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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장 20~43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LNCK 2022. 2. 25. 11: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 요12장20~43절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요12:20~43    2022.02.13.출처

  

오늘은 질문을 하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특별히 여성분들에게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밥이 제일 맛이 있으십니까? 

당황스럽네요. 남들이 만들어서 차려준 밥이 제일 맛있다고요?

그러면 이렇게 한번 제안을 해보겠습니다. 
어떤 음식을 잘 하는 분이, 내일부터 이제 여러분들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고, 
여러분 집에서 밥을 차려주시고, 그 다음에 식사 후에 설거지도 해주시는데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자원봉사하고 싶은 마음으로
스스로 어떤 보람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을 그렇게 섬겨주신다고 하면, 
내일부터 그런 섬김을 좀 받아보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의 표정이 밝아지시네요.

근데 이 자원봉사자 분에게, 뭐 별건 아닌데 흠이 하나 있어요. 
이분이 코로나 확진자에요. 
근데 문제가 또 하나 있는데, 이분이 별건 아닌데 전염성이 강한 
그런 전염병을 늘 달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그의 섬김을 받아 보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주저하시는군요.

여러분, 섬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누가 나를 섬기는가?' 하는 것은 
섬김을 받는 우리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해요. 

그런데 늘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이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분의 아들의 피로 씻기지 않았거나 
그리고 그분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섬김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에는 덕이 될 수 있고, 사람들에게는 유익을 줄 수 있다 할지라도 

죄로 더러운 가운데서, 아들의 피와 그분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의 섬김은 
그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다.. 라는 것이 그분을 섬기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본문 26절에 보면, 그분을 섬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이라고 말하면서 
어떤 사람이 섬기느냐,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 섬기느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섬기느냐, 
어떤 형태로 섬기느냐? .. 이것도 매우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왕으로 오시되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이 땅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저와 여러분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왕이십니다. 

본문 말씀은 이제 그 왕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을 때에 
'나를 섬기려면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6절에, 이제 그 왕이 너희 인생 가운데 찾아오셨다면 
그 왕을 너희가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나를 따르라!' 

내(예수님)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과 똑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라는 거에요. 

구약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섬기라' 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난 이후에 
섬기는 방식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따라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겼단 말이에요. 

내가 섬기고 싶은 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섬겼던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가운데 왕으로 찾아온 모든 사람이 
예수를 섬기려고 하면 

이제 구약백성들이 율법을 따라 섬겼던 것처럼 
너희는 그 율법에 마침이 되고, 완성이 되는 나(예수님) 처럼 섬겨야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나를 따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라,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그저 그 분 뒤를 졸졸 따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본문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셨는지를 바라보고 

그리고 이제 우리도 그러면 어떻게 섬겨야 될지를 
배워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세 가지로 나눠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섬겨야 되는가?
그 첫번째는, 하나님의 때에 맞춰서 섬겨야 한다.. 
라고 말씀해주고 있어요. 

요12:20~21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유대인들이 아니에요.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빌립을 통해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이 찾아온 자들과 예수님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거는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순간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에게도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가족들이 '올라가서 좀 드러내보여라' 할 때도,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시며 
계속 뒤로 물러서셨던 그분이 

이제 드디어 헬라인의 방문을 통해서 '내 때가 이르렀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헬라인의 방문이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님에게 '움직이라'고 하는 때라는 것을 그분이 분별하셨고, 
그것 때문에 이제 십자가로 직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그분은 지금 마구잡이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다.. 라는 것을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중요한 두 가지 주의사항이 있는데, 하나님을 섬길 때 첫번째 주의 사항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안 된다.. 라는 거예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죠? 
하나님의 때를 거슬러서도 안 된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사울 왕은 이 두 가지를 다 거슬렀던 사람이었어요. 
그는 아말렉과의 전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어요. 

하나님은 아말렉 전부를 진멸하라 했는데 
그가 보기에 좋은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더 유익하다 싶은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어요.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서서 
그가 왕이 된지 2년만에 사울은 하나님의 때를 거슬렀어요. 

그때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는데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함께 그 전쟁을 치러야 했어요. 

그런데 그가 볼 때, 사무엘이 자기가 정한 때보다 늦게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때를 거슬러, 자기가 정한 때에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 하나님의 때에 맞춰서 
예수를 섬겨야 된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어떻게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서, 
또 그렇게 섬길 수 있는가요?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고 
이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살면서 계속해서 배워나가고 
성숙시켜 나가야 될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지침은 있습니다. 

▲노아 때에 홍수가 터졌어요. 노아 가족은 홍수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에 방주에 들어갔어요.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런데 6일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7일째부터 비가 막 쏟아졌습니다.  
나무로 만든 그 배에 비가 쏟아지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폭우가 쏟아지니까 

그런데 아마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에 세워진, 산 위에 세워진 그 방주 쪽으로 와서 
방주를 두드리면서 문을 열어달라는 소리도 아마 들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그 소리가 잦아지고, 배가 물 위로 떠오릅니다. 그렇게 일 년을 또 있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방주 밖으로 나가고 싶었겠어요. 

그런데 이제 그가 언제 내가 이 배에서 나가야 되지? 
처음에는 까마귀를 내보냅니다. 그 다음에는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세 번째 비둘기를 내보냈을 때입니다.

창8: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그러니까 노아는 어떻게 그때를 분별한 것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경험과 생각과 상식을 가지고 분별한 것입니다.

노아는 지금 자기 이성을 사용해서 분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돼요. 
감람나무 새 잎사귀 물어온 것을 보고, 물이 줄어든 것을 파악한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하나님과 관련된 때를 분별할 때에 
이렇게 상식과 이성을 사용해서 분별해야 합니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이성과 내 판단도,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다만 그 이성과 내 판단이 타락했고, 변질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서요.

그런데 지금 노아를 보면, 
그가 이렇게 자기의 이성과 생각만 가지고서 상황에서만 분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립니다. 

창7:15~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자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싸인이 왔어요. 
그제야 비로소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일반적인 싸인만 받고서 움직일 때가 있어요. 
그러나 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일반적인 싸인(감람나무 잎사귀)을 받고서 '아 때가 이르렀구나' 하는 것을 임박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가 방주에서 나오지는 않았어요.

그러면서 그가 계속해서 구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죠? 영적인 싸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 
우리는 일반적인 이성을 통한 일반적인 싸인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구할 때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영적인 싸인을 주셔서 
그 영적인 싸인이, 일반적인 싸인과 함께 만날 그 때에.. 어떤 액션을 취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보면 말씀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때를 정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유월절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그때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살기가 점점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서 

예수님께은 '아 내가 이제 십자가를 지러 가야 될 때가 되었다'라는 것을 
어떻게 분별하셨겠어요? 

그분을 향하여서 살기가 점점 더 거세어져서, 이제 죽이기로 모의하고 결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그것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보면서 
'아~ 이제 내 때가 이르렀구나' 하는 것을 아셨겠죠. 

그런데 그 때와 함께, 그러한 일반적인 싸인과 함께 특별한 싸인이 있었는데
헬라인들이 주님을 방문했어요.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지금 찾아와서 누구를 보고 싶다는 거에요? 
예수를 뵈옵고자 합니다.   요20:21

예수님은 이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어요. 
그러나 그들이 거절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되고 
그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서,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일이 있게 될 것이고 
그와 함께 또다시 유대인들도 돌아오게 되는 이 일을 보면서 
예수님은 아마 이것을 영적인 싸인으로 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삶이 처음에 이 땅에서 시작될 때에, 이방인들이 동방에서 찾아왔어요. 
박사들이 별을 보고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어요. 

그리고 나서 그들이 뭘 원했습니까? 예수를 뵈옵고자 했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를 뵈옵고자 하면서 
이방인들이 찾아온 그때부터 예수님의 삶이 시작됐거든요. 

그런데 이제 또다시 이방인들이 
그 예수,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건져내실 그 예수를 
뵈옵고자 하는 그 싸인이, 그분께 왔을 때에 

예수님은 '아 이제 내가 여기서 떠날 때가 되었다'라는 것을 
하나님의 싸인으로 알고서 
그때 맞춰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걸어가시기 시작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 정확하게, 
언제나 실수 없이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 또한 예수님을 섬긴다 라고 할 때 

우리는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때를 거스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이 이러한 식으로 
일반적인 싸인과 그리고 영적인 싸인을 받고서 움직여
하나님의 때를 따라 섬기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의 때를 따라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께서 하나님 어떻게 섬기셨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섬겨야 되는지 
두 번째 교훈은, "자기 생명을 미워함으로" 섬겨야 한다.. 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4절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생명의 원리 하나를 말씀해 주십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생명의 원리'입니다.

여기에 보니까, '자기의 생명'이 나와요.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생명이 있고 
원어로는 딱 분별이 되어 있어요. 

한글로 번역될 때는 둘 다 '생명'인데 
헬라어 원어에는 '조애' 와 '프쉬케'가 있습니다. 

조애는 영원한 생명, 영생의 생명을 말하는 거예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프쉬케는 '자기 생명' 입니다. 자기 목숨.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명이죠. 생명보험 할 때의 생명.

조애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생,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받은 영원한 생명이고, 
프쉬케는, 아담으로부터 받은 생명, 부모로부터 받은 육적인 생명을 말하는 거예요. 

본문에 '자기 생명을 잃어버린다'라는 것은 
프쉬케를 말하는 거에요. 인간의 목숨을 말하고 있어요.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지, 정, 의를 가진 자아를 말하는 거죠. 우리의 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쉬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혼(프쉬케)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스스로 결정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해서 
그 생각이 내 감정을 움직이고요. 
그 생각과 감정을 따라서 의지가 결정해서 행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 나라는 존재, 이 자아는
그 속에 의지가 가장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이 의지가 바로 '진짜 나' 입니다. 자아입니다.

자 그런데 본문에 프쉬케와 조애가 섞여 나옵니다.

'자기의 생명(프쉬케)을 사랑하는 자는, (조애를)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프쉬케)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조애를) 보전하리라' 요12:25

여기서 지금 사랑한다, 미워한다.. 라는 단어는 
단순히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라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선택한다, 붙잡는다, 놓지 않는다.. 이런 뜻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감정을 붙잡은 채로, 그 자기 혼적으로 결정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생명을 미워한다' 라는 것은
'자아를 내려놓는다. 포기한다. 꺾는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냐면 
생명의 원리를 말하는데 

'너희 안에는 조애가 있고, 또 프쉬케가 있다. 

너희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 예수생명이 있고   *조애
그리고 너희가 부모로부터 받은 네 자아라는 옛 생명이 있다.  *프쉬케

네가 네 생각과 네 감정을 붙잡고 살아간다면, 
그것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그렇게 계속해서 네 자아대로 주장한다면 
이 영적인 생명(조애)을 잃게 될 것이라는 거에요. 

영적인 생명이 약해지고, 이 영적인 생명, 예수 생명이 줄어들게 되며 타격을 받게 되고 
이 생명이 연약해진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네가 네 생각과 감정을 붙잡지 않고 
네게 준 하나님의 말씀과 네 속에 있는 성령에 감동을 붙잡고서 살아간다면 
'영적인 생명(조애)을 보존할 것이다.'   *요12:25

그래서 우리는 계속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자아가 살 것인가, 예수생명이 살 것인가? 

그런데 이 원리가 뭐냐면 
내가 내 생각과 내 감정을 따라서 계속해서 살아가면 
나는 강해지고, 예수의 생명은 보존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 생각을 내려놓고, 그리고 내 감정을 따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거에요? 
예수생명이 내게 나타나는데 
이때에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거에요. 

예수를 닮아가게 되고, 예수가 우리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라는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본으로 보여주고 계세요.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지금 완전한 사람이셨던 예수님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혼(프쉬케)가 있으시죠.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괴롭다, 지금 내 감정이 죽을 것 같다' 라고 표현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지금 내 감정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 라는 거에요. 
그리고 내 감정이 지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서 많이 흔들리고 있다.. 
라고 주님이 지금 고백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뭐죠? 
27절에 보니까,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옵소서' 
그분의 생각이 지금 하나님의 뜻과 잠시 배치되고 있는 게 보이시죠.

하나님의 계시, 그분의 성령은 
예수님보고 십자가로 가라고 말하는 거에요. 

근데 예수님의 인간적 자아, 프쉬케는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이 그분에게 있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을 보시잖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몸이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어떤 생각이냐면 
'아~ 십자가로 가기엔 너무 마음이 어렵구나. 이것을 지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 생각이 '지금 내 마음이 괴롭고 힘들다'는 감정을 만든 것입니다. :27

그런데 이 순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7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28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그것을 버리고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딱 붙잡고서 살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감정이 주장하는 대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성령에 감동을 따라 선택하여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섬기는,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저와 여러분의 섬김의 방식 또한 
똑같이 자기 생명을 미워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의 뜻입니다.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우리가 하나님의 떼를 따라가는 것도 참 어렵거든요. 
그러나 나의 생명(자아)을 미워하면서 섬기는 것도 매우 어려워요. 

그래서 이건 계속해서 우리가 애쓰고 수고해야 되는 일인데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왕이신 예수을 섬기기 위해서는 
이 방식대로 섬겨야 된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어요. 

끊임없이 내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요 그 생각에 따른, 그리고 나의 경험에 따른, 내 감정이, 즉 나의 자아가 
끊임없이 나를 주장하고 컨트롤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속도를 좀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감정대로 확 움직일 때가 있어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생각대로 딱 움직일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 생각이, 지금까지는 옳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 계시 앞에 섰을 때는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상반된 때가 있단 말이죠. 

그러면 언제나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죽어야지만, 내 안에 예수가 사는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살도록' 
자기 생명을 미워하므로 예수를 섬겨야 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셨고, 우리는 어떻게 생겨야 되느냐?
충성을 목표로 하여 섬겨야 된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12장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하셨던 사역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그 사역의 전반적인 평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평가가 결국 무엇입니까?

요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것이 예수님이 지금까지 하셨던 사역의 결과이고, 
그 사역에 대한 사도요한의 한 줄 평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실패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역을 실패한 이유가 예수님의 잘못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잘못을 하셨든지, 아니면 좀 실수를 하셨던지 
아니면 좀 열심을 내지 않으셨던지.. 뭐 그런 것 때문에 지금 실패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이 실패가 기록되어 있다.. 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어요.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지금 이미 이렇게 이사야서에 기록되었다..라고 말하고 
이사야는 이미 고난 받는 종을 예언하는데, 

거기서 이사야는 이미 오실 예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할 것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기록했다.. 라고 말해요. 

그런데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말한 바)를 누가 믿었으며'  사53:1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주의 팔(기적, 표적을 뜻함)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사53:1
아무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입으로 말씀한 가르침과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능력, 즉 표적
이 모든 것들을 누가 믿었느냐? 
아무도 안 믿을 것이다.. 라고 이사야가 예언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들을 누가 믿었느냐? 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표현하신 자기 계시가 7가지가 나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행하신 7가지 표적이 나왔어요. 

그런데 그 7번의 자기 외침과, 7번의 그 표적을 통해서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라는 것을 
이사야가 미리 보고,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이 여기서 응했다'라는 것은 
결국은 실패가 확정되어 있었다.. 라는 거에요.  요12:38

거기에다가 그 실패한 이유까지도 이사야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예언했어요.
결국은 고난 받는 좀 예수가 사역을 했는데, 안 믿더라 이거에요. 실패하더라 이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는,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하고 나옵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그래서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그래서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실패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못 믿게 만들었다' 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이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죠. 
예수님이 사역을 실패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 이라고 주장하는 그 유대인들이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예수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들이) 
사실은 끝까지 강팍하여서, 예수를 믿지 않았던 그들의 패역함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들의 패역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는 거에요?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지 않고 내버려 뒀다.. 이 말입니다. 

바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바로가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10번의 재앙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반역할 수 있었는가? 
그가 하나님께 패역한 마음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또 한편 하나님은 바로가 완고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또 뭐라고 표현하십니까?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의 마음에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냥 내버려두셨다.. 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임하셔서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패역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패역함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셨기 때문에 
그들이 결국은 믿지 못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자 그러니 어쨌든 이사야는 벌써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셔도, 
또한 표적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신다 할지라도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사역의 실패를 미리 보았고, 성경에 이것이 기록돼 있었어요. 

그러면 이것이 성경에 기록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미리 다 아셨습니다. 
본인이 이렇게 가르치고, 본인이 이렇게 표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이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셨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이렇게 가르치시고, 표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결국은 충성이란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사역이 성공하느냐/ 그것을 이루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 그래서 그 말씀을 이룰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앞에 서 있으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은 
바로 내가 무엇을 해서 성공을 하고 무엇을 한다.. 라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내가 그것을 향해 따라가고 걸어가는가에 달려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든, 저처럼 사역을 하든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요. 

사역의 성공, 그리고 사업의 성공! 
그러나 성공하느냐/ 안 하느냐? 
이것이 예수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 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표적이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않을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요청하셨고, 요구하셨기 때문에 
그 길로 걸어가서 그 일을 이루셨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인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사업이나, 내 일이나, 내 꿈이나, 내 사역에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이루는 것! 
이것에 우리가 초점을 맞춰서 
충성을 목표로 하여서 주님을 섬겨야 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