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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5장 27~32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나요

LNCK 2022. 2. 22. 12:03

https://www.youtube.com/watch?v=5UL-nFKzyL8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나요?            눅5:27~32        2019.11.10.출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물질만능시대입니다. 
그래서 그 물질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자기 영혼을 파는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뮤지컬의 주제만이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진실을 
돈과 바꾸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초등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 물으면 
운동선수, 과학자 .. 이런 저런 대답을 했죠. 

그런데 십 년 전쯤에는 그때 한참 초등학생들이 직종에 상관없이 
'돈 많이 벌어서..'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뭐라고 대답하냐면, 장래희망이 뭐냐? 물으면 
'건물주' 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초등학생까지 완전히 사고체계가 물질만능주의가 되었어요.
그래서 '조물주 위에 건물주' 라고 표현하거든요. 

전능자 하나님보다 더 확실한 것이 돈이라는 거예요. 
만능신인 돈을 섬기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죠. 

오늘 본문에 그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보겠는데요. 


◑1. 첫번째는 <마태의 포지션> 입니다.  *그의 자리, 위치    *2대지는 마태의 포텐셜

눅5: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후에' 라고 되어 있는데,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고,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이후에 
예수님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마치 다급하게 호출을 받은 것처럼 움직이셨어요. 
어디로 가셨는가? 세관 앞에 가셨어요. 

당신에 세리들은 '면허증을 발부받은 강도들'이라고 불렸죠. 
게다가 일반세를 거두는 세리보다, 세관에 앉아서 통관세를 매기는 세리들이 
더 악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돈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죠. 
지금 예수님을 따라오던 무리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요! 

 

▲그러면 예수님의 첫번째 행위를 어떤 동사로 표현했는가 하면
27절에 보니까,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보신' 것이 첫번째 였어요.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잠시 응시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주님의 시선을 눈치챈 세리가 굉장히 당황스러웠던 거예요. 
왜냐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딱 두 가지 종류였다고요. 

-자기가 두려워서 피하려고 하던지 
-아니면 자기를 경멸의 눈빛으로 째려보든지.. 

그런데 저 분의 눈빛은, 두려움도 아니고 경멸도 아닌 거예요. 묘한 눈빛인 거예요. 
자신의 영혼의 밑바닥을 다 훑고 지나가는... 
내 인생의 진실을 알고 있고, 내 내면의 욕망과 절망,

그 욕망이 나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절망을 주는 것!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눈빛! 
그러면서도 나를 정죄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시는 눈빛인 거예요. 

그 주님의 시선 앞에 그(마태)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다' 저는 27절의 이 표현을 보면서, 제가 본문을 계속 묵상했어요. 
아니 예수님이 보신 게,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걸 보셨거든요.

근데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건, 당연한 자기 포지션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도대체 그에게서 무엇을 보셨다는 건지..  

 

예수님은 앞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그에게 '나를 따르라!'   :27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콜링인데, 그 부르심을 주셨어요. 

아마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더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도 혐오하지만 

만약에 그 세리가 예수님같은 분을 따라다닌다... 
그건 더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인 거예요. 더 혐오할 만한 일인 것이죠. 

자 그렇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다면, 이 세리의 반응은 어떨까요? 

28절에 '그러자 레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우리말성경) 
'벌떡 일어났다' .. 마치 전기충격기를 갖다 댄 것처럼, 용수철처럼 일어났다는 것이죠. 

세관에 앉아서 통관세를 집요하게 받아내던 이 사람이 
세관 톨 부스 Toll Booth 에서 그냥 갑자기 튀어나온 거에요. 이상한 일이죠. 

당시에 세리들은, 그런 세금 받던 자리를 한번 벗어나면 
다시는 자기 직업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금 걷는 일에, 손해를 끼쳤으니까요.

그러면 이 세리 레위(마태)는 도대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따라갔을까요? 
물론 가장 최근에 핫한 소식을 다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의 활약상이 어떤지를 다 알고 있었겠죠. 

그러나 지금 이 자리를 떠나서 박차고 나가면 
자신이 지금까지 세리로서 누렸던 모든 특권과 모든 이익을 포기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따라갔어요. 

27~28절 딱 두 절을 보면, 정말 무슨 뭐 마법 같은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요? 
레위 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정말 거룩한 레위 지파의 후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거룩한 인생을 살라는 부모의 바램을 갖고 태어난 인생일 수도 있겠죠. 

또 다른 이름은,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입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사람의 인생은 
전혀 '선물' 같은 인생도 아니고   *마태
전혀 '거룩한 인생'도 아니었다는 것이죠.  *레위

그런 그에게서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보셨습니까? 
'예수님이 보셨다'고 되어있는데 
그냥 가만히 세관에서 세리 업무일을 하고 있는 것만 보신게 아니십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5:27
  
첫번째 보신 것은, 예수님은 그의 깊은 목마름을 보셨어요. 

여러분, 가물어 메마른 땅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이 '저 바싹 메마른 땅은, 계속 저렇게 바짝 메말라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나요? 아니죠. 
가물어 바짝 메마른 땅만큼, 간절히 물을 원하는 장소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많은 사람들 상담해보면은 '죽고 싶어요. 죽고 싶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만큼 
잘 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 사람은 없는 거예요. 

굉장히 역설적으로, 가장 세속적인 사람이, 가장 거룩에 대한 갈망이 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마음을 잘 알고 계셨어요. 

레위야말로 응급 환자라는 것, 그래서 다급히 그를 찾아가신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 발로 찾아올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왜 못 찾아가느냐? 
나병환자는 죽을 각오를 하고 라도 예수님을 찾아갔잖아요. 

게다가 중풍병자는 자기가 걸어갈 수가 없으니까 
친구들을 동원해서라도 들 것에 실려서 예수님께 나왔잖아요. 

하지만 세리는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다리가 멀쩡하지만 
무슨 면목으로, 무슨 낯짝으로 주님 앞에 나가겠어요? 

'제가 한번 인생을 새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할 용기도 없는 거예요. 

인생도, 자동차도 
그 마지막 끝이 벼랑끝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속도가 붙어서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계속 달려갈 때는 
응급상황인 것이죠. 예수님이 그걸 아셨던 거예요.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계속 그 길로 가면서 돌아서지 않고 폭주할 때 
'저 사람 저거를 좋아해서, 저거를 원해서 저러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요. 

과연 그럴까요? 
근데 수많은 사람들은, 마태와 같이 사실은 자기가 원치 않지만 
돌이킬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그 길을 계속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이 어느 한 자리에 계속 있다 보면, 마태처럼, 
경멸을 당하는 그런 자리는 아닐지라도 
'저 사람은 저 자리에 계속 있겠구나..'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본인의 마음 가운데는 
'내가 언젠가는 여기를 반드시 떠나야지!' 
이런 마음으로 계속해서 속에서 되뇌이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죠.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정지화면으로 보는 경우가 참 많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시간 속에서, 무빙하는 즉 움직이고 있는 인생으로 보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정지화면으로 많이 봐요. 
베드로같은 어부는, 항상 해변에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고 
돈만 밝히는 마태 같은 인생은, 세관에 늘 앉아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은 
그 허무함을 알기 때문에.. 빠져나오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는 그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엄청난 반발력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이죠. 

'언젠가는 나도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 
이런 마음은 세상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는, 더 그런 마음이 강하고요. 
몸을 팔아서 돈을 버는 창녀에게도, 그런 순수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누워 있는 알코올중독자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는 거에요. 
그런 마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열망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절대로 그의 과거로 낙인을 찍으면 안 됩니다. 
참 감사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의 미래를 보시고, 그 미래를 기준으로 우리의 현재의 삶에 개입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면서 떠오른 노래가 하나 있어요. 
찬송가가 떠올라 야되는데 가요가 떠올랐어요. 

여러분이 잘 아는 노래인데, 혹시 안 들어 보신 분은 
가셔서 '거위의 꿈' 이라는 노래를 들어보세요.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이런 가사입니다. 

가사의 일부분을 읽어드리면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는 웃을 그날을 함께 해요.'  

여러분, 늘 땅바닥에서 그냥 걸어다니는 거위가 
날고 싶다는 꿈을 꾼다고 생각할 수 있나요?

물론 사람의 감정을 이입한 노래지만 
늘상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은 
'거위는 그냥 늘상 저기 땅에 있을 거야, 저기가 편할 거야, 저기가 좋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겠죠. 

근데 주님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아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마태의 포지션을 
'영적인 비상'의 활주로로 바꿔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감사한 거죠. 

제가 대학생 시절의 크리스천 모임을 만들어서 
장애인 시설에 가서 봉사하기도 하고 
한 2년 지나서는 청량리에서 '밥퍼 사역'하시는 최일도 목사님 사역에 가서 
봉사를 하겠다고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 최목사님 밑에서 섬기시는 한 목사님이 나오셔서 
저희들을 보더니 너무 어리게 보신 것 같아요. 

그때 저는 굉장히 좀 마음이 불편하긴 했는데 
'우리가 어리지 않는데 왜 그럴까?' 20대 초반이었어요. 어린 게 맞았죠. 

그때 그분이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글쎄요.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일지 모르겠습니다.' 

사창가에 있는 자매들이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자기 몸을 판 돈으로 헌금하면서 통곡하고 오열하는 거예요. 
그걸 이해할 수 있겠냐고요. 

한번은 교회에 나오는 자매에게, 자매가 생일을 맞았는데 
낮에 밥 사주고 영화를 보여주겠으니 나와라, 그랬더니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나온 거예요.

근데 만나자마자 그냥 너무 우니까 얼굴이 뭐 엉망이된 거예요. 
자기를 깨끗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줘서 고맙다고 울었던 거죠.

여러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만약에 그런 사람들이 '나는 비상을 꿈꿉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니 너는 그냥 땅바닥에 계속 있어! 넌 그게 안 어울려!' 이렇게 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치 있고, 온전한 삶에 대한 갈망이 강한 것이죠. 
우리는 그들과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정말 그들과 다른 인생을 사는 걸까요? 

지금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자리, 
처음에는 나의 인생에 안식처와 도피처가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나중에 내 영혼을 저 아래 벼랑끝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 그 자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그런 인생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하지만 
그런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손가락질 하고 자책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마태가 너무나 급한 나머지 달려가셔서 
마치 심장박동이 멈춘 것 같은 마태의 영혼에 긴급 심폐소생술을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럼 또 사람들이 질문 하겠죠. '예수님, 꼭 이런 사람이어야 하나요?'
'멀쩡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룩하게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이런 사람(세리)을 살리셔야 했나요?' 

근데 잠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

사실 그는 소심해서 예수님을 찾아가지도 못했어요.

누군가가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가 주지도 못했어요.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있는 간절함과 절박함을 주님은 보셨던 거예요. 
'레위야, 당장 나와라!' 그가 당장 나온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포지션에 있는 절박한 영혼을 선호하신다고요.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갈망하지 않고 사는 느긋한 영혼들보다 
절박하고 간절한 영혼들을 선호하신다고요. 

그래서 절박하게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분들은 기뻐하십시오. 
주님이 곧 찾아오실 것이고, 주님이 여러분을 건지실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 볼 부분은 <마태의 포텐셜> 즉 잠재된 가능성입니다.  *1대지는 포지션

예수님은 마테에게서 그걸 보신 것입니다.

눅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많은)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큰 잔치 great feast 란, 엄청나게 큰 잔치를 벌였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살면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날이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초청인사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에 뭐라고 돼 있냐면 '많은 세리들과' 이렇게 되어있는데 

그러니까 지인 몇 명을 초대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자기가 아는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을 다 초대한 거에요. 
개역에는 '세리'가 단수인데, 원어에는 '많은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인 중심의 조촐한 파티가 아니라, 큰 동네가 떠들썩한 잔치를 연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세리 친구들을 좀 가리워주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이라고 표현했거든요. 
약간 중립적 표현을 썼어요. 

그런데 마태 자신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자신이 쓴 마태복음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적나라하게 썼습니다. 마9:11

주님이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는데 
이 식사의 장면이, 당시 중동의 관습처럼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제대로 만찬을 즐기셨다는 뜻이에요. 

   *오늘날에도 중동에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는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죠.

개역에 '앉아'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에 '카타케이마이'는 recline, 비스듬히 눕는 자세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가장 편안하게 식사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상상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모여서 점잖고 거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까요? 
상스러운 말들이나 저속한 이야기들이 오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주님은 마냥 즐거우신 거예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마11:19, 눅7:34
이런 비난성의 표현이 예수님에게 따라다니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자리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즐거워하신 척을 한 게 아니라, 
진짜 즐거우셨거든요. 진짜 즐거우셨어요. 

그리고 이 비난을 받게 된 것은, 마태가 벌인 이 거창한 파티 덕분이었다고요.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는가요? 

30절에 그 종교 지도자들이 비판을 한 거예요. 
눅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이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주거나, 말씀대로 살려고 가르치거나, 회개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같이 어울려서 즐겁게 진짜 놀고 먹느냐?' 이렇게 마구 비난을 하니까 
음악소리가 멈추고, 왁자지껄 하던 소리가 순간 멈췄겠죠. 

여러분 마태가, 아까 예수님을 따라갈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8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그를 믿어줄 수도 없는 거예요. 

'봐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갔다'고 되어 있는데 
저 마태 친구들의 면면을 봐라!' 

우리가 간단하게 상상을 해봐도 
이들이 밥 먹고 대화하고 어울리는 모습이 
거룩과는 한참 거리가 멀지 않았겠어요?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예수님이 비난을 당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 비난을 들어야 되는 마태의 심정이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그래 내가 지금 이거 미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고 해서, 내가 너무 오버한 게 아니야?
내가 과연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뭘 할 수 있을까?' 

순간 마태가 '주님,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제가 주님께 이렇게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마태가 아무 반응을 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나서서 답변을 해주셨어요. 
그게 31~32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1~32

마태와 그 친구들이 너무나 부끄러워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보시고, 지금 상황이 이러면 안 되겠다는 거예요. 

이 소중한 사람들이 절망하고 포기하고 주저앉게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답변하면서 
'이게 유유상종인 줄 아느냐? 환자 옆에 있다고 다 환자인 줄 아느냐? 
환자 옆에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도 있는 법이다. 

나는 죄인을 불러서 의인으로 바꿔 놓는 존재다. 
너희 눈에는 그들이 죄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통쾌하게 말씀을 해주셨죠. 

주님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계셨어요. 
'나는 의사이기 때문에, 이 환자가 비난받는 환자 일지라도 
난 환자 옆에 있는다. 그거 갖고 나를 비난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 병원에도, 죄인이라고 그의 치료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가 죄인이건, 의인이건
일단 병원과 의사의 의무는, 그를 치료하고 살려 놓는 것입니다. 
하물며 영적인 병원인 교회와, 영적인 의사들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에 성경 본문을 다섯 번, 여섯 번 계속 보면서 
필름을 계속 돌려보듯이 보면서, 한 가지 새로운 걸 제게 보여주셨어요. 

27절에 주님이 밖으로 나가셨는데, 왜 나가셨는가요? 
이미 5장 서두에 시몬과 제자들을 부르시고,   눅5:1~11
그리고 나서 나병환자를 고치셔서    5:12~16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든 상황이었다고요. :15

그러면 그 환호하는 무리들을 버려두시고 왜 나오셨냐는 거죠.  :27
이유는 단 한가지! 
'나Jesus는 나에게 박수 치고 환호하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따라올 사람이 필요하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갈 사람들이 아니라 
인생을 걸고 나를 따라올 한 사람을 찾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태처럼 세관에 주저앉아 있을지라도, 술집에 앉아 있을지라도 
저 길거리 뒷골목을 서성이고 있을지라도 
주님이 그를 만나주셨을때, 인생을 180도 전환하고 따라올 
그 한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마음이죠. 

다만 도대체 이 마태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세리가 뭘 하겠습니까? 

평생 남의 돈 빼앗던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요? 
무슨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예수님께 만약에 그런 질문을 한다면 
예수님이 이런 답변을 하실 거라는 상상이 되더라고요. 미소를 지으시면서... 

'저런 세리는 집요하게 전도할 수 있지!' 이렇게 얘기하실 것 같아요. 
(집요하게 세금을 걷었으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을 모두가 어리둥절해 할 때 
예수님은 늘 그들의 가능성을 보고 선택하셨어요. 

어부 시몬에게서는 엄청난 열정을 보셨어요. 물고기 한 마리를 못 잡아도 밤새 그물질 하잖아요.  
나중에 수천 명을 돌이키는 전도자가 되잖아요. 

박해자 청년 사울에게서는 
불굴의 의지와 돌파력을 보셨어요. 
나중에 그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한 반대에도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세리 마태에게서는 집요함을 보신겁니다. 
마태가 어떤 일을 했다고요? 세금 징수원이잖아요. 

여러분 세금을 얼마나 집요하게 거두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시몬과 같은 어부는, 물고기를 낚는 감각으로 사람들을 낚을 것을 기대하셨다면 
세리 마태에게서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집요하게 거두는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빚진 것을 
좇아가서 반드시 그것을 내도록 만드는.. 

'하나님 앞에 당신 빚진 것 청산해야 되지 않느냐?' 
그렇게 끊임없이 집요하게 (세금 독촉하듯이) 전도할 사람으로 보셨던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역한다 그랬는데 
마태는 '빚을 독촉하는 자'의 심정으로 사역하지 않았을까요? 

뭐 그건 목사님의 개인적 상상아닌가요? 너무 지나친 해석 아닌가요?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근거가 있습니다.   
  
마태가 결국에 한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마태복음을 기록한 거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정말 집요하게 전도합니다. 아주 집요하게! 
'전직 세리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한다..' 
아마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코웃음쳤을 거에요. 

'야, 민족의 배신자이고 우리가 손가락질하는 네가 
뭘 우리에게 설득을 하냐?' 

근데 유대인들이 마태복음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여러분 세리마태가 구약성경을 130회나 인용을 했어요. 어마어마하게 많이 했습니다. 
그냥 도배를 해버렸어요. 

그러면서 '이 분이야 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부인할 수 없이 만들어버렸어요. 

아주 집요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면서 
그들을 돌아오게 만든 전도자 였던 것이죠. 

예수님은 마태에게서 집요한 복음증거자의 가능성을 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에서도 그 가능성을 보시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을 영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자리를, 여러분의 포지션을 보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이제 사회적 지위와 경력 등으로 가면을 쓰고 있어요.
자신이나 남들이 보는 내 모음은,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라
사회적인 모습, 어쩌면 가면 쓴 얼굴만 보고 있는 거예요. 

근데 주님은 여러분의 내면의 본질을 보고 계시거든요. 가면 속 모습을 보고 계세요.
예수님은 우리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포지션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 자체를 보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모두가 '저런 청년 사울 박해자가 어떻게 전도자가 되었느냐?'
근데 그 사울에게서 돌파력을 보시고 
일자무식이었던 시몬 베드로, 어부 시몬에게서 열정을 보시고 

늘 소심했던 디모데에게서는 섬세함을 보시고 
누가에게서는 치밀함을 보시고 
마태에게서는 집요함을 보시는 거에요. 

주님은 가능성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모두가 당신의 포지션을 보고 있을 때, 예수님은 당신이 포텐셜(잠재적 가능성)을 보시는 거예요. 

지금 내가 주눅들어 있고, 무너져 있을지라도 
나의 잠재적 가능성을 보고 나를 발탁해주는 리더를 만나는게 평생의 축복인 것이잖아요. 
주님을 그렇게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난 주말에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산에서 기도하면서 
똑같은 사역을 목회자도 한 자리에 계속 있으면서 하잖아요. 

그러니까 똑같은 사역을 계속 하다보면 약간 매너리즘에 빠지거든요. 
주님이 그런 저에게 '네 인생의 목표 goal이 뭐냐?' 
'네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너를 말씀을 묵상하여서 선포하는 메신저로 선택했다!' 

제가 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저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 생각이 미로안에 빠져있는.. 
그래서 생각하다가 실행할 타이밍을 놓쳐서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소년이었거든요. 

그러다가 제가 주님을 만났고, 주님이 저의 생각을 정리시켜 주셨고 
생각한 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고 
어느 날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묵상)하고 전달하는 메신저로 세워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사람들을 볼 때 도대체 뭘 보실까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너무 딱지를 열심히 쳐서 탈장이 됐다고요. 

넘길 수 없는 딱지를, 넘길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면서  
네 시간씩 다섯 시간씩 치는 거예요. 

제가 5~6살 때인데, 왼쪽 배가 탈장이 됐어요. 
그리고서는 거기 꿰매고서는, 
오른쪽으로 또 딱지치기를 계속하다가 오른쪽 배도 탈장이 됐어요. 

어느날 보니까 저희 둘째 아들이 그 딱지치기를 집요하게 하고 있더라고요. 
네 시간 동안 딱지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들을 딱 보는 순간, 저 집요함, 저 열심! '주님을 만나면 그냥 불꽃이 튀겠다!'
그 열정을 어디에 쏟아 붓겠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쏟아 붓는 거죠.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뭐라고 평가하든, 그거에 너무 매달리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이 보통 속된 표현으로 '내가 뭐 배운 게 도둑질이지',
내가 하는 일, 내가 세관에 수십 년을 앉아 있었어도 
내가 하는 일이 별 볼일 없어도,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세속적이어도 

아니요. 주님은 여러분 안에 놀라운 가능성을 심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 두신 그 가능성은, 주님이 포기할 수 없는 비전이라고요. 

반드시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마태와 같이 
'이제까지는 너에게 심어둔 가능성은, 너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 거기까지! 이제 그만! 
자 일어나라, 나를 따라와라, 나랑 함께 가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 날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