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수19장에서 가나안 땅 분배가 완전히 끝났습니다. 열두 지파의 모든 땅 분배가 끝났고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는 이름 모를 딤낫 세라 라고 하는 한 성읍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정말 다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그 모든 땅의 분배가 끝나려면, 오늘의 본문 수20장, 도피성이 지정이 되어야 합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이 민수기에서 모세에게 말한 것처럼 부지 중에 사람을 죽인 자, 실수로 살인죄를 범한 자가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장소입니다.
이 장소가 지정이 되고서야 모든땅 분배가 완료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12지파의 땅을 분배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그것은 12지파의 재산을 불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영영히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게끔 나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땅을 분배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이 12지파의 땅을 분배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심히 살고 먹고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 요즘으로 말하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경제가 다야!' 라는 식의 먹고 사는 문제가 다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 부지 중에 우리는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잖아요. 누구나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살다보니까 실수로 내가 남을 해칠 수 있잖아요.
근데 그럴 때에, 내가 정말 의도하지 않았는데 남에게 잘못하고 해를 입혔을 때 내가 그것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해요.
그래야 한다면, 평생을 다바쳐서 광야를 지나왔는데 평생을 다바쳐서 이 싸움을 해서 가나안 땅을 취했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실수로 살인할 수 있고,
신약적 의미로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데 그런 죄에 대한 어떤 보장도 없다면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수13장에서 시작된 땅 분배를 19장에서 모두 마치시고 20장에 들어와서 이들에게 도피성을 말씀하십니다.
▲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라'
광야에서 들었던 바로 그 도피성을 이제 실제로 하나하나에 지명을 불러가며 그 땅에 정하라는 것입니다.
▲3절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그 당시 중동 팔레스타인의 법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예요. 눈을 상하게 했으면 그 사람의 눈을 뽑아야 되고, 이를 부러뜨렸으면 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리는 거에요. 그러면 생명은, 생명으로 해요.
실수든 잘못이든 아무튼 상관없어요. 우리 가족이 죽었으면, 그 가족을 죽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 모든 가족은 먹지도 잠자지도 않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죽을 때까지는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 게 이 당시의 관습이요, 문화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실수였다고, 아무리 내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 살인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는, 그 가족은 보복을 포기하지 않아요. 자 그 사람을 맞아들이는 장소가 바로 도피성 이죠.
▲4절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절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누구나 여기에 해당할 수 있어요. 누구나 그렇잖아요. 살아가면서 일부러 건물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어디 있고, 일부러 차 사고 내는 사람이 어디에 있고, 일부러 정말 일을 하다가 잘못해서 주위 사람을 해하는 경우가 일부러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일부러 그랬으면 도피성의 피신이 적용 안 되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 사람이 동기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결과만 중요한 거예요. 결과가 사람이 죽었으면 '네 목숨 내 놔!' 하던 시대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결과를 보시는게 아니라 동기를 보세요. '과연 일부러 그랬냐?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그랬냐?'
그것을 그 도피성 성읍 장로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적어도 도피성이 아니라면, 그걸 말할 여유도 없이 좀 자기의 사정을 알릴 여유도 없이 그냥 맞아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그러기 전에,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시는 것이죠.
▲6절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비록 부지중에 살인한 자라 하더라도응보의 원리(창 9:6)에 의해서 보수자(報讐者)에게 죽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살인자는 도피성으로 달려가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사고의 내용을 알리고 보호를 청할 수 있습니다. 수20:4
이때 장로들은 긴급 피난자에게 그 성읍의 일정한 장소를 제공하고 피살자의 보수자로부터 그의 신변을 보호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살인자에 대한 보수자의 신병 인도 요구가 있을시, 그 보수자에게 그를 직접 넘기지 않고 회중이나 회중 재판소(사고를 낸 현장 회중들의 판결 또는 도피성에 있는 지역 재판소)에 그 살인자를 넘겨 공정한 사법적 판결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판결 내용이 실수나 부주의로 인한 비고의성 살인으로 판명되면,
그를 다시 도피성으로 데려다가 일정한 기간(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생명을 보존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고의적(의도적) 살인으로 판결되면, 그는 피의 보수자(가족, 친척)에게 넘겨져 처형되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공정한 판결 제도를 설정함으로써,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무분별한 피의 복수가 악순환 되지 않게 하셨고, 보복과 형벌의 객관성을 확립코자 하셨습니다.
한편 민 35:32에 보면 비록 오살자(실수로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속전(贖錢)에 의해서는 결코 성읍을 떠날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대제사장의 죽음이 곧 속전을 대신하였음을 암시해 줍니다.
즉 대제사장의 죽음이 속전으로 간주되어 살인죄를 상쇄시켰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궁극적으로 피 흘린 자에 대한 진정한 보수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서(창9:5-7),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보수자요 심판자로서 대제사장의 죽음을 살인죄의 속전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결국 이와같은 점에서 볼 때 대제사장의 죽음은 인류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한 모형이 됩니다.
▲7절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 세 개, 서편에 세 개가 있어요.
자 그러면 이 6곳을 여기에 배치한 이유가 뭐냐면 "가나안 땅 어디서든 하루 길에 올 수 있는 거리에" 지금 있는 거예요.
(영적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언제든지 나아올 수 있도록)
그러니까 누구든지 이 도피성에는, 큰 길을 다 대로로 열어 놓고 어디서나 찾아올 수 있게 표지판을 붙여놔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우연히, 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그 성읍으로 피할 수 있도록 요단 서편과 동편에 누구든지 갈 수 있도록 이렇게 여섯 개의 피난처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민35: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가거든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 세 성읍은 요단 이 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도피성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철연장으로 사람을 쳐서 죽인 사람이나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들고 사람을 죽인 사람, 그리고 사람을 미워하여 밀쳐서 죽이거나 기회를 보아 무엇을 던져서 사람을 죽인 경우와 원한으로 인해 손으로 쳐서 죽인 사람의 경우엔, 도피성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민35: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고의로 살인한 사람)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17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19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20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21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하였음이라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
▲도피성의 규례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도피성을 찾아 왔을 때 그 도피성의 장로들이 성문 앞에서 그 사람의 범한 일에 대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야 했습니다.
장로들이 그 사람의 범죄에 대해 판결할 때, 반드시 두 세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다음 만일 그 사람이 도피성에 거주할만한 사람으로 판단이 될 때 그 사람을 도피성으로 들여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보복을 받을 수 있도록 되돌려 보냈습니다.
도피성에 거주한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안에서 살면서 원수들의 보복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도피성을 스스로 벗어난 경우엔 더 이상 보호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스스로 법적 보호망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들은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이라 명하셨습니다.
▲도피성과 그리스도 이스라엘의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 있습니다. 도피성이 요단강 서쪽과 동쪽에 모두 3개씩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어떠한 장소에서도 손쉽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만일 도피성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면, 도중에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빨리 도피성에 다다를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신19: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혐원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나 두렵건대 보수자의 마음이 뜨거워서 살인자를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미쳐서 죽일까 하노라.'
또한 하나님은 도피성까지 가는 길을 잘 닦아 놓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신속하게 도피성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신19: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삼 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
이는 마치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도 산 길이 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새롭고도 산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타국인도 도피성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헬라인이나 유대인,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민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도피성을 벗어나면 생명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피성에 피신한 사람은 오직 대제사장이 죽을 때 자신의 집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민35:25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9절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그래서 이방인도, 도피성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6절 내용의 반복입니다. 6절을 참조하세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위해서 도피성에 몸을 피하고 있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어요.
그래서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참된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피성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돈 가지고도 없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이 좀 있고요.
힘 가지고 돕는 사람들도 좀 있고요.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돕는사람들이 좀 있어요. 선한 의지로 돕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데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돕는 사람은 없어요.
어디까지나 나한테 유익이 되고, 내가 좀 남는 걸 활용하는 차원의 돕는 거지 내 목숨까지 줘가면서 돕는 사람은.. 세상에는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내어 주셔서 대제사장이 죽어서 도피성 있는 자들이 자유를 얻는 그 참 자유를 허락하시는 우리의 진짜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냥 아 십자가에 달리셨구나, 아프셨겠다, 눈물난다' 가 끝이 아니라 그 십자가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거기에 피했던, 즉 도피성에 있던 우리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도 자유를 누리며 기쁜 삶을 살고 하나님의 힘 가운데 거하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까지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부끄러움이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도피성에 은혜를 붙잡고 비록 우리 모두 죄인이고 허물이 많지만 그러나 용서받은 죄인으로,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오늘도 힘을 내서 열심히 살고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