기도 집에 가고 싶은데 
제가 끊지를 않으니까, 세션이 멈추지 못하죠. 

아직도 기억납니다. 기타를 치던 한 신학생은 
손이 그냥 막 그냥 쥐가 나려고 그러는 거죠. 

그러다가 '이 청년 세션들 때문에 안 되겠구나' 해서 멈췄던 때도 있어요. 
정말 은혜 가운데 젖어서 찬양하는 체험을 통해서 성령님을 알게 하셨고 
산에서 많은 시간을 기도 하면서, 그 산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황홀경에 젖어 가지고, 기뻐가지고, 성령에 취해가지고 
혼자 뛰기도 하고, '야~ 임재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혼자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을 알아갔던 그런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다가 이제 제가 교회 개척을 했어요. 
그러니 얼마나 임재에 대해 굶주리겠습니까! 
그게 맛을 보게 되면 잊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맛을 알면, 이거 어떻게 그게.. 그 맛을 못 느끼면 고통스러워요. 
다행스럽게도 길튼교회 초창기때 
우리 작은 25평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작은 곳에 성령님이 얼마나 함께 해주시는지요! 
그때 우리 교회는 늘 눈물바다였습니다. 

제 사역중에 가장 회개의 역사가 강력했던 때였어요. 
강단에 촌스럽게 글자로 써 놨어요. "통곡이 있는 예배" 이렇게 써놨거든요. 

정말 그 표어 그대로 주님이 역사 하셔서 
통곡의 그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이쪽으로 이사를 왔는데, 여기가 보험회사 자리였어요. 그냥 냉랭했던 건물입니다.
정말 기도도 처음에 안 됐습니다. 

그러나 한 두 분 오시면서, 우리 성도들과 함께 예배로, 기도로, 찬양으로 달구어서
이젠 뜨거운 성소가 되었어요.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저의 목회사역 가운데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뭐냐면 
그래서 임재가 끊어지면 다 끊어지는 거라는 거에요. 
임재가 끊어지면 결국 무너지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 그걸 아주 철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도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이 뭐냐면 
이곳에 성령님의 임재가 늘 함께 해달라는 거에요. 

 

어느 날은 제가 예배인도를 하는데 분위기가 냉랭한 거예요. 그러면 겁이 덜컥 납니다. 
'지금 뭔가 잘못 가고 있나? 지금 죄를 짓고 있나? 왜 이렇게 냉랭할까?' 

냉랭할 때는 설교도 잘 안 됩니다. 막 버벅 대고 힘이 들어요. 
그러다가 그 다음 주가 되어서, 다시 성령의 임재가 저를 감싸주시면 
'이제 살았다. 우리가 다 죽은 거 아니었구나' 하면서 보냈던 수많은 시간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저는 그렇습니다. 설교가 조금 부실하고, 목회 계획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차질을 빚더라도 관계없어요. 예배 때마다 성령님의 임재가 있으면 
저는 거기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임재로 함께 해주시는 교회가 있다면 
조금 계획대로 잘 안 된다 할지라도, 그 교회는 안전한 교회에요. 

저는 성령의 임재야말로,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번 임재가 끊어지면 결국 다 무너집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를 보세요. 
한때 대단했던 교회, 
전통과 역사를 자랑했던 교회들.. 지금 어떻게 됐죠?

일부는 술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상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캐나다 토론토에 갔더니 처치 스트리트 라고 하는 거리는 
그렇게 수많은 교회들, 백년 넘는 대단한 교회들이 많았지만 
지금 동성애자들의 아지트 소굴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 교회에 임재가 끊어진 거예요. 

여러분 임재가 딱 끊어지는 순간, 세상이 그때부터 밀고 들어오는 거에요. 
그걸 우리 크리스천들은 깨어서 막아낼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이걸 가장 두려워해야 돼요. 
내 안이 성령의 자리가 아니라, 세상의 자리가 되는 것을요. 
우리는 이걸 두려워해야 돼요. 

기도 조금 잘 안 돼도 괜찮습니다. 
말씀 조금 바빠서 못 읽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아세요? 

성령께서 거하실 우리의 심령이 
세속화로 가득 차서, 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그런 곳이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안타깝지만 요즘 교회들 안에 왜 세상의 모습이 보입니까? 
두려워해야 돼요. 그 이유는 성령의 임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도 별 수 없어요. 십자가 걸어 놓고 '교회' 간판 붙여도 
성령의 임재가 딱 떠나버리면, 그곳은 소름끼치게 두려운 곳으로 변해버립니다. 

여러분 교회라고 갔는데, 뱀들이 곳곳에 우글거리는 거 보셨습니까? 
그게 일부 교회의 현장입니다. 
귀신들이 휙휙 날아다니는거 보셨습니까? 그런 교회들도 일부 있습니다. 

교회도 세상보다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성령님이 교회를 떠나시면, 세상보다. 더 악한 곳이 교회가 될 수 있어요. 왜냐?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맞습니까? 
우리가 다 멀쩡합니까? 멀쩡한 사람들은 교회 잘 안 와요.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죄인들이 모여서 
주님 앞에 치료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 교회에, 성령이 떠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자가 걸어 놓고 별 추잡한 짓을 다하면, 
교회는 세상보다 더 악한 곳이 되는 거예요. 

성령의 임재가 떠나버리면,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해도 
그 영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주일마다 사람들은 점차 교회 가기를 고통스러워할 겁니다. 
어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죽은 교회에 가면 몸이 아프시다고 해요. 
그거 맞는 이야기에요. 

여러분, 우리가 이런 교회를 만들어 가서야 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 혼자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나부터가 하나님을 다시 경외하고 
성령님을 사모해서, 언제나 성령께서 나의 영혼을 붙들어 주시길 기도하고 
그 임재가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것 같으면 
두려워서 주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주의 얼굴을 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윗이 범죄하자, 성령이 떠나시는 것 같자 
'주의 영이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주의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달라고,
주의 임재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말라고' 
애걸복걸하면서 눈물로 자기 침상을 적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영적인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임재의 중요성을 알았으니 어떻게 해 나가야 될까요? 

임재의 영역을 넓혀가시길 바랍니다. 
예배당만 임재가 있고, 여러분의 삶에 임재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성령님을 예배당에 와서만 구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솔직히 예배당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세상에서 보내시는데 
가정에서 보내시는데 
그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구하지 않으면, 여러분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배당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임재의 영역을 넓혀가셔야 돼요. 

그런데 만일 거기서도 임재가 느껴지지 않으면 
두렵고 떨면서 '하나님, 나와 함께 해달라'고 무릎으로 기도하며 
주의 얼굴을 구하는 참 영적인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 삶에 임재가 있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건 예배당이 아니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마트 였습니다. 
뭘 놀래십니까? 목사도 물건 사러 마트에 갑니다. 

어느 날 이마트 안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임재가 찾아왔어요. 
거기서 눈물이 나고 기도가 터져서 누가 볼까봐 창피해서 숨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이런 일을 경험하게 하실까? 
제가 시간이 지나서 알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않았습니다. 
'내가 늘 너의 곁에 있으니, 늘 깨어서 나와 교제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성도들이 어디에서 있든지, 각자 서 있는 그곳에서 
그곳에서도 내가 있으니 
네가 서있는 곳을 예배터로 만들려고 하는 
주님의 마음을, 그 뜻을, 제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서 계신 곳을 예배터로 만들어 버리세요. 
으슥한 골목이라고 할지라도, 
세상 유혹이 가득하고 지저분한 거리라 할지라도 

내가 거기서 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면 
여러분 그곳은 천국이 되고, 
임재만 찾아 오면, 그곳이 예배터로 바뀌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서 계시는 곳에 하나님을 온전히 모셔서 
그곳에서 귀신들을 다 내쫓고, 성령의 임재 터로 만드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도 보았지만 실제로 
맨하탄의 타임스퀘어 처치 라는 교회가 있어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이 개척하신 교회입니다. 
그 후임자는 카터 콜론 목사님이신데, 최근에 은퇴하셨습니다. 
목사님과 그 교회는, 미국과 온 세상에, 20세기 후반~21세기 초에
참 선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하여간 저는 목회자다 보니까, 타임스퀘어 처치하면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목회하셨던 곳이라 
거기에 그 근처라도 꼭 가보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거기에 가 볼 기회가 마침내 왔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찾아갔더니, 코로나 때라서 교회 문을 잠궈놨습니다. 
들어가 볼 순 없었지만, 겉에서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참 그렇게 영광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던 곳이기 때문이었죠.

근데 사실 그 교회는 원래 교회가 아니었고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정말 갱단과 마약중독자들이 판을 치는 
그런 어둠의 거리에 있었던 공연장이었습니다. 연극 극장입니다. 

그 교회 안을 들어가 보면, 이런 현대식 예배당이 아니라 
옛 고전스타일의 극장같이 되어 있어요. 
그 극장을, 그 공연장을, 그 세상 문화가 들끓는 그 공연장을, 
그 버려졌던 곳을,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이 오래 전에 거룩한 교회로 세우셨죠. (1987~)
참 뜻깊은 그런 교회이고 명소입니다. 

그런데 그 공연장이 교회가 되기 전에, 한 4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라는 유명한 뮤지컬 공연을 해왔던 곳입니다. 

근데 거기서 '예수님' 역을 연기했던 배우가 있었는데요. 
그가 그 뮤지컬에서 비록 예수님 역할을 했지만, 실상은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연기할 때나, 연기를 하지 않을 때나 늘 마약에 취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배우가 그 자기가 늘 공연하던 그 공연장이 예배당으로 바뀌고 
그 타임스퀘어처치가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 우연히 아내하고 한번 가본 거예요. 

거기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먼저 그 아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약 중독자였던 그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돼요. 

그러면서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께 가서 인사를 하는데 뭐라 그러냐면 
'지금 목사님이 쓰시는 목양실은, 제 드레스룸 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늘 사탄을 숭배했습니다. 마약에 취해서. 

저는 여기서 수천번이나 촛불을 켜놓고 사탄을 숭배하고 
사탄이 찾아와서 이 촛불을 꺼주기를 제가 사탄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사탄이 나타나서 촛불을 싹 꺼주었습니다.'

그런 수많은 사탄과의 교제를 나눈 그 장소가, 이제 목양실이 된 거예요. 
여러분 보통 영적으로 센 사람이 아니면, 뉴욕 범죄의 소굴 한복판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람이시니까 
영으로 그곳을 점령하시고, 다 거룩한 예배당, 목양실로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말도 안 되는 장소가 그렇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임재의 장소로 바뀐 거예요. 

여러분이 어느 곳에 계시는지 모르지만 
거기가 아무리 정말 더럽고 형편없을 지라도 
여러분이 그곳에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시고 성령을 간구하면 
성령의 임재 터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타임스퀘어 처치는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통해 수많은 죄인들을 변화시켰고 
지금도 그리스도의 헌신된 제자들을 양육시키고 있습니다. 

윌커슨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오래 되었건,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통해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이렇게 공공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이 윌커슨 목사님께 항의 했어요. 
'윌커슨 목사님, 당신은 연세가 너무 드셨어요. 
너무 늙어서 요즘 시대의 흐름이나 유행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때 윌커슨 목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그들이 한마디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임재가 있고, 영혼들이 구원받고 있으며 
예배 한 시간 전부터 강한 임재로, 사람들이 무릎을 꿇은 경험을 합니다.' 
라고 얘기했어요. 

그럴 때 무슨 시대니, 유행이니.. 이런 얘기를 했던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돌아가버렸어요.

여러분 정말 속시원한 답이고, 이게 정답 아닙니까? 
지식이 난무하고, 프로그램이 많고, 
뭐 대단한 목사가 박사학위를 몇 개를 따온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성령이 임재가 있어야죠. 영혼들이 건져져야죠. 구원받아야죠. 
사단의 역사가 떠나가야죠. 여러분 이게 교회죠. 뭐가 교회이겠습니까? 

허울뿐인 기독교, 알맹이는 하나도 없이 형식만 갖추고 있는 기독교, 
그걸 기독교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짓밟히는 거죠. 소금과 빛이 없으니까! 
정말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의 발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찢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행과 시대에 발맞추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서, 그로 인해 영혼들이 구원받고 변화돼야 돼요. 

저는 여러분 이런 일들이 우리 교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 교회 주차장에만 들어서면 임재가 느껴지고 
성전으로 올라오실 때 계단만 밟더라도 벌써 은혜에 젖고 
그 찬양소리가 들려주면, 벌써 그 찬양소리에 눈물을 흘리면서 입장하는... 
저는 그런 예배를 항상 사모합니다. 

사람들이 가끔 제게 꿈이 뭐냐고 물을 때가 있어요. 
저는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큰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부흥강사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자격도 없고, 그런 그릇도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지금은 '목회는 주님께서 하시고..' 저는 아무 욕심이 없어요. 

제 소망은, 늘 임재 가운데 거하고, 단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임재가 충만한 교회를 세워가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예배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이에요. 

내 평생에 주님 뵐 때까지, 임재 가운데 예배드리고 
임재 가운데 살다가, 주님 앞에 가면 성공한 인생 아닙니까? 
도대체 누가 성공한 인생이에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성공한 거 아니에요? 
뭐로 성공의 지표로 삼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꿈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교회에서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교회의 임재가 없다, 도대체 눈물이 없다.. 
이제는 그만 웃어도 돼요. 우리는 충분히 웃었고 즐거웠잖아요. 

이제는 울어야 될 때입니다.
울어야 될 때 울지 못 하면 안 되죠. 

임재가 없는 게 불만이어야 해요. 
임재를 얘기하지 않으면 가짜 성도입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성령의 임재에 예민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존재가 드러나는 법이죠. 


제가 참 유익하게 읽었던 책 중에 <세상을 가슴 뛰게 할 교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저자는 하와이에서 목회를 하시는데, 교인 수는 1만 명입니다. 
하와이에서 1만명 목회가 쉽지 않아요.  
사람이 많으니까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거기서 예배를 드리오셨는데 

 

그런데 토요일이었습니다. 학교측에서 미리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급하게 하루 전날, 주일에 강당을 쓸 수 없다고 통보를 해 온 거에요. 
그러니 목사님과 스탭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주일예배 드릴 장소를 막 긴급하게 찾았습니다.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수소문 했더니 야외공원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하와이 라고 하는 곳은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답니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그냥 이제 야외공원을 쓰기로 하고, 
비상기도에 전 교인이 돌입을 한거죠. 주일이라도 비가 내리지 않게 해달라는 거죠. 

이제 야외공원에서 예배를 준비합니다. 거대한 음향시설, 수백 개의 조명, 
엄청난 무대 세팅, 의자.. 등 시설들이 들어왔대요. 

목사님은 계속 기도를 하셨답니다. 
'주님 지금까지 제가 주님을 성실히 섬겨 온 것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부탁인데, 주일예배 때 주의 백성들이 비에 젖지 않도록 좀 도와주십시오!' 기도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잠을 깼는데 무슨 소리에 깼느냐? 빗소리에 잠을 깬 거에요. 
'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하늘의 수도꼭지를 잠가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면서 야외공원으로 나가셨어요. 

그런데 이제 믿음을 갖겠다고, 또 빗소리를 들으면서도, 일부러 우산을 안 챙겨가신 거예요. 
근데 잠깐 비가 멎는 것 같더니, 다시 빗방울이 뚝 떨어지고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찬양이 시작되었고 
거기 신실한 예배자들이 비를 맞으면서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도 그 회중가운데 서서 찬양을 했지만 
마음이 온통 하나님께 불만이셨답니다. 

'하나님, 제가 정말 얼마나 비가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까. 
아니 딱 하나 만들어달라고, 비 좀 내리지 않게 달라고 했는데, 이게 비가 웬 말입니까? 
제가 주님을 이렇게 섬겼는데, 주님 어떻게 굳이 이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속으로 항변을 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지는 않았지만 단호한 음성이셨답니다. 
'너는 나의 임재보다, 비에만 신경을 쓰는구나!' 
'너는 나의 임재보다, 비에만 신경을 쓰는구나!' 

목사님은, 그 음성을 듣자 모든 것이 멈춰졌대요. 
찬양소리도 안 들리고요. 사람들도 안 보이고요. 
그냥 자기가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더래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임재를 놓쳤구나!' 맞는 말씀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데, 날이 화창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람들이 많이 오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코로나라서 사람이 적게 오거나/ 많게 오거나
그게 사실 여러분 본질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려야되요. 성령께서 함께 해줘야 한다고요! 

이 목사님은 그 주의 음성을 듣고 모든 태도를 바꿔서 
이제 비 기도는 하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는 기도를 하셨답니다. 

예배가 끝날 무렵 쯤에, 하나님은 비를 거두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따스한 그런 햇살을 비춰주셨다고 해요. 

여러분 이 책을 읽다가 제가 생각나는데, 우리 청년들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직도 기억나는게 청년부가 '찬양팀 거리 전도'를 나갔어요. 

청년 전도팀이 전도하러 나갔는데 그날 하필 비가 오는데 
제가 일정이 있어서 같이 못 나갔어요. 

그러니까 제가 계속 노심초사 걱정이 됐죠. 
'얘들이 어떻게 전도를 하고 있을까?' 
그래서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베이스기타 치는 자매한테 전화를 했어요. 
'야 지금 너네들 어떻게 전도 하고 있니?' 

그랬더니 너무 간단하게 얘기해요. 
'목사님 우산 쓰고 했죠.
근데 너무 은혜스러웠어요!' 

'청년들이 선포도 많이 했고요. 
우리가 찬양하는데 아주 강력한 찬양을 할 수 있었어요. 
너무 은혜스러웠어요. 목사님, 걱정 하나도 안 하셔도 돼요.' 

저는 여러분 그때 우리 청년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임재를 사모하면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임재 가운데 전도했데요. 

여러분 주님의 임재를 우리는 사모하고 있습니까? 
정말 주님의 임재면 충분합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느껴지지 않아도 그걸 문제 삼지 않고 
계속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저 일상이 내 스케줄, 내 일정대로 진행되고 맞춰지면 그걸로 만족하는 거예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빠져도 
목회 시간표대로 흘러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계획대로 얼마든지 맞춰질 수 있어요. 성령님 없이도요. 

그런데 과연 이런 삶, 이런 목회가 과연 맞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어느새 성령님 없어도 척척박사 같이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거기에 얼마나 영적인 역사가 있습니까?
 
일은 참 깔끔하게 마쳐졌지만, 거기에 어떤 열매가 맺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령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아도 
정말 불편함없이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배당을 와서도 성령께 구하지 않죠. 
그러다가 그저 강단에서 내 상황에 맞는 말씀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그 말씀이 나오면 위로받고, 눈물 한번 찔끔 흘리고, 

힘나는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그 말씀을 들으면 갑자기 또 힘이 나가지고 
나갈 때 내 영과는 관계없이 그냥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거의 혼적인, 육적인 반응을 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더라는 거죠. 
영은 불이 다 꺼져가고 있는데 말이에요. 

자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임재가 없는 곳이라면 그것이 심령이건, 그것이 가정이건, 교회이건.. 기억하셔야 돼요. 

세상의 강력한 위협과 가치관을 절대 방어하고 이길 수 없습니다. 
예배와 수고와 헌신이 있어도 
성령 빠진 예배, 성령 빠진 수고와 헌신으로 
주님 앞에 내세울 수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랑만 하다가 끝날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문제보다도 
주님과 함께하는 교재, 주님의 임재를 갈망하길 원하세요.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예배와 삶에서, 
내가 서 있는 곳이 성령님의 임재가 없는 냉랭한 곳은 없는지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해야 되는데 
성령께서 내 삶에 역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야 돼요. 

그 (성령 임재) 준비의 최고봉은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많이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이거를 해야 돼요. 순종입니다! 
성령충만과 직결되는 것은 순종이에요. 순종! 

사람들이 순종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의 온갖 은사를 다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이 온갖 대단한 성령집회를 연다고 해보죠. 

만일 그 사람의 삶에 순종이 없으면 그는 가짜입니다. 
그 은사는 결국 중단되게 되어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주님 말씀에 따를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 
능력과 권능을 행한다고요? 그것도 문제가 있고요. 
그게 얼마나 건전하고 끝까지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게 진짜일까요? 

따라서 우리의 삶에 더욱 임재를 갈망하고 
그 임재가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사모함과 동시에 
그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다. 

순종하십시오 그게 성령충만의 비결이에요. 
그런 맥락에서 이번 주 저도, 순종할 때 임하시는 성령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애를 썼어요. 

여러분의 삶에 성령을 사모한다.면 임재를 갈망한다.면 충분히 순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내 마음이 원하지 못하니까, 순종이 안 되는 거거든요.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그래서 성령께서 나의 삶을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내어드리는 것이지 
방언, 또는 통변한다고 그게 성령충만의 증거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령충만한다 하면서 순종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육신충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