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가 노년을 힘 있게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평생을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로 인생을 충성되고 힘 있게 살게 합니다.
이렇게 충실히 인생을 산 사람은 후회가 없습니다. 노년에 빛을 더 발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죽을 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지막 말은 무엇입니까? 최후에 유언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우리 인생은 유언을 준비하는 인생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 이렇더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말 한 마디를 할 수 있어야,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았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평생에 간증이 있습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하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자기 인생과 이스라엘 역사에 실현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은 놀라운 일들을 해냅니다.
10절입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말씀에 붙잡히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일당 천의 용사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모세는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신32:30).
이것은 지나간 옛날 말씀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눈에 띄이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이라는 단어입니다.
8절입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9절도 보십시오.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신명기서에서는 한글개역 성경으로 “오늘”이라는 단어가 72회나 등장합니다.
신명기 서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모세가 말씀을 전하던 그 오늘이지만,
이 오늘은 말씀을 읽는 자가 사는 오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은 여전히 살았고 운동력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히4:12).
오늘날도 여호수아처럼 말씀에 사로잡히고 말씀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 사람이 능히 천 명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아니 만 명이라도 능히 감당하고 천만 명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2)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와 물질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2만 불 시대에는, 3만 불 시대만 되면 잘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럴지 몰라도 신앙인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질 중심의 사고는 오늘 여호수아가 비판하고 있는 '가나안 우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이 신이 누구입니까? 대표적으로 바알 신입니다.
바알 신은 비와 폭풍을 주관하는 신으로 농사의 신입니다.
그래서 이 바알 우상을 섬기면 농사가 잘되고 복 받는다는 것이
이들 가나안 우상세력들의 주장입니다.
사실 본질은 우상이 아니라, 우상을 매개로 한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물질이 신이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하고 구원받는다는 물질 종교에 빠져 있습니다.
물질은 얻은 자는 교만하고 사치하며, 물질을 얻지 못한 자는 불안해하고 비참해집니다.
물질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니까 온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자는 뜻이 아닙니다.
100% 신자화 되어도, 말씀의 원리를 따라서 우리 생활이 바뀌지 않으면
말씀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100% 신자의 나라였지만 실패했습니다. 명목상의 신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말씀의 확신을 가지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말이나 단순히 종교적 교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압니다.
물질 중심이 아니라, 정신과 가치 중심의 삶이 곧 말씀 중심의 삶입니다.
말씀의 원리와 기준 Biblical standard 으로 사는 삶입니다.
◑3.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한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길입니다.
8절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그리하면 9~10절과 같은 승리가 주어집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편이 되어 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반대로 다른 한 길은 가나안 족속을 친근히 하며 그 우상을 섬기는 길입니다.
12절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달리 표현하면 세상을 좇아 사는 삶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는 13절입니다.
13절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친근히 하다는 것은 바짝 붙어서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자신이 가까이 하고 따르는 것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굴이 세상을 닮아 있고, 모든 생각하는 것이 세상 가치관 대로라면
우리는 세상을 친근히 하여 따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영원한 평화와 안식은 하나님을 따를 때 있습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그 중심으로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세상과 너무 친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도 하나님과 친근히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일당 천의 인생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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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던 알프레드 노벨의 일화입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유럽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광산에서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도 다이나마이트는 유용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벨은 무심코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사망 기사가 어느 프랑스의 신문에 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그의 형이었던 루드비히 노벨이 죽은 것을 신문사가 잘못 보도했던 것입니다. 이 사망기사도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노벨을 더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그 헤드라인 기사의 제목이었습니다. 그 기사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하다.”
노벨은 사람들이 자기를'죽음의 상인'이라 부르는 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발명품이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지만,반대로 전쟁과 파괴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간 치명적인 무기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돈을 번 셈이 되었습니다.
이 일 후 노벨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자 자신이 모은 전 재산으로 인류의 발전을 위해
혁혁한 공헌을 한 각 분야의 과학자들을 시상하는 노벨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노벨을 떠올릴 때 그 누구도 그를 전쟁 상인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노벨상은 개인과 나라가 서로 받고자 원하는 더없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사망 오보 기사가 나간8년 후인1896년 노벨은 정말로 죽었습니다.
그때 사망기사의 제목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살다간 믿음의 사람 노벨 사망하다”
늙는 것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 인생은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주2)조선을 성서 위에, 김교신 선생
우리나라 신앙 위인 중에 이런 말씀의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 활동했던 김교신이란 분입니다.
이 분은 처음으로 ‘성서 조선’이란 말을 만들어 냈던 분입니다.
『성서 조선』이란 잡지를 만들어 일일이 제작해서 직접 배달까지 했습니다.
김교신은 조선을 성서 위에 놓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소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조선에 줄 바 가장 귀한 선물은 신기하지도 않은
『구약성서』, 『신약성서』 1권이 있는 줄 알 뿐이다.”
선생은 민족의 희망은 오직 성서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성서 조선』이란 잡지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고의 선물은 ‘성서’ 1권 뿐이니
양자의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성서 조선』은 1942년에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은 연못 속의 개구리를 보고
‘아 전멸은 면했구나’라는 글을 올렸다가 일제에 의해서 폐간되고 맙니다.
김교신 선생은 이로 인해 1년 옥살이를 한 후 흥남질소 비료 공장 사감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지냅니다.
당시 전염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선생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돌보다가
동일한 장질부사로 1945년 죽음에 이릅니다.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의 비전은 오늘날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의 비전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