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HuVJQvUdbM&t=4351s
◈나는 연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강합니다 고전3:16, 엡2:22 2022.03.06.출처
"나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강합니다"는 제목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난 3월 2일자 뉴스위크 기사에 이런 제목이 실렸습니다.
'미국 성인 18 퍼센트가 그들이 삶에 있어서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런 제목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읽어보니까
미국 성인 18%라면 4천 6백만명인데,
그들이 펜데믹이 시작된 이래로
자신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라고 답변했다는 거죠.
계속해서 이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4천6백만 명의 미국 성인들이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이 아플 때, 위급한 상황에서 자녀 돌봄이가 필요할 때,
또는 공항에 라이드가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 있거나 아무도 없다고 답했다.'
저는 왜 이것이 기사거리가 될까? 처음에는 도대체 의미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미국사람들은 잘 도와주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남쪽에 살 때는 길을 가다가도 차를 세워서 태워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정말 좋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뉴욕 쪽은 사정이 조금 다르지만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사가 실릴 수가 있는가?
팬데믹이 모든걸 바꿔놨다는 겁니다.
팬데믹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았습니다.
어려운 이웃이 있어도 이제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충격인 거죠.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이 필요한데,
정작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거나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이게 뉴스위크의 기삿감이 되었습니다. 왜요?
이게 미국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일이 되었으니까요.
◑사회적 거리두기로, 건강을 잃는 일이 증가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외로움의 팬데믹"이라는 제목으로
코로나19로 인한 고독사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주로 혼자 사는 노년층이나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분들이
코로나19에 걸려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뒤늦게야 이웃 주민들에게 발견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팬데믹이 가져온 비극 외로운 죽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니까
이 고독사는 2021년 한 해 3159명으로, 5년 전 대비 57.3%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40세 미만의 청년 고독사, 그러니까 젊은 사람이 죽는 거죠.
청년 고독사는 2017년 63명에서 2020년은 102명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점점 늘어나는 추세죠.
성별로 보면 고독사 인구가 지난해 3159명 중
남성이 2403명, 여성은 662명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3.6배 많은 것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남자들이 코로나 기간 동안에 참 어려움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래서 2021년 4월부터는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독사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외로움이라는 바이러스"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펜데믹 기간 동안 우리에게 아주 익숙해진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사회적 거리 Social Distance 일 것입니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켰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사회적 거리두기'는
자연스럽게 우리 몸에 배이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펜데믹 전에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입니다.
뭐 이런 단어가 있는지조차도 몰랐습니다.
'안전을 위해,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라는 의미를
아주 완곡하고 부드럽게 잘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나름 성공을 거둔 그런 슬로건이었고 캠페인이었습니다.
펜데믹 기간 동안 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이 정말 필요했습니다.
또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으로
우리가 이 질병으로부터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해준 것도 사실입니다.
동시에 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우리에게 가져온 정신적인 피해 또한 적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외로움, 외로운 죽음, 고독사 이런 것들입니다.
미국의 한 의사가 '외로움의 전염병'이라는 주제로 책을 썼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그분은 '만성 외로움으로 인한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심장의 조직과 혈관에 손상을 일으키는 염증의 증가를 초래하고
심혈관 질환과 사망의 위험을 증가시킨다'고 보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125차 미국 심리학 협회 연차총회에서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비만보다 더 큰 공중보건 위험요소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증가추세에 있고,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또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Social Isolation 사회적 고립이,
만성적인 외로움을 가져오고
그 만성적인 외로움은, 불안 우울증 그리고 자살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외로움은 심장마비환자들 중에 사망의 위험률이 거의 4배나 증가하는 원인이 되고
병원 입원의 위험은 68%
응급실 방문위험은 57% 증가하는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모든 연구를 종합해 보면
외로움은 정신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육신의 건강에도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믿은 성도들, 그리스도인들은 외로움을 느낄까요, 못 느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외롭지 않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서, 세상 사람들보다는 외로움을 덜 느끼겠지만,
늘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이 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도 밥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배고픕니다.
어쨌든 외로움은 정신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불안장애, 우울증 증상을 초래합니다.
또한 면역력 저하와 인지기능 저하 및 고혈압을 포함한
만성적인 건강위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분명히 우리의 호흡기 질환에서 지켜주긴 했지만
또 동시에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질병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적인 질병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다가, 영적인 건강도 잃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교회와 거리두기'가 됐습니다.
교회와 거리두기가 되니까, 예배와 거리두기가 됐습니다.
교인들과 거리두기가 되었습니다.
근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시간이 지나니까, 하나님과 거리두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만난 대부분의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했는데, 왜 하나님과 멀어지죠?
우리는 우리 몸이 느끼는 거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내 몸이 성전과 멀어진 만큼, 예배가 멀어지게 되고,
예배가 멀어진 만큼 우리 마음도 하나님 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쓰고 아무 말씀을 안 하시니까
아무래도 은혜도 좀 비활성화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사실 마스크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 중에 하나는
전통적인 예배를 드리고, 조용히 숨죽이며 예배드리는 교회는 마스크를 써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처럼 뜨겁게 기도하고, 통성으로 기도 하고, 전심으로 예배하는 그런 교회에서
마스크는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영을 전달하는 통로에요.
영을 막고 있는 거죠.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마음껏 기도하지 못하도록.. 마스크가 방해한 것입니다.
'목사님 속으로 기도, 찬양하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속으로 해도 되죠.
그러나 속으로 기도해서, 영적인 돌파를 경험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는 하나님과 거리두기를 청산할 때가 되었다,
이제 성전을 가까이할 때가 됐다, 예배를 가까이 할 때가 됐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가 왔다는 신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우리가 내일 일을 알 수 없지만, 야고보 사도는 그렇게 말하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Come near to God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실 것이다. And He will come to you' 약4:8
누가 먼저 가까이 가야 됩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믿음의 지체들과 너무나 오랫동안 거리두게 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지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지체들과 가까이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심지어 목사인 저도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저도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모두가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바로 교회를 주셨고
그리고 교회 안에 소그룹 모임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정말 우리 교회가 소그룹의 모임을 활성화해야 될 시기가 왔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많은 고민을 해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들이 다시 한번 이 소그룹으로 더 잘 모일 수 있을까?'
또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정말 함께 교제하고, 함께 떡을 나누며,
함께 그렇게 친밀한 시간들을 나누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 .. 엄청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소그룹에 참석해서 받은 은혜
지난 금요일은 3월달 소그룹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정말 모처럼 어느 한 소그룹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그룹에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서 얘기 한마디 못해봤는데
정말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그런데 저는 그 소그룹에 가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목회자로서 제가 성도들을 만날 때는
언제나 성도들의 어려움을 들을 준비를 하고 만납니다.
또 그분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드려야 되고 또 어떻게 도와드려야 되는지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만납니다.
왜냐면 성도님들이 저를 만나기 원하는 때는, 언제나 어려움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누가 저를 만나자고 하면 심장이 두근거릴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젊어서는 안 그랬는데 요즘 나이가 드니까 점점 새가슴이 되어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소그룹 모임에 갈 때도 제 나름대로는 마음준비를 하고 참석을 했습니다.
왜냐면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르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그냥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참여한 소그룹 모임에서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정말 큰 위로, 그리고 격려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함께 모였던 두 가정, 저희까지 세 가정인데,
함께 모여 있던 두 가정이 자연스럽게 교제하다가
그분들이 우리 교회에 온 경위를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그리고 교회에 온 다음에 어떻게 서로가 변화 되었는지
그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었어요.
누가 나누라고 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나누게 됐어요.
근데 제가 그 내용을 처음 들었어요.
저는 들으면서 정말 제 안에 감동, 감격, 말할 수 없는 감사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가정은, 아내와 남편이 경제적으로 가장 밑바닥을 칠 때, 정말 어려울 때
저희 교회로 찾아왔더군요. 그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이렇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근데 지금 어떻게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께 감사밖에 할 말이 없다..는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부부가 자주 다투게 되잖아요.
그 부부가 서로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다른 것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서 때로 부부 간에 심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한번은 너무 심하게 다퉈서 '이제 더 이상 못 살겠다. 이제 헤어져야 되겠다.'
그런 결심을 하고, 아내가 그래도 담임목사인 제게는 글을 써야되겠다, 편지를 써야되겠다...
(말이라도 하고 떠나야 되겠다)
그래서 6페이지의 이메일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못 받았거든요.
그랬더니 차마 보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제가 너무 바빠 보여서 제게 못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메일을 다 쓰고 나서, 아내는 자기 마음이 다 풀어지면서 다시 괜찮아졌다는
그런 나눔의 내용을 제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기 마음의 답답함과 고충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구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제게 이메일을 썼는데
이메일 쓴 것만으로 그 마음속에 있는 그 답답함이 해소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을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까요!
듣는 제가 때로는 민망할 정도로, 이거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근데 그렇게 나눠주시는 두 부부, 집사님 네 분이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요.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이더라고요.
근데 정말 제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부가 그렇게 힘들게 때로는 심하게 다툴 지라도
이 두 사람이 합의한 게 한 가지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
보통 목회자들이 결혼주례하기 전에, 신혼부부에게 권면하는 말인데요,
결혼한 부부가 이런 약속을 계속 실제로 지키며 사는 간증을 들으니
얼마나 제 가슴이 찡했는지요.
왜 그랬는가 하면 두 분이 똑같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그렇게 다투고 힘들어도 교회 와서 자리에 앉으면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마음이 녹아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예배는 빠지지 않기로 그렇게 결정하고 그 결정을 지킨 두 사람!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고 나니까 또 다른 한 가정이, 자기도 질세라 이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정에 남편이 말하길, '아내가 변화되었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 남편은 한 시간에 한마디 합니다. 말수가 평소에 거의 없는 분이에요.
근데 그 한마디가 '내 아내가 변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변했냐?
이런 말해서 참 죄송하지만, 그전에는 쇼핑을 그렇게 좋아하고
차 중에서도 15만불 이상 되는 차를 타던 아내!
그렇게 사치스러운 삶을 살던 아내가, 어느 날부턴가 그 모든 삶을 청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나 평범한 아내로 돌아왔다는 그 남편의 짧고 진솔한 고백!
정말 저 혼자 듣기 너무 아까웠습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니 전에는 비싼 최고급 명품 옷만 입고 다녔다는 거죠.
그리고 값비싼 귀금속을 몸에 두르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정말 변했다는 거예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렇게 사치스럽게 살던 사람이
그 삶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언젠가 저는 맨하탄에 나가서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서 어느 백화점을 들어가게 됐는데
그 백화점 안에서 제 머리가 지근지근 조여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되게,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제 눈에 보이는 물건을 사고 싶은 충동이 들었어요. 돈도 없는 주제에!
그 순간 성령님이 제게 깨닫게 해 주신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동구매의 영이란다'
충동구매의 영 .. 한국말로 '지름신' 이라고 합니다. *돈을 지르게 만드는 귀신
왜 여자들이 백화점만 가면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는지, 정말 이해가 되더라고요.
저는 사실 실제로 그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핸드백이 셀 수 없이 많은 분인데, 백화점만 가면 핸드백을 또 사온다는 것예요.
'충동구매의 영'이 있습니다. 절제가 안 되시는 분은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 집사님이 쇼핑을 끊기로 하고,
쇼핑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쇼핑 금식'을 시작한지가 지금 꽤 오래됐는데
아직까지도 쇼핑을 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정말 놀랐습니다. 이거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야 이건 진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두통으로 시달리던 사람인데,
오랜 세월 동안.. 때로는 두통이 너무 심하면 앉아 있기도 힘든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남편이 새벽기도를 나오기 시작한 이래로
매일 아팠던 그 두통이 한 달에 몇 번으로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다 아니까 놀래서 '이건 기적입니다. 정말 기적입니다.' 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선한 분이신가요!
다시 확인하는 소그룹 시간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약하지만 '우리'는 강합니다!
사실 저는 이 두 가정을 위로해 드리려고 갔습니다.
조금이나마 그분들에게 제가 힘이 되어 드리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역전이 돼서, 제가 위로를 받고
제가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제가 나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저의 건강 문제 나누며, 저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날 성도님들과의 나눔을 통해서
저는 보약이 줄 수 없는 큰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정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 한 분 한 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참으로 연약한 인생들이에요. 참 연약한 분들이에요.
그런데 그 연약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우리가 함께
소그룹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도 나누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눌 때
'우리는 결코 연약하지 않구나, 나는 연약한데 우리는 연약하지 않구나!' 그걸 깨닫게 됐어요.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그분 곁에 있어주고, 때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고생도 하지만
그러나 그 연약함을 품어 주기를 원하고 기다려주는 공동체! 그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가요!
사실 목회자인 저도 엄청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도 실수가 많고 연약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체들과 함께 정말 마음과 마음을 터놓고 나누는 그 시간,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위해 함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시간 저는 정말 이 '우리'라는 이 작은 믿음 공동체가 있으므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한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각자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는 정말 연약함 투성입니다.
내가 나를 알잖아요. 때로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모여서, 우리가 그 연약함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내가 믿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나는, '우리' 안에 있는 나는
결코 연약하지 않습니다.
왜냐면요,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전3:16 '너희(개인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도들아, 너희가 모일 때,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전이 너희 공동체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이에요.
고전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의 믿음의 공동체가 모인 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 이름으로 모인 이 지체들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결코 연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두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서로 연락하고, 서로 상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믿음의 공동체,
바로 그 믿음의 공동체는 약하지 않습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는 강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개개인이 모여서, 함께 이루는 이 믿음의 공동체,
이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강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왜요? 그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님이 직접 세우셨고,
또 세워나가실 것입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또 이 공동체를 통해, 개개인은 부족하지만
그러나 함께 모인 이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분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도, 우리의 슬픔도 함께 나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행복은, 내게 있는 것을 주위 사람들과 나눌 때, 바로 나눔이 있는 그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눌 때, 그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눌 때, 그 슬픔은 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눌 공동체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이 험한 세상, 이 힘든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혼자 있지 말라고,
외롭고 불행한 사람 되지 말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바로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이게 얼마나 값진 선물인지 아십니까?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십니까?
교회는 하나님께 소중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우리 각자는 허물 많은 죄인들이고, 각자는 정말 소망 없는 자인것 같지만
우리가 모인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사랑안에서 성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나 혼자 절대 세워갈 수 없습니다.
이 공동체는 우리가 함께 세워가는 것입니다.
23전 전에 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강력한 은혜와 비전을 주셨습니다.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각자 불완전하지만, 공동체 안에 있으면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서 결코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목회자 혼자 이 공동체를 세워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